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날이 새면 집 지으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4-5약 8분 분량
규장 문화사에서 출간한 <사랑의 편지>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히말라야’산맥 아래 ‘카투만두’라는 조그만 왕국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의 낮은 따듯한 봄날 같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히말라야’의 찬바람 때문에 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이 나라에 전설적인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긴 이름의 새 입니다. 이 새는 따듯한 낮에는 종달새나 꾀꼬리 마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즐깁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히말라야’의 찬바람이 눈발을 날리며 찾아오는 혹독한 밤이 되면 이 곳 저곳을 방황하면서 끝없이 이렇게 울어댄다고 합니다:
아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날만 새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
밤이 지나고 낮이 다시 봄날 같은 낮이 됩니다. 이 새 위로도 햇볕은 따듯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 새는 지난밤의 고통이나 다짐은 다 잊어버리고 따듯한 봄의 향연에 빠져버립니다. 다시는 밤이 안 올 것처럼 집짓기를 잊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밤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고, 이 새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다시 이렇게 울어댑니다:
아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날만 새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즉 늘 결심은 하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반복되는 후회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상징이자 교훈일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늦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시절 다 허송(虛送)하고 막판에 끗발 내는 사람을 두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사사기>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습니다.
힘 있고 건강한 젊은 시절을 만용(蠻勇)과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송세월 하다가, 좋아하던 여인의 배반으로 머리털 과 눈알이 다 뽑히고 난 뒤에야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하나님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 ‘삼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최후가 장렬(壯烈)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자랑스럽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삼손’의 처지나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새의 처지나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밤이 오리니.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전 3:1). 그리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전 3:2). 전도자는 젊은 시절에 이와 같은 심정을 토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 이와 같은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철들자 환갑이” 된 셈입니다.
본인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나이가 들고 은퇴할 시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도자의 이 말씀이 전에 없이 깊이 와 닿는 느낌입니다. 하루하루가 아쉽고, 정년(停年)을 좀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강의와 더 좋은 연구를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심정이셨나요? 제자들에게 동업을 제안하시면서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왜 그런가요?
나 같은 사람이 본인의 대학원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처럼, 내 은퇴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전에 무엇인가 이루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학위 과정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학위를 주어 졸업도 시켜야 합니다. 또 매년 실적 평가를 통해서 연구비를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늘 쫓기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독려하고 야단도 쳐야 합니다. 이것은 아마 기간 내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건설업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왜 이처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마감 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좀비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서, 해가 지고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되고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둠이 깔리면서 낮 동안 숨어있던 좀비들이 여기저기 구멍에서 기어 나와 활동을 개시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에 전율하면서, 낮이 참 짧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 짧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시간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 “밤이 올 테니 서둘러 낮 동안에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 하루가 천년 같으신 분이 시간에 쫓길 리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가지신 분, 그래서 언제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내일 재개(再開)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시간이 짧다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좀 먹는다”는 말은 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돈 뿐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유를 가지신 분조차도 “밤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그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 인생에 언젠가는 밤이 올 것이라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설교자로서 내가 이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교회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만일 부모라면, 내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훈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이 그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면 그는 내 자식이 아니라 세상의 자식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아이는 영원한 아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놓치거나, 게을리 한다면 기회는 두 번 다지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다 큰 자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든 그르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더 나아가 필경은 자식들이 나를 가르치려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가르친다? 순리(順理)가 역리(逆理)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부모에게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게으름의 대가가 찾아온 것이지요.
아직은 낮이라. 내 인생에도 언젠가는 이처럼 밤이 오겠지요. 그런데 내 인생의 밤이 반드시 죽음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시점이 바로 내 인생의 밤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될 그 때가 바로 내 인생에 밤이 찾아온 시각이 아닐까요?
밤은 혼자 오지 않습니다. 그 밤과 함께 주님도 다시 오십니다. 마치 도적과도 같이 홀연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그 때에는 상냥하고 친절한 동업자로서가 아니라, 단호하고도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동업하겠다고 제안해 보아야 이미 때가 지난 후입니다. 더 이상 동업자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분과 동업할 수 있는 기회는 그분이 다시 오실 그 때까지 만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인생의 밤이 오기 전까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절). 그분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나봅니다. 서두르지는 않되, 그렇다고 느긋하게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그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오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번 한 주의 일은 무엇입니까? 올 한 해에 반드시 “해야 할” 과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일이 내 일이기 때문입니까? 행여나 “내 일”이 하나님의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이점이 걱정이 되었던지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솔직히 사람들의 동기 유발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었으면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하라.” 아, 먹어서 남 줍니까? 공부해서 남 줍니까? 열심히 피아노나 기타 배워 남 줍니까?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로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언젠가는 그 모든 지식이나, 재능이나, 기술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은사”로 거듭나게 될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섭리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자기 개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시험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학생은 도와주려 해야 도와 줄 길이 없습니다. 내가 그 학생 대신 답안지를 기록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써놓은 답안지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단 일점이라도 점수를 주게 되지요.
하나님의 동역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동역자들이고 친구들입니다(고전 3:9).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활용하실 지를 생각하면 즐겁고, 가슴이 뛰며, 흥분이 되지 않습니까? 은사는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오지 않습니다. 한 뿌리, 한 줄기로부터 여러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은 것처럼, 우리의 은사도 지극히 작은 한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응용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요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당연한 내 일을 마치 남의 일로 여기며 하릴 없이 세월을 죽이고 있는 자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권고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