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 날에는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6:23-27약 9분 분량
적어도 다락방 강론 자체만을 드려다 볼 때, 지금은 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 주는 상징이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無知)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고별 강연답게 참으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과연 제자들은 이중 얼마나 제대로 이해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향해서도 그렇고, 선생님을 향해서도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고 있는 이들 모습을 통해서 확인해 볼 일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13:37);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14:8);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14:22);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16:17).
이들의 영적 상태 또한 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칠흑 같은 밤이 지나면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벽의 동이 터오면, 사물의 윤곽이나 색깔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자던 것들이 깨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벽이 주는 변화일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또 조금만 있으면”, 영적인 새벽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절).
도대체 새벽이 주는 변화가 얼마나 클 것이기에, 얼마나 엄청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기에, 더 이상 주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주님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어보라는 말입니까? 누구를 찾아가야합니까? 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찾아가야 하며, 누구에게 간구를 해야 합니까?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하).
내 이름으로.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만나 그분에게 묻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을 일대 일로 대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용돈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가 무서워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요청을 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어머님께서는 아버지께 왜 직접 말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곤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절).
이 말은 그분이 직접 나서서 나의 간구를 하나님에게 말씀드려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아버지에게 요청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권도 이만 한 특권이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일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전에는 하나님에게 직접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주기도문까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참고. 마 6:9-13).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이름”,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좀 속된 표현을 빌자면, 주님의 이름을 팔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팔면 하나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행여나 신성모독이라 비난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님으로 착각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들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야곱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착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을 큰 아들 ‘에서’로 착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요구하는 그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의 형, ‘에서’의 이름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동생이 형의 흉내를 내며, 형의 이름을 판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도 가끔 그런 착각을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간혹 색맹이 되어 붉은 색과 흰색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어떻게 이런 일이? 과학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붉은 색안경을 통해서 보면 붉은 색이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일까? 붉은 나의 죄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으니(참고. 롬 8:29), 하나님도 결국 ‘이삭’의 실수를 반복한 셈입니다. 즉 동생의 피를 형의 피로 착각하셨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즉 내가 형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내 목소리를 형님의 목소리로 착각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구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시는 이유도 그기에 있는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하). 이 약속은 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와 똑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아버지께서 친히. 이 두 번의 약속에서 똑 같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중요한 대목이 하나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입니다. 정말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행여나 유보조항(留保條項) 같은 것은 없을까? 정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가 함부로 기도해서는 안 될 것처럼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주님 스스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6:33).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기도 제목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야고보서>는 이보다 더 엄격하게 기도 제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이 쯤 되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 빼고, 저것 제하고,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과연 무엇을 구해야 할까? 정상적인 부모자식 간이라면 아버지 앞에서 이것저것 따져가며 요청하는 자식은 없습니다. 특히 자식이 어릴 때에는 정말 이것저것 체면 차리지 않습니다. 그냥 마구 떼를 쓰고, 울며 보채고, 졸라댑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떤 기도는 해도 되고, 어떤 기도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졸라댑니다. 적어도 그 부모가 계부(繼父)나 계모(繼母)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비록 나를 입양한 양아버지이긴 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식으로서의 권한은 친자식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친 아들과 양 아들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같이 대하고 사랑합니다. 정말 그럴까? 아무도 함께 놀아주려고 하지 않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모자라거나 못나서도 아닌데 같은 학급 친구들은 그를 멀리 했습니다. 이 아이의 부모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리고 아픕니다. 그런데 그 학급에 한 학생이 그를 가까이 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 등하교 길에 함께 하며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끔 집에 까지 와서 놀다가기도 합니다. 이 외톨이 아이의 부모는 이 친구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정이 이 부모의 심정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절). 이것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조건입니다. 이제 보니 ‘에서’의 착각과 하나님의 착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에서’의 착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착각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이었습니다. 알고도 모른 채 그냥 눈과 귀를 닫아준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분 아들의 친구로, 동생으로 받아들여준 것이었습니다. 무근 근거로? 그분 아들을 대하는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에야 아나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야곱’처럼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부모와 형제를 속이며 곤경에 빠뜨려도 괜찮은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야곱 이야기>에서 핵심 주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야곱’이 무엇을 위해서 형과 아버지를 농락했을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가 추구한 것은 일상의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치하고 시시한 사기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하찮은 것을 추구한 쪽은 오히려 그의 형이었습니다. ‘에서’는 하찮은 것을 위하여 귀한 것을 버리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 자였습니다. 그는 금을 돌 같이 여겼고, 돌을 금 같이 여겼습니다. 오죽했으면 <히브리서>가 그를 “망령된 자”, 즉 “정신 나간 자”로 부르겠습니까(히 12:16).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참고. 17:3). 가엽게도 우리의 ‘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경멸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또 조금 있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벽이 가져다 줄 또 다른 극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는 주님께서 어렵게 비유로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참고. 28-29절).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일대 일로 대화할 것이며, 선생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28절).
“또 조금 있으면”이 의미하는 바가 부활이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든, 또는 앞으로 있을 주님의 재림이든, 모두 종말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미래의 사건으로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당시 사도들이나 오늘의 교회는 이미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이해)”과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들이나 오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혼란 가운데서 주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들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이며, 물을 필요도 없어져버렸습니다(참고. 16-18절). 또한 무엇을 기도하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이를 들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능력을 뽐내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