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3과
결혼: 레아와 라헬
김태정 목사창세기 29:15-30약 25분 분량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23절)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28절)
<창세기> 화자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야곱-라반 순환>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문 14년이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인데, 실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야곱’의 두 번의 결혼에 관한 담담하고도 객관적인 진술이 전부입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레아’와 ‘라헬’입니다. 첫 결혼은 속아서 한 것이고, 두 번째가 그가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본문이 결혼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핵심 주제는 결혼보다는 오히려 “(라반의) 속임수”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볼 때 본문은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속임수, 즉 “(야곱의) 속임수”와 관련한 에피소드들과(25:27-34; 27장) 더 잘 어울릴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결혼 이야기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소개한 바 있는 “벧엘의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본문은 “인과응보”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이들 질문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라반 이야기>의 동심원적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앞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만, 두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본문의 범위 설정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 표에서 보듯이 본문은 내용상 첫 번째 에피소드와 불가분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별개의 이야기 단위로 다룰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두 번째 에피소드는 네 번째 에피소드와 대칭의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는 다시 크게 두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 장면은 ‘야곱’의 칠년 동안의 노동에 관한 짤막한 언급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장면 1야곱과 라헬의 정혼(15-19절)
라헬을 위한 7년의 봉사(20절)
장면 2결혼(21-30절상)
또 다른 7년의 봉사(30절하)
자료와 편집.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자료 비평적 입장은 본문이 주로 <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만 24절과 29절은 <사제 기자>의 주석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두 절은 각기 ‘레아’의 여종 ‘실바’와 ‘라헬’의 여종 ‘빌하’에 관한 언급으로서, 이야기의 흐름 상 후대 기자의 편집적인 삽입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본문이 직전의 에피소드와 내용 상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야훼 전승>이 아니라 <엘로힘 전승>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라헬’에 대한 소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과 두 번째 에피소드가 동일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이미 1-14절에서 ‘라헬’에 대한 소개가 있었으니 이곳에서 다시 그녀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참고 16-17절).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것이, 16-17절에서 ‘라헬’을 언급하고 있는 목적은 그녀를 다시 새롭게 소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추가적인 정보 즉 ‘라헬’에게는 그보다는 덜 매력적인 언니 ‘레아’가 있으며,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사실 이 정보는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서, 특히 본문의 핵심 주제인 ‘라반’의 속임수와 관련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본문의 전승이 첫 에피소드(1-14절)의 전승인 <야훼 전승>과 다르다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절과 29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일까요? 일부 반대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절은 적어도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두 여종에 관한 언급은 이야기의 흐름 상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며, 따라서 다른 전승의 편집적 손길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여종을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딸려 보내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언급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다른 전승에서 추가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절은 이어지는 이야기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야곱’의 자식들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두절 역시 굳이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야곱과 라헬의 定婚(15-19절)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문 지 한 달, 외삼촌이 먼저 한 가지 제의를 하며 말을 건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15절)
아무리 친척지간이지만 조카에게 그냥 무보수로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외삼촌의 말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주 자상하고 친절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일”(דבע, 아바드)과 “보수”(어원: 고용하다; רכשׂ, 사카르)를 연결시키고 있는 그의 의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남남이라면,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주겠다는 제의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대에 대한 자상한 배려임에 틀림없겠습니다만, 어찌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이처럼 흥정의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어지는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일”과 “보수”는 ‘라반’과 ‘야곱’의 관계를 규정짓는 핵심 단어로서 불평등과 착취의 대명사로 계속 등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29:18, 20, 25, 27, 30; 30:26, 29; 31:6, 41; 30:16, 32, 33; 31:7, 41), ‘라반’의 제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활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라반’은 ‘야곱’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자기에게 온 동기와 원인을 익히 알고 있으며(29:13), 지난 한 달 동안 눈여겨 본 결과 ‘야곱’이 ‘라헬’을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도 파악한 터입니다. 조카의 이러한 처지와 사랑을 볼모로 잡아 그의 노동력을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의는 조카에게 일한 대가를 주겠다는 자상한 배려가 아니라, 그를 거의 무보수로 고용하여 부려 먹어보자는 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제의를 통해서 그는 둘 사이의 혈연관계를 끊고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를 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촌의 제의에 ‘야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화자는 대답 대신 ‘라반’의 두 딸을 비교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고 있습니다:
16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16-17절)
그러나 이런 정보는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 꼭 필요한 정보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일종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기능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야곱’이 과연 삼촌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또는 단도직입적으로 ‘라헬’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할 것인지에 대한 반응을 듣기 위해서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암소”(cow)를 의미하며, ‘라헬’은 “암양”(ewe)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Wenham). ‘레아’의 “안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라헬’이 “곱고 아름답다”는 말과 비교해 봄으로써 ‘레아’의 용모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아’는 어딘지 총명과 기개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용모도 썩 매력적이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섬기리이다(18절)
놀랄 일은 다른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삼촌에게 7년을 무료 봉사하겠다는 ‘야곱’의 제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조금 전 ‘라반’은 ‘야곱’에게 아무리 친척이라도 어찌 무료로 봉사할 수 있겠느냐고 물은 바 있는데(15절), 지금 ‘야곱’은 ‘라헬’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한 그릇의 고기죽을 형 ‘에서’에게 양보하는 대신에 놓고 형으로부터 “섬김”(דבע, 아바드)을 받은 바 있습니다만(25:23), 이제는 반대로 ‘라헬’을 위하여 삼촌에게 동일한 “섬김”을 제공해 주겠다고 제의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신부 값”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정해놓고 있는 현찰이 아니라 노동력입니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그 대가는 ‘라반’에게 있어서는 흐뭇한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한 달 노동의 대가가 1 내지 1.5 세겔이었다고 하니, 앞으로 7년 동안 그가 제공할 노동력의 총 가격은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최고 가격인 50세겔을 훨씬 능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신 22:29). 왜 하필 7년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구태여 일찍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형과는 될 수 있으면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야곱’의 제의는 ‘라반’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야곱’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19절)
‘라반’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삭’만큼 자식의 결혼 상대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삭’도 ‘야곱’이 가나안의 여자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28:2). 그러나 ‘라반’이 지금 결혼시키려고 하는 딸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까? ‘라헬’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벌써부터 그는 이처럼 애매모호한 말로 ‘야곱’을 속일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은 성사되었고, ‘야곱’은 그로부터 7년을 하인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20절)
후대 이스라엘의 안식 법에 따르면 하인(또는 노예)은 6년이 지나면 주인을 떠나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출 21:1-6; 신 15:12-18). 그러나 ‘야곱’은 여기에 일 년을 더하여 섬겼음에도,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기간이 마치 “며칠”에 불과한 것처럼 느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전에 ‘리브가’가 ‘야곱’을 삼촌 집에 보내면서 “며칠”만 지내라고 했던 그 명령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27:44). 마침내 그 간이 다하고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부푼 꿈은 이제 곧 절망과 분노로 산산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2. 결혼(21-30절상)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7년 이후 ‘야곱’의 결혼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대화를 주도한 쪽이 ‘라반’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야곱’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21절)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야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라도 하려는 듯 삼촌을 향하여 명령조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 아내를 주시오. 내가 이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해야겠습니다.” 그는 지금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선처해 달라는 부탁이나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해야겠으니 아내를 내어놓으라는 권리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반’이 이에 대해 무어라 반응했는지 아무 기록이 없으니, 그의 속마음이 어떠했는지 헤아려 볼 길이 없습니다만, 추측컨대 조카의 요구에 선뜻 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견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22절)
이웃을 초청하고 결혼 잔치를 벌입니다. 당시 결혼 관습에 따르면 일련의 요식 행위를 따르는 것이 상례일 것입니다. 예컨대 신부 집을 오간다든지, 결혼 서약서를 낭독한다든지, 이웃과 양가 친척들이 모인 자린에서 큰 식사를 베푸는 등의 절차가 그것입니다. 신부는 결혼식 내내 너울이나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데(24:65), 결혼 첫날의 예식은 신랑이 자신의 소매 자락으로 신부를 감싸고, 신방으로 신부를 데려가 합방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 잔치는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통상적인 절차에서 일부 빠진 부분이 있었을 것인데, 신랑 ‘야곱’의 가족들이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라반’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도대로 결혼식을 주도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헬’ 대신에 ‘야곱’이 사랑하지도 않는 큰 딸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23절)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날이 아주 어두웠던지, 또는 ‘야곱’이 술이 너무 취해 제대로 사람을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술에 취해 어둠 가운데서 실수를 저지르는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형”(די,,,, 베키라)과 “아우”(רי, 차이르)라는 단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곳은 이 곳 외에 그 유명한 <롯 이야기>에서 ‘롯’의 두 딸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그 애비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번갈아 육체관계를 맺은 바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과음”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롯 이야기>의 경우 두 딸이 적극적인 가해자로 그 애비가 소극적인 피해자라면,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 역할이 반전되고 있습니다. 즉 애비인 ‘라반’이 적극적인 가해자라면 두 딸은 소극적인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큰 차이는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롯’과 ‘레아’의 처지를 비교해봄으로써 가능해 집니다. ‘롯’의 경우 인사불성 가운데서 그런 짓을 했다면, ‘레아’는 의식이 또렷한 가운데서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레아’의 행위와 관련해서 ‘해밀턴’(Hamilton)은 이런저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레아’는 아버지가 자신으로 하여금 동생 ‘라헬’처럼 위장 행동을 하라고 요청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발적으로 순응했을까? 이런 일이 자신의 명예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단순히 아버지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만족했을까? 이런 의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는 대신 화자는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일말의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24절)
이 정보는 당시의 결혼 관습으로 볼 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보이자, 고대 결혼 언약에 따르면 결혼하는 딸에게 그 애비가 결혼 지참금으로 옷이나 가구 또는 현금을 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이혼이나 사별 등의 경우 신부를 위한 예비비 기능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지참금이 하녀라든지(24:61; 29:29) 또는 한 도시(왕상 9:16) 등과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에도 아무런 극적 요소를 더해주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21-23절에서 24절을 빼고 25절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리 치사하고 야비한 애비라도 그 딸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후한 결혼 지참금을 줄 정도로 관대하고 사려 깊었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을까요? 그래서 ‘레아’조차도 자신이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함일까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라반’의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족장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인 “언약”과 관련해서 중요한 일조(一助)를 하게 될 것임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는 23절에서 24절을 건너 뛰어 25절에서 다시 본류(本流)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25절)
세 번에 걸친 질문은 ‘야곱’의 충격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7년을 노력 봉사한 대가로 돌아온 것이 그토록 사모하던 ‘라헬’이 아니라 못난 그의 언니였으니 말입니다. 특히 “왜 그렇게 했느냐”고 따지는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은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3:13),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12:18),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던졌던 질책성 질문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라반’이 자기에게 “속임수”(ה, 라마)를 썼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실은 그 자신이 이미 형에게 동일한 “속임수”를 사용한 적이 있는 터라(27:35), ‘야곱’은 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사기를 당하여 분노하고 있는 이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카의 항의에 대한 삼촌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자기 합리화로서, 그는 여기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앞에서 다시 한 번 “형”과 “아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6절)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두 단어는 <야곱 이야기>에서 ‘에서’와 ‘야곱’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한 쌍의 단어이기도 합니다(25:23, 32; 27:19, 32). 그러나 아우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속임수로 형의 기선을 제압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라반’의 이 말은 마치 ‘야곱’의 지난 행적을 꾸짖으며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훈계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라반’이 주장하고 있는 관행은 ‘이삭’의 가정에서도 마땅히 지켜져야 했을 것이었는데도, ‘야곱’은 이를 거슬러왔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합리화는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관행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왜 지난 7년 동안 ‘레아’의 신랑감을 구해주지 않았을까요? ‘레아’가 너무 못나서 마땅한 신랑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계책을 마음에 가지고 있었을까요? 어찌 되었든 ‘라반’은 할 말이 없게 되었고 ‘야곱’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세련되고 능수능란한 ‘라반’은 자비를 베풀듯 새로운 제의를 가지고 조카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찌니라(27절)
우선 칠일 동안의 잔치를 마치면, ‘라헬’과의 결혼도 마저 치러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7년을 봉사한다는 조건 하에서입니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 제의라 하드라도 ‘야곱’의 편에서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가족도 없을 뿐만 아니라, ‘라헬’과의 결혼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덫에 걸린 ‘야곱’의 이런 처지를 모를 리 없는 삼촌은 그래서 더욱 가혹한 결혼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라헬’과 결혼해서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야곱’의 염원에 비할 때, 이 조건은 실로 가혹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야곱’이 삼촌의 제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임으로써 끝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28-29절)
적어도 외견상 두 사람은 서로 합의한 바대로 품위 있고 적절하게 행동한 듯합니다. ‘야곱’은 별 말없이 순순히 한 주간의 잔치를 무사히 치렀고, ‘라반’은 잔치가 끝난 후 ‘라헬’을 ‘야곱’에게 여종과 함께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진정으로 이 합의에 만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는 화자의 언급이 그의 불만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30절)
‘야곱’은 ‘라헬’과 결혼 후 7년을 더 봉사하였습니다만, 그녀와의 결혼 이전에 불과 며칠처럼 느껴졌던 지난 7년과는 달리 이번은 슬픔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의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란과 갈등을 통해서 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전화를 통한 사기극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수법이 얼마나 교묘했으면 어느 한 재판장도 속절없이 수천만 원을 사기 당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대개 이들은 정부나 공공기관을 사칭하면서 환급해 줄 세금이 있다거나, 또는 신용카드 사용액이 연체가 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상대방의 은행 계좌 번호와 비빌 번호를 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정보를 이용해서 피해자의 계좌로부터 돈을 빼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고, 얼마 전에는 이들 사기꾼들의 수법을 역이용하여 그들 계좌로부터 오히려 돈을 빼돌려 가로챈 희대의 천재가 있었다는 신문 보도를 접한 바 있습니다. 그 수법이 어떠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상습 사기꾼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상대에 대한 감동과 경탄이었을까요 아니면 분노로 치를 떨었을까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루이스’(C. S. Lewis)는 말합니다. Lewis, C. S.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ㆍ이종태 역. 서울: 홍성사, 2001.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가 유신론자든 아니든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든지 “열역학의 법칙”등과 같은 “자연법칙”이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게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자연법”이 무엇인지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논쟁을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너한테도 이런 짓하면 좋겠어?”
“거긴 내 자리입니다. 내가 먼저 맡았다고요.”
“그 사람 좀 내버려 둬. 너한테 나쁜 짓 한 거 없잖아.”
“나한테 신세를 졌으니 너도 좀 갚아야지.”
“이봐요,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이런 종류의 대화는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매일 주고받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쩌다 실수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때 어느 누구도 “그런 기준 따위는 집어치워”라고 대꾸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그런 기준에 위배되지 않는다든지, 또는 어쩔 수 없이 위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대려고 대부분 노력합니다. 누구나 이 세상이 정당하고 공평해야 한다는 일종의 합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법칙이며 “자연법”이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자연법”은 그냥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본성에 대한 증거로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논의를 조금 각도에서 이어가 봅시다. 기분 나쁜 영화란 어떤 것입니까? 보고 난 뒤 기분이 씁쓸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영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법정에서 무죄 선고로 받고는, 피해자와 검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뒤로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왜 모두들 이런 결말을 싫어합니까? 권선징악을 원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그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많은 자녀들을 낳고 그 이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더라.” 이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라면 이 영화는 아주 기분 나쁜 영화입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원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에 반하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기꾼이... 도대체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있기라도 한 거야? 있다면 그는 사기꾼 편인가, 아니면 사기를 당한 사람 편인가?” 이런 분노와 좌절은 비단 ‘야곱’의 형 ‘에서’에게 국한될 수만은 없습니다. 적어도 이 세상이 공평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의 지난 잘못에 대해서 질책이나 비난 대신 축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항의성 질문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야곱’이 원하는 바대로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가 ‘벧엘’을 떠나 ‘하란’의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나보다 확신하며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한 눈에 홀딱 반한 그는 처녀의 아버지 ‘라반’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고, 신부 값 대신에 7년간을 그의 집에서 노력 봉사를 하게 됩니다. 결코 짧지 않은 7년의 세월이 불과 며칠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라헬’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만 합니다.
그러나 맑은 아침은 여기까지입니다. 구름이 끼면서 비가 내릴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두 번째 장면부터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그동안의 확신이 이제 흔들리기 시작할 차례입니다. 7년이 끝나자 그는 당당히 ‘라반’에게 자기 아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진정한 결혼 즉 잠자리를 같이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삼촌은 순순히 잔치를 열어주었고, ‘야곱’은 그의 딸과 함께 잠자리에 같이 듭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게 누굽니까? 옆에 누운 자는 아름다운 ‘라헬’이 아니라, 못생긴 그의 언니 ‘레아’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둘째 딸을 제치고 첫째 딸을 나에게 주다니! 어떻게 삼촌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를 속이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어! 이건 공평치 못해. 하나님은 어디서 무얼 하시는 거야?” 삼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비난과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는 ‘야곱’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가 아버지와 형을 속여 먹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삼촌을 향한 그 비난과 정죄로 실은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삼촌의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어 보입니다. 즉 ‘라헬’을 갖기 위해서 또 다시 7년을 봉사하는 것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공평한 처사일까? 특히 하나님의 택한 자가 이런 보복적 수모를 당해도 괜찮은 것인가? 어느 영화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을지라도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하나님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 계셨습니다만, 결코 그 일을 잊지는 않으셨습니다. 택한 백성이라 해서 징계와 정죄로부터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대가가 클 수 있다고 <아모스>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필자는 여러 명의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특별히 관심과 호감이 가는 학생이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잘 알아서 자기 일을 처리하며 창의적인 연구 결과를 내어놓는 학생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외국인 학생 중에서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학생이 한두 번 결석을 해서 야단을 쳤더니, 울면서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국 얘들은 수시로 빠져도 아무 야단도 치지 않고 그냥 용납하고 넘어가면서 왜 유독 자신에게만은 그렇게 가혹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내심 내가 왜 인종차별을 하는지 항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나 <잠언>은 이런 항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2)
7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이번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물어볼 차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치사하고 야비한 일들이 한 가족이나 친척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침묵하시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일들이 “아브라함 언약”이나 “야곱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야곱’을 징계하기 위해서 이런 계획을 꾸미신 것일까? 과연 무슨 재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심리학자이면서 영화와 심리학에 관한 여러 책을 쓰신 장근영 박사님께서 진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2007년 6월호).
진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상대를 존중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진실을 알았다고 확신할 때부터 진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회자(膾炙) 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다소 부정적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섭리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때,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일방통행적인 의사 결정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지나치게 단순화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인격적인 존재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단선적이거나 단세포적일 수가 없습니다.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때때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록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그분의 섭리가 작동하는 원리나 메카니즘을 이해해 보자면 이런 식일 것입니다. 때로는 그야말로 인간의 의지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각과 뜻과 조화를 이루면서 쌍방향의 방식으로 섭리해 가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기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의 섭리하는 방식은 입체적이며 복합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라반’의 술수로 인하여 두 자매와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남편을 서로 차지하려는 이 두 자매의 사랑싸움 때문에 그들의 두 여종과도 육체관계를 가져 무려 열두 명의 자식들을 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결과만을 놓고 볼 때, ‘벧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나열한 세 번째 방식을 통해서 자신이 ‘야곱’과 한 약속을 성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호세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보응하셨고”(호 12:2), ‘라반’의 죄악으로 인해서 ‘야곱’의 귀향이 늦추어지긴 했지만, 동시에 그를 향한 약속을 이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비하고도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야곱-라반 순환>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됩니다.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