강해, 제9과
제 9과: 율법주의 반박(1)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3:1-4:11약 23분 분량
D. 檢證
(3:1-4:11)
법정에서 검사가 논고를 내릴 때나, 변호사가 변론을 할 때에 있어서나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점은 연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검증”(檢證, probation)은 연설이나 재판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서론”(exordium)이나 “이야기”(narration)는 모두 이를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바로 이 “검증”에 해당되는 부분이 3:1-4:11로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이야기” 부분에서(1:11-2:14) 견지해 왔던 소극적이고도 수세적인 입장을 뛰어넘어, “변론”(또는 명제 선언) 부분에서는(2:15-21) 보다 적극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들을 제시할 차례입니다. 그가 제시할 증거들이란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nism)가 틀렸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증거들을 말합니다. 참고로 다시 요약하자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명목주의”는 보다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 외에 “율법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체 “검증” 본문은 이 두 주제에 따라 다시 크게 두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1-18율법주의 반박
(2) 3:19-4:11명목주의 반박
한편 이 두 주제는 2:15-21 사이에서 이미 서신의 “대명제”(大命題, proposition)로 제시된 바 있으며, 이 본문 역시 상기한 두 주제에 따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2:15-16율법주의 반박
(2) 2:17-21명목주의 반박
서신의 구조를 통해서 볼 때, “명제”와 “검증”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들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3:1-18 사이에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을 다시 세분해 보면,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마찬가지로 3:19-4:11 사이의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도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3:19-25)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3:26-29)
(3) 관계에 대한 예시(4:1-7)
(4) 사도의 염려(4:8-11)
“검증” 본문은 당시의 상투적인 수사학적(修辭學的) 관행을 따라 상대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표현을 도입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3:1). 그리고 끝 부분도 이와 유사한 질책성 발언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 하노라”(4:11). 이 두 구절 사이에 일단의 수사적(修辭的) 질문들이 (1) 3:1-5 사이에서 한 번, (2) 그리고 4:8-10 사이에서 또 한 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이 문학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검증” 본문에 대한 수미상관(首尾相關)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를 통해서 “검증” 본문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비난과 질책)
(2) 3:1-5수사적 질문들
(3) 4:8-10수사적 질문들
(4) 4:11“내가 두려워 하노라”(비난과 질책)
수사학적(修辭學的) 관점에서 볼 때, 사도는 이 부분에서도 서신의 벽두부터(1:6) 도입해 왔던 소위 “법정 수사”(法廷 修辭)의 기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점 3:1-5 사이에서 사도가 제기하고 있는 일련의 질책성 심문(審問)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나머지 본문(3:6-4:11)에서는 일부 구절들을 제외하고는(3:6상; 4:9) 당시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수사 기법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곳에서 수사학적(修辭學的) 기법을 ‘유대’식 논쟁과 성경 해석 방법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에 관한 그의 주석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검증” 본문에서 사도가 시도하고 있는 바는 “명제” 선언에서 드러난 두 주제, “율법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해서 보다 ‘유대’적인 전통과 방식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증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9
율법주의 반박(1)
경험을 통한 검증

(3:1-5)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하)
<갈라디아서>의 “검증”(檢證)에 해당되는 본문은 3:1-18 사이로서, ‘바울’의 서신중에서 아마도 가장 친숙하고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본문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율법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에 대해서 아주 강도 높게, 그리고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사도가 2:15-16에서 천명한 바 있는 기독교 복음의 “대 명제”, 즉 율법은 기독교 복음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옳고 정당한 것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검증”(檢證)하는 일입니다. 사도가 접근하는 세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으며, 본문은 그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1) 경험을 통한 논증(1-5절)
(2) 성경을 통한 논증(6-14절)
(3) 신학적 입장을 통한 논증(15-1절)
문학과 역사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검증”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처음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 후 “유대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나타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과 자신들의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만 있었더라도, “유대주의자”들이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것이고,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도는 단언합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수사학적으로 당시의 설교자나 교사나 작가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과 흡사한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본문의 다섯 절 안에는 추궁하고 심문하는 식의 질문들이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책성 질문들은 그리스∙로마 시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수사적 형태로서 바울도 이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롬 3:1-9, 27-31; 4:1, 9-10; 6:1-3, 15-16; 7:1, 7; 8:31-35.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랄하고도 모욕적인 비난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3:1). 이런 표현 또한 당시 설교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수사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 역시 이러한 수사학적 기법들을 활용해서 ‘갈라디아’의 이방 기독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려 시도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그동안 피의자로서 자신의 입장과 논지를 밝히고, 그 논지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검증”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참고 억눌러 왔던 감정이 화산이 폭발하듯 갑자기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상)
피의자의 신분으로서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직분과 그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변론하던 모습에서 돌변하여, 그 배심원들을 향해서 비난과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수신자들을 집적 호명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1) “고린도 인들이여”(고후 6:11); (2) “빌립보 사라들아”(빌 4:15); (3) “디모데야”(딤전 6:20). 그러나 감탄사 “오!”(ὥ 또는 ὦ)와 함께 수신자들을 부르는 경우는 그의 서신중에서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감탄사와 호칭을 동시에 사용하는 용례는 더러 있습니다: 마 15:28; 막 9:19; 행 13:10; 약 2:20).
본문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어리석다”는 단어를 통해서 사도의 비난이 얼마나 신랄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어리석은 자”를 “지혜 있는 자”의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롬 1:14), 그가 이곳에서 지칭하는 대상은 “헬라 야만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갈라디아’의 이방 신자들을 향하여 “어리석다”고 할 때는 그런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영적 분별력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그의 깊은 근심과 좌절 그리고 곤혹스러움을 드러내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염려하는 것은 이들의 지적 능력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이 더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기는 ‘엠마오’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누가복음>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을 유사한 표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한탄에 이어 여섯 가지의 질문이 마치 피의자를 심문하는 검사처럼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너희를 속였느냐(1절중)
본문에 등장하는 “속이다”는 동사는 신약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단어로서, 그 의미하는 바는 다소 상징적인 것으로서 “마술을 걸어 현혹시키다” 또는 “마법을 걸다” 등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구절을 “누가 너희에게 환각제를 주었느냐?”로 고쳐 쓰고 있습니다(The Message). 사도가 보기에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악한 귀신의 주술(呪術) 에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식의 질문은 당시 반대자들의 책략과 음모를 밝히 드러내기 위한 수사적 표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악한 주술을 깨뜨리기 위한 처방은 “복음”을 다시 들려주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가 이전에 공개적으로 이들에게 전했던 그 복음을 수고스럽게도 다시 한 번 더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의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1절하)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다”(σταυρό, 스타우로)는 동사는 본문 중에서는 완료형 분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사건이 과거에 단 한 번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나 효과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근거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이 복음을 한 번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이를 대체할 만한 어떤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율법주의”를 비롯한 여타 종교적 가르침과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대 헌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사도로부터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었던 이 복음을 지금 다시 한 번 더 듣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동사 “밝히 보이다”(προγράφω, 프로그라포)는 헬라어로 “미리 쓰다” 또는 “공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만, 본문에서는 후자(後者)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마치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듯, 또는 ‘예수’의 깃발을 그들 앞에 흔들어 보이듯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사도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절상)
하지만 그가 알고 싶은 것은 단순히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가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실제 무슨 체험을 했는가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이 단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변론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에 관한 언급으로서,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체험한 바 있는 “성령의 체험”에 호소하면서, 과연 그들이 무슨 근거로 “성령”을 받을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이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면, 즉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만 한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가 없으며 “유대주의자”들의 유혹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두 번째 수사적 질문은 이런 확신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하)
현대 독자들에게 이 질문은 다소 느닷없다는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성령”의 등장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은 두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 본문과 서신의 후반부에서 자유와 방종과 관련해서입니다(5:13-26). 물론 ‘바울’은 서신 전체를 통해서 “성령” 그 자체를 논쟁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그의 인식은 서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변론을 전개할 때나 호소할 때나 항상 “성령의 내주하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은 바 있습니다. 사도는 이점을 전제로 하고 변론을 펼쳐가고 있으며, 3절에서도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시작하였다”는 동사의 시제와 태는 완료형 분사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음”을 누구나가 인정하는 절대적 사실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율법의 행위”에 있었든지, 아니면 “듣고 믿었던 행위”(έζ άκοἦς πίστεως)에 있었든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새로운 용어, “듣고 믿었던 행위”를 등장시키면서 “율법의 행위”와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두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는 “그리스도의 행위(즉 믿음)”를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둔 바 있습니다만(2:15-16),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용어의 의미가 그렇게 분명치가 않습니다. “들었던 신체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들었던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듣고 믿었던 행위”를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지만 마지막 번역이 가장 그럴 듯합니다(Longenecker). 그렇게 보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행위(즉 믿음)”가 “칭의”의 객관적 근거로서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었다면, 신자들의 “믿음의 행위”가 그 주관적 근거로서 동일한 대척지점에 서 있다고 보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사도는 다시 신랄하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3절상)
교인들의 영적인 무분별과 자가당착적인 행동, 그리고 이로 인한 위기 상황의 발생. 차분하고도 논리적인 변론을 전개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사도는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신히 네 번째 질문을 통해서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하)
우리는 여기서 두 쌍의 개념들이 반명제의 관계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1) 성령과 육체; (2) 시작과 마침(완성). 특히 “성령과 육체”는 사도가 새롭게 소개하고 있는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서,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나 또는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는 행위”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를 종합해 볼 때, 각 용어는 반명제의 관계에 서 있는 두 진영 중 어느 한 쪽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쪽 편에 “율법의 행위”와 “육체”가 있다면, 다른 한 진영에는 “그리스도의 행위”와 “듣고 믿음의 행위”가 있습니다.
이 네 번째 수사적 질문에서 사도가 강조하려는 바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일관성입니다. 즉 처음 시작을 “성령”에 의지하였다가, 어느 시점에서 “육체” 즉 “인간의 노력”에 의지하려는 것에 대한 질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그리고 마지막까지 오직 “성령”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의 다섯 번째 질문은 네 번째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경험에 호소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회심 당시의 경험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절)
그러나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괴로움을 받다”(πάσχω, 파스코)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나 <신약>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불쾌하고 달갑지 않은 괴로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 눅 22:15; 24:46; 행 1:3; 3:18; 17:3; 고전 12:26; 히 2:18; 9:26; 벧전 2:20, 23; 3:17).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곳에서도 이 단어를 복음 때문에 받게 된 “고난”이나 “핍박” 등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와는 정 반대의 의미, 즉 “호의적이거나 달가운 경험”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그리스’ 문헌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번역본에서는 4절을 “너희가 이처럼 많은 경험들을 헛되이 하였느냐?”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한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id you experience so many things in vain?--if it really is in vain(RSV)
Did you experience so much for nothing?--if it really was for nothing(NRSV)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이곳에서 말하는 “많은 경험들”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으로 시작한 체험”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3절).
만일 이 단어의 어원이나 또는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빈도만으로 이 구절을 해석한다면, 그 의미는 “고난”이나 “핍박” 등과 같은 괴로운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3-4절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배경에서 보드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외부로부터 무슨 고난이나 핍박을 받았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입장에서 4절을 재구성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놀라운 체험,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그 많은 영적인 체험들이 이제 아무 쓸모없게 되었단 말입니까?
사도는 지금 절망이 아니라, 이들이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 질문으로 배심원들을 향한 심문에 가까운 모든 질문들은 끝이 납니다. 질문의 요점은 직접적으로는 2절을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실은 2-4절 사이에서 소개한 바 있는 신자들의 모든 경험들을 총망라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a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b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c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절)
그가 요약하고 있는 신자들의 경험이란 이중적인 것입니다. 첫째는 회심 당시의 경험으로서, “성령을 받았던 체험” 즉 “성령 세례”를 말하며(“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5a절), 두 번째는 회심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말합니다(“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고...”, 5b절). 전자의 경험을 2-3절에서 그리고 있다면(“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후자의 경험은 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이처럼 많은 경험을...”). 구문론 상 이 두 구절은 모두 동일한 정관사 “(그) 이”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 때 “그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두 경험의 수혜자는 모두 동일한 “너희들”입니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성령의 체험”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는 “듣고 믿었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인지 물음으로써 “검증”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증” 작업 내내 이들 반명제의 관계에 대한 논증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너희들이 믿을 때.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영화 <이집트 왕자: The Prince of Egypt>의 절정이자 압권은 역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홍해 탈출”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주제곡, “너희가 믿을 때”(When you believe)가 당시 미국을 대표하던 최고의 가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의 이중창으로 흘러나오면서 관람객의 감동은 극에 달합니다. 이 노래는 제 71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주제가 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바 있습니다.
“출애굽”은 <구약>의 출발점이자 ‘이스라엘’의 출발점이기도 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방황하고 타락할 때마다, 회고하고 돌아가야 할 정신적 고향이자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오경>이나 <예언서>의 모든 설교와 훈계도 이 사건을 축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들이 믿었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집트’의 마병과 수레들이 그 갈라진 홍해 사이로 수장되었으며,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으며, ‘시내’ 산 정상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과 번개를 듣고 보았으며, ‘가나안’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나타났고, 이후 그들과 늘 함께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이스라엘’의 실재였습니다.
‘바울’은 이들 ‘이스라엘’의 영적 후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싶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절). 그들이 사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는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먼저 그 대답을 해버립니다. <홍해 에피소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체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체험”입니다. 즉 그 때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직접 그들 속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 속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오심”을 역사적 사건으로 체험했고, 이후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의 실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회심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체험이나 현상들을 간증합니다. 그러나 그 간증이 아무리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라 해도, “성령의 체험”을 언급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경험을 통한 논증”에서 “성령의 체험”을 핵심 증거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경험은 바로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께서 오셨을 때 ‘사라’는 ‘이삭’을 낳았으며,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시에 물속으로부터 나왔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에게 내려오셨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나에게는 언제 그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달하여 구름과 천둥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듣고 보았던 것과 같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임재는 그런 것과 같지 않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대로 부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임의대로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분의 임재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초자연적인 엄청난 사건이나 현상을 기대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은 사건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며, 느낌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성령 또한 언제, 어떻게 오시는지 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비롯해서 방금 소개한 바 있는 <신약>의 모든 인물들에게 성령께서 오신 때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였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 그렇다면 성령께서 왜 오셨습니까? 그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열심히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 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도는 바로 이점을 본문의 변증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즉 이번에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명제는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입니다. 그는 이 주제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상)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절)
여기서 보듯이 “성령의 강림”은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그리스도와 신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능력을 행하시고” 있다고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5절).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은 오히려 “율법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기>나 <히브리서>는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처음 임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시커먼 구름이 산 정상을 감돌며, 천둥과 벼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에게 강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력 시위였습니다. 누구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자들이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이 율법이 그렇게도 무서워 떨던 백성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늘 살기 등등 이들을 잡아 죽일 궁리만 해왔습니다. 법이 많은 곳에 처벌이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이 강림했던 그 날 이후 수천 년이 지난 동일한 그날, 즉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임재”하셔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비롯한 그의 모든 백성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키며 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5절). 그러니까 사도가 이곳에서 “율법주의” 즉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두고 있는 것은 “믿음의 행위”(그리스도와 신자들의)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행위”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도 동시에 대척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행위”가 과연 무엇인지 이곳에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서신의 후반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체험한 “성령의 행위”는 그들이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이후 겪은 성령의 다양한 사역, 즉 그 열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입니다. 때로 그 열매는 달고 맛있기도 했으나, 대개는 예수님을 좇아 좁은 길을 걸으면서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쓰디 쓴 것이었습니다(4절).
이제 이 단락을 처음 시작하면서 물었던 질문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왜 성령께서 오셨는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고도 다시 ‘이집트’의 송아지를 섬기는 것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능력입니다. 실은 율법의 한계라고 해야겠지요. ‘바울’은 율법을 “의문(儀文)의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무리들은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행위)입니다.
“유대주의”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렇게 꾑니다: “그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최소한의 율법은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아주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목론”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가르침을 따르는 순간, ‘시내’ 산의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들이 내버렸던 “유대주의”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이런저런 대답들로 세상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이제 내가 ‘바울’에게 대답할 차례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수사학적 기능으로 볼 때, 본문은 “경험을 통한 검증”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도가 거론하고 있는 핵심적인 경험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이미 경험한 것은 무엇이며,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본문에서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개념들을 짝을 짓고, 설명해 봅시다. 그리고 각 개념을 “율법주의”와 “명목론”과 연결시켜봅시다.
4.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첫 경험은 무엇이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