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성전을 떠남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59약 8분 분량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이 되어야 함을 앞선 설교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대답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들은 답변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하고 있습니다(59절). 그나마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대화가 이제 폭력으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가슴을 닫습니다. 스스로 어둠과 죽음 가운데 남아있겠다는 각오와 결단입니다. 왜 좋지 않은 일에는 결단하고 행동하는 일이 이처럼 쉬운지 모르겠습니다.
초막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느낌은 축제의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와 불신, 살기(殺氣)와 광기(狂氣) 일색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동생들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아예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우대에서 다니려 아니 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7:1); 그들이 독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느리(8:59)
하지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모습 인가요! 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어둠과 죽음 가운데 방치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초막절의 절정은 “물의 축제”와 “불의 축제”입니다. 거기다가 두 축제의 영적인 의미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덤으로 들은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7:37);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어 “생수”를 마시지 않았고, “세상의 빛”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들어 그를 치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은 이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도피.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리들이 바라는 대로 되었습니다.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 없애버리고자 했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순순히 사라져 준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 예수를 잡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숨어서 몰래 성전을 빠져나갔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두 번 다시 예수를 마주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떠나주었으니 이제 두 번 다시 그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렴 몰래 빠져 나간 자가 다시 제 발로 걸어들어 올 리는 만무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의 미친 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것이고, 핏대 올려가며 더불어 논쟁을 벌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간섭과 잔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일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도 없는데, 참으로 속이 후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평상시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결말이 과연 그들 인생에 축복이 될까?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 것이 축복이 될까?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가 없는 것이 유익이 될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들입니다. 무리들은 예수에 대해서 아무런 해를 끼칠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에서 예수를 몰아낸 결과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은 나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주어 탁월한 삶을 살도록 하려고 왔습니다. 더 이상 어둠 가운데서 헤매지 않고, 질서와 균형 잡힌 삶을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이며, 무엇이 무의미한 일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려고 왔습니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도 되는지 혜안을 갖도록 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런 분을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과 영역에서 몰아내고 멀리할 때, 내가 얻게 되는 유익은 과연 무엇일까요? 역시 대답이 필요 없는 한가한 상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유기. 그러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화자의 설명은 단순히 “유익과 손실”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소극적으로 그들을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냥 “지나쳐버린”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이들 종교 지도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무지와 죄악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각자의 “갈대아 우르”에 머물기를 원했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선택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그렇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영영 그렇게 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해주시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포기한 자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1: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1:28).
왜 그분은 어떤 자는 구원해 주시고, 어떤 자는 내버리시는지 정말 알 길이 없습니다. 순전히 자기 뜻대로 그렇게 하신다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체 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그런데 정말 슬프고 끔찍한 사실은 버림받은 자는 자신이 정녕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삼손’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21절). 영웅이 비참하게 노예로 전락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즉 이스라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경제적 파탄과 부도는 개인이나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이 내려온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패했으며(출 17:11), ‘아이’ 성을 공략할 때에도 ‘여리고’의 승리에 취해 있다가 망신을 당합니다(수 7).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즉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진중에 두고 ‘블레셋’과 싸울 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였으니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사무엘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10-11)
나중에 패배의 소식을 들은 제사장 ‘엘리’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할 명장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함께 했는데도 이처럼 개망신을 당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었습니다. 훗날 ‘비느하스’의 아내가 유복자를 낳으면서 고백한 내용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4:21-22)
한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한 국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면, 교회라고 예외일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곧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있는 이 장면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비켜갈 것인지에 대한 예고이자 예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 사이에서 이점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예수교회.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떠나고 있는 이 모습 또한 극적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징은 이것입니다. 즉 이제 ‘유대’ 성전은 그리스도 없는 성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버린 성전, 하나님이 없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무슨 건물이나 장소에 제한받으시는 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에게 장막이나 성전은 ‘임마뉴엘’의 징표이자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막 속에 지성소가 없고, 언약궤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신랑 없는 신부 처지가 되어버린 셈이지요.
<성경>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교회와 성전으로부터 예수를 몰아낼 수 있으며, 죽일 수도 있다고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오늘 나는 어떠합니까? 매일처럼 기도를 하는데, 실은 하나님은 듣지 않고 딴 곳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 마음에 아무런 갈등이나 불편함이 없었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라 생각하며 감사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내 혼자였기 때문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 응답 받았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공중기도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 예배를 인도하시며, 지켜보고 계실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들 질문에 대한 유일한 의미 있는 답변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