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4과
자녀 출생
김태정 목사창세기 29:31-30:24약 55분 분량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29:31)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의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30:24)
‘이스라엘’의 열두 족장이 태어나는 배경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경쟁과 투기의 산물입니다. 여섯 개의 <야곱-라반 이야기>의 에피소드 중에서 본문은 세 번째에 해당하며, <야곱 이야기>의 전체 동심원적 구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만큼 화자는 이 세 번째 에피소드를 전체 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는 듯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묵상해 볼 일입니다.
수사적 특징으로 <창세기> 전반에 걸쳐 친숙한 모티브들이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등장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간의 갈등과 경쟁”이나 “대리모를 통한 자녀의 출산” 등이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경쟁은 “합환채 사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이야기의 역설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가 그것입니다. 화자의 설명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독백을 통해서도 이점이 명시적으로든 또는 암시적으로든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족장 이야기>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봅시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 이야기는 <야곱-라반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로서, 동심원적 구조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 순환> 전체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화자도 본문 이야기를 <야곱 순환>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열두 명의 아들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자녀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첫 아들 ‘르우벤’의 출생에서 시작하여 ‘요셉’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30:24). ‘요셉’의 출생은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30:25).
이처럼 많은 자식들이 탄생하게 되는 원인(遠因)이야 말할 것도 없이 ‘라반’의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과 분쟁이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레아’에게는 자식은 있으나 남편의 사랑이 없고, 반대로 ‘라헬’에게는 남편의 사랑은 있으나 자식이 없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자신에게는 없고 상대방에게는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러한 두 자매의 탐욕이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라헬’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남편과 언쟁을 벌이고 있는가 하면(30:1-2), ‘레아’는 남편과의 하루 밤 잠자리를 위하여 ‘라헬’과 “합환채”를 놓고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30:14-16). “합환채”(‘히브리’어: י, 두다이; 영어: mandrake)는 상치와 같이 낮에 자라고 그 잎사귀는 색깔이 검푸른 것 외에는 상치와 아주 닮았고 꽃은 자주 빛이며 뿌리는 대부분 두 갈래로 되었고 열매는 5월 초순에 익으며 크기는 작은 사과만하고 매우 향기가 좋다고 합니다. 이것을 맥추 때에 ‘르우벤’이 그 어머니 ‘레아’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 꽃은 성적 욕구를 돋우는 일종의 강장제로 알려진 듯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오며, 1회를 제외하고 모두 “합환채”를 가리킵니다.
가족 간의 이런 갈등은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이름에도 고스란히 반영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29:32-35; 30:6, 8, 11, 13, 18, 20, 23-24).
본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서 손색이 없지만, <야곱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을 드러내고 있어 불가분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라헬’이 ‘레아’를 제치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은 <창세기> 내에서는 “형과 동생의 갈등”과 관련한 익숙한 모티브입니다. 가깝게는 ‘야곱’과 ‘에서’의 갈등에서부터 멀게는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요셉과 그의 형제”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라헬’이 남편을 향해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야곱’이 삼촌 ‘라반’을 향해서 “내 아내를 내놓으시오”라고 요구하는 장면(29:21)이나, 또는 ‘에서’가 아버지를 향하여 “나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소서”하며 울부짖는 장면(27:36-38)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익숙한 모티브는 또 있습니다. 즉 자식이 없는 ‘라헬’이 자신의 하녀 ‘빌하’를 통해서 출산을 도모하는 모습은 마치 이전에 ‘사라’가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가지려 했던 것과 흡사합니다(30:3; 16:2). ‘레아’는 어떻습니까? “합환채”를 동생 ‘라헬’에게 주고 그 대가로 남편을 사는 행위는(30:16-18) 그녀의 아버지 ‘라반’이 ‘야곱’에게 노동의 대가로 딸을 주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29:15; 30:32-33; 31:7-8, 41). 마지막으로 ‘라헬’이 몸종 ‘빌하’를 통해서 ‘납달리’를 낳은 후,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외치고 있는 모습은 훗날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32:29).
본문의 단락을 구분하는 방식은 학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자녀 출산과 관련해서 구분하자면 아래 각 단락은 네 명의 자식들의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29:31-35레아
30:1-13레아와 라헬
30:14-24합환채와 레아와 라헬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바처럼 장면에 따른 단락 구분이 더 적절해 보이는데, 전체 에피소드는 크게는 둘로, 작게는 여섯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표에서 보듯이 첫 세 장면은 동일한 표현, “ooo가 보니”로 시작하고 있는가 하면(29:31; 30:1, 9), 마지막 두 장면은 “하나님이 ooo을(를) 생각하신지라”(30:17, 22)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한 번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두 경우 모두 ‘라헬’이 자신의 불임(不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도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30:1-3; 14-15). 또한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느슨하긴 하지만 일종의 교차대구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아래 두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29:31)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그 태를 여신고로(30:22)
사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주요 갈등의 원인이 해소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자식은 있으나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던 ‘레아’가 “합환채”의 대가로 남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는가 하면(30:16-21), 남편의 사랑은 있으나 자식이 없어 애태우던 ‘라헬’은 ‘요셉’을 낳게 됩니다(30:22-24). ‘라헬’은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잊고 싶기라도 한 듯, 자식을 한 명 더 갖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고 있습니다(30:24). 이야기는 이처럼 잘 짜인 구성을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나 애환을 통찰력을 가지고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한 편의 이야기로 취급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자료와 편집. 그러나 전통적인 자료비평 입장은 사뭇 다릅니다. 당연히 여러 자료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지요. 학자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주된 자료는 물론 <야훼전승>과 <엘로힘 전승>입니다. 본문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하여 분리해 보자면, 처음과 세 번째 장면을 <야훼전승>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고(29:31-35; 30:9-16), 두 번째와 다섯 번째 장면을 <엘로힘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30:1-8, 17-24). 하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여종”에 대해서도 각 전승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엘로힘 전승>에서는 “האָ”(아마)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30:3), <야훼 본문>에서는 “ה”(쉬프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30:4, 7, 9, 10, 12, 18). 상이한 자료들이 섞여 있다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흔히 어떤 인명이나 지명의 기원을 밝힐 때 약간은 다른 설명으로 반복해서 소개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야곱’의 몇몇 자식들의 이름에 대한 기원(起源)을 밝힐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29:32, 33; 30:6, 18, 20, 23-24). ‘야곱’의 일부 자식들의 이름에 대해서 각기 상이한 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라반’: 괴로움을 돌보심;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30:32). (2) ‘시므온’: 하나님께서 들으심; 사랑받지 못함(29:33). (3) ‘단’: 억울함을 푸심; 호소를 들으심(30:6).
그러나 이런 문학적 상수들의 차이만으로 상이한 자료들을 구분하는 데에는 늘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가령 30:9-16 전체를 순수한 <야훼전승>으로 볼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30:1-8, 17-24 전부를 순수한 <엘로힘 전승>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Wenham). 따라서 <엘로힘 자료> 내에서 <야훼 자료>가 있을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30:1-8의 일부 구절은 아래에서 보듯이 <야훼 자료>에서 볼 수 있는 다른 표현들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이 <야훼 자료>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30:1상)(엘로힘 자료)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29:31)(야훼 자료)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30:9)(야훼 자료)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30:3)(엘로힘 자료)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16:2)(야훼 자료)
30:7의 경우에서도 “시녀”(ה, 쉬프하)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야훼 자료>의 확장(擴張)으로 볼 수 있습니다(Gunkel). 마찬가지 논리로 <야훼 자료>에 속한다는 본문에서도(30:9-16) <엘로힘 자료>나(9절하) 더 나아가 <사제 자료>들을(13절하)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두 자료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 질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두 자료간의 차이는 인위적인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Wenham).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하듯, ‘웨스터만’(Westermann)은 본문의 주된 성분이 두 자료가 아닌 <야훼 자료>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대에 일부 편집적인 삽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이야기의 원 골격과 후대 삽입을 구분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골격: 29:31-32; 30:1-6, 14-18, 22-24; (2) 편집적 삽입: 29:33-35; 30:7-13, 19-21. 후대의 편집자는 추가로 다른 구절들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29:32; 30:6, 17-18, 22-24(Wenham). 이처럼 ‘웨스터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의 이야기로서 본문의 총체성이나 일관성은 더욱 뚜렷해진다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본문의 단락 구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본문을 두 개의 단락과 각 단락을 세 개의 장면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운문(韻文) 형식에 따른 것으로서, 자료 비평적 접근 방식은 이런 형식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거의 불가능하게 합니다. 예컨대, ‘야곱’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들의 이름과 그 이름에 대한 기원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의 구성과 수사적 특징을 쉽게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각 아들의 이름은 이들을 낳은 두 어미가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과 두 자매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 화자는 <창세기>에서 아주 친숙한 “형과 동생”과 관련한 모티브를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성을 통해서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일관성과 총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각 아들의 이름은 이런 점에서 본문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요셉’의 이름에 대한 설명은 ‘벤자민’의 출생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다만 ‘디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는데, 그는 홍일점으로서 이름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본문의 흐름에 특별히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디나’의 등장은 34장을 준비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장치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나’의 탄생과 관련한 언급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간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창세기> 내에서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나홀’의 여덟 명의 아들을 열거하면서 유일하게 ‘리브가’를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22:23), 이 또한 24장의 <이삭 이야기>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참고로 24장과 22:20-24 두 본문은 같은 <야훼 자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레아’가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30:13) 하며 외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문 중에서 ‘디나’를 그 중의 한 명으로 언급하는 것도 시의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이런저런 이유들로해서 본문 역시 <창세기>의 주된 자료인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 원 출처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레아와 네 아들(29:31-35)
첫 번째 장면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레아’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화자의 서술이나 ‘레아’ 자신의 독백을 통해서 그녀의 현재 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현재 겪고 있는 고독감이나 상실감은 그가 낳은 네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서 절절이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이들 모두 남편의 사랑과 위로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하다는 원망과 분노가 베어 나오는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무심한 남편과는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31절)
하나님은 이 딱한 여인을 지켜보셨고 또한 행동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누군가를 지켜보신다는 것은 행동하기 위함입니다. 그 대상도 주로 약하고 억압받는 자들입니다(참고. 6:5; 7:1; 18:21; 31:12; 출 2:25; 4:31). 그분께서 취한 행동은 ‘레아’의 태를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바로 직전의 표현과는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29:30). 즉 “사랑받지 못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미움을 받다”는 뜻으로서,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으나, 하나님은 ‘라헬’을 제쳐두고 ‘레아’의 형편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자식을 갖는 것은 <구약>의 전통에서 볼 때 축복이자, 동시에 힘과 권력을 얻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레아’는 하나님의 위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더욱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얻게 된 것은 ‘라헬’의 투기와 질투가 전부였습니다. 이전에 ‘사라’나 ‘리브가’가 그랬던 것처럼(11:30; 25:21), ‘라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야곱’의 첫 자식을 낳고서도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남편의 관심을 더 그리워하고 있는 ‘레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32절)
‘르우벤’은 음성학 적으로 “로, 벤”(ן א) 즉 “보라, 아들이라”에 가깝습니다만, 이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 보기에는 미흡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름의 기원이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레아’의 비참한 처지 또한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יינ,베니) 돌보셨다(האָ, 라하).” 이 표현은 <구약>에서 지명이나 인명의 기원을 밝힐 때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언어의 유희로서, ‘르우벤’에 포함되어 있는 두 자음(l 과 b)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하갈’ 역시 아들을 낳고 이같이 토로(吐露)한 적이 있으며(16:11), 앞으로 ‘야곱’이나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일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31:42; 출 3:7; 4:31). ‘르우벤’을 위시해서 <요셉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인 ‘시므온’, ‘유다’, 그리고 ‘요셉’의 이름은 모두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의 이름에 대한 기원과 관련해서, 다소 느슨하긴 하지만 일종의 시적 반복을 통해서 또 다른 설명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ינ, 야훼벤).” 이 문장 역시 ‘르우벤’에 포함된 세 자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문장은 직전의 에피소드에서 사용한 바 있는 핵심어 “사랑”(18, 20, 30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레아’는 ‘르우벤’의 탄생으로 이런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에 대해서도 ‘르우벤’의 경우처럼 두 번에 걸쳐 이름의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33절)
첫 번째 설명은 다분히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야훼’께서 하신 일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소 느슨하지만 이번에도 시적 반복을 고려한 듯 표현으로서, 자신과 남편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함으로...” ‘셈’ 계열의 언어에서 “온”(on)으로 끝나는 단어는 대개 추상명사이거나, 형용사이거나 또는 접미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므온’의 경우 “듣다”(ע, 샤마)에서 유래한 접미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또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온”이 일부 고대 근동 문헌에서 신(神)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므로, ‘시므온’은 “온 신이 들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이곳에서는 ‘레아’가 말하고 있는 바대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첫 번째 설명은 앞에서처럼 ‘하갈’의 경우를 연상시키고 있지만, 두 번째 설명은 ‘레아’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다시 한 번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미움을 받다”(אנ, 사네)는 뜻으로서(29:31), 이곳에서도 ‘시므온’(ןוֹע)의 이름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언어의 유희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 단어는 두 자음(s, n)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도 ‘레아’의 염원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34절)
‘레위’가 의미하는 바가 “연합하다” 또는 “결합하다”는 뜻이라고 하니, 세 아들을 낳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편의 사랑을 간구하고 있는 ‘레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야곱’ 역시 한결같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잠자리는 같이 하면서도 결코 사랑은 주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레아’의 고통스러운 염원은 네 번째 아들을 낳은 이후 비로소 잠잠해 집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35절)
‘유다’가 의미하는 바는 “찬송하다” 또는 “여호와께서 찬송을 받으시리로다”일 것입니다. 첫 아들의 경우처럼 ‘유다’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담은 이름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남편과의 관계 개선을 염원하는 어떠한 희망도 피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제는 포기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극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얻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주셨으니 분명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종종 그러하듯이, “내 고통이 변하여 찬양이 되었도다” 하며 아들의 이름도 그에 상응하도록 지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후 그의 출산은 멈추었습니다. 왜입니까? 화자는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 남편과의 관계가 한동안 소원해 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레아’가 그것을 원했는지 아니면 ‘야곱’인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이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사랑 없는 육체적 관계가 무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레아’가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화자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지라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라헬의 반응(30:1-8)
두 번째 장면은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표현으로 그 막을 열고 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1절상). 하나님께서 ‘레아’가 자식을 낳지 못함을 보았을 때의 반응은 자비와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라헬’의 반응은 질시와 투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언니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대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종을 ‘야곱’에게 주어 대신 아이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1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1하-2절)
‘야곱’과 ‘라헬’의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29:1-20). 그런데 이후 이들의 결혼 생활에 관해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이 장면이 처음이자 유일한 곳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삿대질 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갖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은 <구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삼상 1:6-8, 15-16; 잠 30:16), 지금의 ‘라헬’처럼 악의적으로 남편에게 대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아니면 내가 죽으리라.” ‘사라’나 ‘리브가’도 오래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이렇지는 않았습니다(16:2; 25:21). 아이를 낳지 못한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라헬’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남편을 비난하는 태도 또한 경건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아이는 인간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시 113:9). 따라서 ‘라헬’은 분노나 원망이 아니라 기도로 기다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화를 내며 대꾸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이런 수사적 질문은 후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이 백성들로부터 불가능한 일을 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왕하 5:7).
그러나 ‘라헬’은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행동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대리모(代理母)를 통한 권리 행사가 그것입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3절)
‘라헬’은 지금 ‘사라’가 이전에 취했던 그 방식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당시 법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긴 했지만, ‘사라’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불임(不姙)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 <창세기> 화자가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6:1-6에 대한 해석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까?
‘야곱’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라헬’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전례가 있으니까, 또는 관습이 그러니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라헬’의 처지를 동정해서 그랬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의 말에 순종하여”(16:2) 그렇게 했던 것에 비해, ‘야곱’의 결정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아무런 평가나 해설이 없이 그냥 ‘빌하’에게로 “들어갔다”고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하’는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었습니다:
4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4-5절)
‘사라’와는 달리(16:5-6; 21:9-13), 새로 타어난 아들을 보고 ‘라헬’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6절)
그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 자는 생모인 ‘빌하’가 아니라 ‘라헬’입니다. 아들의 이름 ‘단’(ן)은 “심판하다” 또는 “변호하다”(vindicate)를 뜻하는 단어 ‘딘’(ןי)에 대한 word play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다니엘’의 준말일 수도 있습니다(Wenham). ‘다니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엘)이 심판하셨다” 또는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단’이 태어난 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 중에는 그녀의 기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지만, 아들을 갖기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에 반드시 동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이, 아들을 가지기 위해서 취했던 방법 때문일 것입니다.
‘단’의 이름에 대한 두 번째 설명, 즉 “(내게 아들을) 주셨다(ן, 나탄)”에서도 ‘단’의 이름에 대한 언어의 유희가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라헬’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진정으로 ‘단’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태도는 동일한 방법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보여주었던 ‘사라’의 태도와는 지극히 대조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16:1-7).
‘빌하’는 ‘라헬’에게 두 번째 아들 ‘납달리’를 낳아줍니다:
7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7-8절)
8절에 따르면 ‘납달리’는 “크게 경쟁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다양한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석 상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해석 상 어려움이 많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크게 경쟁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부분은 יתּ םיל יתּ (naptûlê ’ĕlōhîm niptaltî)로서, 전체적으로 이 문장은 “씨름” 또는 “싸움”을 뜻하는 ‘나프툴림’(יתּ)의 복수형과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םיל), 그리고 “씨름하다” 또는 “비틀다”를 뜻하는 ‘파탈’(ל)의 “니팔완료”가 합쳐진 것입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하나님의 싸움으로 (내가 내 형과) 싸웠다(혹은 씨름 하였다)”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싸움”(naptûlê ’ĕlōhîm)을 “큰 싸움” 또는 “강력한 싸움”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씨름으로 내가 내 형과 씨름 하였다”(NSRB, RSV); “내가 내 형과 큰 싸움을 하였다”(NIV); “큰 씨름으로 내가 내 형과 씨름 하였다”(KJV). 모두 “하나님”을 “큰”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표현은 훗날 ‘브니엘’에서의 ‘야곱’의 경험을 예고해 주는 주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습니다(32:28). 우리는 그가 이곳에서 형을 만나기 전날 밤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8절에 따르면 ‘라헬’은 언니 ‘레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싸워 이기는 것을 봅니다. ‘라헬’은 ‘야곱’과 마찬가지로 형을 밀어낸 동생으로서 형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자입니다.
3. 레아의 반응(9-13절)
질투는 질투를 낳고, 경쟁은 또 다른 경쟁을 낳습니다. ‘라헬’의 득의만만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라헬’이 하는 일이라면 ‘레아’는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자신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녀 ‘실바’를 통해서 두 명을 더 낳습니다. 이 세 번째 장면 역시 앞선 두 장면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을 멈춤을) 보고...(9절)
그녀가 한 일은 하녀 ‘실바’를 통해서 두 아들을 더 낳는 것이었습니다:
11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레아의 하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서 낳으매 13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11-13)
그러나 이번에는 앞의 경우와는 달리, 새로 태어난 두 아들의 이름에 대해서 비교적 짧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들 이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거나, 또는 남편의 사랑을 염원하는 등과 같은 암시는 없습니다. ‘갓’이 의미하는 바는 ‘레아’가 지칭하고 있듯이 “행운”입니다. 동시에 신(神)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예컨대, ‘아시리아’에서는 ‘가딜루’라는 이름이 알려져 있고, ‘우가릿’ 문헌에서는 ‘고드야’라는 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갓’이라는 이름이 이들 신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셀’ 역시 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나안’의 신 ‘엘’의 아내가 ‘아세라’입니다. 또는 ‘아시리라’의 ‘아슐’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사렐’의 준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사렐’(Asarel)은 “엘(El)이 기쁨으로 채우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장 ‘레아’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아셀’은 “기쁨(행복)”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녀는 여기에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라”는 설명을 추가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레아’가 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훗날 ‘디나’의 탄생을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21절; 34장). ‘아셀’의 출생과 관련해서 기쁨으로 환호하고 있는 ‘레아’의 모습은 ‘예수’를 낳고 환호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
4. 레아가 남편을 원함(14-15절)
네 번째 장면은 짧기는 하지만 두 자매 사이에서 오래 동안 내연되어 오던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자식은 많이 있으나 남편의 사랑이 없어 애태우던 ‘레아’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그 이름 속에 자신의 염원과 한(恨)을 담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반면에, 남편의 사랑은 누리고 있었지만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없던 ‘라헬’은 대리모(代理母)를 통해서라도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동안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한 사건을 통해서 이들 자매사이에 공개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 거둘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14절상)
만일 <창세기> 이야기의 연대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때 ‘르우벤’의 나이는 5-6 살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레아’는 이미 네 아들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2년 터울로 이들을 낳았다 해도, ‘르우벤’의 나이는 이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월의 밀 수확 시기에 그는 “합환채”(mandrake, 만다라화)로 불리는 식물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합환채”라는 <칠십인 역>에서 יוּדּ(두다이)를 번역한 것으로서, 이후 이 단어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다이’(명남)는 ‘도드’(דוד: 사랑, 사랑하는 자)와 관련이 있는 듯하며, <영어 성경>에서는 ‘만드레이크’(mandrake)로 번역하며, <한글개역>은 “합환채”로 번역합니다. ‘아베 마리티’(Ahbe Mariti)에 따르면, “합환채”는 상치와 같이 낮에 자라고 그 잎사귀는 색깔이 검푸른 것 외에는 상치와 아주 닮았으며, 꽃은 자주 빛으로, 뿌리는 대부분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열매는 5월 초순에 익으며, 작은 사과만 한 크기로서, 그 향기가 아주 좋다고 합니다. 이 “합환채”를 맥추 때에 ‘르우벤’이 그 어머니 ‘레아’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때는 ‘갈릴리’에서 5월이며 “합환채”가 열매 맺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식물은 성적 욕구를 돋우는 일종의 강장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오며, 1회를 제외하고 모두 합환채를 가리킨다.
이 식물은 또한 고대부터 성욕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니, 여자의 불임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르우벤’이 가져온 식물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 효능이 과연 상기한 바와 같은 것인지, 더 나아가 어린 ‘르우벤’이 그 효능을 알고 있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레아’와 ‘라헬’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헬’은 아직 한 번도 임신을 해 본 적이 없고, ‘레아’ 역시 이제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 약의 효능에 대해서 이 두 사람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라헬’은 그의 언니에게 정중하게 그 중 일부를 좀 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태도는 그녀가 남편 야곱에게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격렬하게 요구하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태도입니다: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14절하)
라헬이...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30:1)
그러나 ‘레아’의 반응은 냉담하고 투박합니다. 동생에게 던지는 수사적 질문이 그녀의 현재 심기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과장된 질문은 히브리 특유의 수사적 형태로서, <구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민 16:9; 수 22:17; 사 7:13; 겔 34:18).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15절상)
‘레아’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남편” ‘야곱’이 ‘라헬’과 지내느라 나와는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출애굽>의 규례에 의하면 이혼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출 21:10). 여종에게도 이런 권리가 주어질진대, 정식 부인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라헬’도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레아’에게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15절하)
이 타협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금 가족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뒤틀려 있는지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우선 ‘레아’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합환채를 포기하는 대신 남도 아닌 “내 남편”과 단 하루 밤만을 지낼 수 있을 뿐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라헬’을 편애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헬’ 또한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녀 ‘빌하’를 통해서 여러 명의 아들을 낳게 되어, 언니에 대한 승리감으로 득의만만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몸에서 태어난 아들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 때문에 견딜 수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여기서 끊어져, ‘레아’가 동생의 타협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추측컨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5. 레아가 남편과 동침함(16-21절)
이 다섯 번째 장면을 통해서 두 자매 사이에 적어도 어느 정도의 양해와 양보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출발은 다소 기이한 방식의 거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 남편을 두고 두 아내가 마치 사업상의 거래를 하듯 주고받고 한 것입니다:
저물 때에 야곱에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16절상)
‘레아’는 남편을 샀다고 말합니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고용하다”(רכשׂ, 사카르)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야곱 이야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29:15; 30:18, 28, 32, 33; 31:7, 8, 41).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야곱’의 인간관계가 늘 이런 식입니다. ‘라반’과는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아니라,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였으며, 그의 아내들과의 관계 역시 거래의 대상 정도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이 거래를 통해서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 ‘잇사갈’ 즉 “가격(값)”을 의미한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결과라는 화자의 설명은 다소 뜻밖입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17절)
왜냐하면 ‘레아’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남편의 애정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화자가 암시하고 싶은 점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레아’와 ‘라헬’ 모두는 ‘잇사갈’이 태어난 것이 합환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믿겠지만,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예)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시 113:9). 그러니까 합환채에 대한 믿음은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레아’는 합환채 없이도 세 명의 자식을 더 낳았으며, ‘라헬’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향후 삼 년 동안은 아무 자식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또 있는 듯합니다. ‘레아’와 ‘야곱’ 사이의 관계가 이후부터 새로워질 것이라는 암시가 그것입니다(우리는 이점을 20절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잇사갈’의 어원은 ‘아모리’어로 “신은 자비로우시다”입니다. 또는 “피고용인”의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비록 잦은 일은 아니지만, 어미가 아이의 이름과 관련해서 설명을 덧붙일 때, 그것이 출산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준다거나, 또는 그 이름의 어원을 드러내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그 출산을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지금 ‘‘레아’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18절)
그녀는 지금 아들 ‘잇사갈’이 출생한 것은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전에 그가 치른 대가, 즉 자식을 갖기 위하여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준 행동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갓’과 ‘아셀’을 보게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합환채를 포기한 대가로 아들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여섯 번째 아들 ‘스불론’이 태어났을 때 ‘레아’의 기쁨은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은 더욱 애매모호합니다: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20절)
‘레아’가 아들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때로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할 때가 있는데, 대개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불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이 나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입니다. ‘자바드’(db'z)는 동사형 “선물”(하다)와 명사형 “선물”의 어근으로서, <구약>에서 처음으로 두 품사 형 모두가 이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름 가운데 이 어근과 연관된 이름이 있기는 합니다: 스바냐; 세배데.
그리고 두 번째 설명은 자신과 남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입니다. 이전에 세 아들을 낳았을 때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29:34). 이제 여섯 번째 아들을 낳은 지금 ‘레아’의 심정은 더욱 낙관적이 되어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득의만만한 기분은 딸을 낳을 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21절)
‘디나’가 의미하는 바가 “심판하다” 또는 “판단하다” 등이니, 이 당시만 해도 ‘레아’의 기분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기양양 내지는 득의만만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개 여자가 태어날 때, 그가 무슨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이 관례라는 사실로 미루어, 이 구절은 각별하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디나’가 태어난 것은 단순히 ‘야곱’의 자식이 하나 더 늘었다는 이상입니다. 이 아이 역시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 “심판”이나 “판단” 등과 연관된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34장).
6. 라헬의 태가 열림(22-24절)
이 짧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라헬’이 시녀의 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서 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합환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22절)
그러나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라헬’이 아이를 낳았다는 그 이상입니다. 이 순간은 <야곱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곳으로서, 지금 이후부터 ‘야곱’의 생각을 사로잡게 되는 것은 “귀향”(歸鄕)입니다(30:25). 아들 ‘요셉’의 출생으로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이 <야곱 이야기>의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 <노아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는 구절과 문학적인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하나님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8:1).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사 홍수의 물이 물러가게 하신 것처럼, ‘라헬’을 기억하사 아들을 낳게 하셔서 ‘야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준비시킨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여셨다”는 언급은, 첫 번째 장면에서 “여호와께서 ‘레아’의 태를 여셨다”는 언급(29:31)과는 수미상관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구조로 볼 때, ‘라헬’은 ‘야곱’과 결혼한 후 첫 번째 아들을 갖기 위해서 7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그들이 처음 만난 지 14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29:18, 27).
‘라헬’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요셉’으로서, 이번에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명이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3-24절)
첫 번째 설명은 시적(詩的)인 것으로서, ‘라헬’이 어머니가 되는데 따르는 평판이나 소문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라헬’이 무자(無子)의 수치를 벗었다는 노래입니다. 한 편 두 번째 설명은 ‘라헬’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담은 기도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훗날 응답될 것이지만,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대가를 치러야 이루어질 기도입니다. 훗날 ‘라헬’은 아들 ‘벤야민’을 낳으면서 죽게 됩니다.
어원론적으로 볼 때, 이 두 번째 설명이 ‘요셉’의 이름에 근접하는 것입니다. ‘요셉’(요셉-일)은 ‘이삭’, ‘이스마엘’, ‘야곱’, ‘잇사갈’ 등과 같은 다른 족장들의 이름처럼,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의 이름”(엘)과 삼인칭 단수 미완료 동사형으로 주어지는 표현, “그가...하시리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화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본문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29:32, 33, 35) 사용한 바 있는 그분의 개인적인 이름인 고유명사 ‘야훼’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외 본문의 다른 곳에서는 항상 ‘엘로힘’을 선호해 왔습니다. 즉 화자는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야훼’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에덴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 7개의 장면 중에서 “유혹과 타락”과 관련된 세 번째와 네 번째 장면에서 화자는 ‘야훼 하나님’ 대신에 ‘엘로힘 하나님’을 사용함으로써 여타 장면들과 구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창세기 1>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호칭의 변화가 주는 수사적 효과는, 인간이 동산 중앙에서 범죄 할 당시 하나님은 친밀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대신에 소원하고 멀리계시는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곳 <야곱 이야기>에서도 ‘야곱’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즐겁고 순탄하게 시작하는 듯 했습니다만(29:32-35), 남편과 아내의 관계나 아내와 하나님의 관계가 서서히 소원해 지면서, 이들은 하나님을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엘로힘 하나님”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헬’은 기도의 응답에 반응하면서, 보다 친밀한 언약의 하나님 “야훼”(또는 주님)로 고쳐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훈과 적용
1. 레아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이 ‘아브라함’에서 ‘이삭’을 거쳐 ‘야곱’에 이르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비로소 하나의 강을 이루는 듯이 보입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에서 열두 명의 아들로 자손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중 여섯 명이 ‘레아’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본인은 물론 남편과 하나님 모두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남편은 마치 사생아를 보듯이 시큰둥했고, 아내는 그 때마다 좌절과 분노로 비참함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 속에 그 어미의 한과 슬픔이 속속들이 베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레아’는 ‘야곱’이 사랑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녀에게 정중하고 친절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레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남편이 동생 ‘라헬’을 사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보다는 훨씬 아름답지만 자식 한 명 낳지 못하는 동생을 말입니다. 이런 ‘레아’의 처지는 분명 동정 받을 만합니다. 하나님마저 그녀를 동정하고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셔서 그로 하여금 많은 자식을 낳게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과 한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사 인과응보가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 ‘레아’는 ‘야곱’을 속이는 일에 아버지와 공모한 전력이 있습니다. 첫날 밤 사랑하는 ‘라헬’을 기대하며 가슴 벅차 있는 ‘야곱’에게 몰래 들어가 동생 대신 그와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동의 없이 아버지 단독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 ‘레아’도 ‘야곱’을 보는 순간 그에게 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를 향한 연모가 탐욕이 되어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겠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 순서는 그 죄가 성장하면서 사망의 열매를 맺을 차례인데, 부부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은 처음부터 이미 죽은 상태로 시작되었고, 사랑의 열매 또한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남편의 증오와 분노가 전부였습니다. ‘레아’가 치러야 할 대가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동생 ‘라헬’이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한 집안에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일부다처가 허용되던 시절이라 하드라도 사람의 본성을 숨길 수 없는 법, 이때부터 그녀의 좌절과 한숨과 외로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의 장막에서 하녀와 함께 빈둥거리며, 한숨지으며, 때로는 눈물지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M Luther). 동생보다 아름답지도 않고, 즐거움을 주는 타입도 아니고, 동생과 남편으로부터 의심과 경멸까지 받아가면서, 하릴 없이 시간만 보내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하녀 ‘실바’와 처지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오늘날의 일부일처제도 하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레아’는 오늘날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많은 여인들의 초상화입니다. 오늘날 많은 여자들이 남편으로부터 미움 받고 버림받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별거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혼까지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남편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만, ‘레아’처럼 자신이 자초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대로부터 비난과 함께 스스로도 자책감으로 이 모든 결과를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해 본 기억이라고는 ‘레아’처럼 결혼 전에 단 한 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만일 내가 지금 ‘레아’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그녀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싶어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무슨 도움이 되기는커녕 경쟁과 질시의 상대가 된 이 시점에서 ‘레아’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부득불 하나님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시편> 기자도 한 때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는가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레아’도 이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남편 ‘야곱’으로부터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고난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보다 영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기억하셔서 첫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보라, 아들이라”(르우벤)고 지었습니다. 한이 맺힌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그녀는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그녀는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라헬’이 첫 아이를 낳고는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자랑할 때 사용하던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과는 다릅니다.
기도는 또 다른 기도를 낳습니다. 기도는 마치 근육과 같아서 쓰지 않으면 굳고 단단해져서 움직이기 힘들지만, 쓰면 쓸수록 유연해집니다. 기도를 늘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단 한 번에 속 시원하게 모든 불안과 답답함을 날려버릴 수 있는 그런 기도란 없습니다. 대개 기도를 잘 안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기적을 바랍니다. 기도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아’가 이런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졌을 리는 없겠지만 첫 아이를 낳은 감격은 그녀로 하여금 계속 기도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두 번째 아이를 낳게 됩니다. 아이의 이름은 “들으심”(시므온)입니다만, 이번에도 하나님에게 그 공(功)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나님이 누구로부터 ‘레아’의 처지를 들으셨다고요? ‘레아’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마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레아’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연합함”(레위)입니다. 세 아들까지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할 것이라는 기대로 지은 이름입니다. 지금까지 세 아들의 이름을 보면 ‘레아’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 남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긍휼도, 남편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필자는 이런 ‘레아’의 모습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필자 역시 ‘레아’와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하나님하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입니다.
남편의 마음이 여전히 ‘라헬’에게 머물러 있는 가운데,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찬솜하다”(유다)입니다. 이번에는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들 낳는 것을 남편의 사랑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순순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러나 그녀가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을 낳았을 때, 한 말은 다시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하는 듯하다가, 다시 남편과의 동거를 바라는 듯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또는 이제는 그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리라).” 아들의 이름 ‘스불론’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레아’가 낳은 모든 아들의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가 곁들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남편을 향한 염원과 원망이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기도는 그녀에게 있어 한 평생 자신의 원망과 한을 쏟아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었고, 하나님은 그 대상이었습니다.
‘레아’가 일평생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늘 그녀 곁에 계시면서 귀를 기울였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먼 훗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제사장과 인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라헬’이 아닌 ‘레아’의 배속에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 처지가 ‘레아’의 처지와 흡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여자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라헬
가련하고 비참하기는 ‘라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남편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고 있습니다만, ‘레아’보다 더한 굴욕감과 비참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못난 언니 ‘레아’에게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총애는 누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총애는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인 자식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총애가 언제 ‘레아’에게로 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안감이 남편을 향한 가당치 않은 요구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예의와 체면은 더 지키는 것이 그 사랑을 오래 지속시키는 비결일 텐데... 질투와 모멸감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앙탈을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분노한 남편은 그야말로 정답으로 쏘아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맞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잠자리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라헬’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버릇없고 투기심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가 더 큰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남편의 편애를 받으며 살아온 나머지,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아복제와 같은 생명공학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창조를 일개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남편을 향해서 쏟아내는 불만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성과 도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한 TV 광고에서 이 효리 양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아, 다 나를 따르라” 하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백설 공주>에서도 공주의 계모는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는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라헬’도 대부분의 미인들이 그러하듯이, 뽐내며 못난 언니를 우습게 여기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자기와 결혼하기 위해 칠 년을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 봉사하겠다고 했을 때, 눈을 내리 깔고 머리를 쳐들고는 온 동네를 보란 듯이 돌아다녔을까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속아 언니와 결혼한 것을 알고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 다시 칠년을 더 봉사하겠다고 했을 때, ‘라헬’의 허영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이 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나에게 자식이 없다니!” 질투는 분노가 되고, 분노는 절망이 되고, 절망은 겸손한 기도가 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인데, 아직 ‘라헬’은 그러한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녀를 염려와 관심 가운데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만일 외모가 출중하지 못한 여인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미인에 대해서도 걱정과 염려와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대개 그렇지 못하고 시기심이 먼저 발동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미인들 역시 ‘라헬’처럼 그 아름다움 때문에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노정시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상대가 가진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각자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 필요를 채워주고 싶어 하시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삼상 16:7). 즉 하나님은 ‘라헬’의 미모에 대해서 질투하거나 경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아직 자신의 방식대로 자식을 갖고 싶습니다.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녀 ‘빌하’를 남편에게 대리모로 들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에 대해서 일찍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사회적인 통념으로 인정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라헬’의 방식을 거부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타이르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라헬’은 두 아들을 보게 됩니다. 첫 아들의 이름을 “억울함을 푸심”(단)으로 짓습니다. 무슨 아이의 이름이 이렇습니까? 자식의 탄생이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한풀이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필경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그 한이 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합니다. ‘라헬’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두 번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투쟁” 또는 “경쟁”(납달리)입니다. ‘라헬’이 자식을 갖고자 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보다 못났지만 자식 하나는 잘 낳아대는 언니를 이기는데 있습니다. 미모에다 자식까지 갖게 되었으니 언니를 완전히 깔아뭉개 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련하고도 비정한 ‘라헬’이여! 내 인생의 목적이 혹시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나 형제나 동료들을 이기고 짓누르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까?
3. 합환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간혹 그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잉태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당하고는 못사는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레아’도 그냥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당한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의 지적대로 두 사람은 마치 포커 놀이에서 판돈의 액수를 계속 늘려가는 것처럼 “자식 내기” 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게임을 먼저 시작한 쪽은 ‘라헬’입니다. 그녀는 하녀 ‘빌하’를 걸었고 두 자녀를 따냈습니다. 이에 질세라 ‘레아’는 동생이 이미 따놓은 두 아들과 한 시녀를 따먹기 위해서(이기기 위해서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지만), 그 위에 네 아들과 하녀 ‘실바’를 겁니다. 그래서 두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야곱’에게는 한 아내와 한 시녀와 여섯 명의 아들을 판돈으로 벌어준 셈입니다. 이로써 ‘레아’가 이긴 것입니까? 한 아내와 한 시녀와 두 아들 대 한 아내와 한 시녀와 여섯 명의 아들의 판돈이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 모든 일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한 가족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질투의 힘은 이처럼 파괴적입니다. 시작은 동생이 했지만 그 언니 역시 치른 대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한 때 네 명의 아들을 낳고 좀 성숙해진 줄 알았던 ‘레아’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하녀를 통해서 낳은 두 아들의 이름만 보아도 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 아이의 이름은 “행복하다”(갓)이고 다른 아이는 “기쁨”(아셀)입니다. 하나님의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에 네 아들의 이름을 야훼 하나님과 연관시켜 짓던 때와는 판이한 모습입니다.
이어서 벌어지는 “합한채 사건”은 더욱 가관입니다. 이 식물은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여자가 아이를 갖게 하는 특효약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근거가 없는 믿음입니다만 이들 자매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레아’의 첫 아들 ‘르우벤’이 우연히 들에 나가 이 식물을 꺾어왔다는 사실을 ‘라헬’이 어떻게 알았는지, 언니에게 달려와 그것을 좀 나누어 갖자고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애태우는 ‘라헬’에게 있어 자존심과 경쟁의식은 크게 개의할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동안 억눌러 왔던 억울함과 상대에 대한 경쟁심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는 쪽은 ‘레아’입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적어도 법적으로만 보자면 ‘야곱’을 빼앗긴 쪽은 ‘레아’일 것입니다만, 실은 그 반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곱’을 빼앗은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만일 ‘라헬’이라면 이렇게 반박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내 남편을 훔쳐간 자는 언니야!”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라헬’은 맞서 싸우기 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선택합니다. 남편을 하루 밤 파는 대가로 그 식물을 갖자고 제의합니다. 남편은 언제나 내가 원하기만 하면 가질 수 있다는 자심감에서 나온 계산일 것입니다.
과연 그 식물이 효험이 있었던지 한동안 출산이 멈춘 ‘레아’는 연거푸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아들인 ‘잇사갈’과 ‘스불론’이 바로 이 때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아이의 출산에 대해서 독자들이 합환채에 대해서 잘못된 믿음을 가질까봐 화자는 친절하게 단서를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이점은 ‘라헬’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가 이 식물을 먹고 난 뒤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까? 오히려 한동안 무자식의 설움과 고통은 더하여졌을 것입니다. 합환채를 먹은 자신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먹지도 않았던 언니가 아이를 둘이나 더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라헬’도 마침내 한 아이를 낳게 되는데, 화자는 그녀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독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을 잊지 않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이야기를 마치면서 화자는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개입”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인지, ‘라헬’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결국 합환채 에피소드를 통해서 세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만, 이야기의 역설은 이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 합환채 때문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4. 하나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만,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열두 조상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실은 전혀 자랑스럽지가 못합니다. 이들은 부부간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거짓과 술책과 질투와 투쟁의 열매였습니다. 자식 하나하나의 이름 속에는 그 어미의 환희와 감사가 아니라, 한(恨)이 녹아 있습니다. 가족사에서 가장 즐거워야 할 순간들이 이처럼 분노와 한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불신과 갈등과 탐욕으로 분열된 가족 구성원들 때문입니다.
고양이가 호랑이를 좋아할 리 없듯이, ‘야곱’은 삼촌 ‘라반’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속아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아니라, 그의 못난 언니 ‘레아’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촌에 대한 분노는 그대로 ‘레아’에게 투영되어 결혼 생활 내내 한 번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 대해서도 차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한편 아름다운 ‘라헬’은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자식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없고 언니에게는 있는 자식을 갖기 위해서 대리모(代理母)가 되면서까지 목적을 이루기는 합니다만, 이런 방법은 ‘사라’와 ‘하갈’의 경우를 통해서 <창세기> 화자가 이미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일차 비난한 바 있는 술책입니다(창 16장). 그러나 ‘라헬’의 기쁨도 잠깐... 적어도 두 자매 사이에 작동하는 관계의 법칙이 있다면, “상대의 행복은 나의 불행”입니다. ‘레아’ 역시 대리모를 자청하면서 반격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자식을 가지기는 합니다만, 기대했던 남편의 사랑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계속되는데, 합환채의 대가로 남편과의 하루 밤 잠자리를 사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레아’는 이번에도 자식을 두 명 더 낳게 되지만,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라헬’이 마침내 자신의 몸에서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사랑은 끝내 ‘라헬’ 뿐이었던 듯합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의 물줄기가 ‘이삭’에서 개울이 되고, 이는 다시 ‘야곱’과 ‘에서’에 이르러 시내 물이 되기까지는 그 성취가 요원하게 보이기만 하던 것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 태어나면서 비로소 큰 강을 이룰 것 같다는 기대감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의 강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셨고(창 12:2), 하늘의 별들만큼 자손의 수가 많을 것이라고 하셨으며(창 15:5), 그와 언약을 세워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7:2). ‘야곱’에 이르러 그 언약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캄브리아기 대폭발”과도 같다고나 할까요. 한두 명에 불과하던 자손의 수사 열두 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방식이었을까? 속임수와 질투와 경쟁과 심지어 미신까지 동원되는 등 철저하게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강물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인격이나 성품에 걸 맞는 방식으로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완전함이나 거룩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야곱’이 결혼 후 겪고 있는 온갖 갈등이나 고통은 언약의 성취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삼촌에게 속아서 한 결혼이고, 또 많은 자식들을 가지긴 했지만, 그에 따른 모든 고통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20장),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 이별과 슬픔 등과 같이 인생에서 우리가 싫든 좋든 만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대도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고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마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분이 아닙니다. 목적이 선하다면 그 방법도 반드시 선해야 할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이 꾸며내는 수단이나 방법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설령 필요하다 하드라도 ‘아브라함’이 보여준 바 있는 믿음의 순종 같은 것이지 그 외 다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대답이 이러한대도 <창세기> 화자나, ‘야곱’이나, ‘레아’나, ‘라헬’, 모두 하나 같이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레아’나 ‘라헬’이나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헬’이 자식이 없어 ‘야곱’에게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불평을 늘어놓을 때, ‘야곱’은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면서 아내의 불평을 일축해 버립니다. ‘레아’나 ‘라헬’이 자식들을 낳고는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바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을 말할 때,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차원에서 전능하시다는 것이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제어하시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시는 분입니다. 상황이 불리할 때나 유리할 때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J. Stott). 참고: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야곱’의 가족사에 끼어들어 그들이 뒤죽박죽 헝클어 놓은 것을 무시하고 그분만의 방식대로 새롭게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그분의 언약이 이루어지도록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설명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을 듯합니다. 합환채 에피소드의 역설이 이에 대한 더없이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연습과 토의
1. ‘이스라엘’의 열두 족장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언약의 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시기와 경쟁의 산물이라는 점에 대해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2. 합환채 에피소드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