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조금 후, 또 조금 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6:16-22약 11분 분량
2014년 3월에 국내 개봉 예정인 할리우드 영화, <노아>의 광고 포스터는 영화 제목 바로 아래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은 시작에 불과하다.” 참으로 혜안(慧眼)이 번뜩이는 문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성경>에서 종말은 항상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前奏曲)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역설은 이것입니다: “모든 시작에 종말이 있고, 모든 종말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그 첫 번째 사례일 것입니다. 원(原) 창조, 즉 태초의 창조 이후 세상은 ‘노아’ 시대에 이르러 창조 직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혼돈”(chaos)과 “어둠”(darkness)과 “공허”(emptiness)가 그것입니다(참고. 창 1:2). “대홍수”는 그와 같은 세상을 끝장내는 종말의 심판이었습니다. 홍수 기간 내내 온 지구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로 뒤덮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새벽의 도래(到來)를 알리는 징조이자 암시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창조, 즉 신세계(新世界)의 시작 말입니다.
‘바벨’탑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지식과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黨)을 지어 역모(逆謀)를 도모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함께 역모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올라가자!” 한 마디로 하나님과 맞먹자는 것이지요. 하지만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 하나님은 반역의 탑을 허물기 위하여 손수 내려와야 할 정도로 탑의 높이는 미미하고 보잘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려가자” 할 정도였겠습니까!
반역은 실패로 끝났고, 사람들은 서로 간에 갑자기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역모를 도모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곳에 모였던 자들을 뿔뿔이 흩어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혼돈과 어둠 속으로 빠져듭니다. 다시 종말이 찾아온 것이지요. 이번에도 다시 새벽이 찾아왔을까요? 한 줄기 빛이 캄캄한 역사의 무대를 다시 비추기 시작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 ‘아브람’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 고별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이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화자는 그분을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4).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한 사람의 반역으로 초래된 혼돈과 어둠과 공허의 세상을 끝장내고, “재창조”(re-creation)의 빛으로 신세계를 시작하려 오셨습니다.
세상은 복음,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야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신세계”(新世界)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된 백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종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었습니다. 사도들도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다녔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즉 얼마 안 있어, 모두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곧 이별을 해야 합니다. 회자별리(會者別離)의 법칙이 이번에도 예외 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별이 단순히 이별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별도 서러운데, 세상은 이 이별을 놓고 박수 치며 환호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향해 순진하고, 어리석고, 답답하고, 외골수라며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 배척하고, 핍박까지 할 것입니다.
인생 역전도 이런 역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박을 기대했다가 쪽박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분은 단순히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광복과, 행복과 영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또 믿었던 주(主)님이었고,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떠날 것이고, 그분과 함께 시작된 “신세계”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올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희망으로 들떠있던 제자들은 다시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찬 무의미한 일상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 갈 것이었습니다. 태초의 창조 직전의 모습으로, 대홍 수 당시의 모습으로, ‘바벨’의 반역 직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었습니다. 혼돈과 어둠과 공허는 다시 세상과 제자들을 뒤덮고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 동안 이 같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도대체 얼마 동안 나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이 종말이라면 새로운 시작이 또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과연 새로운 시작은 과연 있을 것이며, 있다면 언제일까?
계시의 역설. 세상은 그와 같은 시작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지금 괜한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만물이나 역사를 둘러보면 그 증거가 너무나 강력해서 거의 대부분의 인생들이 세상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어떻고, 자연계시가 어떻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자연의 계시는 오히려 시간의 역사는 결코 끝남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종말 따위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과연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어김없이 다시 새벽이 옵니다. 어제 떴던 태양은 오늘 다시 떠오르고, 내일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 태어난 이래 이 같은 사실은 한 번도 중단되거나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이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만고의 진리이자 법칙입니다. <성경>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
유사 반복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인의 의도는 물론 다른 곳에 있습니다만(참고. 1절), 나는 여기서 이 노래의 두 번째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는 여기서 단순히 “날은 (그 뒤에 오는) 밤에게, 그리고 밤은 (뒤이어 오는) 날에게”라고 노래하지 않고, “날은 (그 다음) 날에게, 그리고 밤은 (그 다음날) 밤에게” 말하고 전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하나의 전제(前提)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단순히 반복적인 것을 넘어, 영속적(永續的)이기까지 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무렴 역사는 그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지! 역사의 종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도 우리와 함께 그렇다고 합창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바로 여기에 “계시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차라리 “계시의 함정”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낮과 밤의 순환을 보고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윤회(輪廻)하고 있거나, 계속해서 발전해 간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내 인생에 종말은 있을지언정, 우주와 역사에는 결코 종말이 오지 않을 것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감춘 듯합니다.
이점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의하실 때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말하지 않고, 알쏭달쏭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숨기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농부가 진정 자기가 가진 보화를 아무나 가져가기를 원했다면 길가 아무 곳에나 두면 될 일이지 굳이 땅에 파묻은 심보가 무엇입니까(참고. 마 13:44)? 그 보화를 누가 가져갈까 두렵거나 싫어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열었다면 간판을 가게 앞에다 내걸어야지, 아무도 못 보게 가게 안에다 다는 주인은 없습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가 교인들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나 방언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분은 진정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정말 종말이 없다고 믿도록 함정을 파놓은 것일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理性)에 의지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은 그기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심하게 오염되고, 타락해있습니다. 그래서 보기는 하나 어렴풋이 보일 뿐이고, 듣기는 하나 희미하게 들릴 뿐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듯이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참된 이성의 소리, ‘로고스’ 즉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말입니다.
또 조금 있다가. 그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를 보리라”(22절). “너희가 나를 보리라”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보리라”입니다. 두 표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가 아니라, 잠시 잠간 후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그 종말을 끝장내고, 새로운 새벽을 열겠다”는 선포이자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혼돈과 어둠과 공허로 가득 찬 다락방 분위기를 한숨에 날려버리는 우렁찬 호령입니다.
이는 태초의 혼돈과 어둠과 공허를 가르고, “빛이 있어라”(창 1:3)고 호령하시던 하나님의 그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는 홍수 이후 ‘노아’와 그 식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과 같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것이지요. 양치기 ‘모세’에게, “이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출 3:10)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 모두 혼돈과 어둠과 공허를 끝장내는 새로운 창조를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던 세상은 이제 곡하고 애통할 것입니다. 반대로 애곡하고 슬퍼하던 제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역전에 재역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 말씀은 또한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절). 무슨 말씀이신지? 그 기쁨이 이제부터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다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의 종말은 없을 것입니다. 종말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새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벽을 위하여 사도들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했을까? 만일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 기간은 불과 사흘이었습니다! 그 사흘은 사도들에게 어쩌면 삼 년과도 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역시 혼돈과 어둠과 공허로 가득 찬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을”(“샬롬!”).
만일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기간은 오십 일입니다.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이지요. 배속에 애기를 가진 어머니가 기대와 소망으로 열 달을 기다릴 수 있다면, 오십 일을 어찌 기다릴 수 없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들은 단순히 그 날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함께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모여서 반역의 ‘바벨’탑을 쌓아 올라 간 것이 아니라, 순종의 기도의 향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향기에 취해 황급하게 직접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영원한 새벽으로 자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이후 사도들은 전혀 딴 사람들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지배하던 혼돈과 어둠과 공허가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피해 다니던 그들이 이제 비로소 세상을 향해 호령을 하며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종말이 그들 앞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호령하던 세상은 반대로 그들의 말을 들었고, 두려워했으며,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역시 혼돈과 어둠과 공허가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만약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주님의 재림(再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동안 이천 년 이상을 기다려온 우리가 앞으로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와도 같다”는 시인의 노래를 듣는 일로 위로를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내 편에서 먼저 그분을 만나러 나서는 것은 어떨까! 주님께서 승천(昇天)하실 때,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 그렇습니다. 나도 하늘만 쳐다보며 그날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두 번째 보혜사께서 이미 내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늘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순종하게 하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주님을 날마다 대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혼돈과 어둠과 공허 속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늘 주님을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에게도 진정 다시는 종말이 없는, 종말의 종말이 실현된 것일까? 영원한 새벽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