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야곱과 이스라엘
김태정 목사창세기 32:24-28약 4분 분량
1. <Summersby 이야기>
이 이야기의 교훈이 있다면?
그는 왜 “나는 사실은 섬버스비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고백하기를 거부했는가? 왜 ‘섬버스비’로 죽기를 원했는가? “나는 가짜에요”라고 할 때 생명은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고백을 발하는 순간, 다시 이전의 그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난 뒤 비로소 자신에 충실해서 살아온 그 모든 공든 탑을 다 허물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그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된 자존심, 즉 “명예”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이 여인과 살면서부터입니다. 이 여인의 남편의 이름 ‘섬버스비’로 살면서부터입니다.
이 여인이 사실을 알고 실망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까? 실은 이 여인도 이 새 남자가 전 남편이 아닌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 여인 역시 태어나서 한 남자의 사랑을 이렇게 진심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남편은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고, 그를 사람 취급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한 여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며, 꿈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 새 남편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소연합니다. 이름을 바꾸면 계속해서 나와 함께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끝내 거부하며 죽어갑니다.
2. 학력과 섬버스비
오늘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유형의 ‘섬버스비’가 있습니다. 가짜 학력이 그것입니다. 가짜 학위로 대학 교수와 광주 비엔날레 예술감독까지 됐던 신정아씨 파문이 터진 이후 한 달여 동안 방송계, 연예계, 학원가, 만화가,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교수 김옥랑씨, 공연계 실력자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사이비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양파껍질 까듯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가짜들이 드러날지 모를 일입니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가 문제인가?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늘 무슨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회 탓을 합니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만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신정아만 하드라도, 자신의 고유한 이름 신정아가 부끄럽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했던 배우 윤석화도, 그냥 그 사람이었지, 이화여대 출신 윤석화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자신의 이름 위에 가면을 덮었습니다. 무덤 위에 회칠을 하듯 말입니다.
3. 야곱과 이스라엘
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름이 부끄러워, 여기에 무슨 새로운 가면을 덧입힐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이름 아닌 다른 이름으로 행세하고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전체 <야곱 이야기>의 절정은?: “에서가 달려와,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33:4)
어떻게 이런 일이? 두 원수가 이렇게? 언제? ‘야곱’이 아니 ‘이스라엘’이 그가 이전에 빼앗았던 하나님의 축복을 되돌려주려 했을 때... 무슨 말인가? 그는 이전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후로도 계속 같은 이름 ‘야곱’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의미하는 바는? 속이는 자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자기중심적, 그 모든 축복도 항상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 사기를 쳐 가면서 까지라도 말입니다. 신정아처럼 말입니다.
이제 인생의 두 번째 위기를 앞두고, 긴장과 초조함 가운데, 어둔 밤 얍복강에서 깊은 고민과 시름에 빠집니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동안 회피해두었던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 즉 <에서>였습니다. 혼자서 <에서>라는 인생의 괴물을 놓고 혼자 힘든 씨름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울부짖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32:26). 처절한 외침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야곱은 야곱입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항상 “나에게 축복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일부러 져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야곱’이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인 것이지요. 이제부터 그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그것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33:11).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