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장은 <창세기>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곳으로서, 이곳에서 ‘아브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수립하고, 그 이름도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이 사실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처럼 중요한 이야기의 앞뒤로 불필요하며 불쾌하기 까지 한 <롯 이야기>가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헤어져서 ‘소돔’으로 가는 이야기와(13장), ‘소돔’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어 나오는 이야기가(14장)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고, 후반부에서는 ‘롯’이 ‘소돔’이 멸망하기 이전에 간신히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술에 취해 두 딸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식을 낳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18-19장). 이러한 편집을 도식화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가 시사(示唆)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주인공이 ‘롯’이 아니라 ‘아브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교훈과 적용을 위해서 “영웅과 반 영웅”, “교사와 반면교사” 등과 같은 대비 또한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은 그 형식과 내용이 아주 특이한 편입니다.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는 <아브람 이야기>에는 사실상 없다고 ‘라이켄’(Ryken)은 말하고 있습니다. 리런드 라이켄, 44쪽.
하지만 <창세기>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주인공 ‘아브람’이 자의든 타의든 이 전쟁에 개입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아브람’으로부터 단순히 영적 영웅 이상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아브람’과 ‘롯’은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중반에 이르도록 전혀 언급도 없다는 점(12, 13절), 그리고 <아브람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하나님과의 대화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 등이 본문이 갖는 형식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서술 방식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함인지, 배경 설명을 덧붙인다든지, 예: (1)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12절); (2)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13절); (3) 살렘 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또는 오래 된 지명(地名)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 (1) ‘벨라’ 곧 ‘소알’(2절); (2)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3절); (3) ‘엔미스밧’ 곧 ‘가데스’(7절); (4) ‘사웨’ 골짜기 곧 왕곡(17절).
전체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혈과 육의 전투(1-16절)
(1) 동군 연합 대 서군 연합: 제 1회전(1-4절)
(2) 동군 연합 대 서군 연합: 제 2회전(5-12절)
(3) ‘아브람’ 대 동군 연합(13-16절)
2) 영적 전투(17-24절)
(1) ‘소돔’ 왕과 ‘아브람’(17절)
(2) ‘멜기세댁’과 ‘아브람’(18-20절)
(3) ‘소돔’ 왕과 ‘아브람’(21절)
(4) ‘아브람’의 대답(22-24절)
전반부에서 세 번에 걸쳐서 전투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히브리’식 이야기 전개 방식으로서 마치 영화에서의 중첩(오버랩)의 기법처럼 점진적인 진행을 통해서 이야기를 극적인 결말로 이끌어 가는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수사적 방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두 번의 전투를 언급하면서, 동군과 서군 연합군을 일종의 교차대구적인 방식으로(ABBA) 등장시키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그돌라오멜’과 연합군(1절)
‘소돔’과 연합군(2절)
‘소돔’과 연합군(8절)
‘그돌라오멜’과 연합군(9절)
이 같은 형식을 통해서 화자가 기대하는 효과는 그 지역의 최후의 승자, 즉 패권은 ‘아브람’에게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이 ‘소돔’의 연합군을 격파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다음,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돌라오멜’이 ‘가나안’과 ‘사해’ 지역에 사는 여러 족속들과 왕들을 패배시킨다는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의 범위와 강도를 다소 확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동일한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어떤 견해를 따르든 전쟁 이야기를 이처럼 두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방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적 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역의 진정한 군사적 패자는 ‘그돌라오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 번째 단락에서 천하무적의 ‘그돌라오멜’도 ‘아브람’ 앞에서는 추풍낙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번씩이나 ‘소돔’ 왕을 굴복시킨 ‘그돌라오멜’마저 패배시키고 조카 ‘롯’을 구출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반부의 전쟁 이야기는 그 핵심이 ‘아브라함’의 힘과 승리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후반부를 위한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브람’은 단순히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영적인 영웅으로서의 자질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탁월한 영적인 자질은 일련의 대조의 기법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우선 화자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대하는 ‘소돔’ 왕과 ‘멜기세댁’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아브람’의 신세를 입은 자들이지만 그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판이하고 대조적입니다:
18살렘 왕 멜기세댁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하매(18-20절상)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21절)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대비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영적 자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할 뿐인 것을 ‘아브람’의 선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22-24절)
이야기 전체의 형식적 특징을 보면, 그 신학적 주제가 ‘아브람’의 ‘영적 자질’과 관련한 것으로서, 후반부에서도 그 구조를 교차대구적 방식을 취함으로써, 극적인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17절‘소돔’ 왕의 등장A
18절‘멜기세댁’의 등장B
19-20절‘멜기세댁’과의 대화B1
21절‘소돔’ 왕과의 대화A1
22-24절‘아브람’의 대답
이처럼 본문은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게 꾸며져 있어, 전달하려고 하는 신학적 주제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는 합니다만, 본문과 관련한 가장 큰 질문은 역사적 질문, 즉 전승과 자료와 관련한 것입니다. <창세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족장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족장들의 가족사에 국한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배경과 관련한 지명이나 연대기나 또는 가족 이외의 인물들과의 접촉이나 교류 등에 관해서도 상당히 애매모호하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난데없이 국제적 규모의 전쟁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것도 시간과 장소와 등장인물들을 아주 상세하게 거명해가면서 마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듯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러 왕들의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면 전쟁의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아브람’이 당시 국제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처럼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이런 사료(史料)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언제 본문으로 확정된 것일까?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으며, 한 세대에 걸친 연구와 논의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견해가 없습니다. 혹자는 14장이 시기적으로 <창세기>의 다른 본문에 비해서 가장 후대에 포함된 것으로서 다분히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주장하는가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반대로 ‘이스라엘’ 건국 이전 내지는 ‘바벨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출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이런 역사적 질문들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들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로 그칠 것입니다. 본문에 관한 보다 상세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위해서는 Wenhe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1, 306-307쪽, 318-320쪽).
동군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왕들 중에 ‘아리옥’과 ‘디달’은 주전 이천년 경에 실제 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고, ‘아므라벨’과 ‘그돌라오멜’도 분명치는 않지만 각기 ‘아모리’ 족속과 ‘엘람’ 족속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과 연계할 만한 성경 외적인 사료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동군 연합이 공격 시 취했던 경로 역시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로에 포함된 일련의 지명들은 ‘요단’ 동편에 위치한 ‘왕의 고속도로’를 따라 산재해 있습니다. ‘사해’ 주변의 다섯 왕들의 이름이나 이들과 관련한 일부 지명들이 성경 외적인 자료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야기가 허구일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부 지명들에 대해서 추가로 해설이나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아주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후대 화자(편집자)의 편에서 독자들을 위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가적인 설명은 지명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일반명사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םיכינה; hanikim)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다만 19세기 ‘이집트’ 문서나 15세기 ‘타낙’ 서신 등에서나 발견되고 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trained men born in his household”로 다소 애매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굳이 <성경> 기자의 의도를 따른다면 ‘해밀턴’(V. Hamilton)이 그의 주석서에서 번역하고 있는 대로 “trained men, household servants”로 하는 편이 성경 기자의 원래 의도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이 단어는 상당히 오래된 기원을 가진 것이 틀림없어 보이며, 따라서 편집적 해설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댁’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El-Elyon)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이천년 당시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그의 전리품을 포기하는 행동이라든지,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등과 같은 법률적인 표현들 역시 당시 ‘가나안’의 고대 문서에서 병행되는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브람’을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는 히브리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당시 가나안 문서 등에서 ‘하비루’인들의 생활 습성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기록들과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와 ‘하비루’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일한 족속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단락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내용이나 일련의 표현들이 고대 ‘가나안’ 문서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봅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자료비평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본문은 시기적으로 <야훼 전승>의 편집시기를 앞서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용면에서 본다면 <롯과 소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꾸며놓은 것이지,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나 해설로 보기는 어렵다는 관점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출처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 역사성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가장 큰 반대는 보다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는 의문들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아브람’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그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이곳에서 용맹스러운 전사(戰士)로서 동방의 왕들까지 제압할 정도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 그는 아내와 소수의 종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전전하는 비교적 조용하고 고독한 인물에 불과합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주전 2000년 당시 어느 시점에서도 ‘사해’ 남방의 다섯 도시가 ‘엘람’의 종속국이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함으로써, 본문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두 번째 질문은 원칙적으로 타당한 것이기는 해도, 즉 ‘엘람’이 ‘사해’ 지역을 지배했던 시점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주전 2000년 당시 ‘엘람’ 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는 합니다. 더 나아가 3000년 후반 근처의 사료(史料)들 역시 매우 빈약하며,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소돔’과 인근 도시들에 대한 확인 작업이 정확한 것이라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건은 2000년경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과 관련된 것인데, ‘아브람’을 순례하는 ‘베두인’의 한 고독한 족장이 아니라, 용맹스러운 전사 내지는 군사적 영웅으로 보는 시각 역시 지나치게 과장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브람’을 따라 순례하는 무리의 수자나 규모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무리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암시가 여기저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아브람’을 처형하지 않고 국외로 추방한 것만 하더라도, 그를 따르고 보호하는 무리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실제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가축이나 노예를 포함해서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2:16). ‘가나안’에 도착한 뒤에도 ‘롯’과 헤어져야 할 정도로 각기 거느린 식솔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13:6). 이처럼 ‘아브람’은 휘하에 큰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이야기에서도 이 점을 재확인 할 수 있는데, 그가 해안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아비멜렉’ 왕과 땅 소유권을 놓고 조약을 체결하는가 하면(21:22-34), ‘헤브론’ 지역의 ‘헷’ 족속은 그를 “하나님의 방백”(a might prince, NIV)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기록 모두 아브람을 군사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318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도(14:14),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그가 그런 소수의 무리를 가지고 네 왕이 이끄는 군사 동맹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디안’ 족을 무찌른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삿 7). 이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아브람’이 거둔 승리도 분명 영웅적 성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큰 전쟁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이야기를 확대 해석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의 군대는 때로 그 규모가 아주 작았으며,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건도 국제적 규모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소규모의 전투 또는 기습 공격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투 이야기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상당 부분 이전의 오래된 문헌이나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정확한 시기나 성경 외적인 사료들과의 관계 등을 규명하고 확인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점에서 14장은 <창세기>의 다른 장들과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이야기가 딱히 비역사적인 허구라는 주장도 확인할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전제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제 1부: 혈과 육의 전투
1. 전투 1(1-4절)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자아내던 조용하고 평화롭던 그 땅이 갑자기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전쟁(המחלמ)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고 해야, 국가 간의 큰 전쟁이 아니라, 부족 국가나 도시 국가 간에 일어나는 소규모의 분쟁 또는 갈등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헨리 모리스’, 31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속성상 잔인하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많은 주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짓밟고 파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의 발단은 사해(死海) 인근 지역에 살던 다섯 도시 국가의 왕들이 12년에 걸친 억압과 종속 상태를 벗어던지고 13년째 되던 해에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선언한데서 비롯됩니다. ‘헨리 모리스’는 이곳에서 숫자 13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숫자가 “배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만, 불필요한 우화적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헨리 모리스’, 313쪽.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 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한지라(1-4절)
오늘로 치면 자주와 독립 선언이라고 할까요. 약소국이 독립을 선언하면 종주국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엘람’의 ‘그돌라오멜’이 주축이 된 소위 ‘동방 4개국 연맹’이 영향력 상실을 우려하여 ‘왕의 대로’를 따라 ‘서방 5개국 연맹’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여가면서까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독자들에게는 꽤나 친숙한 이름들이었던 같습니다. 1절에서 ‘시날’을 ‘바벨론’과 동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왕 ‘아므라벨’의 정체는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이 이름의 발음이 ‘하무라비’와 비슷하다하여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라살’의 왕 ‘아리옥’과 관련해서는 두 사람 정도가 거명되고 있는데, ‘아리우쿠’와 ‘아리우키’가 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의 이름은 각기 주전 18세기 ‘마리’ 서고(書庫)(‘짐리-림’의 다섯 번째 아들)와 주전 15세기 <누지 문서>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본문의 자료가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반증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편 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시위대 장관의 이름이 ‘아리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단 2:14, 15, 24, 25), 시기적으로는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그리고 ‘엘라살’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벨론’에 이르기까지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어원적으로 ‘엘람’어로 된 두 단어의 합성어이긴 하지만, ‘엘람’어로 ‘그돌’은 아들을 의미하며, ‘라오엘’은 무자비하거나 아주 통이 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엘람’ 왕국의 기록에 이 이름을 가진 왕을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역사 신학자 Albright는 이 이름을 주전 17세기의 ‘엘람’ 왕 ‘쿠두르 라가마르’(Kudur-Lagamar)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만, 주전 2100-1100년 사이에 ‘엘람’을 통치하였던 40여명의 왕들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왕은 없다고 합니다. 후에 다시 Albright는 이 이름을 주전 1625-1610년 사이로 추정되는 시기에 또 다른 ‘엘람’ 왕 ‘쿠두르-난쿤디’(Kudur-Nankhundi)와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이 왕은 당시 ‘아카드’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임’ 왕 ‘디달’은 주전 18-13세기 사이에 있었던 ‘두달리아’(Tudhalia)라는 이름을 가진 네 명의 ‘헷 족’ 왕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국가’를 의미하는 ‘고임’은 다소 불투명한 것이, 이 이름을 가진 민족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고임’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아카디아 단어 ‘움만-만다’(만다 족속)가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들은 주전 3천년 경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한 일단의 북방 야만족으로 확인하기도 합니다. Wenham, 308쪽; Hamilton, 400쪽.
침공을 당하고 있는 다섯 왕들이나 각 왕국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도 간단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돔’ 왕 ‘베라’의 어원이나 의미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정복하다”는 의미를 지닌 ‘아랍’어 ‘바라아’(baraʿa)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안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모라’ 왕 ‘비르사’ 역시 ‘아랍’어로 “증오”(憎惡)를 뜻하는 ‘비르시’(biršiʿ)로 봅니다. 흥미롭게도 ‘베라’와 ‘비르사’는 어원적으로 모두 “사악하다”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드마’ 왕 ‘시납’은 ‘바빌로니아’어로 ‘Sin-abušu’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며, ‘신’(Sin)은 달의 神(the moon god)으로서 그 뜻은 “신은 그의 아버지다”입니다.
‘스보임’ 왕 ‘세메벨’은 ‘셈’족어로 “이름”(또는 ‘아들’)을 뜻하는 ‘Sem’과 “강하다”를 의미하는 ‘ʾabāru’의 합성어로 간주할 수 있는데, 따라서 전체적으로 “거룩한 이름은 강하다” 또는 “그 아들은 강하다”를 뜻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있는 다섯 번째 왕에 대해서는 ‘벨라’, 즉 ‘소알’의 왕으로만 소개하고 있고 왕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다섯 도시 국가들은 모두 사해(死海) 근방에 있었다는 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들 위치를 추적해 보자면 사해 북단 보다는 남쪽 지역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유황 냄새가 풍기며 소금이 석출되어 나오는 것이 마치 ‘소돔’의 종말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9:24-26). <창세기>의 다른 본문에서도 ‘소알’ 지역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아서 물이 풍부하다”고 쓰고 있어(13:10), 이 지역일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해 동남쪽으로 많은 개울들이 있어 사해로 흘러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근처에 “역청 구덩이가 많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14:10), 이들은 지금 사해의 남단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들 도시 국가들의 위치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암시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 시기에 이들 이름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추측컨대, 이들 모두 사해 남단의 비교적 얕은 물속으로(6-7 미터 정도) 매몰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의 탐사에서 사해 동쪽 연안에서 다섯 지역 정도를 초기 청동기(주전 3100-2350년)에 속한 도시들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중 ‘밥 에드라’(Bab ed-Dhra)로 불리는 지역이 가장 넓고 특기할 만한 것이,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도시들은 모두 6-1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 내에 흩어져 있습니다.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이래야 ‘밥 에드라’로부터 불과 40킬로미터 떨어진 것입니다. 혹시 ‘소돔’일지도 모르는 ‘밥 에드라’와 ‘뉴메이라’(Numeira) 지역은 함께 주전 2350년경에 멸망되었다가 이후 잠시 점령기를 거친 후에, 주전 2200-2100년 사이에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립니다. 이 시기는 대략 ‘아브람’이 살았던 시대보다는 다소 이르기는 하지만, 고고학에 의하면 이 지역이 폐허로 변한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어떤 군사적인 침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발견이 <창세기>의 기록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될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경>이나 <예언서>에서 자주 짝을 지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이 함께 나타나는 이곳과 다른 한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창 10:19; 신 29:22). ‘벨라’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소알’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13:10; 19:22, 23, 30; 신 34:3; 사 15:5; 렘 48:34).
‘벨라’ 곧 ‘소알’(2, 8절) 등과 같이 옛 지명을 화자 당시의 친숙한 지명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는데,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오래 된 것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소알’은 ‘롯’이 ‘소돔’이 멸망한다는 예고를 들었을 때 피하고 싶어 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19:20-23). <예언서>에서는 ‘소알’이 ‘모압’의 영토 내(사해의 동남쪽)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사 15:5; 렘 48:34). 다섯 도시 국가들이 서로 아주 가까이 인접해 있었음에도 각자 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 구조와 잘 일치하고 있는 역사적 서술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의 통일국가가 아니라 독립적인 도시 국가의 연합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수 12:7-24).
‘싯딤’ 골짜기는 본문에서만 나타나는 이름입니다(3, 8, 10절). ‘싯딤’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깊음, 들, 마귀 등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제안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싯딤’의 발음이 ‘소돔’과 비슷하여, ‘소돔’이 이야기 안에서 핵심어가 되도록 보조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싯딤’을 가리켜 ‘싯딤’, 곧 사해라고 하는데, 과연 지금의 사해를 뜻하는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지리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사해의 지리적 형태는 남쪽 가장자리로 올수록 수면이 얕아지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싯딤’을 사해 부근을 따라 접해 있는 골짜기와 연계해서 부르고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단락에 대한 방대한 역사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현대 독자들이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간단한 정보 하나뿐입니다(그나마도 4절은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4절을 보다 단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Wenham, 310쪽.
바로 이 점이 첫 단락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주제를 위한 도입부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란 무엇입니까?
2. 전투 2(5-12절)
첫 번째 전쟁 기사에서 ‘그돌라오멜’의 역할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간접적으로 암시를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만,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그가 이 지역의 강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동방 연합군”의 지휘를 맡아 14년째 되는 해에 다시 침공을 재개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5제 십사 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5-7절)
두 번째 침공에서는 단순히 사해 부근의 다섯 국가들만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요단’ 동북편의 여러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왕의 대로”를 따라 ‘요단’강 북쪽 끝에서 시작하여 사해 남단의 ‘소돔’과 ‘고모라’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있었는데, 위치 파악이 보다 용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기까지 합니다. 세 구절에서 나타나는 지역들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의 대로”(민 20:17)는 북으로는 ‘시리아’에서 남으로 사해까지를 잇는 ‘요단’ 동편의 도로로서 무역과 전쟁의 중요한 경로였다고 합니다(근동 지도 참조).
두 번째 침공에서 이들 도시 국가들도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번에는 이들 역시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독립 전쟁에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1) ‘아스드롯-가르나임’의 주민 ‘르바임’ 족속(‘르바’ 족속, <개역 성경>)은 ‘가나안’에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이전에 살았던 여러 족속 중의 하나로서(15:20), ‘아나김’ 족속과 마찬가지로 체구가 큰 족속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왕 ‘옥’이 가진 침대는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은 ‘요단’ 동북쪽의 ‘바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신 2:11, 20; 3:11). 따라서 ‘그돌라오멜’이 ‘바산’의 ‘아스드롯’을 공격한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함’ 지역의 ‘수스’ 족속은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3) ‘사웨-기랴다임’ 지역의 ‘엠’ 족속은 <신명기>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신 2:10-11), ‘르바임’ 족속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엠’은 어원론적으로는 아마도 “두렵다”는 의미와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며, ‘모압’ 족속이 거주하기 이전에 같은 지역에 살던 족속들로 추정될 뿐입니다. ‘사웨-기랴다임’의 경우 ‘사웨’의 의미는 확실치는 않지만 골짜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이보다는 더 잘 알려진 ‘기랴다임’(민 32:37; 수 13:19; 렘 48:1)과 동일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5절에 의하면 ‘기랴다임’은 ‘함’과 ‘세일 산’ 사이의 어느 곳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나마도 이 지역에 비슷한 발음을 가진 이름들이 있어 확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4) ‘세일 산’에 ‘호리’ 족속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명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신 2:12, 22), ‘아라바’의 동쪽에 위치한 이 산악 지역은 사해와 ‘아카바’ 만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전에 ‘에돔’ 족속이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주전 3000년 말경에 ‘후리안’이라 불리는 비(非)-‘셈’ 계열의 족속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문의 ‘호리’ 족속을 이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기는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집트’의 역사자료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을 ‘후루’라고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후리안’ 족속이 사해 남단까지 이주해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엘-바란’(바란의 나무)도 이곳에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성경>에서 보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엘랏’(신 2:8; 왕상 9:26)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로서 ‘그돌라오멜’이 “왕의 대로”를 따라 침공해 왔다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위치한 이곳까지 당도했을 것이 분명하며, 이어지는 구절(7절)에서 이들 군대가 이곳에서 “돌이켜...가데스에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란’은 ‘가나안’ 남단에서 가장 넓은 황야로서 ‘시나이’ 반도와 ‘느게브’와 ‘아라바’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5) 이들 침공 부대가 ‘엘바란’에서 돌이켜 이른 곳은 서북 방향에 위치한 ‘가데스-바네아’입니다(7절). 이 지역은 큰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서, 기자는 이곳을 ‘엔-미스밧’이라는 옛날 이름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민수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40년 동안의 광야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가데스’는 ‘가나안’의 남쪽 접경 지역으로서(민 34:4), 광야 여정에서 군대 본부가 있던 곳으로 보입니다(민 13:26; 20:22).
‘아말렉’ 족속은 ‘시나이’ 반도와 ‘느게브’ 북단에서 살아가던 일종의 유목 민족으로서, 역사적으로 출애굽에서 왕정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는 여러 번에 걸쳐 적대적인 충돌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출 17:8, 14; 민 13:29; 신 25:17, 19; 삼상 15:2-8). 이런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돌라오멜’이 ‘가데스’에서 ‘아말렉’을 쳤다는 사실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진술로 보입니다.
(6) ‘하사손 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이곳에 살던 여러 족속 중의 하나로서, 때로는 ‘가나안’에 사는 모든 족속을 총칭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거주지 ‘하사손 다말’은 사해 서쪽 부근에 ‘에인-게디’라고 <역대기> 기자는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대하 20:2). 혹자는 이 지역이 ‘유다’ 남쪽의 ‘다말’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며(왕상 9:18; 겔 47:18-19), 이 외에도 다른 여러 지역이 후보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중 어느 지역이 맞든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왕들이 사해 지역과 근처 평원을 향하여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장소가 ‘가데스’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전쟁을 소개하는 목적은 이중적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참고. 역사와 문학). 무엇보다도 지역의 절대 강자로서의 ‘그돌라오멜’의 위력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그의 이름은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1절), 이번에는 맨 앞에 등장하고 있습니다(5절). 그가 이끄는 연합군은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와 사해 남단 ‘소돔’과 ‘고모라’까지 휩쓸어버립니다.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버린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두 번째 전쟁 이야기를 첫 번째 것에 비해서 약간 상세하게 진술하되(8-9절), 간략하게 그 결과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즉 반란을 일으켰던 ‘소돔’과 ‘고모라’ 왕의 군사들은 달아나다 역청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산으로 도망치기도 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왕들의 재산과 양식과, 여인들을 포함한 남은 자들은 모두 전쟁 노획물로 붙잡혀 가버렸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10-11절). 17절에서 ‘소돔’ 왕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번 전투에서 그는 “역청 구덩이”로 피하여 목숨은 부지한 듯 보입니다.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9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8-9절)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로 왕이 달아달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10-12절)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히브리’ 식 서술의 한 전형을 만나고 있습니다. 즉 먼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묘사를 한 다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진술하되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까지 언급함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극적인 절정으로 이끌어 가는 기법이 그것입니다. <대홍수 이야기>에서도 기자는 홍수의 절정을 동일한 기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7:18-19, 23). <사무엘서>도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이야기를 전함에 있어 먼저 포로로 잡혀간 여인들에 대해서 일반적인 진술로 소개한 다음, 이어서 보다 세부적인 사항 즉 ‘다윗’의 아내들에 대한 언급으로 좁혀가고 있습니다(삼하 30:1-5).
그리고 이런 점증식(漸增式) 시적 반복의 절정을 통해서, 이번 전쟁 이야기의 두 번째 목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 이야기를 위한 배경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롯’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12절상). ‘롯’의 지금 처지는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결과와도 같습니다. 그가 ‘소돔’을 선택한 것은 하나의 재앙이었음이 명약관화 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브람’이 과연 ‘롯’을 구하러 나설까?” 다음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세 번째 단락의 배경이 된다는 말입니다.
3. 전투 3(13-16절)
세 번째 전쟁에서 엿볼 수 있는 주인공 ‘아브람’의 자질이 있다면 과연 어떤 것들이 있으며, 화자는 그것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첫 번째가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아브람’의 자질입니다.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13-16절)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영웅은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는 왕들과 사람들의 운명마저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아브람’의 힘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이 ‘아브람’이 거느린 불과 318명의 군사(이들이 정규 군대인지 아니면 집에서 훈련시킨 私兵인지 확인할 길조차 없지만)들한테 쫓겨 ‘가나안’의 최북단 ‘단’을 지나 ‘다마스쿠스’까지 혼비백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가데스에사 단까지”라는 표현은 마치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라는 표현처럼 ‘가나안’ 전체 지역을 나타낼 때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관용어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그가 거둔 승리가 철저했고 완벽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고 있는데, 빼앗겼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여인들과 나머지 백성들까지 다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특유의 유사 반복의 표현을 통해서(되찾은 재물에 대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되찾은 사람들 중에 여인들도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해 주고 있는 강조점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가나안 전 지역을 휩쓸어버릴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이들 연합군이 이처럼 맥없이 무너질 수 있을까? 도대체 ‘아브람’이 언제 어디서 이런 군사적 자질을 갖추게 되었을까?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본문에서는 ‘아브람’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처음으로 ‘히브리’ 사람이라고 칭하면서(13절상), 그의 사회적 신분이 군사적 힘을 갖추기에는 부적절했음을 시사해주는 듯합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39:14; 41:12). 그러나 이 단어와 관련하여 ‘하비루’ 또는 ‘아피루’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주전 3000년 후반부터 고대 근동 지방의 여러 문서들 속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상당히 친숙한 용어인 듯합니다. ‘아피루’는 당시 이방인 노예나 용병, 또는 비적 떼 등과 같은 사회 하류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 듯합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런 계층에 꼭 들어맞는 자로 볼 수 있는데, ‘가나안’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이방인이었고, ‘롯’뿐만 아니라 ‘소돔’ 왕을 위해서 군사를 일으키는 일종의 용병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가 어원적으로 ‘하비루’ 또는 ‘아피루’와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용어가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아주 오래된 자료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거둔 이 승리가 훗날 “기드온의 전쟁”을 예고해주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더 중요한 과제가 아직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브람’의 “군사적 자질”은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입니다. 더 큰 관심사는 족장으로서 ‘아브람’이 지닌 “영적 자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실은 제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지만, 이곳에서 제 2부를 위한 일종의 다리 놓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어떤 부분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발견한 수사적 기법을 적어보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에 대한 일련의 표현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듣고...거느리고...(단까지) 쫓아가서...쳐서 파하고...(호바까지) 쫓아가서”(14-15절). 가능한 모든 쓸데없는 수식어를 배제한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입니다. 그의 행동이 이처럼 단순하고도 명쾌했음을 보여주는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신속하게 대처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카에 대해서 무슨 원한이나 복수심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기자는 오히려 침묵과 생략으로 일관하면서 주인공의 “영적 자질”을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으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장 160km를 내달려 조카 ‘롯’을 구합니다. ‘아브람’은 그 땅의 가장 북쪽 ‘단’을 지나 ‘다마스쿠스’까지 쫓아갔습니다(15절하).
‘롯’만 구한 것이 아니라, 여인들을 포함한 다른 포로들과 빼앗겼던 재물 모두를 되찾습니다(16절). ‘아브람’이 여인들까지 구해주었다는 사실은 앞의 이야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입니다. 훗날 ‘다윗’ 왕의 행동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삼상 30:17-18).
화자는 ‘아브람’의 영적 자질에 대해서 아직 할 말이 더 있는 듯합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이 아니라, 이웃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13절후). 그는 ‘히브리’ 사람, 즉 이방인으로서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그 땅의 주민들과 좋은 관계 내지는 동맹관계를 맺어두고 있었고, 이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롯’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 2부: 영적 전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아브람’이 제 1부에서 치른 전투가 혈과 육에 대한 것이었고, 그는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전투, 즉 영적 전투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보다 교묘하고 은밀해서 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1. 소돔 왕과 아브람(17, 21절)
전투에서 돌아오면서 ‘아브람’은 두 왕을 만나게 되는데, 첫 상대는 ‘소돔’ 왕 ‘베라’입니다. 후반부의 교차대구적인 구조로 볼 때(참고, 역사와 문학), ‘아브람’이 ‘소돔’ 왕과 ‘멜기세댁’을 다른 시점에 각각 따로 만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만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가 그동안 어디 숨어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동안 어느 장소에 피신해 있다가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소돔’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왕의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사웨’ 골짜기는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단순히 골짜기를 의미하거나(5절) 또는 ‘우가리’ 어로 통치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만일 후자를 의미한다면, “왕의 골짜기”로 표현한 이 단어는 이전의 ‘히브리’어를 적절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왕의 골짜기”는 <사무엘 서>(삼하 18:18)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 장소는 ‘예루살렘’ 남쪽 4킬로미터에 위치한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일 ‘살렘’(18절)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런 추정은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바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영 파티를 위해서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17절),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21절)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는 요구 사항뿐입니다. 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백성들뿐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전쟁 수확물은 ‘아브람’이 가져가도 좋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런 제안마저 단호히 거절하고 사양합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획물들까지 모두 돌려보냅니다: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22-24절)
당시 관습에 따르면 ‘아브람’은 모든 전쟁 노획물들을 다 취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될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전투를 치렀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법보다는 명예를 선택했으며, 이 점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이처럼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소돔’ 왕 ‘베라’는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함에 있어 ‘롯’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멜기세댁과 아브람(18-20절)
‘멜기세댁’이 ‘베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18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8-20절)
여기서 ‘멜기세댁’이 누구인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멜기세댁’에 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내 왕은 세댁(Sedeq)이시다”; “밀쿠(Milku)는 의로우시다”; “내 왕은 의로우시다”. 처음 두 해석에 의하자면, ‘멜렉’이나 또는 ‘세댁’은 신의 이름이라야 하지만, 세 번째 해석에는 그러한 전제가 필요 없습니다. 이중 처음 두 해석이 더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름에 덧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호수아>(10:1)에서 ‘예루살렘’ 왕의 이름을 ‘아도니세댁’(나의 주는 세댁이시다)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과, 다윗의 제사장이 ‘사독’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 해설자가 ‘멜기세댁’이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잘 일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시편> 110에서는 ‘시온’의 왕을 ‘멜기세댁’과 연결시키고 있고, <시편> 76:2에서는 ‘시온’과 ‘살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그 장막이 또한 ‘시온’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역시 ‘살렘’을 ‘예루살렘’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멜기세댁’을 단순히 ‘살렘’의 왕으로 부르고 있는데, ‘살렘’이 정확하게 어딘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부르지 않고 여기서처럼 줄여서 쓰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미 주전 이천년 경의 <성경> 외의 문서들 속에서 ‘예루살렘’을 ‘우루살림’(Urusalim)/‘루샬리뭄’(Rushalimum)으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살렘’을 ‘세겜’ 근처의 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과 관련한 전승이 ‘예루살렘’으로 변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참고, 창 33:18). 이 역시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이긴 하지만, 적어도 <창세기> 화자에게 있어서는 ‘멜기세댁’은 ‘사해’ 남단의 한 지역의 인물임에 분명해 보이는 것이, 그의 등장을 언급하면서 ‘소동’ 왕도 함께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넉넉함과 너그러움입니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옵니다. 빵과 포도주는 왕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음식들로서, ‘멜기세댁’은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에게 합당한 대우와 대접을 베풀어주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신세 입은 것에 대해서 감사와 호의를 표할 뿐입니다. ‘베라’와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는 그가 예지와 신통력마저 지니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절). 그가 어디서 이런 예지를 얻게 되었는지, 또는 그가 칭송하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족장의 하나님 ‘야훼’인지에 대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가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하나님을 섬겼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엘리온’(El-Elyon)에 대한 번역입니다. ‘멜기세댁’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첫 번째 제사장으로서, ‘엘-엘리온’은 족장들이 섬기던 하나님의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이름으로서, ‘엘-올람’(El-Olam), ‘엘-샤다이’(El-Shaddai), ‘엘-이스라엘의 신’(El-God of Israel)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엘’은 이천년 경 ‘가나안’의 만신 전에서 섬기던 여러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을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다른 수식어 ‘엘리온’, ‘샤다이’, ‘천지의 주재’ 등과 함께 합성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기도와 노래 속에 “축복”(ךרב, 바라크)을 뜻하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모티브를 연상시켜주는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언약이 처음으로 실현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나안’의 한 이방인 ‘멜기세댁’에게도 말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1-3)
초월 신을 경외하던 ‘가나안’의 이방인 제사장 ‘멜기세댁’은 분명 신비스럽고 흥미로운 존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성경> 화자들은 그를 두고 여러 가지 알레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흔히 왕의 대관 시로 알려져 있는 <시편: 110>에서 시인은 ‘다윗’ 왕을 두고 ‘멜기세댁’의 계열을 잇는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시 110:4). 시인에게 있어서 이상 국가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가 되어서 왕이 제사장 직분을 겸직하는 그러한 나라가 되어야 하며, ‘멜기세댁’이 그 원형(原型)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사실 ‘다윗’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이스라엘’ 즉 제사장 나라의 한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출 19:6).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예배에 참석하여(삼하 6:14), 희생 제물을 드리면서,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는 등 영락없는 제사장이었습니다(삼하 6:17-18; 왕상 8:14, 55, 62-63). ‘멜기세댁’이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으니, ‘아브람’의 후손으로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자 왕으로 다스리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축복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의 알레고리는 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확대되어 “그리스도론적 해석”(메시아적 해석)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로써, 예수님 스스로도 ‘바리새’인들과 논쟁에서 이 <시편>이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마 22:41-45).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이런 주장을 보다 상세하게 비교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과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주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습니다(히 5-7장). 그의 요지인 즉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멜기세댁’의 계열을 잇는 것으로서, <구약>의 ‘아론’의 제사장 계열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 근거로 ‘아론’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위대한 조상 ‘아브람’이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바친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면 그의 후손 ‘아론’이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옛 언약 하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한 예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셨듯이, <히브리서>는 ‘멜기세댁’을 ‘메시아’의 한 예표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댁’이 가지고 나온 떡과 포도주는 성만찬을 예표하는 것이라는 후대 기독교의 해석은 어쩌면 당연한 해석적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순전히 <창세기>의 본문 안에서만 집중시켜 볼 때, ‘멜기세댁’은 하나님의 손길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통찰력 있게 인정한 이방인의 한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자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비멜렉’이나(21:22), ‘라합’(수 2:11), ‘룻’(1:16), ‘나만’(왕하 5:15) 등이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또 한 편으로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러 온 동방의 현자(동방 박사)들일 수도 있으며(마 2:1-12), 로마의 백부장들일 수도 있고(마 8:5-13; 막 15:39; 행 10), ‘수로보니아게’의 과부일 수도 있으며(막 7:26-30), 더 나아가서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수많은 이방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아브람’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3. 아브람의 대응(22-24절)
이 부분은 ‘아브람’의 영적 탁월성을 보여주는 마무리 선언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22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 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22-23절)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람’을 통해서 복을 받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약속이지,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흥정과 타협을 요구해오던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도 누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야훼’의 이름이 에피소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서 보였던 거짓되고 비겁한 행동과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과 비겁함으로 일관하다가 ‘바로’ 왕과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결국 국외추방을 당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쫓겨나면서 많은 재물과 노비까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실로 위풍당당함 그 자체입니다. 그 자신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복의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혈과 육의 전투
발단. 약소국이 독립을 선언하면 종주국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독립 운동도 그랬고, 지난 세월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탄압, 그리고 최근에는 ‘위구르’ 자치주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반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과 북한이 통일되는 것을 누가 가장 싫어할까? 흔히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나는 정 반대라는 생각입니다. 요히려 중국과 일본이 아닐까요? 북한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가장 싫어할 나라가 중국이며, 일본 역시 우리가 강대국이 되어 자기네들과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누가 이런 본인을 친미주의자라고 합디다).
‘엘람’의 ‘그돌라오멜’이 주축이 된 소위 동방 4개국 연맹 역시 강대국으로서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들 왕은 “왕의 대로”를 따라 서방 5개국 연맹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고 있습니다(1-4절).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자아내던 조용하고 평화롭던 그 땅이 갑자기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발단은 사해(死海) 인근 지역에 살던 다섯 도시 국가의 왕들이 12년에 걸친 억압과 종속 상태를 벗어던지고 13년째 되던 해에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선언한데서 비롯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동에는 분쟁이 끊일 날이 없는데, 이 지역이 갖는 경제적 가치 즉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돌라오멜의 전쟁. 약소국들의 독립 선언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쟁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동방 연합’의 총지휘를 맡아 다른 여러 왕들과 함께 14년째 되는 해에 다시 한 번 이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5절).
이 전쟁이 과연 두 번째 전쟁인지, 아니면 앞의 전쟁 이야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화자의 의도는 다른데 있어 보입니다. 그가 이 전쟁을 소개하는 목적은 이중적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선 지역의 절대 강자로서의 ‘그돌라오멜’의 위력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가 이끄는 연합군은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와, 사해 남단 ‘소돔’과 ‘고모라’까지 휩쓸어버립니다.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버린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두 번째 전쟁 이야기를 첫 번째 것에 비해서 약간 상세하게 진술하되(8-9절), 간략하게 그 결과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즉 반란을 일으켰던 ‘소돔’과 ‘고모라’ 왕의 군사들은 달아나다 역청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산으로 도망치기도 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왕들의 재산과 양식과, 여인들을 포함한 남은 자들은 모두 전쟁 노획물로 붙잡혀 가버렸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10-11절).
‘롯’의 지금 처지는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결과와도 같습니다. 그가 ‘소돔’을 선택한 것은 하나의 재앙이었음이 이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소돔’을 선택했을 때는 자신의 자유의지와 결단에 따라 그렇게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운명은 순전히 정복자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가진 모든 재물을 다 빼앗기고, 남은 인생을 노예로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 지역의 절대 강자 ‘그돌라오멜’의 은혜를 입는 길뿐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를 알아 볼 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꼭 같은 조건, 예를 들어 친구나 가족이나 형제로 인생을 함께 시작했으면서도,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 처지나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사태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특히 어렵고 딱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왜 자신의 처지가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 반문해 보곤 합니다. ‘롯’ 역시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면서 그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아버지를 일찍 여의긴 했지만, 아버지와 다름없는 삼촌의 보살핌 속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땅 문제로 삼촌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삼촌은 오히려 더 큰 양보를 해주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소알’의 큰 땅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이곳에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촌을 배신했다는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다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기막힌 반전이란 말인가!” 이것이 ‘롯’의 절망에 찬 결론이자 절규입니다. 그를 이 절망 가운데서 구출해 줄 유일한 희망이자 절대 권력자 ‘그돌라오멜’이 ‘롯’의 딱한 형편을 알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 반전은 불가능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진짜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요? 화자는 우리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즉 ‘롯’이 ‘아브람’의 조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소개함으로써(12절상),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엘람’ 왕은 ‘롯’을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만, ‘아브람’의 하나님은 그를 알고 계신다는 암시 말입니다. 이 같은 암시가 이어지는 세 번째 전쟁 이야기에 대한 배경의 기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연 ‘아브람’을 불러 ‘롯’을 구출하게 하실까? ‘롯’이 ‘아브람’의 조카라는 화자의 진술은 과연 무엇을 기대하게 하는 것일까?
아브람의 전쟁. ‘위어스비’ 목사는 이 단락을 해설하면서 ‘그돌라오멜’이 무슨 목적으로 이 전쟁을 일으켰든, 하나님은 ‘롯’을 위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롯’을 구출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든 아니든, 본문의 주인공은 ‘롯’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쟁의 영웅 ‘그돌라오멜’도 아닙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이야기가 한참 지난 후에야 등장하고 있는 ‘아브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선 두 번의 전쟁 이야기도 결국 ‘아브람의 전쟁’을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 번째 전쟁에서 엿볼 수 있는 주인공 ‘아브람’의 자질이 있다면 과연 어떤 것들이 있으며, 화자는 그것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 첫 번째가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아브람’의 자질입니다. 그동안 두 번의 전쟁을 통해서 드러난 영웅은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는 왕들과 사람들의 운명마저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도 ‘아브람’의 힘 앞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막강한 군대가 ‘아브람’이 거느린 불과 318명의 군사들한테 쫓겨 가나안의 최북단 ‘단’을 지나 ‘다마스쿠스’까지 혼비백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승리는 철저했고 완벽했습니다. 빼앗겼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여인들과 나머지 백성들까지 다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가나안 전 지역을 휩쓸어버릴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이들 연합군이 이처럼 맥없이 무너질 수 있을까? 도대체 ‘아브람’이 언제 어디서 이런 군사적 자질을 갖추게 되었을까?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거둔 이 승리가 훗날 ‘기드온의 전쟁’을 예고해주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더 중요한 과제가 아직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브람’의 군사적 자질은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입니다. 더 큰 관심사는 족장으로서 ‘아브람’이 지닌 영적 자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실은 제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지만, 이곳에서 제 2부를 위한 일종의 다리 놓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어떤 대목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배신에 대한 감정은 정말 처치 곤란입니다. 그 후유증도 실로 길고도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할 지도 모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과거의 경험 중에서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배신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배신이 그만큼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배신을 처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복수를 택합니다. 장장 9년이나 끌었던 ‘트로이’ 전쟁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렌’의 배신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버리고 이웃 나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도망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 남편이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이웃 국가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돌라오멜’도 종주국의 왕으로서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들 약소국들이 받은 대가는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처럼, 철저한 응징과 파멸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연인사이에 있어서나 국가 간에 있어서나 배신에 대해서 관용과 자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상적인 감정과 기대가 ‘아브람’을 만나서는 다 무너져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가다 간신히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전해주는 소식을 접한 ‘아브람’이 보이고 있는 반응 때문입니다: “그는...듣고...거느리고...(단까지) 쫓아가서...쳐서 파하고...(호바까지) 쫓아가서”(14-15절). 가능한 모든 쓸데없는 수식어를 배제한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입니다. 그의 행동이 이처럼 단순하고도 명쾌했다는 말입니다.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그는 본능적으로 행동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카에 대해서 무슨 원한이나 복수심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화자는 오히려 ‘침묵’과 ‘생략’으로 일관하면서 ‘아브람’의 ‘영적 자질’을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으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 고결하고도 아름다운 ‘영적 영웅’이 지닌 자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장 160km를 내달려 조카 ‘롯’을 구합니다. ‘롯’만 구한 것이 아니라, 여인들을 포함한 다른 포로들과 빼앗겼던 재물 모두를 되찾습니다(16절). ‘여인들까지 구해주었다는 사실은 앞의 이야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입니다.
‘위어스비’ 목사는 ‘아브람’의 이러한 영적 자질에 대해서 칭송하면서, 한 가지 자질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즉 그는 흔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은 소위 ‘고독한 영웅’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으나 세상이나 이웃을 떠나 살고 있지도 않았고, 세상일에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 즉 이방인으로서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그 땅의 주민들과 좋은 관계 내지는 동맹관계를 맺어두고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13절후). 바로 이런 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롯’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이러한 처세술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구약> 특히 <신명기>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까? <여호수아서>에서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유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에스라>나 <느헤미야서>에서도 이방인과의 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상거래까지 금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브람’의 이런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책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방인 왕 ‘아닥사스다’의 충직한 술 관원으로, 그 왕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성벽 재건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느헤미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어떻습니까?
이들 믿음의 사람들이 성공한 배경이 어디에 있었을까? 지도자의 자리에 있거나,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개 독단과 아집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고독한 영웅 본색을 수시로 드러내고는 합니다. 이점 교회의 목회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 사역은 훌륭하게 수행하는데, 같은 교단 내의 교회 간 연합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수는 어떻습니까? 필자 역시 늘 나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다른 교수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본인은 교수와 목사 직분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두 영역에서 모두 최악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결과로 따져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다음과 같은 충고는 본인의 가슴을 비수처럼 찌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나는 혼자만의 거룩함을 좇다가 다른 사람과의 화평을 소홀히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본인의 아내와의 관계마저도 수시로 충돌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참으로 후회막급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아무나 선생되지 말라”는 충고가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탁월했습니다. 그의 탁월성은 군사적 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 영역에 있었습니다. 영적 탁월성은 무슨 초 신령한 생활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즉 윤리․도적적인 탁월성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아브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영적 탁월성은, 그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전혀 책임이 없고 할 필요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땅을 놓고 한바탕 다툰 후, 나로부터 많은 양보를 받아내고 떠난 조카가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겪게 되는 당연한 자업자득이라고 쾌재를 불렀을 테니 말입니다. “너, 이번에 아주 혼 좀 나봐라.” 뭐 이런 식의 반응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혼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집트’에서 비굴하게 굴던 그 ‘아브람’이 아닌 것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헤세드’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는 정신 말입니다.
교훈. 이야기를 마치면서, ‘롯’에게도 관심을 돌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과의 대비를 위해서 어쨌든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으니 교훈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 ‘아브람’과는 대조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인류에게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여러 가지 타이틀을 붙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 늘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거나 폐를 끼치는 사람. 늘 은혜를 입지만 의지박약(意志薄弱)하여,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사람.
나는 ‘롯’과 얼마나 다른 사람입니까? ‘위어스비’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던지면서 교훈과 적용을 위한 묵상 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죽다가 살아난 ‘롯’, 그가 삼촌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촌에게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까? 다시는 ‘소돔’ 땅에서 살지 않고 다시 삼촌과 함께 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2. 영적 전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아브람’이 그동안 싸운 전투가 바로 혈과 육에 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전투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보다 교묘하고 은밀해서 싸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전쟁에서 이긴 뒤에 훨씬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위어스비’ 목사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의 승리 후에 ‘아이’ 성에서 패배를 맛보았고(수 7장),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승리한 후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을 쳤습니다(왕상 19장).
소돔 왕. ‘아브람’이 전쟁에서 돌아와 만날 첫 상대는 ‘소돔’ 왕 ‘베라’입니다. ‘아브람’의 탁월성은 ‘소돔’ 왕 ‘베라’를 만났을 때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소돔’ 왕 역시 ‘롯’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인물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는커녕 거만하고 당당하게 원래 그의 소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마지못해 전쟁 노획물은 그냥 가져도 좋다는 식의 흥정을 제안한 것이 고작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그의 흥정을 받아들여 포로들은 돌려주고 노획물들을 가져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그 모든 것들을 자기 소유로 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아브람’이 ‘베라’의 제안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사악하고 음흉한 ‘소돔’ 왕은 그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돌아다닐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멜기세댁’ 앞에 내어놓을 십일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음흉한 왕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영적 탁월성이 돋보인다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왜 ‘베라’의 제안을 거절하였을까? 법적으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위어스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이 법원의 판결에 관련해서는 합법적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 관련해서는 도덕적으로 빗나간 것들이다.” ‘아브람’은 법보다는 명예를 선택했습니다. 도덕적 우월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귀하게 여겨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화자는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만, 그 저의를 들여다보면 이런 저런 인간관계를 통해서 필요할 때 신세를 지거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도덕적 탁월성이 드러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사회적 출세를 위해서 인간관계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신발 끈 하나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브람을 부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말을 당신이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23절, 쉬운 성경).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것은 어딘가 믿는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22절). 실력보다는 인맥, 기도보다는 뇌물, 정정당당함보다는 비굴함 등을 쉽게 선택하려 하는 내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멜기세댁. 나의 유익을 위해서 어떻게 하든 여러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이유는, 필요할 때에는 꼭 ‘멜기세댁’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에게 꼭 필요하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그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을까?
‘멜기세댁’이 ‘베라’와 비교되는 대목은 무엇일까? 넉넉함과 너그러움입니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옵니다. 여기서 ‘빵과 포도주’는 왕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음식들로서, ‘멜기세댁’은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에게 합당한 대우와 대접을 베풀어주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대가로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그가 입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와 호의를 표하고 있을 뿐입니다.
‘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웠고, 감사하거나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무시하고 미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롯’과 마찬가지로 육과 혈에 속한 자일뿐입니다. 위엄이나 덕스러움이나 명예나 도덕적 탁월성 등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러한 자가 무슨 복을 받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12:3).
화자는 ‘멜기세댁’이 예지와 신통력마저 지니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절). 그가 어디서 이런 예지를 얻게 되었는지, 또는 그가 칭송하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족장의 하나님 ‘야훼’인지에 대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가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하나님을 섬겼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기도와 노래 속에 축복(ךרב, 바라크)을 뜻하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모티브를 연상시켜주는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12:1-3). ‘멜기세댁’은 하나님의 손길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통찰력 있게 인정한 이방인의 한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자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비멜렉’이나(21:22), ‘라합’(수 2:11), ‘룻’(1:16), ‘나만’(왕하 5:15) 등이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또 한 편으로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러 온 동방의 현자(동방 박사)들일 수도 있으며(마 2:1-12), 로마의 백부장들일 수도 있고(마 8:5-13; 막 15:39; 행 10), ‘수로보니아게’의 과부일 수도 있으며(막 7:26-30), 더 나아가서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수많은 이방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아브람’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아브람의 대응. 이 부분은 ‘아브람’의 영적 탁월성을 보여주는 마무리 선언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 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22-23절).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람’을 통해서 복을 받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약속이지,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흥정과 타협을 요구해오던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도 누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어스비’ 목사는 ‘아브람’의 이런 행위를 두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세상이 주는 뇌물에 힘입어 살지 않고 주께서 주시는 복을 힘입어 살았다.” 그는 아무도 세상이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과 선물을 받음으로써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종도 되고 세상의 유명 인사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브람’의 결심과 결의는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발로였음이 고백 중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이 에피소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많이 변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보였던바 행동 양식은 거짓과 비겁함으로 일관된 것이었고, 이 일로 해서 그는 ‘바로’와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결국 그 나라에서 쫓겨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쫓겨나면서 많은 재물과 노비까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실로 위풍당당함 그 자체입니다. 그 자신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복의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뱀처럼 지혜롭게, 그러나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권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롯’도 ‘베라’도, 그리고 ‘멜기세댁’도 필요로 했던 것들입니다. 물론 ‘롯’이나 ‘베라’처럼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영원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는 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멜기세댁’과 같이 빛의 역사를 알아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서 밝음이며, 소금은 그 자체로서 짠 맛입니다. 밝게 하기 위해서나 짜게 하기 위해서 다른 첨가물을 더하거나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로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세상의 도움이나 신세를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람’이 그 탁월성을 드러냄에 있어 ‘베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무슨 관계를 필요로 하며 활용하고 있습니까? 동문입니까? 가문입니까? 학력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아니면 무대의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그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을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하고, 각 단락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특히 ‘아브람’의 영적 자질이 각 단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도 함께 논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