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도 맹인인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39-41약 9분 분량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물론,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은 그야말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그 말을 뒤집어 다르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예외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예수님의 말들을 몇 군데 찾아 모아보았습니다. 가히 <난센스 모음집>이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일관성을 찾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12:47).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3:18);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도대체 어느 말씀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을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참고. 마 12:39; 16:4; 눅 11:29).
하지만 ‘요나’가 누굽니까?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교사로 가는 것이 싫어 도망치던 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나중에 억지로 가서 설교를 하긴 했습니다만, 자기 설교를 듣고 이 족속이 믿고 회개하자 그게 보기 싫어 하나님에게 불평과 항의를 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자신도 이 선지자와 같다는 말씀인가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복음을 강의하실 때, 쉽고 평이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요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 화자들은 그분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합니다(마 13:34; 막 4:34). 오죽 했으면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예수님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자면, 천국의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2). 참으로 예수님의 인격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입니다. ‘요나’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더 낫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도대체 이 세상에 왜 왔는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해. 그러나 모두가 다 구원받아서는 안돼!” 이게 뭡니까? 마치 무슨 코미디극 대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이 소위 “개그” 수준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역 차별.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분의 말씀은 지독한 편애(偏愛)와, 멸시와, 저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편애란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에 대한 것이요, 멸시와 저주라 함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편애란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겠다는 것”이요, 멸시와 저주는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하나님의 편애도 문제지만, 저주와 모독은 더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하게 잘 보고 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저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슨 원한이 많이 맺혔기에 이토록 그들을 혐오하신다는 말입니까!
물론 우리는 ‘요나’의 불평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쪽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이 살아오던 이방 족속이 어느 날 설교 한 번으로 회개했다고 해서 다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오던 이스라엘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역차별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역차별 하신다는 점은 “포도원 품꾼”에 관한 비유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참고. 마 20:1-12). 하루에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자나,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다가 해질 녘에 잠시 들어와 일을 한 자나 똑 같이 받습니다. 이것은 정의(正義)가 아닙니다. 이에 가장 오랜 시간 일 한 자가 화가 나서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탕한 동생을 둔 형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에 대해서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눅 15:11-32). 오히려 그 동생이 죽이고 싶도록 얄밉습니다. 자기 몫 다 써버리고서는 돌아와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란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그런데요 그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지 않습니까! 그것도 또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 치더라도, 잔치 비용으로 왜 형 돈을 쓰느냐 이겁니다.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이 역시 역 차별의 전형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대중들 앞에서 이들을 모독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쪽은 오히려 예수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다면, 방탕한 작은 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어줄 수 있다면, 불과 한 두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꼭 같은 품삯을 줄 수 있다면, 왜 이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아량과 자비를 베풀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태도는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절). 마치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지금 ‘바리새’인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더욱 큰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지금 받는 역차별. 우리는 심판에 대해서 말할 때 늘 미래에 다가올 종말의 심판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살아있으면서 맹인이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양치기 소년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시도 때도 없이 늑대가 쳐들어온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대다가 정작 늑대들이 왔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던 그 소년의 처지 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절친했던 한 친구도 지금 이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직장 생활과 결혼 그리고 유학 등으로 이십여 년을 만나지 못하고 지내다가, 수년 전 어떻게 연락이 닿아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 아내가 암에 걸려 위중하게 되었다며 잠깐 돈 좀 꾸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도와준다는 기분으로 기백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이 돈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 만나는 고등학교 동기들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돈을 빌어서는 갑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골프 접대를 하겠다며 가까운 친구들을 한 때 자신이 근무하던 ‘말레이시아’까지 초청을 해서, 친구들은 모두 부부 동반하여 갔습니다만, 그는 공항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그냥 돌아와야 했습니다. 얼마 후 친구들이 그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미안하게 되었다며 다시 한 번 이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이겠거니 하고 찾아 갔습니다만, 이번에도 허탕이었습니다.
이 친구 사는 게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펴져 완전히 사기꾼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절친했던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들이 한 번 씩 부부 모임을 갖습니다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친구로 대접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 내세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아무도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 자체가 그를 향한 동료들의 심판일 것입니다. 그는 실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연습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운명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는 이 금언을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젊어서부터 아주 고약한 훈련, 즉 남을 속이고 약속을 어기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여기까지 가져 온 것입니다.
눈먼 자들. 그런데 더 큰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자신 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영화 <식스 센스>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내 친구처럼 눈이 멀었다고 하시는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뭐, 우리보고 맹인이라고? 정신 나간 녀석 같으니? 귀신 들린 자가 따로 없구먼! 어리석은 ‘사마리아’인 같으니라고!” 이것이 이들의 반응이었습니다(참고. 8:48; 10:20).
똑같은 선지자, 똑같은 설교, 똑같은 아버지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 이처럼 극명하게 갈릴 수가 있을까?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로키’ 산(Rocky mountains) 지역에는 미 대륙을 동서로 나누는 “로키 산 분계 령”(continental divide)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이 분계 령은 작은 수로(水路)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수로를 기점으로 물이 서부 태평양과 동부 대서양으로 나누어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은 개천 중앙에 있는 한 작은 돌멩이입니다. 이 돌멩이가 한 방물의 빗물을 태평양의 물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또 대서양의 물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 또는 “거침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선언 때문에 걸려 넘어집니다. 십자가가 자신의 죄와, 허물과, 무지와, 그리고 무능력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류의 고상한 스승으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며,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구해주는 거룩하고 고상한 예수를 누가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문제는 십자가의 고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볼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는 불필요했고, 또한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 없다는 사람을 누가 도우려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들이 맹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