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두를 위한 질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34-38약 9분 분량
무식하고 천박한 소경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개망신을 당하고 만 ‘유대’ 종교 전문가 집단. 그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버렸으며,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맹수처럼 포효(咆哮)하는 이들 모습을 한 번 볼까요: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완전히 이성을 잃은 패자(敗者)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향한 비난과 정죄가 정작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피하려다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빛과 어둠의 분리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을 서막 이후 지금까지 반복해서 관찰해 왔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정말이지 유신론자가 되는 것보다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소경은 이제 사회적 죽음을 당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선언 받았으니 말입니다. 예수에 대한 솔직하고 거침없는 증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어찌 이 사람에게만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의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처럼 행동하면 나도 똑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시험 삼아 내가 말끝마다 예수님 이야기를 꺼낸다고 상상해봅시다. 얼마 안 가서 나와 대화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버리겠지요. 내가 증언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멋들어지게, 효과적으로 증언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모두가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칭찬보다는 대부분 반대나 무관심을 기대하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미워 배척했다면 그의 패거리도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예수님의 이와 같은 경고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의 품으로.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어디로 쫓겨났을까? 바깥 어두운 곳이었을까? 그곳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전에 자기가 했던 행동을 놓고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울부짖음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 20:7-10)
언젠가 이 본문을 놓고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묵상할 기회를 갖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만, 한 마디로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고 있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놓고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유혹하고 또 강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지금 하나님을 결혼을 빙자한 성 폭행자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이 맹인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까요? 모르긴 해도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외로움” 등으로 크게 위축되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라도 당연히 그랬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그는 또 다른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눈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의 몸은 세상 밖 어두운 곳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또한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내쫓긴 곳은 ‘아담’이 내쫓겼던 “에덴의 동쪽”도 아니었고, ‘예레미야’가 내던져진 어두운 지하 감옥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던져진 곳은 주님의 품속이었습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35절상)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일대 일로 그를 만나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 자신이 의도했던 것도, 그를 내던진 자들이 의도했던 바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의 표현대로라면, “고난 받은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려는 참입니다(참고. 시 119:71).
한 집사님이 추석을 맞아 조상 묘역에서 잔디를 깎다가 기계 날이 돌에 맞아 튀어나와 그분의 다리에 박혀버렸습니다. 이분은 그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나서 조상의 묘역을 다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자손 사고 나는 것도 막아주지 못하는 그런 조상은 있으나 마나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고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고 대들었다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늘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더 힘들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절규하신 것도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러 하셨다면, 그분의 사도들이 예수께서 이제 곧 그들을 떠날 것이라는 말에 크게 당황하고 실망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14:5, 8). 하지만 주님께서는 동요하는 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고 다짐하셨습니다.
<삼손 이야기>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20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 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0-23)
‘삼손’은 하나님께서 언제 그를 떠나신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아오셨는지도 몰랐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언제 다시 그에게 돌아오셨을까요?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떠나는 순간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실은 처음부터 늘 그와 함께 계셨던 것이지요. ‘삼손’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있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나실인’(ryzIn, 나시르), 즉 “분리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것은 이 맹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는 결코 혼자 고아처럼 남겨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삼손’에게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도 찾아오신 것입니다. 혼자 남겨져 있었을 그에게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35절).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찾아갔으며, 그를 만나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지금 이 시점에 왜 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한 것일까요? 일견 지금 그에게는 불필요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왜일까? 그는 눈을 뜨기 전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대로 쫓아 행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갔을 리는 없습니다. 그는 믿었고, 행했으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게 되었습니다(11절). 뒤이어 그가 선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17절).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는 확신도 갖게 되었습니다(3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지금 예수께서 묻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체득(體得)해서 알고 있는 그 모든 지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설령 중요하다 해도, 그것으로 “인자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인자를 네가 믿느냐?” <성경>은 이 질문을 모든 개개인이 대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것 무엇이겠습니까? 목숨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맹인에게 복음, 즉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진정 구원받기를 원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인자”일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결국 <성경>의 핵심 인물은 인자, 즉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이름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죽기 전에, 그분의 제자들이 어떻게 그분을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분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괴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요지인 즉은,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 선생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불교의 고승(高僧)들께서는 심심찮게, “부처가 되려면 부처를 잊어야 한다”고 선문답하듯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질 새라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도, “예수쟁이가 되려면 예수를 잊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정신인 것이지,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차를 타면서 누가 그 차를 만들었는지, 그 차를 생산한 회사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운전하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두 번에 걸쳐 그분은 자기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지(롬 10:13), “누구나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주(主)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절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미루고 있습니까?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요?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이제 비로소 이 사람은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인자를 믿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