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는 대개 맹세가 따릅니다. 상거래에서 계약 당사자가 서명을 한다든지, 또는 인감 증명을 교환하는 등의 행위가 일종의 맹세에 속하는 것으로서, 계약에 대한 법적인 구속력을 갖자는 것입니다. 맹세는 대개 맹세를 하는 당사자보다 더 큰 권위나 공신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우리의 대답을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맹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무언인가를 약속하실 때, 맹세를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우선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을 책임지고 보장해 줄 수 있는 자기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득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실은 맹세가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이 곧 맹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맹세를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담보 내지는 증거를 요구하고 나섭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자기 저주가 포함되는 언약을 체결함으로써 맹세를 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흔히 <아브라함 언약>으로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서론에서 본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다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구두 서약”(verbal oath)을 들 수 있고(창 21:23, 24, 26, 31; 31:53; 출 6:8; 19:8; 24:3, 7; 신 7:8, 12; 29:13; 겔 16:8), 다음으로는 구두서약에 상징적인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로써, 선물을 증정한다든지(창 21:28-32), 음식을 먹는다든지(창 26:28-30; 31:54; 출 24:11), 기념비를 세운다든지(창 31:44 이하; 수 24:27), 피를 뿌린다든지(출 24:8), 제물을 바친다든지(시 50:5),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한다든지(겔 20:37), 동물을 잘라 쪼개는 일(창 15:10)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이 마지막 상징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언약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라고 ‘팔머 로벗슨’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신 것이며, 반드시 계약 당사자를 삶과 죽음의 관계로 묶어두는 약정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Robertson, O. P.;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제 1장.
언약의 한 쪽 당사자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그분도 언약을 어길 시에는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언약 체결 장면은 바로 이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와 문학
단락과 구조.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15-17장은 <창세기>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곳으로서, 이곳에서 ‘아브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장과 15장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로서 그 시작과 결말을 아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언(序言), “이 일 후에”(1절)는 14장에서 소개한 바 있는 왕들과의 전투에서 ‘아브람’이 거둔 승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15장에서 14장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암시나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두 장의 연결 고리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땅에 관한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18-21절), 이곳에서 하나님은 당시 그 땅에 살고 있던 열개 민족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면서 그 땅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8-21절)
이야기 전체의 플롯(plot)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이야기의 형식은 ‘히브리’ 특유의 시적 유사 반복(類似 反復)입니다. 즉 전체 플롯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고, 순환과 반복을 통해서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반복과 중첩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아래 도표를 통해서 이점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이와 같은 병행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문학적 상수(常數)들이 그것입니다:
(1) ‘주 야훼’(2/8절)
(2) ‘후손’(ערז)(3, 5/13, 18절)
(3) ‘상속하다’(שׁרי)(4/7, 8절)
(4) ‘이끌어내다’(אצןה)(5/7절).
자료와 편집. 이 두 단락은 원래 하나의 이야기였을까? 또는 상이한 두 자료를 섞어 편집한 것일까? 이에 대한 자료비평적 답변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가설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전통적으로 후자의 입장을 선호해 왔습니다. 즉 본문은 <야훼 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섞인 편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만 두 자료가 혼재해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엘로힘 자료>와 <야훼 자료>가 연속적으로 본문의 두 단락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1-6절, <엘로힘 자료>; 7-21, <야훼 자료>), 또는 두 자료가 전체적으로 혼재해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예, <엘로힘 자료>: 1절 후, 3절 상, 5, 11, 12상, 13상, 14, 16절; <야훼 자료>: 나머지 구절들).
이런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즉 한 편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에 대한 자기소개가 두 번이나 거듭해서 나타나고 있는 점이라든지(1, 7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브람’의 반응 역시 두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점이라든지(2-3, 8절), 각 장면에서 시간에 대한 언급도 두 번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으며(5절의 밤; 12, 17절의 해질 무렵에 대한 언급), 또한 각 단락에서 ‘아브람’의 태도에 대한 언급 또한 서로 모순을 보이고 있는데, 6절에서는 아브람의 믿음에 대해서 소개하다가 8절에서는 다시 그의 의심 내지는 불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흐름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또는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두 개의 상이한 자료를 편집한 결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7절)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2-3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12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학자들 사이에서 <엘로힘 자료>의 존재는 크게 인정받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본문 전체가 통일성을 지니는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13-16절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히브리’ 이야기 방식에서 볼 때 차라리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보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
자료의 형성이나 편집 시기에 대해서도, 주전 이천년에서 천년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상이나 땅에 관한 언약의 조건들을 고대 근동 사회와 연관지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자료의 형성 시기가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그 내용으로 볼 때, <창세기>에서 일련의 발달 과정을 거친 것으로서, 심지어는 7세기경까지 늦추어 잡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본문에서 <신명기>적 요소들을 끄집어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아브람’을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나, 언약의 용어들이나, 또는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의 목록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이 나름대로 부인하기 어려운 요점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것이 일련의 발달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가설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가설에 근거하여 자료의 시기를 추정하는 작업 또한 잠정적이고 한시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종의 순환 논리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사상이나 용어들을 <신명기>와 연관시켜 그 시기를 추정하는 작업 역시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를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신명기>가 본문의 자료를 이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료비평과 관련해서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실은, 본문을 통해서 <야훼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과 본문의 형성 시기도 <야훼 자료>의 편집 시기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제 1막: 언약의 약속
1. 계시: 환상(1절)
‘야훼’ 하나님의 계시, 즉 직접적인 음성으로 새로운 이야기의 막은 열리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아브람’으로서 ‘롯’과 헤어진 이후(13:7) 지금까지 네 왕들과의 전투를 거치면서 오래 만에 들어보는 그분의 음성입니다. 환상 가운데 그 음성을 들었다고 하니, 이는 분명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현(顯現)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환상’(הזחמ)을 통해서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이곳 외에 세 곳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민 24:4, 16; 겔 13:7). 비가시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가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말씀(즉 음성)으로 들렸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꿈을 통한 계시와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다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고 계시며, 그가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이삭’이나(26:24) ‘야곱’이(46:3) 들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서, 당시 이 두 족장이 처해있던 상황은 불안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했던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주변 민족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으면 했지, 그가 두려워해야 할 명시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돌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위험에 빠진 개인이나 백성들에게 ‘구원의 신탁’을 선포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민 21:34; 신 1:21; 3:2; 7:18; 20:1; 31:8; 수 8:1; 10:8; 11:6; 사 7:4; 10:24).
혹이나 그가 두려워해야 할 상대가 있었다면 누구였을까? 지역의 패자 ‘그돌라오멜’을 만나서도 살아남은 ‘아브람’이 바야흐로 ‘야훼’ 하나님을 대면하고서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 앞에 나타나시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분명 안전을 담보해 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어지는 약속이 이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1절). 분명 군사적인 은유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만, 명령에 이은 약속의 말씀은 분명 군사적인 은유를 함축하고 있으며(삼하 22:3, 31; 시 3:4; 115:9-11), 앞서 14장에서 있었던 전투를 연상시켜 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신실한 백성, 특히 그가 세운 왕들의 방패가 되신다는 표현 역시 <구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예: 시 84:12-13; 잠 30:5). 그리고 상급(רכשׂ)은 일반적으로는 임금 또는 수당을 의미하지만, 전쟁 노획물을 의미하기도 하므로(겔 29:19), 이 단어 역시 14장의 사건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후손이 땅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고”(13:16), 이들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12:1-3). 그러나 이 약속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이 이 일로 해서 늘 어두웠을까요?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자식으로 근심하고 있는 두 아버지에게 우연찮게도 동일한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건네고 있습니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눌 1:12-13)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환상’, 즉 말씀과 음성을 통해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과 동일한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을 백성들에게 전할 때 항상 “두려워 말라”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화자는 이곳에서 ‘아브람’을 선지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으며, 그가 받은 신탁이 그의 후손 모두에게 전가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3-25)
2. 반응: 요구(2-3절)
그러나 두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갈등을 향해 나아갑니다. 화자는 오래 만에 대화를 등장시킴으로써, 그 갈등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2-3절)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아브람’의 생각을 읽게 됩니다. 대화는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트렘퍼 롱맨’(T. Longman III)은 성경 이야기(narrative)의 중요한 수사적 요소 중의 하나로 대화를 꼽고 있습니다: Tremper Longman III. 「문학적 성경해석」. 유은식 역. 서울: 솔로몬, 2002. 그에 의하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두 인물 중 한 인물이나 또는 두 인물 모두 어떤 사람이나 또는 대변인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집단을 대표합니다(왕상 12장). 또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두 인물들은 종종 서로 대조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그들의 서로 다른 말투는 인물들의 특징을 부여하는데 기여합니다(예: 창 25장의 ‘야곱’과 ‘에서’의 대화). 대체로 <성경)의 서사(敍事)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대화는 사실성과 생동감을 표현하는데 좋은 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롱맨’은 ‘벌린’(Berlin)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직접 화법은...인물 내면의 심리적이고 이념적인 관점을 전달하는데 가장 극적인 방법이다.”
‘아브람’이 주도하고 있는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동안 꾹 참아왔던 ‘아브람’의 불편했던 심기가 한꺼번에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밀턴’(V. Hamilton)도 화자의 의도를 살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도 없이 죽을 텐데 당신이 내게 주는 그 상급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해밀턴’, 417쪽(참고도서 3).
‘아브람’의 내면세계를 잘 파악한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브람’은 아들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고사하고 아무 후사도 없이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상이나 계시가 무슨 위로가 되며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가 주시는 선물이 무엇이든 자식 없이 죽어야 하는 ‘아브람’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될 수 없다는 강한 불만이 담긴 질문입니다.
내친 김에 ‘아브람’은 후계자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결심까지 단숨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2절). 이 구절의 의미를 놓고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며,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는 Hamilton이 그의 저서에서 잘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참고도서 3, 420-422쪽), Wenham의 견해에 따르면, 이 구절은 아마도 본문 변조 내지는 파괴의 결과로 보아야 하며,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참고도서 1, 328쪽).
이 한 번의 선언으로 성이 차지 않았음일까요? 결심과 불평을 재차 쏟아놓으면서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3절).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까지 다 해버렸습니다. 단호한 그의 결심에 하나님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어 보입니다.
과연 ‘아브람’의 반응은 온당한 것입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며,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동안 그는 말없이 하라는 대로 했고, 그저 기다려 왔을 뿐입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를 통해서 약속한 대원칙,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1:28; 9:1)는 ‘창조의 언약’은 고사하고, ‘땅과 후손’에 관한 개인적인 약속들조차 지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불평과 항의를 하나님에게 쏟아 붓고 있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까?
화자는 이에 대한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처음으로, 그리고 <성경>에서는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이 대화에서 이전과는 달리, 주도권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크게 틀린 관찰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본인의 지식에 의하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는 <창세기>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타락 이후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아담’ 및 ‘하와’ 사이에 있었던 대화로서(창 3:9-13),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두 번째 대화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에 ‘가인’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서, 이 역시 하나님께서 범죄 한 ‘가인’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대화를 주도하고 계십니다(4:9-15), 그러나 이 세 번째 경우는 ‘아브람’이 주도적으로 하나님을 대화로 끌어들이고 있는 듯한 형국으로 보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엿볼 수 있듯이 ‘아브람’은 더 이상 단세포적이거나 평면적인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아주 복합적이며 입체적인 성격을 지닌 자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피난을 간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자신의 생명과 아내를 맞바꾸려 했던 지극히도 이기적이고 야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가 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훗날 조카 ‘롯’과 땅을 놓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 순순히 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한 가족의 어른으로서의 덕스러움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망나니 같은 조카를 구하기 위하여 타인의 전쟁에 기꺼이 목숨을 거는 자비롭고도 희생적인 성품 또한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노획한 모든 전쟁 전리품들을 ‘소돔’ 왕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물론, ‘멜기세댁’을 만나 십일조까지 드리는 영적 영웅으로서의 자질까지 지니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나는 ‘아브람’은 하나님의 엄청난 환상과 거듭되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불평으로 가득 찬 어린애와 같은 한 노인 그 자체입니다. 화자는 <아브람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쓰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만큼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일까요? 무엇입니까?
3. 대답: 공증(4-5절)
‘아브람’의 항의성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어떤 것입니까? 이전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4-5절)
약속의 핵심은 후사에 관한 것으로서 두 번에 걸쳐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문으로,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그의 후사는 ‘엘르아살’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날 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서 대조 반복을 통한 강조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약속이 정녕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즉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이 나를 이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분 좋은 약속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 ‘사라’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라’가 이 약속을 듣고 속으로 비웃기까지 했겠습니까(18:12).
이제 답답한 쪽은 하나님인 것처럼 보입니다. 밖에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집안으로 들어와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모습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집 안에서 단 두 사람이 만나 계약서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확증을 받고 싶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은 아닐까요? 약속한 바를 틀림없이 이룰 것이라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공증(公證) 작업으로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한 밤중에 밖으로 끌려나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무슨 새로운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내용으로 볼 때 이전에 그가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브람의 몸에서 날 후사”에서(4절) “하늘의 수많은 별들만큼이나 많은 후손”으로(5절) 그 초점이 옮아가고 있다는 점이 새로울 뿐입니다. 현재 우주에는 수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수사적 과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약속은 엄밀한 의미에서 후에 정반대되는 ‘이스라엘’의 현실과 병행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그러니 숫자에 대한 열심보다 의로움이나 거룩함에 대한 열심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를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4. 결론: 믿음(6절)
이처럼 단호한 하나님의 공증 행위에 대해서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화자는 하나님과 ‘아브람’ 간의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대신에, 해설로 결론에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이 표현은 <신약>에서도 세 번씩이나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롬 4:3; 갈 3:6; 약 2:23.
불행하게도 애매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단지 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 안에 담긴 뜻이 참으로 풍성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이 되는 세 단어는 “믿다”, “여기다”, 그리고 “의”입니다.
우선 ‘아브람’의 믿음을 언급하고 있는 표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만,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문장 안에서 쓰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 “믿다”의 동사 형태가 “사역형”(힢필, causative)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Hamilton, 424쪽; Wenham, 329쪽). 그래서 동사의 형태에 따라 가장 충실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도출됩니다: “그(아브람)는 자신을 단호히 여겼다”; “그는 자신을 확고하다고 선언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브람’이 ‘야훼’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신뢰(또는 의지)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표현마저도 불가사의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그동안 한 번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새삼스럽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선언은 마치 이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된 것처럼 들리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부분은 또 있는데, ‘아브람’이 어떻게 이처럼 쉽게 순순히 믿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화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는 듯합니다.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교훈을 위한 목회적 권면을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아브람’은 자신이 현재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신뢰했다는 점 말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화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문장은 <개역> 성경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영어의 NIV 번역이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치 않게 보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의로 여긴 것인가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개역 성경);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NIV). 문제는 두 번째 문장의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으로서,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당연히 주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롬 4:3). 그러나 정상적인 ‘히브리’ 식 구문론을 따르면, 두 번째 문장의 주어는 특별히 명시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이상 첫 번째 문장의 주어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므로 ‘아브람’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의미는 다음처럼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가(아브람이) 이를(여호와의 약속을) 정의로운 것으로 여기고”(Hamilton, 425-427쪽).
이와 관련해서 ‘위어스비’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람’은 가장 긴요한 것을 얻게 되었는데, ‘의’(義)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모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며(롬 3:23),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그렇다면 ‘의’란 과연 무엇입니까?
<오경>에서 “의”(체데크; הקךצ)가 의미하는 바는 항상 인간의 행동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는 18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히브리’어로 아주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8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람’이 ‘소돔’의 운명을 놓고 의인과 악인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의인을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 점을 강조하면서 ‘소돔’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18:23, 25, 26). ‘아비멜렉’도 역시 ‘사라’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자 하나님이 의인을 어찌 죽이려 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을 봅니다(20:4). ‘노아’도 대홍수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던 것은 그가 그 시대에 의인으로서 완전한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6:9; 7:1). 적어도 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인’이란 재판관으로부터 무죄 방면 된 자를 말합니다(예: 신 25:1). 그렇다면 영적인 차원에서 의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은 자, 즉 구원을 입은 자를 뜻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시 1:6; 75:11; 등).
통상적으로 ‘의’는 윤리․도덕적인 행위와 결코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서>에서 한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겔 18:5). 그리고 의인이라면 마땅히 금해야 할 일련의 행동 강령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 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내 율례를 쫓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8:6-9)
구약에서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부르고 있기도 한데(예: 신 32:4; 시 7:9, 11), 그렇다면 “의”란 “하나님을 닮은 행동”, 또는 적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이런 의미로 “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18:19; 30:33; 38:26).
그렇다면 ‘아브람’이 얻었다는 “의”는 윤리․도덕적인 차원의 “의로운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화자는 ‘아브람’의 행동이 아니라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의인”이란 재판관으로부터 무죄 방면 된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그분의 계시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운 행동 대신에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의로운 행동을 취하게 합니다(예: 18-19장). 그러나 구약 전체적으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믿음을 의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브람’의 믿음과 의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참고, 롬4장, 갈 3장, 약 2장.
제 2막: 언약의 체결
1. 계시: 환상(7절)
제 2막의 첫 무대도 제 1막과 마찬가지로 환상 즉 ‘야훼’ 하나님의 음성으로 막이 열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7절)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것에 대한 시적 반복 내지 병행에 해당된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다만 두 계시 사이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첫 번째 것이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두 번째 계시는 하나님의 과거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나는...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는 선언은 일종의 예시화(foreshadowing)로서, ‘아브람’의 후손들이 겪게 될 출애굽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유사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야훼’(아도나이; the Lord)라고 밝히고 있는 곳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네 번뿐입니다. 화자가 두 선언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는 행위와, 이집트에서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불러내는 행위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갈대아 우르’(즉 바벨론)이든 ‘이집트’이든 ‘아브람’과 ‘이스라엘’이 살아서는 안 되는 곳으로서 마땅히 구출되어 나와야 하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다만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겼었던 형편과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갈대아’에서 ‘아브람’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 계시에서 달라진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의 문제에서 ‘땅’의 문제로 관심사가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 역시 언약의 중요한 한 요소로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습니다(12:7; 13:15, 17).
2. 반응: 요구(8절)
이 문제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아브람’의 질문을 통해서입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
이 질문은 매우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의심이나 불평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지, 또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믿음의 행위로 보아야 할지 분명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제 1막의 결론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다시 말하자면 ‘아브람’의 질문은 이 결론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의심과 불평이 담긴 항의성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아니면 두 이야기는 별개의 에피소드이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아브람’의 질문을 믿음의 행위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석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 H. Morris, 326쪽; (2) W. Wiersbe, 「순종하여라」. 생명의 말씀사. 서울 1995, 60쪽.
그러나 <아브라함 이야기>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모두 선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구성은 앞에서 보았듯이, 순환적이며 시적인 병행 반복을 이루고 있으므로, ‘아브람’의 질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아브람’의 질문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1) 주 여호와여(2절)
(2) 주 여호와여(8절).
따라서 이곳에서 ‘아브람’의 의도나 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화자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두 번째 질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언약의 두 번째 요소, 즉 “그 땅”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땅과 후손”이야말로 ‘아브람’ 언약의 두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후손에 관한 문제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공증을 받아냈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그 땅에 관한 문제로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면서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아브람’의 행위가 믿음의 결과인지 또는 의심과 불만의 표시인지에 관한 논쟁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 대한 관전 포인트는 아닌 듯합니다. 관심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아브람’의 요구에 구체적인 공증을 제시해 주실 것인가?”
3. 대답: 공증(9-17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실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다소 기이한 방식입니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명령이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9절)
세 종류의 짐승(각 삼년씩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두 종류 새(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모두 희생제사에 쓰이는 것들입니다. ‘아브람’은 새를 제외한 나머지 큰 짐승들은 잡아 죽인 다음 그 몸을 둘로 쪼개고 두 쪽을 땅에다 서로 마주보게 놓았습니다: 이 독특한 의식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령하신 말씀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문체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명령과 그 성취에 대한 언급을 기술할 경우 긴 명령이 있고 그 성취에 대해서 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반대로 간단한 명령이 있고(9절), 그 성취에 대한 언급이 다소 길게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10절).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10절)
하나님께서 이 독특한 의식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이 구절에서 일종의 문체의 변화를 봅니다. 즉 통상 하나님의 명령과 그 성취에 대한 언급을 기술할 경우 긴 명령이 있고 그 성취에 대해서 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반대로 간단한 명령이 있고(9절), 그 성취에 대한 언급이 다소 길게 따르고 있습니다(10절).
‘아브람’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로 볼 수 있습니다만(레 1:6, 17), 통상적인 제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번제는 잡아 죽인 짐승을 제단 위에 놓고 태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희생 제사로만 볼 수 없는 이런 의식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단락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이날 ‘아브람’이 겪은 신비한 체험과 환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놓고 있으며 불필요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현대 독자들에게는 모두 수수께끼 같은 내용들로서 그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1-17절)
장면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살펴봅시다: “솔개가 죽은 동물들을 먹으려고 내려왔습니다. ‘아브람’이 새들을 쫓아 버렸습니다”(11절). 이 장면이 지닌 상징은 무엇일까요? 왜 ‘아브람’은 솔개들을 쫓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고 있으며, 만일 솔개들이 죽은 동물들을 먹어 치워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많은 주석가들이 해석적 알레고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식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솔개는 구약에서는 정결하지 못한 짐승으로서(레 11:13-19; 신 14:12-18), <예언서>에서는 이방 세력(아마도 이집트)을 상징하고 있기도 합니다(겔 17:3, 7; 슥 5:9). 그리고 만일 이들 시체들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면(희생제사이든 예식의 한 징표이든), 지금 ‘아브람’이 보이고 있는 행동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솔개라는 이방 세력을 쫓아내고 있는 보호자로서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14장의 이야기와도 병행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12절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 하니.” 앞에서 제기한 바처럼, 이런 배경 설명이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 냄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시간에 대한 언급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1-6절) 배경은 별들이 촘촘히 빛나는 한 밤중이었습니다만(5절), 이곳에서 시계는 다시 해질 때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름대로 가능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자료 비평적 설명을 들 수 있을 것인데, 즉 두 에피소드가(1-6절; 7-21절) 서로 다른 자료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설명도 가능합니다. 즉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참고, 문학과 역사), ‘히브리’ 식 이야기 특유의 시적 병행으로 이루어져 있어 두 에피소드를 다른 자료로 취급하기에는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두 이야기는 동일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니만치 시간에 관한 다른 언급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함이 마땅하는 설명입니다. 또는 두 이야기가 그냥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다고 가정해도, 6절과 7절 사이에 하루라는 시간 간격을 두면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 구절을 통해서(또는 11절과 함께) 느껴지는 무대 분위기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이루어질 언약 예식을 앞두고, 무대 전체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음산함과 두려움 입니다: “사체 위를 맴도는 솔개”; “이를 쫓는 아브람”; “캄캄함”; “깊이 잠든 아브람”; “심히 두려움을 느끼는 아브람”(11-12절). 일견 주변적인 것들로 보이는 이런 무대 장치들은 실은 이어지는 내용, 즉 ‘아브람’과 ‘이스라엘’의 앞날에 관한 예언(13-16절)에 대한 문학적 배경 내지는 서론적 가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11-12절에 대한 해석적 알레고리도 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설명해 봅시다.
우리는 이곳에서 ‘Wenham’의 해석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Wenham, 335쪽.
“깊은 잠”이나 “두려움” 또는 “캄캄함” 등과 같은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활동을 연상시켜주며(창 2:21; 사 29:10; 출 10:21, 22; 14:20; 15:16; 23:27; 신 4:11; 수 2:9),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과 같은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다름 아닌 이들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되는 셈입니다(13-16절). ‘아브람’이 “깊이 잠든 후” 즉 그가 죽은 후에, “연기 나는 풀무와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듯이” ‘야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과 광야와 그리고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서 계시고, 행하시면서, 보호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언약의 예식은 이 신비한 장면을 끝으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증거를 요구한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가시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브람’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의 모델이요 표상이었다면,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언약의 당사자로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는 정복자요 왕이며, 예언자이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4. 결론: 체결(18-21절)
앞에서 미해결로 남겨두었던 문제, “이 특별한 예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왜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갔는가?”에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그 대답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18절)
‘팔머 로벗슨’에 따르면, 이 장면은 계약 수립 의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그 모든 약속들이 ‘아브람’의 동의나 협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을 갖기는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아브람’의 요구에 부응하여 공식적인 ‘계약 수립’의 예식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의식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언약을 “자르다”(cut)입니다. 동물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계약의 당사자들은 삶과 죽음의 서약을 한 것입니다. 이 일로 자기 저주의 맹세를 세운 셈입니다. 즉 만일 계약에 있는 약속을 어기게 되면, 동물이 쪼개진 것처럼 계약 당사자의 몸도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자기 저주의 서약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 외의 고대 근동 문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전 18세기와 17세기에 속하는 한 시리아 문서는 ‘아바-안’(Abba-An)이 ‘야림림’(Yarimlim)에게 도시를 기증할 때에의 협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바-안’은 맹세(서약)함으로써 ‘야림림’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의 목을 잘랐습니다. 주전 18세기에 속하는 또 다른 ‘마리’(Mari) 문서는 계약의 끝에 나귀를 죽이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죽인다”는 말까지도 계약 수립의 전문 용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계약 수립 과정에서 죽기까지 서약함으로써 피의 약정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약의 쌍방은 계약 관계에서 삶과 죽음으로써 약속을 합니다. ‘아브람’ 계약의 경우, 창조주 하나님은 엄숙한 맹세로써 인간과 자신을 결속시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아브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으로 ‘아브람’의 의심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엄숙히 약속하셨고, 약속을 자기 저주의 맹세로써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저주의 약속은 후에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특별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유다’ 왕국이 포로로 들어가기 전에 이와 꼭 같은 계약 수립의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1400년이 흘렀는데도 ‘아브람’이 목격한 것과 같은 예식이 <예레미야서>에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렘 34장).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손에 들어갔습니다(1, 6, 7절). 잃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드기야’ 왕은 계약 갱신을 위해서 모든 백성을 불러 모읍니다(8, 9절). 백성들은 이스라엘 노예 해방에 관한 ‘모세’의 언약을 기초로 이 부름에 응답하고 있습니다(10절). 그러나 백성의 편에서 노예 해방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종들은 해방되자 곧 다시 그들 주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11절). 이 때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들에게 그들이 얕보던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섭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개진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라(렘 34:17-20).
계약의 저주에 관한 이런 인식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아브람’ 계약의 형태나 원리가 계속해서 생명력을 지닌 채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계약을 파괴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예들은 무수합니다. 예언자 ‘아비야’가 ‘여로보암’의 집에 내리는 저주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에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왕상 14:11). 똑같은 저주가 ‘바아사’의 집에도 있게 됩니다: “바아사에게 속한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16:4). ‘아합’의 집도 계약적인 저주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이 저주는 특히 왕비 ‘이세벨’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왕하 9:10). 후에 시편 기자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탄식하며 이 계약의 저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장사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 79:2, 3).
우리는 이 모든 저주에서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은 공중의 새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거의 동일한 표현의 저주를 예언적으로 계속해서 인용하고 있는 것은, 전 국민에게 계약적인 의식이 살아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이 최후의 심판은 그 기원을 찾아 올라가자면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맺은 “율법”의 언약에서 찾을 수 있으며, ‘모세’의 언약은 다시 본문에서 보는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람’ 계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 자기 저주에 관한 말은 ‘예레미야’ 예언이나 이스라엘 멸망에 관한 예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흥미 있는 것은 <신약>이 “새 언약”을 언급함으로써 <구약>의 언약(옛 언약)이 요구하는 저주로부터 구원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히 9:15-20; 마 26:28; 눅 22:20). ‘팔머 로벗슨’, 141-150쪽.
간단히 결론만 요약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즉 옛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는 계약에서 요구하고 있는 그 모든 결과를 자신이 담당함으로써 계약 당사자들을 저주로부터 구원한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로부터의 사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저주의 희생제물로서 그의 몸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바로 이런 점에서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의 주민들은 그 목록에 있어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긴 것입니다. 대개는 여섯 내지 일곱 족속을 거명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열 족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부분이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 이유로서 이 목록에는 이스라엘과 거의 동시대에 그 지역에 살았던 ‘블레셋’이나 ‘모압’ 족이 빠진 대신에, 이이들보다 이후 시대에 이스라엘에 합병된 ‘겐’이나 ‘그니스’ 족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적용
언약: 약속과 체결
‘폴 트루니에’는 두려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그 큰 신체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본인이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나의 존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네들끼리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금방 조용해집니다. 내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긴장하고 다소 겁에 질려 있는 듯합니다. 무슨 야단을 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늘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 조심스러운 모습들입니다.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이러할진대,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불호령이라도 내릴까봐 그저 안절부절 입니다. 실험실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당연히 보고하지 않습니다. 실험을 하다가 깨뜨린 수없이 많은 실험 기구들은 서랍이나 은밀한 곳에 그냥 숨겨두고 떠납니다.
나는 한 때 가까운 친척의 재정 보증을 섰다가 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보증 금액이 수억 원이라 당시 은행에 예금해 두었던 돈으로는 도저히 다 갚을 수가 없어, 월급에서 매 달 절반씩 갚아주어야 했으며, 이것도 모자라 법무부로부터 집을 경매처분 할 것이라는 공문서까지 받아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겪었던 낭패감과 절망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정부 기관의 직인이 찍힌 공문서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계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도 이럴까요? 불시에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공손히 머리 숙여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집을 처분하겠다는 법원의 통지서를 받을 때처럼 덜컹 겁부터 날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만남은 위기와 긴장의 순간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멋모르고 덤비던 철부지 때였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절실히 찾고 있을 때이든, 또는 먼저 그분이 찾아오시든, 하나님과의 조우는 그 자체로서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말할 것도 없고,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모두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아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내 자신의 뜻대로 살아오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끌려 다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 이들 선지자 앞에 나타나실 때, 항상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신탁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충격 완화용 경구인 셈입니다. ‘아브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1절).
<아브라함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달라진 ‘아브람’의 위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족장이 아니라, 위대한 예언자나 선지자로 격상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방패와 상급이 된다는 약속은 최근에 거둔 군사적 승리를 기억한다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반응: 그러나 ‘아브람’의 대응은 이에 걸맞지 않습니다. 실로 오래 만에 등장하는 대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불쌍하고도 처량한 모습니다(2-3절). 독자들은 처음으로 그의 속내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거둔 군사적 승리와 사회적 성공에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후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비극이자 실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가 끊기고, 가계의 유업을 이을 자도 없고, 노년에 기댈 곳도 없으며,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으니 편안히 잠들 수도 없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는데 있습니다(12:2, 7; 13:16). 여기에 주인공의 불만과 걱정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무엇인가 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혼자의 힘으로 해결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전부터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굳힌 듯합니다. 다름 아닌 ‘엘르아살’같은 하인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인데, 이는 당시 관습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의 태도가 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증: 그의 단호함에 놀랐음일까요? 하나님은 이전의 약속을 두 번에 걸쳐 재확인해 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증까지 해주고 있습니다(4-5절). 그를 이끌고 집밖으로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급한 쪽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보입니다. 무대 아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관객들이 증인이 되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며, 하나님도 이점을 노린 듯합니다. 이런 공증 행위를 통해서 약속이 더 이상 사적이고 그래서 구속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명예는 만천하에 크게 실추될 것입니다.
믿음: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화자는 ‘그가 야훼를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믿음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구약>에서 언약의 당사자들은 한 결 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대 하필 이곳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편에서 볼 때, 어차피 실현될 것 같지도 않은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 그렇게 하지 않는 편에 비해 크게 손해 볼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후손들에게 일종의 역할 모델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 말입니다. 그 믿음이 결국 우리를 ‘의롭게’해 줍니다. ‘의’란 심판의 날에 무죄 방면 즉 구원을 보장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율법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 믿음이 진실 된 것이라면 당연히 의로운 행동을 드러내야 하지만, 화자가 강조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의’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이 채택하고 있는 관점도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처럼, ‘아브람’의 믿음은 후사에 관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며 이는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롬 3:19-4장). 적어도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람’의 후손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바울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람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그런데 <구약>은 믿음이란 약속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령에 순종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도 이점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의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23)
믿음에 관한 이런 일견 모순 된 선언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루터’(M. Luther) 역시 우리의 같은 기분이었던 같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롬 4) 야고보에게로 오면 앞에서 들었던 바울의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버리게 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가 <야고보서>에 대해서 얼마나 반감을 가졌던지 이 책을 성경에서 빼야한다고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의 입장을 곰곰이 분석해 보면 꼭 같은 질문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믿음과 행동에 대해서 <야고보서>의 관심사는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즉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행위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지 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20-24). 믿음과 행위가 서로 어떻게 진정으로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단어를 다섯 절의 한 가운데에서교차대구의 형식으로 배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21절)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도, 그의 믿음이 그 행위로 정당한 것임을 입증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구절은 의로움을 받게 되는 조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을 받은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 그는 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로 철저하게 순종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 사도는 각기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인물을 ‘아브라함과’ 함께 나란히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윗’을 예로 들어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와 상관없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야고보’는 창부 ‘라합’을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일개 창부가 ‘이스라엘’의 족장과 나란히 설 수 있다는 말인가! ‘라합’이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그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마치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한 면만으로는 전체를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마치 입자와 파동의 양면성을 지닌 빛처럼 말입니다. 진리를 과대하게 적용하면 율법주의가 되고, 지나치게 축소하면 신앙주의가 됩니다.
계시: 끝난 것 같은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7절). 왜 이런 반복이 필요한 것일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를 의로 여겼다고 해 놓고서는 말입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분명 반복 병행에 해당됩니다만, 단순한 반복 이상의 선적인 구성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내용 상 새로운 내용도 등장하면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 계시는 첫 번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과거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이방인 땅 ‘우르’로부터 구출해 낸 행동이 그것입니다. 역사 강의를 하시고 싶은 것입니까? 이 시점에 왜 역사 강의가 필요한 것입니까?
민족이든 개인이든 역사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 지는 세계사를 통해서 배우는 바입니다. 한 때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추종 세력은 해방 이후 최근까지의 대한민국의 역사가 불의와 거짓과 기회주의가 득세한 불행한 역사였다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소위 개혁과 진보의 이름으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온 나라에 혼란을 가중시킨 바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독한 열등감의 발로이든지, 오만과 편견과 무지의 소치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엄청난 힘과 노력을 들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자랑스러운 이스라엘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일학교에서 이 역사를 자손 대대로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는 것이 율법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왜 이런 고리타분한 과거 역사가 필요한 것일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표로 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있는가? 과거를 보라.” 지금 여기서도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아브람’의 과거를 회상시켜줌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미래란 <출애굽>의 대 사건으로서, 그의 후손 이스라엘이 400년 후에 이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는 예시입니다.
반응: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는 ‘아브람’의 질문이 이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8절). 다시 한 번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아브람’입니다. 이 요구가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믿음에서 나온 반응이든 그에 필요한 것은 반복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후손에 관한 문제로 하나님의 공증을 받아내었으니, 그 땅에 관한 문제로 또 다시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면서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이런 행위가 의심에서 비롯되었든,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든 이에 관한 논쟁은 관전 포인트는 아닌 듯합니다.
공증: 관심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아브람’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주 기이한 방식을 통해서입니다(9-10절). 이것은 영락없이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제사는 오경 전체에서 이곳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짐승들을 그냥 도살하여 제단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새를 제외하고는 모두 둘로 쪼개어 나란히 정렬시키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다음이 더욱 수수께끼입니다(13-16절).
짐승의 피 냄새를 맡고 여기저기서 몰려든 독수리들을 쫓느라(11절) 밤이 되기도 전에 피곤에 지쳐 잠시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을 하십니다. 그것도 무려 400년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입니다. 당장 가시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400년 이후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상한 의식은 그만두고서라도, 이 예언이 지금 당장 ‘아브람’이 보기를 원하는 가시적인 증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이 아닐까요? 어느 누가 자신이 한 약속을 400년 동안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끝내 지킬 것인가!
이제 남은 대답은, 이 예언과 이상한 의식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상징적인 방식으로 먼 훗날 이스라엘이 거쳐 갈 역사적 체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약을 체결하는 한 방식으로, 짐승의 시체를 갈라 양쪽으로 늘어놓았을 때 솔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시체를 낚아채어 언약을 무위로 돌려버리려 하자, ‘아브람’이 이를 저지시키려고 솔개를 내쫓고 있는 장면을 목도합니다. 시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솔개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방 세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은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 일은 ‘아브람’이 깊이 잠든 후, 즉 그가 죽은 후, ‘연기 나는 풀무’요 ‘타는 횃불’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쪼갠 시체’ 사이로 지나가시듯 이스라엘 가운데서 임재하시면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일은 400년 이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지금 이 땅으로 되돌아 올 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쪼개진 시체 사이를 지나면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문자적으로는 언약을 쪼갬). 쪼개진 시체 사이로 지나심으로써, 스스로를 언약의 저주에 구속시켰으며, 이로써 ‘아브람’의 요구에 대한 증거를 마련하셨고, 이야기는 절정에 도달합니다.
화자는 <창세기> 15장을 통해서 ‘아브람’을 이스라엘의 믿음의 전형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땅을 정복하고 적들을 물리치는 왕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 이야기>와 <다윗 이야기>(삼하 7장)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많은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브람’을 선지자의 반열에 놓고 있기도 합니다(1, 13-16절). 마지막으로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짐승들을 준비하고, 제단을 쌓는 등의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를 제사장의 반열에도 놓고 있기도 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런 지위에 버금가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선지자이자 제사장이며 또한 왕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조상 ‘아브람’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뒤따르고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델이자 전형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마치 두 개의 다른 이야기가 나란히 연결된 것이라는 자료비평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본문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분수령 내지는 전환점을 이루는 곳이라고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토의해 봅시다.
3. 언약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토의 내용 중에 다음 사항들을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합시다: (1) 정의(팔머 로벗슨); (2) 언약의 형식; (3) 언약의 내용; (4) 언약의 축복과 저주.
4. 앞에서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본문이 언약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바를 토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