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야기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직전의 에피소드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바벨론’을 떠난 이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약속, 즉 자신들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밤하늘의 별들처럼 번창할 것이라는 약속을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람’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약속에 걸 맞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죽은 짐승의 시체 사이로 지나면서 스스로 “자기 저주”의 언약으로 공증을 해 주셨습니다.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짐승의 시체 사이로 지나가는 장면은 이들 부부에게는 실로 두려움과 감동 그 자체였으며, 더 이상의 설명은 이제 필요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조만간 그 약속이 성취되는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십년이 세월이 속절없이 더 흘러갔으며(16:3), 그동안 약속의 씨는 ‘사래’가 아니라 여종 ‘하갈’을 통해서 태어나게 됩니다. 설상가상 하나님은 ‘사래’가 아닌 ‘하갈’을 향해서, ‘이스마엘’의 자손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는 새롭고도 엄청난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사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와의 약속은 이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인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애초에 약속을 하지나 말 것을 이제 와서 말을 바꾸어 타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누가 보아도 불공정한 처사이며, 관객의 편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보아도 언약의 역전이요, 일종의 ‘패러디’(parody)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일이 이처럼 꼬여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저주”의 언약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무슨 교훈을 주려는 의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 독자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조롱이요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람 언약”에 다시 한 번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본문의 주된 내용은 가족 간의 분쟁에 관한 것으로서, 구조적으로 크게 세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서막(1절)과 종막(16절)이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시나리오와도 같습니다. 이들 다섯 개의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마엘’의 탄생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아주 정교하게 구성된 한 편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장면은 주 등장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체적인 구성상의 특징 또한 뚜렷합니다. 우선 제 1막은 시적인 평행 반복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ABC//A1B1C1), 제 2막은 일종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ABC//C1B1A1). 그리고 1-3막 사이의 관계는 무대의 장소와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제 1막에서 등장인물들의 장막(또는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다룬 다음, 이야기의 중심부에 위치한 제 2막에서는 광야로 이동했다가, 다시 제 3막에서 주인공의 장막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무게 중심을 잡듯이 균형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막과 종막은 화자의 해설을 담고 있는데, 각각 ‘사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점과(1절), ‘아브람’의 나이가 86세라는 점입니다(16절). 이 두 진술은 아무 상관도 없어 보입니다만, 실은 ‘수미상관’(首尾相關, enclusio)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한 편의 완전한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어떤 분위기입니까?
이번 에피소드에서 각 무대의 중심인물은 모두 여인들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 1막의 주인공 ‘사래’는 매사에 주도권을 지고 일을 꾸미고 실행에 옮깁니다. 남편 ‘아브람’은 그저 수동적으로 말없이 따르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한편 제 2막의 주인공은 ‘사래’의 여종 ‘하갈’이 맡고 있습니다. 주인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야의 한 우물가에서 천사를 만나 그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과 함께 놀라운 약속도 함께 받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사래’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갈’은 제 3막에서도 여전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전히 ‘사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고 ‘아브람’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결국 이야기는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두 여주인공의 갈등과 충돌을 다루고 있는데, 궁극적인 승리는 여주인 ‘사래’가 아니라 여종 ‘하갈’에게 돌아갑니다. 남편의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모두 하갈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종은 물론 남편마저 마음대로 조종하며 모든 권리를 누리던 ‘사래’는 자신이 계획한대로(2절) 한 아들을 보게 되지만, 화자는 세 번에 걸쳐 이 아들은 ‘하갈’이 ‘아브람’에게 낳아준 아들이지 ‘사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5-16절).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십여 년 전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이야기(12:10-20)와 닮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두 이야기에서 닮은 점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인공들에게 닥친 위기(또는 곤경)(16:1과 12:10); (2)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계획(16:2와 12:11-13); (3) 계획을 실행하지만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듦(16:3-6과 12:14-16); (4)예기치 않았던 하나님의 개입(16:7-11과 12:17); (5) 이야기의 결말(16:12와 12:18-20). 이처럼 두 이야기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혹자는 본문의 이야기가 전형적인 민담 설화의 한 부류라고 가정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정 하에 13-14절의 내용도 이야기의 흐름과는 무관하며, 따라서 후대에 부차적으로 덧붙인 자료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구조 분석을 통해서 보듯이, 이 이야기는 아주 정교하게 짜여 진 한 편의 이야기로서, 이중 어느 한 구절이라도 제거해 버리면 전체적인 균형이 상실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제로 삼고 있는 13-14절은 7-8절과는 구조적으로 대칭 관계의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쉽게 빼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위기가 해소되는 이야기의 결말은 12절이 아니라, 15절에 가서야 비로소 성취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13-14절의 내용이 결말 뒤에 마치 색인처럼 덧붙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Wenham).
자료와 편집. 다음으로 다룰 문제는 본문에 대한 역사적인 질문들입니다. 본문의 여러 곳에서 ‘야훼’(아도나이)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2, 5, 7, 9, 10, 11, 13절), 전통적으로 <야훼 전승>이 본문의 주된 요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이나 연대기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은(1, 3, 15-16절) 당연히 <사제 전승>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사제 전승>으로 구분하는 근거는 <창세기(1)>에서 수차례 다룬 바 있듯이, 일련의 공통적인 문학적 상수들 때문인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나안 땅’(3절); (2) 연대기(16절); (3)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에 관한 언급(15절). 그러나 이러한 기준도 확실한 지지를 받기에 부족한 것이, 유사한 표현들이 다른 전승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야훼 전승>이나 <엘로힘 전승>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으며(35:6; 44:8), 아비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이야기도 <야훼 전승>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4:26; 38:3).
그러나 최근 들어 <사제 전승>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1, 3, 15-16절들을 <사제 전승>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반박하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사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언급만 하더라도(1절),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만일 이 구절이 없다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원래 <야훼 전승>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대기 문제에 대해서도(3절) 일부 학자들은 <사제 전승>에서 온 것으로 추측하지만, 3-4절의 내용과 본문 속에 사용하고 있는 두 동사, “취하다”와 “주다”가 전형적인 <야훼 전승>에 속하는 <에덴 이야기>(3:6)와 흡사하다는 점을 들어, 연대기를 다루고 있는 3절 역시 <야훼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 1 막에서 3-4절과 6절은 상호 대칭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만일 3절을 다른 자료에서 취해 온 것으로 본다면, 이야기의 구성은 잃게 될 것이므로 적절한 주장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15-16절에 대해서도 문학비평적인 관점에서만 보드라도, 처음부터 전체 이야기의 일부, 즉 <야훼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가집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처럼, 15절은 이야기의 기승전결에서 결말의 기능을 완벽하게 하고 있으며, 16절은 1절과 함께 수미상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이야기에서 확실하게 <사제 전승>으로 구분할 수 있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마 이야기 전체가 ‘야훼’ 기자의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본문의 편집에 관한 질문, 즉 <야훼 전승> 증에서 어디까지가 <원 야훼 자료>이며 어디까지가 ‘야훼’ 기자의 편집 작업이 가해 진 부분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야훼의 천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혹자는 ‘야훼’ 기자가 이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 취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것이, 이 중 어느 부분이 부차적인 편집의 결과인지에 대해서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 중 한 구절이라도 제거해 버렸을 때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균형 감각을 잃게 된다는 점은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어지는 17장의 경우에도 천사의 목소리가 다섯 번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때마다 이들 각각을 다른 자료로 본다든지 편집적인 작업의 결과로 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자료와 편집을 명쾌하게 구분하여 가려내는 일은 적어도 본문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화자는 ‘하갈’이 하나님의 이름을 ‘엘 로이’(El-Roi)라고 불렀다고 소개하면서(13절), 그녀가 만난 하나님은 다름 아닌 ‘야훼’라고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설은 <족장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자의 기법이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프롤로그: 不姙(1절)
화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1절)
이야기는 처음부터 위기 상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위기입니까? 최근 나이 육십이 넘은 한 여인이 출산을 하여 세계의 뉴스거리가 된 일도 있기는 합니다만, ‘사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기에는 적당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많아도 이만 저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출산은 고사하고 이제 조만간 임종을 맞이해야 할 나이입니다. ‘사래’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점은 <아브라함 이야기> 벽두에서부터 화자가 강조한 바이기도 합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고, ‘아브람’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그 언약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물론 ‘사래’의 몸을 통해서 언약의 후손을 이어가겠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고, 암시적으로만 화자나 독자 모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입니다(참고, 15:4).
아무리 멋진 언약이라 할지라도 ‘사래’가 죽거나 또는 출산을 할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사래’가 이집트에서 ‘바로’의 아내가 되어 살든, ‘아브람’의 아내로서 자식 없이 살든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진술을 통해서 ‘사래’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대사 한 마디 없었고, 맡은 역할 또한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완전히 역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오히려 이야기의 조연으로 물러나고, ‘사래’가 먼저 공세를 취하고 모든 일을 결정하고,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사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그동안의 조연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면모를 보여줄 것인가? 화자는 그의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십여 년 전에 이 땅에 있었던 기근과 ‘아브람’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회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12:10). 독자들은 ‘아브람’이 기근이라는 자연 재해를 만나 이집트로 피신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으며, 이집트에서 아내 때문에 처형당하여 죽을 것을 염려하여 비윤리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약속과 상황, 믿음과 윤리 사이의 그러한 갈등이 이제 ‘사래’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화자는 ‘사래’ 역시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따르는 ‘편의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이 ‘하갈’이라”(1절하). ‘하갈’을 여기서 여종(החפשׁ, 쉬프하)으로 부르고 있는데, 당시 부유한 여인이 결혼 지참금으로 데리고 오는 ‘빌하’나 ‘실바’와 같은 몸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시 123:2; 창 30:24, 29). 이들은 주인 여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재산 목록에 들기도 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나의 여종”으로 부르고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로부터 하갈을 첩으로 얻고 난 뒤에도 ‘하갈’이 ‘사래’의 수중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2, 3, 6절).
‘사래’는 이 여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전에 이집트에서 ‘아브람’이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알면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이번 이야기 역시 당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동일한 구성상의 원리에 따라 진행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암시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위기상황이 발발하고, 이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행동 양식이 마치 판에 박은 듯 똑같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아브람’에게 ‘사래’가 있었다면, 지금 ‘사래’에게는 ‘하갈’이 있어 각 주인공이 편의주의적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사래’가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이번에는 ‘사래’ 자신이 도구로 사용할 차례입니다. 이전에 ‘사래’가 무고한 피해자였다면, 이번에는 ‘하갈’이 피해자가 될 참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갈’은 이방인 여종으로서 약속의 백성인 주인으로부터 억울하게 당하는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에피소드와 지난 번 <이집트 에피소드>는 하나님의 윤리․도덕에 관해서도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을 이집트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함께 했던 여종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크게 망신을 당한 후 ‘바로’왕으로부터 얻은 선물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부부에게 ‘하갈’은 늘 이집트의 수치를 상기시켜주는 기억 보조 장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제 1막: 計策(2-6절)
그러나 이런 기억 보조 장치는 유용하게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악용되는 사례가 더 많은 법입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음성도 오히려 무대 뒤로 사라지고, 인간의 계획이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사래’의 불평에 가득 찬 목소리가 먼저 들려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 하셨으니(2절상)
사실 관계만을 확인한다면 ‘사래’의 진단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나이가 많아서이겠지만, <구약>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서 간혹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로써, <창세기> 기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래’를 범하기 위하여 데리고 가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속한 모든 여인의 태를 막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20:18).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경우도 그렇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삼상 1:5). 물론 두 경우 모두 불임의 원인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만, ‘사래’의 진단은 당시 구약세계의 일반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의 탄생이나 죽음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25:21; 30:2; 레 20:20, 21; 신 28:11; 시 113:9). 문제는 원인이나 그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습니다.
아무튼 당시 근동 지방에서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에게 있어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비극이자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래’가 바로 이 ‘환난’을 극복하고자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습니다: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2절중)
‘사래’가 제안하고 있는 이 방법은 당시 근동지방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며, 지극히 일상적인 관례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이는 주인마님의 아이가 되고, 주모는 여종의 아이에 대해서 어미 자격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여 아이를 가지게 하는 편보다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태어나는 아이는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래’가 남편에게 제안하고 있는 이 방식이 윤리․도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부도덕한 처사로 평가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 역시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달리 마땅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고대 근동의 여러 문서에서도 이런 관습은 아주 보편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Hamilton, 444-445쪽.
<구약> 안에서만 해도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족장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서 첩을 두었던 사람들을 적어도 일곱 명을 만날 수 있는데, <성경>의 순서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갈렙’(대상 2:46, 48); (2) ‘기드온’(삿 8:31); (3) 한 ‘레위’인(삿 19-20); (4) ‘사울’(삼하 3:7; 21:11); (5) ‘다윗’(삼하 5:13; 15:16; 16:21); (6) ‘솔로몬’(왕상 11:3); (7) ‘르호보암’(대하 11:21).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래’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도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화자의 입장입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인간의 결정이나 계획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아무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려해 보아야 할 요소가 남아있을까?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도 합니다만, 화자의 의도를 따라 이야기를 감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여자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실은 문제의 발단입니다(15:4). 따라서 만일 ‘사래’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는 자연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적이 일어나기를 얼마나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적어도 ‘사래’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적, 즉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믿음 정도는 가졌어야 한다는 것이 화자가 바라는 대전제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1막의 스토리 전개 방식이 <이집트 에피소드>의 골격을 등장인물들의 역할만 달리한 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어 ‘이집트’로 내려간 ‘아브람’은 아름다운 아내 ‘사래’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아내더러 그의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에게 소개하자는 계책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12;10-20). 그 때 화자는 ‘사래’가 암묵적으로 남편 말에 동의했음을 그녀의 침묵을 통해서 보여준 바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와 비슷한 어려움이 닥치자, 이번에는 주인공들의 역할이 바뀌어 아내가 남편에게 한 계책을 제시하고, 남편이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에피소드>에서 화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던 간에, 이번에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요.
세 번째로, 화자는 이곳에서 그 유명한 <에덴 이야기>의 타락의 모티브를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래’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하와’가 ‘에덴’에서 취했던 행동을 판에 밖은 듯이 그대로 다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자가 (하갈을) 취하여(הקל; 라카흐) (남편에게) 주매(ןתנ; 나탄)(3절);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הקל)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ןתנ)(3:6후)
남편들의 반응 역시 두 이야기에서 똑 같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עמשׁ; 샤마)(16:2후)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עמשׁ)(3:17)
이와 같은 표현들은 <창세기>에서 유일하게 이 두 곳에서만 나타나고 있는데, 족장 시대에 ‘아브람’이 아내의 말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는 행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화자는 덧붙이기를,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준 때가 그들이 가나안에 거주한지 10년이 지난 후였다고 합니다(3절후). 이처럼 화자가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중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래’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는 듯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라 해도 10년씩이나 속절없이 약속의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구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 되어 주변에 한 가닥 희망 같은 것이 보이기만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싶어 나름대로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화자의 언급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즉 10년을 한 결 같이 그 땅에서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그분은 약속의 또 다른 측면, 즉 그 땅에 대한 약속을 한 결 같이 그리고 변함없이 지켜 오셨다는 암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믿음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성숙하고 강해질 수도 있었다는 암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갈수록 점차 그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하갈’의 결합은 철저하게 ‘사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두 사람은 단지 그녀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처럼 성공하는 듯이 보이는 ‘사래’의 계책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만나게 됩니다: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4절)
‘사래’에게 이 일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자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하갈’이 공공연하게 주인을 경멸하는 태도를 주인 앞에서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들은 이런 일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일부다처제를 관습적으로 허용하던 사회라 할지라도 한 집안에서 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적개심과 시기심은 관습이나 법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임을 우리의 경험이나 역사를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잠언서>에서도 이런 일을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쓰고 있습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 30:21-23).
이 마지막 경우가 ‘하갈’에게 해당되는 것으로서, <잠언서>의 예측대로 ‘사래’는 견딜 수 없으며,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내가 받고 있는 이 횡포(내지는 포악)는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
누구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함에 있어 지나치게 과장하는 데에는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합니다. ‘사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가 ‘하갈’로부터 당했다는 이 횡포라는 단어는 실은 하나님의 ‘대홍수’를 유발시켰던 인간의 횡포(또는 포악)를 묘사할 때 <창세기> 기자가 사용했던 단어이며(6:11, 13), 또한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의 누이동생 ‘디나’의 일로 복수극을 펼칠 때 보였던 그 잔인함과 포악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갈’이 과연 그 여주인에게 이처럼 엄청난 횡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횡포를 자신이 아닌 남편이 받아 마땅하다고 독기를 품고 덤벼대면서,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모습은 정녕 타락 이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 그것인바(3:12-13) 크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에 대한 분노를 넘어 그를 저주하기에 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하) 이런 표현은 실은 하나님이 상대방을 저주하시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삼상 24:13, 16).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12:3). 그런데 다른 사람 아닌 ‘사래’가 ‘아브람’을 저주하고 나선 첫 인물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가련한 여주인공 ‘사래’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저주하는데 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아브람’은 이상하리만치 수동적이고 아내에 대해서 지극히 순종적입니다. ‘하갈’이 그의 두 번째 아내였든 또는 첩이었든 이제 그의 여자가 되었으며, 자기에게 아들까지 낳아준 여자이건만, ‘사래’의 분노를 달래어서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해 보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이번에도 ‘사래’의 손을 들어줍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6절상)
이 한 마디에 다시 두 여인의 처지는 완전히 역전되고 맙니다. 이번에는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훗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었어야 할 그 학대와 동일한 것입니다(15:13; 출 1: 12). ‘사래’의 박해가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 것이었던지, ‘하갈’은 여주인을 피해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역시 이집트의 ‘학대’를 피해 도망해 나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출 14:5).
결론적으로 제 1막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사래’의 계획은 자신은 물론 등장인물 모두에게 철저한 실패와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하갈’은 집을 잃고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고, ‘사래’는 그녀의 여종을 잃게 되었으며, ‘아브람’은 두 번째 아내는 물론 자식마저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사래’의 결정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 2막: 遭遇(7-14절)
두 번째 무대의 주인공은 ‘하갈’, 그리고 배경은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사막의 한 지점입니다. 이야기는 사막의 한 우물가에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는 ‘하갈’에게 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使者가 曠野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7절)
이런 식의 설정은 <성경>의 화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한 전형에 속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조우가 그렇고(참고. 요 4:6-26), <창세기> 안에서도 두 번이나 이런 식의 설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24:11; 29:2). 그리고 우물가에서 낯선 방문객을 맞이하는 주인공은 방문객의 신분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며, 그 순간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화자는 독자들에게 ‘하갈’을 찾아온 방문객이 ‘야훼’의 천사라고 미리 밝혀줍니다. 여기서 천사를 단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천사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천사를 ‘로고스’와 동일시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그를 “하나님을 대변하는 피조물”,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 그 자신”, 또는 “하나님의 외적인 능력” 등등, 아주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야훼의 천사”라는 표현은 58번,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는 11번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및 <사사기>에서는 이 천사를 때로는 하나님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별개로 취급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해밀턴’은 이에 대한 예들을 소상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참고도서 2, 450-452쪽).
그리고 대개의 경우 위기에 빠진 주인공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하나님은 ‘술’ 광야의 한 우물가에서 ‘하갈’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녀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위기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항상 먼저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자든 종이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을 부르는 방식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8절)
‘하갈’의 충격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나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추측건대 여태 아무도 ‘하갈’을 이름으로 불렀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래’와 ‘아브람’조차도 대화중에 ‘하갈’을 이름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습니다. 여종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가 어떻게 살아가든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그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절상)
‘하갈’에게 이 질문은 지극히 당연하게 들렸을 것이지만, 독자들은 금방 이 질문이 지닌 수사적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혀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가인’에게도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런 유의 수사적 질문을 하신 바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4:9)
이 모든 질문들은 하나같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물으셨던 불필요한 질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대답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던 ‘아담’과 ‘가인’과는 달리(3:10-12; 4:9), ‘하갈’의 답변은 아무 거칠 것도 없어 보입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 하나이다(8절하)
“나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며, 도망가는 이유도 분명합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지, “어디로 가느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찾아오신 이유를 설명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9, 10, 11절)
이 표현은 이어지는 대화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며,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표현으로 말미암아, 9-12절 사이의 본문이 후대 편집의 결과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사실 여부를 입증할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갈’은 자기를 찾아 온 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든 승복하기 어려운 주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절)
거칠고도 무자비한 주문입니다. 특히 복종이라는 단어가 어원적으로 羞恥(6절)나 압제(15:13) 등과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 명령대로라면, ‘하갈’은 단순히 돌아가 옛 주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온갖 박해를 감내해야 합니다. 어쩌면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한 학자는 이 명령에 대해서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 명령은 학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기 있는 ‘하갈’에게 주는 하나님의 공포의 말씀이다.” 다시 돌아갔을 때 여주인이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갈’이 돌아가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 모든 수치와 학대를 무릅쓰고라도 돌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이 소식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계산하고 따져보아도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소식을 받아들였을 때 위로와 화해는커녕 오히려 갈등과 긴장이 더해갈 것이 뻔합니다. 조금 전에 천사를 만났을 때 가졌던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계속됩니다. 왜 그가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0절)
한 이방인 여종에게 들려오는 이 엄청난 약속은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이루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늘 이스라엘의 족장들이나 들어보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12:1-3; 15:4-5; 17:2; 22:17; 26:24). 그런데 이제부터 ‘하갈’도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약속은 ‘아브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15장) 항상 수치나 박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물론 우리 역시 현실 속에서는 늘 그 점을 잊고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옛 주인에게로 돌아가라는 냉혹한 명령, 동시에 후손에 관한 믿기 어려운 놀라운 약속,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전해주는 인물이 누구인지 ‘하갈’은 비로소 듣게 됩니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1절).
이 선언은 아기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예고의 한 전형으로 <성경>에서 두고두고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창 18:9-15; 삿 13:3-7; 사 7:14-17; 눅 1:31-33). 특히 ‘하갈’의 경우는 탄생을 알리는 다른 신탁(神託)과 다르게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장차 한 아들을 낳을 것이 아니라 현재 한 아들을 임신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의 ‘이스마엘’이 될 것입니다.
이 아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천사의 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12절)
아들의 운명은 어머니의 운명처럼 현실의 구속과 억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외로운 나귀와 같을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지나친 열망은 결국 이웃이나 기성 사회 조직과의 한바탕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며, 심지어는 가까운 형제들과도 적이 되어 분리와 단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들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지든, 놀라운 약속을 받아든 ‘하갈’은 비로소 천사가 다름 아닌 하나님, 특히 자기를 ‘살피시는 하나님’(El-Roi)임을 고백하며 그 이름을 외쳐 부를 때, 이야기는 드디어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13절)
‘하갈’이 부르는 이 하나님을 화자는 다시 ‘야훼’ 하나님으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하갈’의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구속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언약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13절상)
두 번째 장면은 끝으로 우물을 언급함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14절상)
이 이름 역시 ‘이스마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게 하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가데스’는 잘 알려져 있으나, ‘베렛’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달은 후에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놀라운 약속과 은혜의 수혜자 ‘하갈’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신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현실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시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서 모욕과 수치와 박해를 받으면서 종살이를 계속해야 하는 것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갈’의 태도일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망 가운데 인내를 배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달라진 우물의 위상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술’에 있던 한 우물이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이지요.
제 3막: 出産(15절)
세 번째 장면에서 ‘하갈’이 ‘아브람’과 함께 아들 ‘이스마엘’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15절)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야기의 전도(顚倒)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첫 무대의 주인공,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 ‘사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자는 오히려 세 번에 걸쳐 ‘사래’가 아닌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15-16절)
결과적으로는 ‘사래’의 계획대로 한 아들을 얻게 되었지만, 그 성공을 기뻐하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이 무슨 억장이 막힐 노릇입니까? ‘사래’가 한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 이야기의 해학이 있고,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패러디가 탄생하고 있는 셈입니다.
에필로그: 나이(16절)
화자는 그저 담담하게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정착한지 11년, 다시 아들에 관한 약속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13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기다려야 할 판입니다. 화자가 이야기의 결론으로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동안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사래’에게도 ‘아브람’에게도 ‘하갈’에게도 이제 더 이상의 계시도 약속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의 씨가 태어났고, 그 아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도 이미 받아놓은 상태라 더 이상 무슨 약속이 필요하겠습니까? 가련한 ‘사래’는 이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해야 할 아무 역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실상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래’의 운명입니까? 이 모든 일이 ‘사래’의 자업자득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스마엘’이 태어난 일과,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마엘’이 진정 약속의 씨가 옳다면, ‘사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큰일을 한 것이요, 그렇지 않고 ‘사래’를 통해서 태어날 것이라면, ‘사래’가 아이를 갖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것을 무슨 재주로 가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이처럼 오래고 힘든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기적에 기대하는 것 밖에는 말입니다. 화자가 이야기의 결론으로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요?
교훈과 적용
믿음의 시험장에서 10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천년이 하루 같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는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만한 긴 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람’은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약속들을 들은 바 있습니다. 위대한 약속 중의 하나는 그가 한 아들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과 국가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약속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이 약속은 처음부터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 자신도 그렇거니와 아내의 경수가 끊어진지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혹시나 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수년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참 후에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똑 같은 약속을 들려주자, 이번에는 정색을 하면서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하나님은 쪼개진 시체 사이를 지나시면서 자기 저주의 언약 의식을 행하여 보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처럼 죽어 둘로 쪼개진 시체처럼 저주를 흔쾌히 받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은 의(義)로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15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도 그 때뿐, 그로부터 10년이 다시 속절없이 흘러가버렸습니다. 문제가 하나도 해결 된 것도 없고,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1절). 과연 ‘사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인가?
이번에는 ‘사래’가 역할만을 달리한 채 이전에 ‘아브람’이 했던 것처럼 현실을 따르는 편의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이 ‘하갈’이라”(1절하).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이런 선택에는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2절상). 원망이자 불평이 섞인 사실 관계 확인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계책. 그리고는 혼자 구상해왔던 계획을 털어놓습니다: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2절하). 남편을 여종과 동침시켜 후사를 보자는 것이지요. ‘사래’의 계획을 놓고 사악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당시 자식이 없는 아내가 남편의 후손을 잇기 위해서 취하던 관례였습니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인 통념상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나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무 문제 될 것도 없는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도 별 다른 대안도 없어 보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아이를 낳아 후사를 이어갈 것이라는 구체적인 약속조차 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로 여길만한 어떤 징조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여기서 잠시 <이집트의 에피소드>를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경우가 마치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재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위기상황이 발발하고, 이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행동 양식이 마치 판에 박은 듯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아브람’에게 ‘사래’가 있었다면, 지금 ‘사래’에게는 ‘하갈’이 있어, 각 주인공이 ‘편의 주의적’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사래’가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이번에는 ‘사래’ 자신이 도구를 사용할 차례입니다. 이전에 ‘사래’가 무고한 피해자였다면, 이번에는 ‘하갈’이 피해자가 될 참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갈’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갈’은 아마도 이들 부부가 이집트에서 크게 망신을 당한 후 ‘바로’왕으로부터 얻은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갈’은 ‘이집트의 수치’를 상기시켜주는 ‘기억 보조 장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유명한 <에덴 이야기>로부터 타락의 모티브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이에 여자가 (하갈을) 취하여 (남편에게) 주매”(3절);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3:6후). <타락>의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사래’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의 공세에 대응하는 남편의 모습 역시 판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16:2후);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3:17).
갈등. ‘사래’의 계획은 <에덴 이야기>의 결과보다는 덜 심각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개입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큰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아닌 ‘사래’ 자신에게 입니다. 입장이 달라진 ‘하갈’이 그 여주인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지요. 여주인을 향한 경멸과 거만함이 그것입니다. 현대 여성들이야 될 수 있으면 임신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 반대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래’의 기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멸감, 분노, 질투, 등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언서>에서도 이런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 30:21-23).
그녀의 분노는 저주가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를 다시 <타락>의 모티브를 도입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화와가 그랬던 것처럼, 여인은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편을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하). 책임 회피에 이은 저주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아브람’이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렇게 되면 ‘사래’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아브람’ 역시 이 모든 갈등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사래’가 하자는 대로 순종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갈’을 내쫓는 일에도 아내에게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종이긴 했지만 동침하여 자기 아이까지 임신한 여자였는데, 마치 용도가 다한 물건 취급하듯 하고 있습니다.
복수에는 야릇한 쾌감까지 따르는 법입니다. ‘사래’는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갈’을 모욕하고 억압하며 포악하게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훗날 그녀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당했던 바로 그 수모와 억압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하갈’은 마침내 자유를 찾아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화자는 제 1막의 결론으로 관련 당사자들 모두가 재앙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라’의 계획이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을 우회적으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사래’의 계획과 그 결과에 대한 대응 방식이 아무리 윤리․도덕적으로나, 사회 통념상으로나,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나 언약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임을 알리고자 함일까요?
조우. ‘하갈’이 피해가는 곳은 지난 날 자신의 주인 ‘아브람’과 ‘하갈’이 도망쳐 나오던 그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다시 먼 훗날 이스라엘이 억압과 박해를 피해 도망쳐 나올 그 곳, 즉 이집트입니다. 종으로서 주인을 경멸하고 우습게 여긴 잘못은 있지만, ‘하갈’은 분명 선의의 피해자임에 분명합니다.
우물가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계속되는 중노동으로 기진맥진 쓰러져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며 울부짖던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이 그분의 약속을 잊지 않고 나타나셨듯이 말입니다. 이집트에 나타나신 것은 그분의 약속 때문이었지만, ‘하갈’에게는 아무 약속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압제와 구속은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지만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개의치 않으십니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이름을 불러 세우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절상). ‘사래’도 ‘아브람’도 그냥 여종이라고만 불렀지, 한 번도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던 미미하고 천한 존재가 ‘하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종을 한 고귀한 인격체로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형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다 안다고 합니다.
‘하갈’은 속으로 추측해 봅니다: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나를 불러 세우신 것일까?”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인의 박해를 피해 도망가는 중이라고 하소연해 봅니다(8절하). 그러나 돌아오는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뜻밖입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 주인에게로 가서 계속 순종하며 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그것입니다(9절). 이 무슨 실없는 충고이자 쓸데없는 참견이란 말입니까! 아니, 다시 그 학대 속으로 돌아가라고? 모든 관계가 철저하게 깨어져 버린 그 인간들에게로 다시 돌아가라고? 이것은 너무 잔인한 명령이 아닙니까? 이 세상 어느 누가 이런 충고를 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볼멘소리와 항의에 대해서 화자가 마련한 대답은 어떤 것입니까?
다시 한 번 말도 안 되는 예언이자 약속입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0절). 이런 약속은 ‘아브라함’과 같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나 유효한 것이지, ‘하갈’같은 이방인 여종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약속 앞에 얼 떨떨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하갈’을 향해서 거듭 약속을 확인하면서, 이번에는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칠 일을 예고해 줍니다. 즉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는 예고이자 명령입니다.
드디어 ‘하갈’은 감격과 흥분으로 함성을 지릅니다: “당신은 나의 형편을 살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13절). 이 감격의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우물이 있던 그 운명의 장소를 “나의 형편을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 즉 “브엘라해로이”로 명명하기에 이릅니다. 한 이름 없는 우물이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영원히 기념할 만한 장소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나에게는 영원히 기념할 만한 하나님과의 조우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며 살아갑니까?
출산. 용기백배 하여 돌아간 ‘하갈’은 드디어 ‘아브람’에게 한 아들을 낳아줍니다. 학대와 모멸 가운데서 한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갈’은 고통의 보상을 충분히 받은 셈입니다. ‘아브람’은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화자는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스마엘’이 ‘하갈’과 ‘아브람’의 아들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래’의 아들이 아니라는 또 다른 강조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 ‘사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기쁨의 자리에 그녀의 모습이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바랐던 한 아들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자신이 세운 계획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무대의 뒷전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야기의 해학이 있고 패러디가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래’여! 이제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에필로그. 이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대신 담담하게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정착한지 11년, 아들에 관한 약속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다시 13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기다려야 할 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래’에게도, ‘아브람’에게도, ‘하갈’에게도 이제 더 이상의 계시도, 약속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의 씨가 태어났고, 그 아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이미 받아놓은 상태에 더 이상 무슨 약속이 필요하겠습니까? 가련한 ‘사래’는 이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해야 할 아무 역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실상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사래’의 운명은 이것으로 끝이란 말입니까?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이란 말입니까? 이 모든 일이 ‘사래’의 자업자득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과 ‘사래’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마엘’이 진정 약속의 씨가 옳다면, ‘사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큰일을 한 것이요, 그렇지 않고 ‘사래’를 통해서 태어날 것이라면, ‘사래’가 아이를 갖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것을 무슨 재주로 가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이처럼 오래고 힘든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기적에 기대하는 것 밖에는 말입니다. 화자가 이야기의 결론으로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만,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1, 16절)을 통해서 화자가 이 점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그분의 섭리와 절대 주권에 대해서입니다. 아울러 더 많은 교훈을 위하여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은혜’, ‘믿음과 인내’, 등등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가 따라야 할 전형(典型)은 무엇이며, 반전형(反典型)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가족 간의 갈등과 분쟁을 다루고 있는 본문 이야기는 <아브라함 언약>의 직선적인 구성과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본문을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parody)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토의해 봅시다. 또한 화자의 의도를 파악해 봅시다.
2. 하나의 이야기로서 본문은 내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를 통해서 이를 확인해 봅시다. 이야기의 형식은 핵심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때,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논의해 봅시다: (1) <타락>의 모티브; (2) ‘예시화’ 내지는 ‘반전형’(anti-type)의 사례; (3)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은혜; (4)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
3. ‘바울’ 사도는 복음과 율법에 대한 강의를 위해서, ‘사래’와 ‘하갈’과 ‘마리아’에 대한 해석적 알레고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갈 4:21-31). 또 한 편 혹자는 ‘하갈’을 신약의 ‘마리아’에 대한 예표론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논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