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0과, 전체 원고
생명의 물/세상의 빛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1-8:59약 212분 분량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7:37-38)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7장과 8장은 일견 별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나, 실은 초막절과 관련해서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 것입니다. 단지 중간에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7:53-8:11)가 삽입되어 있어,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원래는 <요한복음>의 한 부분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두 장에서 표적은 잠시 무대 뒤로 물러나고, 대신에 초막절 축제와 관련된 의식이나 장치 및 기구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강론 역시 이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의미심장한 영적 주제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 명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제입니다. 그 시기는 7월 15일(오늘날 9-10월 사이), 즉 이 달 두 번째 안식일에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칠일간의 축제 끝에 여덟째 되는 날 다시 거룩한 예배로 마무리합니다. 축제의 성격 상 이 날은 오늘의 추수감사절에 비견될 수 있겠는데, ‘유대’인들은 이날에 일 년의 수확(포도주, 과일, 올리브 등)을 감사하며, 동시에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기념합니다. 이 기간 중에 그들이 읽는 <성경> 본문은 <전도서>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여전히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에 대해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이 축제의 가장 의미심장한 행사 중의 하나는, 이 기간 동안 낮에는 매일 아침 ‘실로암’ 연못으로부터 물을 길어와 성전 물 항아리에 붓는 “물의 축제”가 있고(참고. 7:37-38), 밤에는 마치 오늘의 횃불 축제처럼 성전 내 “여인의 뜰”에서 거대한 촛대 불을 밝혀 “불의 축제”를 즐기는 것이었습니다(참고. 8:12). 예수님은 이 두 축제를 자신의 강론(7:37-39; 8:12-20)의 소재(素材)로 도입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이 축제와 연관시키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지각 있는 청중이라면 예수님의 강론은 그들 가슴 속에 깊고도 지속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정 그분은 진정 시청각 교육의 대가였습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 7-8장 전체를 흐르는 두 가지 큰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의 축제를 통해서 드러나는 빛(또는 진리)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를 대하는 사람들(그의 형제들, 무리, 유대 당국자들)의 태도나 결정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는 어두움 즉 궁극적인 분리와 심판이 그것입니다. 달리 정리하자면 두 장을 연결하는 핵심 주제를 “계시와 분리”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막 이후 내내 이 두 주제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그 속성상 드러내고 밝히는 기능이 있지만, 동시에 그림자를 수반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빛과 그림자 즉 계시와 분리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 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바로 이 점을 화자는 탁월한 문학적 솜씨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야기의 전체적인 갈등구조가 그렇습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단이며, 율법을 파괴한 자로 일찌감치 규정짓고서는 그를 죽이려고 작정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조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대중의 축제 행사에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마치 인민재판정에 스스로 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화자가 축제를 묘사하고 있는 방식과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백성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하나같이 크고 작은 일련의 비난과 고소들을 퍼 붇고 있습니다: 사기꾼(7:12, 47); 교사 자격도 없는 무식한 자(7:15); 안식일을 범한 자(7:21); 출생지가 분명한 거짓 메시야(7:42).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 외에도 수사적 기법 또한 뛰어납니다. “역설”과 “침묵”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1) 7:17-18(첫째 및 두 번째 기소에 대한 대응); (2) 7:22-23과 5:17-30(세 번째 기소에 대한 대응); (3) 7:28-29, 37-38, 40-43 (거짓 메시아라는 항의에 대한 대응). 이러한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판단은 항상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두 장에서 화자가 진정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은, 대중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증거하며, 설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퍼 붇는 온갖 비난성 질문들과 고소들의 정당성 여부를 오히려 되물음으로써, 대중들(연극의 청중들 또는 배심원들) 앞에서 심판 받고 있는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현명한 독자라면 7장에서 심판대 위에서 심판받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7장과 8장은 동일한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만, 편의상 다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생명의 물: 예수 그리스도(7:1-52)(10과)
(2)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8:12-59)(10과)
(3) 간음한 여인(7:53-8:11)(11과)
처음 두 에피소드는 시기적으로 한 번의 초막절 기간 내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아마 별도의 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앞의 두 에피소드와 전혀 별개가 아니라 신학적 주제에 있어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일은 독자의 몫입니다.
배경. 본문의 일차적인 배경, 즉 “설화세계”의 배경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대’ 초막절입니다. 7장의 序頭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에게 이 축제에 참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고 얼마 후 혼자 초막절의 어느 시점에 홀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그곳 성전에서 무리들에게 강론을 펼치십니다. 늘 그러하듯이, 예수님의 설교는 듣는 이들의 양심을 찌르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에 대한 엄청난 선언 즉 “내가...이다”(ejgw...eijmi; I AM)로 말미암아 엄청난 저항과 분노를 촉발시킵니다.
이야기 전편을 흐르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충돌과 갈등으로서, ‘유대’인들과 대중들의 적개심이 극에 이르고, 예수님은 이들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8:59). 그러나 이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소극적으로 그들을 피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리들을 어두움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리들은 자신의 선택을 따랐고, 예수님은 그들의 선택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지요. <로마서>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유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 버려 두사”(롬 1:24, 26, 28).
본문의 일차적인 배경이 예수님 당시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차적인 배경은 “요한 공동체”가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지금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 핍박과 박해에 처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대한 암시는 본문 첫째 단락에서 화자의 해설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한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서막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구조. 흥미롭게도 본문의 배경이 본문의 구조를 자동적으로 결정해 버립니다. 이곳에서는 5-6장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긴 담론(discourse) 대신에 일련의 짧은 대화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분위기는 본문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는 바, 청중들의 질의와 도전 및 반대가 본문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구조는 이들 질문이나 반대에서 드러내고 있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7-8장 전체적으로 이들 주제가 다소 중첩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주제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1단락(7:1-13): 예수님과 축제 참석 여부
(2) 제 2단락(7:14-18): 예수님과 교사자격 여부
(3) 제 3단락(7:19-24): 예수님과 율법
(4) 제 4단락(7:25-31): 예수님의 기원
(5) 제 5단락(7:32-36): 임박한 예수님의 이별
(6) 제 6단락(7:37-39): 생명의 물
(7) 제 7단락(7:40-44): 백성들 간의 분리
(8) 제 8단락(7:45-52): 유대당국자들 간의 분리
(9) 제 9단락(8:12-20): 세상의 빛
(10) 제 10단락(8:21-29): 하늘로부터 온 자
(11) 제 11단락(8:30-36): 자유와 노예
(12) 제 12단락(8:37-40):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
(13) 제 13단락(8:41-47): 두 자녀
(14) 제 14단락(8:48-59): 아브라함보다 앞선 예수 그리스도
신학과 신앙
1. 그리스도와 축제(1-13절)
이 단락은 예수님의 첫 번째 담론에 대한 일종의 서론에 해당되며, 이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는 배경음악처럼 7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감지되는 분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1절)
살기와 위협, 불신과 배척이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이에 더하여 화자는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들 살기등등한 유대 당국자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일반 대중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2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2-13절).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결국 13절은 1절과 함께 수미상관의 기능을 하면서, 이 단락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한 서론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수사적 기법은 이곳에서 수차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주는 역설은 그것이 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2절). 알다시피 초막절은 ‘유대’ 명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제입니다. 흔히 “장막절”로도 불리는 이 축제는 참가자들이 집 근처나, 들에서 천막이나 나무 가지로 된 집을 지어, 그 안에 머물면서 축제 기간 내내 보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입니다(참고. 레 23:34-36). 축제의 시기, 의미 등등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단지 이 축제의 이중적 특징-종교적 특징과 농업적인 특징-에 대해서 복습하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참고. 서론).
이 즐거운 축제의 때에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갈릴리 집에 머물고 계십니다. 무엇이 그를 이 축제에 참석을 못하도록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당연히 몰랐다고 보아야겠지만) 철없고 무심한 그의 동생들은 형님이 왜 그렇게 촌구석에 박혀 있느냐고 따집니다.
3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러라(3-5절)
동생들의 태도는 냉소와 야유에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거나 이타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순전히 이기적인 것이었으며, 요구하고 있는 바도 여느 ‘유대’인과 찬가지로 또 다른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서 유명인사가 되라는 재촉인 것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실은 다름 아닌 마귀가 처음부터 끈질기게 요구하고 유혹하던 것이었습니다(참고. 마 4:5-7).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냉소하며 요구하던 바와도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39-40). 이들 모두가 지닌 한 가지 공통점은 “불신”입니다.
동생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치 선문답과 같습니다. 지난 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6-7절)
즉 그 “때”(kairov“, 카이로스)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어떤 특정 시기 또는 결정적인 순간 등을 의미합니다만,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때나 시간(crovno”, 크로노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때”를 지칭하는 또 다른 헬라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예수의) 때”(ὤρα)입니다. 이 경우 의미하는 하는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누가 그 결단의 순간을 알고 있을까? 누가 “결정적인 순간”(헬, καιρὀς)을 결정할까? ‘헬라’식 사고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유대․성경적 사고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형제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그분의 말씀이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인 즉은, 그들이 하나님의 때를 무시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며, 이는 그들이 속한 세상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은 형제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다시 한 번 그 “때”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8-9절)
이 말씀은 동생들의 요구를 회피한다거나, 또는 결정을 아직 내리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음 행동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거절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그 어떠한 조언이나 충고입니다. 절대적 자유의지로 인간의 의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도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형제들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10절)
더 나아가 그분께서는 형제들의 요구대로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예루살렘’으로 행차하신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가셨다는 화자의 설명 또한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화자의 설명은 수사학적으로 일종의 역설입니다. 이는 오히려 그분의 신분에 대해서 더욱 드러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유대’ 당국이 그를 찾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는 모습은 화자의 조롱과 해학이 담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두움 가운데 있는 ‘유대’ 종교를 다시 한 번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그러나 화자의 고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유대’ 당국이 무서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꺼리고 있는 소심하고 겁 많은 종교인들도 함께 고발하고 있습니다.
12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2-13절)
혹자는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만일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 정당한 것이라면 그분은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것입니다(신 13:1-6).
그래도 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분명 그렇다고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드러내놓고 그를 칭찬하거나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같이 심약한 자들도 아울러 고발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와 교사 자격(14-18절)
두 번째 단락부터 여섯 번째 단락에 이르기까지의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초막절 강론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강론의 핵심 내용은 여섯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며, 나머지는 모두 강론의 특징에 관한 것들로서 특히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명절은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명절의 중간쯤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며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4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4-15절)
그분께서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그분의 강의를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예수님의 강의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예수님의 강의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면이었을 것인데, 부드러움과 동시에 권위 때문이었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권위와 관련해서 한 결 같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이처럼 권위와 부드러움이 예수님 강의의 트레이드마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자랏’이나 또는 ‘예루살렘’에서 대중들의 반응은 분노와 적대감이었습니다. 그가 ‘유대’ 당국으로부터 공인된 교사 자격증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존경받는 랍비로부터 문하생으로 수학을 받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일반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면, 그분을 가장 싫어했을 무리는 유대 종교 기득권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유대’ 엘리트 집단의 반발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6-17절)
즉 자신의 자격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16절). 그러나 그분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진위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구절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누구나 자기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헌신된 자 만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답변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다른 방법이 없으며, 단지 누구든 예수님 말씀의 진위 여부를 가려보고 싶은 자라면,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좁은 길을 걸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종의 원리 선언인 셈인데, 아래 구절은 이를 보다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선언으로 반복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절)
즉 누구든지 자신을 대변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말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변해서 그 사람의 영예를 위해서 말하는 자는 믿을 만하며 또 거짓이 없는 법입니다.
이 원칙을 예수님과 ‘랍비’의 경우를 들어서 비교해 보면, ‘랍비’들은 오직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가르치는 자들이며, 반대로 예수님의 동기는 이기적이 아니며, 따라서 가르치는 내용이 일관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율법(19-24절)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는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를 알 수 있다”고 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유대’인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소극적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적극적인 공세를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이라 함은 ‘유대’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일이고, 적극적이라 함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소극적 대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예수님은 일단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전제에 동의하고 계신 듯합니다. 즉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참고로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생각하던 것처럼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고 교정하신 일이 그것입니다(참고. 6:34).
그런데 율법에 대해서도 ‘만나’의 경우에서처럼 이들 ‘유대’인들은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모세’의 자랑스러운 후예들로서,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은 교정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쪽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이들이 진정 ‘모세’를 믿었더라면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 즉, 이는 그가 그분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참고. 5:45-46). 더 나아가 그분을 믿는 것은 고사하고 죽이려고 안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유대’ 당국의 음모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말에 펄쩍 뛰며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심지어 그분의 친족들까지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놓고 마귀의 힘을 빌어 그렇게 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참고. 8:48-59; 막 3:21-22).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그분의 “마귀 들린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행한 단 한 번의 “불법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21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내가 안식일을 위반한 단 한 번의 그 일 때문에 나를 비난하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암시하는 바는 “그런 너희들은 항시 그 법을 위반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다름 아닌 그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할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22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21-24절)
예수님의 논리인 즉은, 안식일에 단 한 번 병자에게 기적을 베푼 일이 문제가 된다면(예. 5:1-9), 안식일마다 할례를 주는 행위는 지속적인 위법행위로서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이지요.
4. 그리스도의 기원(25-31절)
네 번째 단락에서 대화의 초점은 다시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원에 관한 논쟁이 그것입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단어, “예루살렘 사람”(@Ierosolumivth", 히에로솔뤼미테스)을 만나게 되는데 이 단어는 이곳과 <마가복음>(1:5)에서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주민”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화자는 분명 이 집단을 다른 곳에서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 온 일반 ‘유대’인들과는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에 비해 당시의 상황, 즉 예수님에 대해서 적개심과 살의(殺意)를 가지고 있는 ‘유대’ 공회의 음모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 두 구절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25절)
위에서 보듯이 “무리”와 “예루살렘 사람” 사이에는 분명 인식의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름대로 자신들 만의 적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6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6-27절)
이들 역시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26절), 그 근거로 예수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27절). 그들에게는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그가 ‘메시아’일 수가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그의 출신이나 기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메시아’에 관한 보편적인 도그마(dogma)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출신이나 출현에 대해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상반되는 언급도 있어 다소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메시아’가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함을 밝히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4-6; 믹 5:2)
이뿐 만 아니라, ‘메시아’는 옛적부터 항상 있어왔다는 <다니엘>의 언급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그렇다면 이들 “예루살렘 사람”은 ‘메시아’에 관한 이 같은 전승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기존의 전승들을 모두 거부했던 것일까?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기원에 관한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의 도그마는 그 자체로서 역설이자 아이러니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역설이라 함은 ‘메시아’의 기원에 대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인식이 그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그처럼 철저하게 무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28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8-29절)
예수님의 답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자랐다는 점에서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의 지식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점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절). 하지만 이들이 꿈에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가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절).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자연적인 기원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초자연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28절하). 만일 이들이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해서도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기원에 대해서 자신의 말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절).
화자는 이 단락의 마지막 두 절에서 축제 기간 동안 일어나고 있었던 변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30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0-31절)
그 변화란 “(빛과 어둠의) 분열과 분리”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과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30절).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 반면 “무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반어법적인 질문이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리?”
지지자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당시 ‘메시아’에 관한 또 다른 인식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유대’ 사회는 전통적으로 기적을 ‘메시아’의 출현과 연관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를 ‘메시아’ 즉 “두 번째 해방자”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비교의 대상은 두 인물이 행한 기적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도, 새로운 해방자 즉 ‘메시아’는 기적의 내용이나 수에 있어 “출애굽” 당시의 ‘모세’를 능가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명절에 모였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서 동정적이며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5. 그리스도: 임박한 이별(32-36절)
‘바리새’인들은 무리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점차 가열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의 그에 대한 일련의 공식적인 조치들을 취하게 되는데, 성전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들을 충동질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합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32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결코 한 통속이 될 수 없는 무리들인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데에는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가 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순간에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자기를 없애려는 음모(陰謀)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스스로 사라진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
그런데 이 말씀은 마치 시나 노래의 후렴구처럼 지금 이후부터 계속해서 듣게 될 것입니다(참고. 13:3, 33-36; 14:4, 28; 16:5, 10, 17). 예수님이 사람들을 떠나신다는 것은 그들을 버리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것은 곧 심판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이 기회를 거부하고, 영영 놓쳐버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선언은 역설의 심도를 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절)
그러나 청중들의 반응은 그들의 오해만큼이나 역설적이며 아이러니합니다.
35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5-36절)
이들의 말은 훗날 공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대제사장 ‘가야바’가 했던 선언과 함께 위대한 역설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참고. 11:49-50). 이들은 지금 부지중(不知中)에 복음에 관한 예언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훗날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 전파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들의 관심사는 예수께서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로마 제국 내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동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상대로 가르치게 될 것인가 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동포들을 상대로도 성공하지 못한 사역이 어떻게 이방인들을 상대로 성공을 거둘 수 있겠느냐는 냉소인 것입니다. 특히나 당시 ‘헬라’인들은 모든 ‘유대’적 전통과 관습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성공 가능성은 더더욱 낮을 것이라는 것이 비판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구절을 읽고 있었을 첫 독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 일이 실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단순히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유대’ 공회가 음모하고 실행했던 바로 그 일,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성공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제거해 버렸다고 자신했던 인 그 일을 통해서, 기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대로 자신이 “떠남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버린 복음이 세게 만방에 퍼져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6. 그리스도-생수(7:37-39)
여섯 번째 단락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본 과(課)의 첫 번째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물”과 “세상의 빛” 두 주제 중에서 첫 번째 주제에 대한 강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단락의 처음 두 절(37-38절)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요한복음> 특유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과, 미래에 있을 그분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절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6:35와 밀접한 병행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앞선 선언(6:35)은 37-38절의 선언과 달리 이스라엘의 대축제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아 선언의 극적 효과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초막절 행사의 장관(壯觀)은 낮과 밤에 각기 행하는 두 가지 다른 의식에 있습니다. 즉 낮에 행하는 의식(儀式)은 “물의 의식”이며, 밤중에 행하는 의식은 “불의 의식”으로서 요즈음으로 치면 “횃불 놀이”(camp fire)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의식을 보지 못한 자는 초막절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자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예컨대, “물의 의식”의 경우 새벽녘에 제사장들은 행렬을 지어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걸어가서 금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다시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오는 도중 궁전 내전의 남쪽 수문(水門)에 이르면 ‘쇼파르’(일종의 트럼펫)가 세 번 울려 퍼지는데, 이는 그 옛날 <이사야>의 선언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0). 나팔 소리와 함께 제사장들은 제단 주위를 돌며, 이에 맞추어 성전 성가대는 “할렐루야 송”(시편 113-118)을 합창합니다. 성가대의 합창이 시편 118:1, 즉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에 이르면 모든 참가자들은 오른 손에는 한 묶음의 종려나무 가지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고, 왼손에는 감귤을 들고(추수를 상징함) 이 구절을 세 번 반복해서 복창(復唱)합니다. 그리고는 한 제사장이 두 개의 은 접시가 놓인 제단 위로 올라가 한 쪽 은 접시에는 포도주를, 또 다른 은 접시에는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붓는 소위 전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 모든 의식이 끝난 후에는 참가객들은 제사장을 향하여 “당신의 손을 드시오”라고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모든 의식이 순조로이 다 행해졌다는 표시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두 가지 상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수확과 관련한 추수감사의 의미로서, 이듬해에도 풍성한 비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슥 14:16-17). 그러므로 만일 축제기간 중에 비가 내리기라도 한다면 이는 분명 그 이듬해에도 충성한 비가 내릴 것이라는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초막절과 관련한 또 하나의 상징은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속행위 이후 계속되는 광야에서의 구원행위를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물과 관련해서는 바위로부터 물을 내어,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었던 역사적 사건(출 17:1-6)을 상기하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과거의 행위를 기초로 하여, 미래의 계속된 보호와 인도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초막절의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선언은 당시 축제에 참석하고 있던 무리들의 마음속에 깊고도 지속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7-38절)
다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라는 표현이 다소 애매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축제의 마지막 날인 8일째에는 아무런 의식(물 긷기나 야간 댄스파티)이 없기 때문입니다. ‘랍비’들도 이 날을 “가장 큰 날”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이 날이 일곱째 날, 즉 안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날에는 축제의 절정으로서, 제사장들이 물 항아리를 들고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도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날에 모든 참가자들이 그들 마음속에 축제의 이중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때, 큰 소리로 들려오는 예수님의 외침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한 표현은 또 있습니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나리라”(38절). <성경>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이 선언을 하고 있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복합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 참고: 출 17:1-6; 시 78:15-16; 105:40-41; 겔 47:1-11; 슥 14:11-17.
이 두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사본에서는, 예수님이 그 분에게 오는 사람 곧 그 분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갈증을 풀어줄 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성령의 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화자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절)
즉 성령님은 신자의 마음속에(문자적으로는 배속에) 강물처럼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38절 맨 나중에 나오는 “그”라는 말 뒤에서 끊기보다 그 구절의 가운데에 있는 “나”라는 말 뒤에서 끊는다면, 그것은(NIV 난외주에서처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마시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중요한 차이는 이 두 번째 구성이 “생수의 강”을 신자들에게 하는 약속과 분리시켜놓음으로써 38절에 나오는 “그”가 신자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해석 공히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과 관련해서는 14-1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절 때 자신이야말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들리심”으로 영화롭게 되면, 성령이 부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복의 강이 목마르고 갈증에 타는 세상에 흘러넘칠 것입니다(19:34; 20:22). 화자는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선지자들과 구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던 성령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려면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해설입니다.
7. 무리들 사이의 분열(7:40-44)
이곳과 이어지는 단락은 문학적으로는 일종의 후기(後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다양한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분리와 분열”은 타락 이후 인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기도 함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다양한 반응들이 하등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화자는 우선 청중들이 보여주고 있는 세 가지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0-42절)
한 무리는 그를 <신명기>에서 ‘모세’가 예언했다는 “그 선지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8:15). 그리고 또 한 무리는 ‘유대’인들의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무리는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한단 근거에 입각해서 그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으로 보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이며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믹 2:5-6). 사실 이 구절조차도 유대인들보다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더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화자 특유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예: 26-27절). 즉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해서 그토록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그를 알아보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음을 놀리는 듯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정말로 ‘다윗’의 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참고: 마 1:1; 눅 3:31; 롬 1:3; 딤후 2:8.
어쨌든 예수님에 대한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이 생기고 있습니다.
43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3-44절)
예수님은 이처럼 늘 논쟁의 중심에 서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을 화평하고 연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열하고 싸우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느 누구도 진리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그 속성 상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겠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판단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하나의 판단입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무도 예수님을 잡으려고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고 화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의 그 유명한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8. 당국자들 사이의 분열(7:45-52)
성전 치안을 맡은 “하속”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을 잡아 올 수 없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45-46절)
<마가복음>은 왜 이들이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막 1:22). 이들 하속 역시 자신들의 입으로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분의 권위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이 말은 전적으로 타당한 평가이긴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7-49절)
그들은 하속들에게 ‘바리새’인들 중에서 아무도 예수를 믿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외칩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필경 무식하거나 아니면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고를 내리기까지 합니다. 이 말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일반 대중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대중은 율법에 대해서 무지하며, 그래서 행할 수 없고, 결국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말이나 생각은 지독한 역설로 곧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법을 모르고 어기고 있는 쪽은 무지한(?) 대중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50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0-51절)
그는 마치 자신이 나타날 장면이 아닌 곳에서 불쑥 나타나고 있는 형국입니다만, 그의 역할인 즉은 조롱과 해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즉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의 생각은 착각이요”하며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브루스 밀른’의 말처럼 이 장면에서 화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이들 바리새인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질책인 즉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보니 무식하게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자들은 이 무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구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결부터 먼저 내릴 수 있는가?’’ 그의 이러한 질책은 지극히 율법적이며 성경적이라 아무도 반박할 근거가 없었을 것입니다(신 19:15-19; 17:2-5).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동료 공회원 ‘니고데모’를 무시하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52절)
‘갈릴리’인이 아니라면 ‘갈릴리’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냉소에 가까운 공격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선지자가 ‘갈릴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언급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 ‘갈릴리’는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 ‘요나’만 하더라도 ‘갈릴리’ 출신이 아니던가요(참고. 왕하 14:25)! 화자의 해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강론은 이 장면에서 끝이 나고, 두 번째 강론은 일견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한 에피소드(8:1-11)를 건너 뛰어 8:12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9. 세상의 빛(8:12-20)
이 단락은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을 다루고 있는 곳입니다.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무시한다면, 이 단락은 자연스럽게 앞선 단락(7:37-38)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이 “또 일러 가라사대”(12절상)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루 미루어 강론의 배경은 초막절이 되어야 할 것이며, 무대는 성전 내 “연보궤 앞” 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20절). 이곳에는 아마도 헌금을 접수하는 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예수님께서 종종 대중을 상대로 강론을 펼치시던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참고. 막 12:41 이하). ‘레슬리 뉴비긴’, 140쪽.
이제 무리는 다시 한 번 엄청난 선언을 듣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12절)
이 선언은 <요한복음>에서 일곱 번 등장하는 유명한 선언중의 하나입니다. 나머지 여섯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
예수님께서 앞에서 스스로를 “생명의 물”이라고 선언하시면서, “물의 축제”인 초막절을 통해서 선언의 의미를 연상할 수 있도록 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축제의 또 다른 한 壯觀인 밤의 횃불 행렬과 관련해서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축제 첫 날의 말미에 사람들은 성전 내 ‘여인의 뜰’에 황금 촛대들과 그 각각의 곁에 네 개의 황금 항아리와 네 개의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제사장에 속한 젊은이들이 손에 36리터에 해당하는 기름 항아리를 들고 가서 황금 항아리에 붓는다. 사람들은 그들 손에 횃불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동시에 레위 인들은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인의 뜰까지 나아간다. 이 축제는 밤새 새벽까지 계속되며, 또한 매일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지속된다. 실로 이들은 축제 기간 내내, 잠 한 숨 제대로 안자고 이 행사를 즐긴다. 새벽녘에 한 제사장의 느린 템포의 나팔이 서서히 울려 퍼질 때, 이 축제는 그 날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빛의 축제는, 물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출애굽의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시켜 주는 것입니다(출 14:19-25). 즉 이 빛은 그들을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었던 바로 그 빛입니다. <시편>도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7:1; 44:3).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물과 빛으로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시 19). 이 같은 배경 하에서 “내가 곧 세상의 빛”이라는 선포가 ‘유대’인들에게 주었을 충격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 반응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절)
배척과 거부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선언 즉 “생수”에 관한 선언(7:37-38)에 대해서는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청중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그와 같은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원래 빛의 기능이란 것이 나누고 심판하는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19-21)
‘바리새’ 인들이 배척하는 근거는 증인에 관한 <신명기>의 법입니다. 즉 증인이 증인으로서의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적어도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는 것입니다(신 19:15).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다소 예외입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다른 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절)
하지만 이 주장은 다소 뜻밖입니다. 왜냐하면 증거와 관련한 그분의 앞선 주장과는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5:31). 이와 같은 두 주장이 상호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대언하고 있다고 보면 가능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화자는 이미 서막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1:1).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판단”(심판)은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판단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육체(외모)에 따른”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5-16절)
‘유대’ 당국자들은 이전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바 있습니다(7:454-52).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유의 판단을 타인에게 내리시지 않습니다(15절).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판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 비췰 때 어둠은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빛을 피하거나 원치 않으면 바퀴벌레의 운명처럼 항상 어둠 속으로 물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이 곧 심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심판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6절).
그리스도의 증언, 즉 하나님의 계시는 그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반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그분의 증언은 혼자가 아니라 두 증인이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는 <신명기>의 요구조건도 자동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17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17-18절)
예수님의 증거가 참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즉 만일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한 주장을 일삼으면서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분의 증거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배척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정말 자기 아버지가 보낸 자요, 그 안에 생명과 빛이 있으며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라면, 세상은 세상적인 검증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확증적인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빛으로 나아오든지 어두움 속으로 돌아가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요한복음> 특유의 오해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들은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두 번째 증인에 관한 증거입니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절)
그분이 말하는 두 번째 증인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하는 두 번째 증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서막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롤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5:37).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오해에 더하여 무지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빛으로 나오기를 거절하며, 어둠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 가두지는 못했습니다.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20절)
10. 하늘로부터 온 자(8:21-29)
아직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언젠가는 떠날 것이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다(참고. 14절; 14:2).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절)
사람들은 그분을 찾겠지만, 이미 “생명의 물”(7:37)과 “세상의 빛”(8:12)을 배척한 상태이므로, 생명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죄 가운데 죽어갈 것입니다. (21절). 그 죄는 본질적으로 불신(참고. 16:8-9), 곧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므로 결국 그들은 어두움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갇힌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떠날 것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습니다만(7:33-34), 이번의 선언은 이전 것보다 그 강도에 있어 훨씬 더 강력하고 위협적입니다. 7:33-34에 의하면, 그분이 가는 곳에는 함께 가지도 못하며 그를 보지도 못할 것이라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는 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전형적인 “오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
적어도 ‘랍비’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음부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고의로 살인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주 희박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살인에 대한 <창세기>의 선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다시 말하자면 자살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살 역시 생명의 피를 흘리는 행위이므로 살인죄로 다스릴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오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중적입니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3-24절)
첫 번째 답변은 마치 배경음악처럼 <요한복음> 전체를 흐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주제 선언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23절상). 이 선언은 동시에 이 단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동기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항상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것이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위로부터 온 지식이나 지혜 즉 초자연적인 “계시”를 파악하고 깨달을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즉 “계시”는 “이성”적 탐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은 불신의 결과에 대한 예언이자, 동시에 어두움과 죽음의 영역으로부터 나와서 빛과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절).
그런데 여기서 “내가 그”(I am he)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原文)에 따르면 “에고 에이미”(ejgw eijmi)로서, 직역하자면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 “나는”(I am)입니다. 즉 주어와 동사만 있고 보어(補語)가 없는 문장이 되어버립니다. ‘랍비’들조차도 이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25절상)
예수께서 “나는”이라고 했으니, “나는 누구냐?”하고 되묻고 있는 것이지요. 다소 냉소가 섞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장의 술어가 누구냐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술어가 예수님을 기술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될 수 있을까? 그분의 답변은 마치 그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25하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5하-26절)
이 대답은 ‘유대’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썩 만족스럽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에고 에이미”(ejgw eijmi), 즉 “나는...이다”의 술어 즉 보어를 알고 싶은데 예수님의 답변은 오히려 자신을 뒤로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일단의 영어 성경에서도 이 번역을 그대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실 이야기가 많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나,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6절).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닫지 못하더라(27절)
그래서 일까요?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될 그 시간과 그 사건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절)
인자가 십자가 “들린” 후에야 비로소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들다”(uJyovw, 휩소오)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동사가 이곳에서는 능동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수동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1-32).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즉 “인자의 들림” 즉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유대’인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다”는 “영화롭게 하다”(doxavzw, 독사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13:31-32). 이 구절들은 이미 <이사야>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대로, 과연 그분께서 십자가 “들린” 후에 ‘유대’인들이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들린” 당연한 결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조차도 여전히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서 무지 내지는 부인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예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예수께서 두 번째 오시는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날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바로 이날에 ‘유대’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그 때 얻게 될 지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때는 모든 것이 끝난 이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자유자와 종: 예수와 유대인들(8:30-36)
새로운 단락은 앞선 단락의 결론과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절)
더 나아가 이 구절은 단락 전체(8:30-59)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무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적대적이고 살기등등하기 때문입니다(참고. 33, 41, 48, 52, 57절). 이와 같은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자 ‘머레이’(G. R. Beasley-Murrey)는 대략 아래 네 가지 정도의 이해가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 30절과 31절에서 “믿음”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두 무리는 서로 다른 대상이다. 즉 3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상은 “참된 신자”를 지칭하는 반면, 3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지적 동의(知的 同意)를 보이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일부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것 같지만, 이내 돌아설 정도로 믿음의 기반이 거의 전무한 자들이다.
(2) 두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상 모두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일 뿐이다. 화자가 이미 언급한 바처럼(참고. 2:23), 이들은 종국에는 예수를 잡아죽이는 일에 동참할 자들이며 그분께서도 그들의 속내를 익히 알고 계셨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이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신 것은 이들의 거짓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3) 이들 신자(信者)들은 <사도행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할례 받은 신자들”(행 10:45)로서, 다른 동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율법의 행위에 열심인 자들일 뿐이다(참고. 행 21:20). 이들은 “유대 기독교인”들로서, 사도 ‘바울’이 지적한 바 있듯이,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는 무리이다. 이들에 대한 화자의 입장도 ‘바울’ 사도의 입장과 다르지 않은데, 그들을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로 규정하고 있다(갈 1:6-9). 8장 전체의 분위기도 “요한 교회”가 이들 “유대 기독교인”들과 갈등과 충돌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갈라디아서>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할례 등과 같은 ‘유대’의 전통적인 종교적 의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로서, ‘바울’은 이들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4) 30-3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신자들의 믿음과 관련하여, 이들의 믿음에 진정성이 없다거나 또는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37절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아직 이들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전혀 없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43절). 화자는 30-32절에서 “믿는 자들”에 대한 언급을 마친 후, 8장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불신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33, 41, 48, 52, 57절). 특히 이들 다섯 구절 중에서 마지막 세 절에서는 이들 “불신자들”을 “유대인”들과 동일 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3절과 41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불신자들” 역시 ‘유대’인들로 가정해도 규정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8:30-59 사이에서 두 무리의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 무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고, 또 한 무리는 불신자들이다(“유대 기독교인”이 아님). 그리고 이 단락에서 우리는 두 개의 상충되는 장면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먼저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참 제자”의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30-32절), 이와는 반대로 불신자들이 무리를 지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선전과 훼방을 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화자가 이처럼 두 개의 상충되는 장면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화자 당시의 배경과 무관치 않다. 즉 “요한 교회”와, 이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유대교”와의 갈등과 충돌의 상황이 그것이다. “갈등과 충돌”의 구조는 화자가 <요한복음>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구성상의 기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상 네 가지 설명 가운데 마지막 것을 가장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자유”에 대한 예수님의 강론은 “믿는 유대인들”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1-32절)
여기서 자유의 전제는 “내 말에 거하면”입니다. 이는 신자의 으뜸가는 의무임을 시사(示唆)하는 권면이자 “참 제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거하다”(mevnw, 메노)는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묵상하며, 실천에 옮기려는 단호한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15:7). 제자가 되는 일이 사전적 의미 그대로 스승이 하는 일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일은 부활 이후 제자들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진리를 알아갈” 것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든지(“내가 그인 줄 알리니”, 28절),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관한 진리 등을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와 그분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일도 단순히 지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실존적 체험 즉 삶 그 자체라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응은 전형적인 “오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절)
여기서 “그들”은 “믿는 유대인”이 아니라 “불신 유대인들”이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화자가 갑자기 “갈등과 충돌”의 상황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후 8장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갈등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신 유대인들”의 오해는 이중적입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과, 한 번도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오해에 대한 답변을 34-36절에서, 그리고 두 번째 오해에 대한 답변을 37-40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4-36절)
이 첫 번째 답변은 실은 32절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과 자유자”에 대한 이해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상호 반명제(反命題)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도 결코 면제받을 수 없으며,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는 한 상황이 있는 바, 그것은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노예”, 이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내적이고 영구적(永久的)인 상황으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노예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해방 즉 “구속”입니다. 누가 그 구속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지 35-2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35절에서 이미지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한다”(노예는 어느 때나 팔릴 수 있습니다);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 이 비유는 쉽고 단순합니다.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종을 구속하기 위해서 왔으며, 이들을 “양자”로 구속할 것입니다.
12.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8:37-40)
‘유대’인들의 오해, 즉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해하고 있는 데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37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7-38절)
예수께서는 반대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일단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1) 반대자들이 자기를 죽이려한다; (2)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기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즉 정체성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아브라함’이 아닌 어떤 다른 자가 그들의 아버지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그분의 아버지께서 원하시며 하라고 하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28-29절 참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반대자들 역시 그들의 아버지 말에 충실한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베일 속에 가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재차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39절상).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도 이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39하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39하-40절)
주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후손”(spevrma, 스페르마)과 ‘아브라함’의 “자녀”(tevknon, 테크논)를 구분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두 단어 모두 “자손”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37절과 39절에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페르마’(spevrma); ‘테크논’(tevknon). 전자(前者)가 “후손”, “씨” 등의 의미를 지닌다면, 후자(後者)는 “자식”, “자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 중에서 후자(後者)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식이면 아버지가 행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6-8)
침례 ‘요한’이나 심지어는 선지자 ‘예레미야’마저도 이미 오래 전에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렘 9:25-26)
‘유대’인들의 <탈무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있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분명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칭할 수 있으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없는 자는 결코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조차 ‘유대’인들을 감동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반대자들에게 같은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의인(義人)을 잡아 죽이려고 덤비는 이들 반대자들은, 그 의인이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고 전하는 자이기에, 결코 ‘아브라함’의 자녀로 간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믿음과 순종의 표상이었으니 말입니다(참고. 창 12:1-4; 22:15-18).
13.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8:41-47)
예수님은 앞에서 반대자들을 향해서 그들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근거는 그들의 행위에 입각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음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대응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절)
자신들이 “음란의 자식”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모습은 <호세아서>를 연상하게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영적 간음이라 표현했으며, 이스라엘 각각을 “음란의 자식”으로 규정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한 분이신 아버지”라고 확인함으로써, <신명기>의 “쉐마”(신 6:4)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에수님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진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2-43절)
만일 반대자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이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며, 그를 미워하는 대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참고. 요일 5:1). 그렇지 않으므로, 반대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알아들 수 없으며, 들을 수 없으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반대자들은 그들의 “아버지” 말을 들으므로(38절),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불신하며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통해서가 행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44절)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가 원하는 것을 수행하게 되는 바, 무엇보다도 “죽이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1) “살인하는 자”였으며, (2) “거짓말 하는 자”이며, 그리고 (3)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타락 이야기>(창 3)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처럼 마귀는 그 인격이나 행동에 있어 예수님과는 하늘과 땅의 사이만큼이나 멀리 정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1)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2) 거짓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으며, (3)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인생들과 나누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귀가 그리스도의 말과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유대’인 반대자들은 자발적으로 마귀의 도구가 되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강조하며 반복하고 있습니다.
45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5-47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 즉 진리를 드러내므로 반대자들은 거짓의 아버지에게 속아 넘어가 진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신과 살의에 가득 찬 적대감에 대해서 공격적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로부터 죄를 들춰낼 수 있겠느냐?” 내 말이나 행동에서 단 한 가지라도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면 드러내 보라는 도전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듯이 그분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일치하며 일관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예수가 무죄하며 의롭다는 점은 다른 사람 아닌 ‘빌라도’가 이미 선언하고 있는 바입니다(참고. 18:38후; 19:4-6).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16:8-9).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4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나 불신은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태생적으로 마귀의 자녀들이니 아무리 믿으려 해야 믿을 수가 없으며, 신자들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본능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신앙과 불신에 대하여 이 단락을 통해서 얻게 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입니다.
14. 아브라함보다 먼저 된 자(8:48-59)
반대자들의 항변은 계속됩니다. 침묵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가 거셉니다. 이번에는 이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으로, 귀신들린 자로 규정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으로 지칭하는 것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절)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왜 ‘사마리아’인으로 규정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만 당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종교적 이단자(‘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거부했으므로); (2) 신비주의자(<성경>을 배우기는 하나 정통 ‘유대 랍비’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므로); (3) 허풍과 거짓 선지자(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느니 또는 “위대한 능력자”라고 하므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인식에서 볼 때, 반대자들은 예수님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첫 번째 비난에는 대응도 않으신 채, 두 번째 비난 즉 “마귀의 자식”에 대해서만 대응을 하십니다.
4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49-50절)
예수님의 대응은 일관 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즉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높이시며, 또한 (반대자들을) 판단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은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높이시며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구약>의 여러 구절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9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10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9-11)
22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23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5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26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2-28)
지금 예수께서 그려 보여주고 계신 것은 법정 공방 장면입니다. 자신과 반대자들이 심판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하나님은 예수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함과 동시에 반대자들을 심판하고 저주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심판은 16:9-11에서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때는 세상이 자신의 판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들림을 받은 후가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약속은 반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은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이처럼 반대자들과의 논쟁에서 믿는 자들을 향한 약속으로의 급작스러운 변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7-8장을 흐르는 “갈등과 충돌”의 구성상의 특징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
그리고 이 약속은 31-32절 사이에 등장한 바 있는 그 약속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의 말에 거하는 사람으로서, 그분을 믿고, 다르며, 말씀에 쫓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요한’ 화자 특유의 표현이자 사상이기도 합니다(참고. 요일 2:3-5; 계 1:3; 3:8; 22:7, 9; 요 11:26; 5:24; 6:47). 이런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화자는 다시 ‘유대’인 반대자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오해” 그것입니다.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2-53절)
죽음에 관한 그들의 오해는 당연히 육체적 죽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예수가 귀신들렸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의 죽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조상 ‘아브라함’의 이름을 동원해서 예수님의 주장이 헛되고 미친 것임을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답변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질문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반대자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
화자는 그의 독자들 역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반대자들의 질문, “너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보다 크냐?”에 대해서 그의 독자들로부터 단호하게 “물론 그렇다”는 대답을 듣기를 원한다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일까? 반대자들의 질문은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네가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께서 자신의 주장을 통해서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 속에는 이와 같은 의구심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5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4-55절)
예수님의 답변인 즉은, 스스로를 높여 영광을 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50절). 그리고 설령 스스로를 높여 영광을 추구한다 한들 그렇게 해서 얻는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도 하십니다(54절). 왜냐하면 그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3:4; 12:23-24, 31-33). 따라서 예수님과 반대자들의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해는 마치 하늘과 땅, 내지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크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영화롭게 하는 방식은 반대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세상의 방식 즉 스스로를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치욕스러운 죽음을 통한 것임을 이들이 알 리가 만무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알며,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선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내친 김에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에 관한 답변까지 하려는 듯합니다. 이 답변은 반대자들의 이전 질문(52-53절)과 연관된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여기서 “때”라 함은 일반적으로 ‘유대’적 통념에 따르면 “종말의 때” 즉 ‘메시아’의 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자이자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답변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보다 더 크다는 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때를 알고 기대하며 살았을까? 우리는 예수께서 <아브라함 이야기>의 어떤 대목을 놓고 이 같은 해석을 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아브라함’이 “기뻐”한 것은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그가 “웃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창 17:17)과 연관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롭게 관찰해야 할 부분은 ‘아브라함’이 즐거워하는 모습과 반대자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반대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단순히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웃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으로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반응과 충격을 봅시다.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7-58절)
새파란 젊은이가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다시 한 번 예의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 선언입니다. 즉 예수님의 선재론(先在論),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시는” 존재에 대한 반복되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선언의 의미와 충격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대자들의 충격과 분노는 절정에 달한 모습입니다. 마침내 무리는 돌을 들어 그를 죽이려 덤비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
이 구절이 주는 수사적 효과는 또 있습니다. 화자는 한편으로 반대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이야기의 절정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또한 나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피해 성전을 빠져나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일견 이는 예수님의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의 적극적인 포기 내지는 유기(遺棄)라 해야 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시간과 영원
아무리 인기 좋은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인터넷 상에는 소위 “안티 팬”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그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험담하고, 때로는 저주까지 퍼부어댑니다. 이를 견디지 못하면 그 연예인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의 인기는 사뭇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런 저런 기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로 인해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계기로 그분은 ‘갈릴리’는 물론 유다 온 지역에 유명 인사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 원했고, 그가 있을 만 한 곳을 찾아 떼를 지어 몰려다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기만큼이나 적대 세력도 늘어만 갔습니다.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는 무리들도 생겨났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갈릴리’ 고향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일종의 은둔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분의 형제들마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왜 시골구석에 박혀 있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그분께서 대중의 눈에서 사라져 있는 동안 인기가 다소 수그러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화려한 기적 쇼를 펼쳐야만 할 것처럼 보입니다. 인기 만회를 위해서 말이지요. 요즘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 드라마의 인기가 떨어질라 치면 갑자기 새로운 인물을 투입하여 원래 대본에는 없던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수법 말입니다.
과연 이들이 형님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했을까? 형님의 인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질 것을 더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형님의 후광(後光)을 입고 자기들 이름을 높여볼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십중팔구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예수의 이름을 빌어 권력이나 명예를 자기 소유로 삼는 일말입니다. 얼마 전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유명한 목사님이 회장에 당선되기 위해서 돈을 썼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왜 돈을 썼을까요? 예수님의 동생들과 같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들 동생들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탐욕보다 더 심각한 “무지와 불신”입니다. 우리의 화자도 노골적으로 이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형님이 누구인지 몰랐으니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요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태도가 무지와 불신의 소치(所致)일까요?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두 번씩이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일까? 그 “때”가 과연 언제이기에 동생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는 것일까?
결단의 때. 사람들은 무슨 중대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을 언제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언제 이사를 해야 할지, 언제 결혼을 해야 할지, 언제 투자를 해야 할지, 언제 투자한 것을 회수해야 할지, 전쟁에서 언제 적을 공격해야 할지...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생은 온통 결단과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단과 선택을 위해서 사람들은 때로 점쟁이를 찾기도 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소위 “그 때”, 즉 “결정적인 순간”을 놓고 금식을 하거나 작정 기도에 돌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결단의 순간을 놓고 고민하며 망설이는 데에는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의 선택이나 최선의 순간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전도서>도 이러한 믿음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 이러니 누가 그 때를 미리 알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 “때”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누가 그 “결정적인 순간”을 결정하는가? “운명”이 그 주인공일까? 이것은 “헬라’식 사고”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무심코 이 사고에 동의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운명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속에는 운명이 우리 인생의 주인공임을 받아들인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운명의 순간이 예수님이 말하는 자기의 “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때”는 그분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운명이 결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이러한 사고는 <성경>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즉 “성경적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 사실 예수님의 생애는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그분이 태어나셨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그분의 죽음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역시 하나 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그것이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2-23)
나중에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다시 한 번 이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 1:18-20)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그분의 죽음이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실행하셨으며, 궁극적인 책임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원된 인물들, 즉 ‘가롯 유다’나, ‘유대’ 당국이나,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은 한낱 조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사적 드라마의 제작이나 연출에 기여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예수님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리셨고, 판결 후에는 판결석(判決席)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함께 고통 받으셨고, 자신이 내린 그 모든 형벌을 함께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늘 함께였습니다. 화자는 서막 첫 구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면, 그 일들이 일어난 시간들 역시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생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무시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 때란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항상 준비되어있다는 말은 아무 때에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때이며, 아무 의미도 없는 때입니다. 그저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주권. 하지만 예수님도 결국에는 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나요? 며칠 후 ‘예루살렘’으로 은밀하게 갔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일은 이전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있기는 했습니다(2:4). 두 경우 모두 예수님께서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하나 결국 동생들이나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해입니다. 다시 한 번 화자의 진술을 들어보지요: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9-10절).
화자의 메시지는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두 가지 점에 있어 그렇습니다. 즉 예수님은 형제들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시간표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시간표에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요구했던 공개적인 방식이 아니라 조용히 은밀하게 갔습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절대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아무도 그에게 언제,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그 소설의 작가더러 소설 속으로 들어오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소설 속의 시간표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을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창세기> 1장은 시간과 공간은 창조된 것이며, 우리 또한 그 시공(時空) 속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물의 형태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의 속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불학정의 원리”라 부릅니다. 다른 경우를 예를 들어봅니다. 자연계에는 너무 빨리 일어나거나, 반대로 너무 늦게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촬영과 상영 기법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나 올챙이 알이 부화하여 개구리가 되는 과정 등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육안(肉眼)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들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저속(低速)촬영의 기법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로켓이나 총알등과 같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고속(高速)촬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일하시는 방식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시간표에 따라 그분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이 때로는 너무 빠르거나 때로는 너무 느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언젠가 그분의 관점에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해달라는 것일 것입니다.
2. 그리스도-좋은 사람?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과연 예수님이 그곳에 올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를 찾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화자는 지난 에피소드에서 아예 대놓고 그들의 불신과 무지를 고발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단순히 고발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일까요? 이들 형제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시니라”(10절)는 설명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기법으로 볼 때, 화자의 이러한 설명은 분명 역설이며 조롱과 해학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명절에 참석은 했으되 형제들과 함께 가지 않았고, 자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참석이 아니라 은밀하게 혼자 참석했다는 것이지요. 동생들의 요청을 정면으로 묵살한 것이며, 우습게 여긴 행동이었습니다. 화자가 진정 의도하고 있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화자의 고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유대 당국자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불고 싶은 마음이 동생들의 동기였다면, ‘유대’ 당국자들은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무리의 행동 방식은 결국 같은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등에 올라앉아 함께 명성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나, 예수를 일찌감치 제거하여 자신의 명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나 결국은 한 통속, 즉 이기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들 두 무리는 함께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군상(群像)이라 하겠습니다. 형님과 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가 진정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동생들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미 와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찾아다니고 있는 당국자들 역시 어두움 가운데 있기는 매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화자의 조롱과 해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이들 뿐이겠습니까? 화자의 고발은 계속됩니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서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주저하는 소심하고 겁 많은 종교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 중 혹자는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만일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 정당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것입니다(신 13:1-6).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12절). 하지만 이와 같은 평가는 자기들끼리 있을 때뿐이지 드러내놓고 그를 칭찬하거나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13절). 화자는 이처럼 심약한 종교인들도 아울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소심한 종교인에 속하는 자는 아닌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아예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침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비위(脾胃)에 맞추어 예수님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부당한 평가. 아마 예수님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가장 잘못되었거나, 전적으로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평가가 있다면, 그분을 “좋은 사람”(good man)으로 부르는 것입니다(12절). 과연 그분은 선하고 좋은 사람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에 대해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그를 “선한 선생”으로 불렀다가 오히려 핀잔만 들었습니다: “네가 어찌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마 19:16-30; 막 10:17; 눅 18:18-30).
그리고 그분의 언행(言行)을 미루어 평가해 보아도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언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끝마다 자기 이야기나 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을 선하다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물론 그분이 그렇게 하실 때마다 항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예컨대, 그분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주 특별한 호칭, 즉 ‘아바’(!Abba)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아빠”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아주 친숙하게 부르는 단어인데,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곧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8:15).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중심적”인 발언은 <요한복음>에서 유별나게 일곱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ejgw...eijmi) 선언, 즉 “나는...이다”(I AM)라는 자기선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등등. “선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런 주장을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이 주로 자신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은 즐거워하다가 기뻐하였느니라”(8:56);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리고 자신의 공생애 초기에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 본문(61:1-2)을 두고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사야> 본문은 이렇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이사야서>조차도 결국 예수님 자신에 관한 예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그분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할 수 있었고, 제자들을 세상을 향한 전도자로 파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을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저지르는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루이스’(C. S. Lewis)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우리는 타인이 나에게 대해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뉘우치며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해줄 권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그가 내 물건을 훔쳤다든지, 내 욕을 하고 다녔다든지 등에 대해서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그래요. 괜찮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줄 권리가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까지 내가 용서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말도 안 되는 월권행위인 것입니다. 예컨대, 서 집사님이 나 집사님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내가 서 집사님을 용서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자기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죄까지 나서서 용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자를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한 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의 지붕을 뜯고 한 중풍 병자를 달아 내리자 그 병자를 보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또 한 번은 한 여인이 예수님이 머무는 집에 들어와 눈물을 흘리다 예수님 발에 떨어지자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주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 내가 이런 일을 지켜본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당연히 분노하고 어처구니 없어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 7:49).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자신을 늘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다녔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공연히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사회적 소요(騷擾)나 분란을 일으키는 자였지, 결코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타당한 평가. 오히려 예수님에 가장 그럴 듯한 평가는 그를 “미혹하는 자”로 부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로 규정하는 일일 것입니다(12절). 즉 그가 미쳤거나 또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본문에서 일부 무리가 평가하듯, “귀신들린 자”일 것입니다(20절).
나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날에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문해 봄으로써 이들 평가들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대망상증”이나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대합니까? 굳이 정신과 병동에 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널려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대할 때 처음 한 두 번은 이해하고 용납하려 합니다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피곤해지고 짜증이 납니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이들을 정상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무시작전으로 돌입합니다. 그들을 피하고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를 대적해서 이기려 한다든지, 그것도 분에 차지 않아 그를 잡아 죽이려 한다든지 하는 일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괜히 그랬다가 나까지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 특히 ‘유대’ 당국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를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반증입니다. 즉 그분을 미치기는커녕 지극히 정상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분의 강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권위와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절제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속이는 자”라는 평가는 어떻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잠시 속이기는 쉽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잠시 속이기도 쉽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을 수천 년 동안 일관되게 속이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이 정말 사기꾼이라면 그는 진정 모든 인류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기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믿고 따랐던 자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 세계의 잡다한 세계관들에 맞서 수천 년 동안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신봉해 온 “유일신론”자들입니다. 이들조차 예수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유일신 사상을 저버릴 정도였으니 속아도 이만저만 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는 그분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나에게 그분은 누구입니까? 내 모든 것을 다 걸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침묵입니까? 침묵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평가절하 하는 일은 없습니까?
3. 그리스도-무자격 교사
“초막절”이 시작될 즈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사는 “과연 예수가 그곳에 나타날 것인가?”였습니다. 그런데 명절이 반쯤 지났을 때, 그분은 나타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처음 은밀하게 참석했다는 화자의 설명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성전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공개강좌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대중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중들의 질문이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일까?”에서 “이 사람의 강의는 과연 믿을 만한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하니”(15절).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갈릴리’에서만 다니셨던 예수님께서(참고. 1절), 지금 대중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그분의 행동을 헌신이라고 해야 할지, 용기라고 해야 할지, 어리석은 만용(蠻勇)이라고 해야 할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의 신비한 시간표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순종의 결단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결코 그 때를 알 수도 또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일까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대’인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무엇때문입니까? 왜 이들은 놀라서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드러내놓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만 놓고 볼 때는 예수님이 공인된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따라서 당연히 글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을 가르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로고스’ 즉 “말씀” 그 자체와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세 <공관복음>에서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한 결 같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마 7:29; 막 1:22; 눅 4:22). 그렇습니다. 그분이 가르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며, 기존 질서나 교육 체계에 대한 존경이나 인정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를 우습게 알고 경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심한 불쾌감과 모욕감으로 치를 떨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들이 반발하는 진짜 이유였던 것입니다.
전승 대 계시. 예수님은 과연 이들의 주장대로 무자격 교사인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사범대학을 졸업한 적도, 교사 임용 시험에 응시한 적도, 그리고 교사 자격증도 없습니다. 그분은 마치 무면허 돌팔이 의사와 같습니다. 조리사 자격증 없이 영업하는 식당 주인과 같습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없이 개업하는 변호사와 같습니다. 무면허 대리운전사와 같습니다. 아무런 학위도 없이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의 규범으로나 오늘 우리 사회의 규범에서 보더라도 그분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평가에 대해서 정작 예수님 자신은 그분의 자격과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우리는 이 답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이것입니다: “만일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자격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것과 같은 그런 자격증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일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축적해 온 인문학이나 사회학이나 철학 또는 자연과학 등과 같은 전승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가르쳤다기보다는 드러내 보였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계시”란 그야말로 “드러냄” 일 것인데, 예수께서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세상에서 과부의 심정을 가장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남편의 심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내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한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면 되는 것이겠지요. 화자는 이곳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품 즉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心情), “속마음”, 또는 “진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별도의 자격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계시의 진위.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진위(眞僞) 여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분은 친절하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무슨 말입니까?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위조 화폐를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진짜 화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떤 물건의 무게나 길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공인된 저울이나 잣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수업 시간에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교과서나 논문을 참고하면 됩니다. 나도 설교를 행할 때에 항상 나보다 더 높은 권위를 앞세워 말하고자 애씁니다. <성경>이나, 유명 학자, 또는 언론 및 방송의 보도를 인용하려 합니다. 내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러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가 없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불러내어 심문하고 판단할 법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의 주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외적인 판단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스스로 진실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뜻을 기꺼이 행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분께 순종함으로써만이 예수님의 주장을 시험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그 가르침이 하나님께로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일찍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6:29). 이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공인된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소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유용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의도나 동기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은 스스로의 영광이 아니라, 보내신 자 즉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 말씀은 가르치는 자의 동기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만일 누구든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가르치는 자라면, 그가 얻고자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명성입니다. 대가 이런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책이나 논문을 쓰거나, 정당이나 학파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그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슨 예수 조직이나, 단체나, 기관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을까?” 이 질문은 <요한복음>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내 학생 중의 한 사람이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의 여러 본문으로부터 대답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본문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의 위기.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을 믿고 행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시 수도 서울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말만 믿고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죽음을 맞게 된 시민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피해를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나중에 낭패를 보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우리의 모든 지적, 영적 안전장치를 내던져버리고 무조건 예수님께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너무 위험천만한 주장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환논리(循環論理)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와 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1:39).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나다니엘’의 질문에 예수님을 먼저 만났던 ‘빌립’도 그가 체험한 바대로 “와 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1:46). 이곳에 등장하는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며, 그들은 오히려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계시의 전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와 보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중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 또한 우리 심중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심중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했으며, 그 계시가 올바른 것임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와 계시. <성경>은 우리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이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복음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던가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입니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이 가는 내용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영생극락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갈 수 있는 지에 관해서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 즉 교회를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만이 계시를 가르칠 자격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사의 자격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교회에서 아무나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무나 설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렇다!”입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전제를 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교사 자격증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여기서 몇 가지 나름대로의 성경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첫째, 그는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대해서야 이론(異論)이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흥미롭게 전해야 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흥미와 관심을 촉발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분히 교수 방법이나 기술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똑 같은 식재료(食材料)를 가지고서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집니다. 오죽했으면 음식 맛은 손끝에서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식재료가 처음부터 썩 좋은 것이 아닐 때에는 요리사의 손은 더욱 중요합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똑 같은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순전히 전하는 사람의 기술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복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맛없는 음식이거든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한 소식으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음식은 살리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리기 위한 복음으로 죽이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제반 교육이나 훈련에 만사 제치고 참여해야 합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훌륭한 교사의 자질이나 은사는 바로 이와 같은 첫 단계에서부터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은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입니다만, 예수 믿은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서툴거나 관심이 없다면 나에게는 교사의 은사가 없다고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은 딴 일을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고 전하고 싶은 열정 말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이 열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단순히 한 유대인 남자에 불과했습니다(참고. 4:9). 그러나 점차 그분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한 남자에서 선생으로, 선생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 곧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여인은 미쳐버렸습니다. 물동이 내던지고 마을로 내달아 온 동네 사람들, 그동안 자기를 경멸했던 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인은 불을 삼켰고, 그 불을 세상을 향해서 내뿜고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감추고 숨기는 짓이야말로 더 요상하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도 기적이지만, 뜨거운 불을 차가운 얼음으로 바꾸는 일도 그에 못지 않는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지금 그 기적을 행하고 있는 장본인은 아닌가요?
셋째, 마지막으로 또 다른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최소한 신학교는 졸업은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리고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공인된 신학교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 교육 기관이 하릴 없이 있는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형편으로 신학교를 다니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람이 속한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를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강조해 왔듯이 교회의 리더십은 교단이나, 지방회나, 총회가 아니라 교회 회중들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중이 인정하는 자격증이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다른 교단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가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회중교회를 지향하는 침례 교단에서만큼은 이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미국 남침례회에서는 말입니다.
4. 그리스도-예루살렘의 무법자
대통령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위엄이자, 국격(國格)이며, 권위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든 절대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 나라의 자긍심과 체통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일본 천황을 만날 때 머리를 숙여 인사한 것을 두고 미국 조야(朝野)에서 논란이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사회를 맡은 목사님의 제안으로 참석자 모두가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대통령과 영부인도 단상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청와대 의전(儀典) 팀에서 야단이 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대통령을 무릎 꿇게 했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의전의 관점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여러 사회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아 뜻 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판에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비종교인들의 적개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인들에게 비친 종교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타협과 독선과 오만과 무례함 그 자체일 것입니다. 굳이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종교가 화합과 일치의 중심에 서야 할 텐데 되레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으니 과연 종교의 목적과 기능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릇 어느 사회에서든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집단화 되고 세력화 되면,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하더라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마련인가 봅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는 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조직에 해(害)가 된다 싶으면 협박과 공갈도 서슴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원로 기자가 그의 칼럼에서 기자의 세 가지 터부, 즉 기자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충고인 즉은 기자는 절대 “지역 문제”나 “여성 문제”, 그리고 “종교 문제”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그 신문 불매운동에서부터 대규모 규탄 시위까지 일어나게 될 테니 절대 금기시 하라는 충고였습니다. 획일적이고 단세포적인 우리 사회의 치부를 꼬집고 비웃는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비웃음의 대상에 다른 조직은 몰라도 종교는 결코 들어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만, 슬프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는 이제 함부로 건드려서는 큰일 나는 위협적인 조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대 강 사업”, “고속전철 사업”, “이슬람 채권 법”, “남북문제”, 등등 정부의 웬만한 시책들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종교가 우리 사회의 무법자(無法者)가 되어간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요?
유대교와 그리스도.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종교는 당시 모든 여론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단(異端)이라는 구실로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초막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일반 대중들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3절). 이쯤 되면 종교가 아니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공안당국이나 정보부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독재정권 하의 경찰이나 정보부는 법과 질서 유지라는 본연의 의무보다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불법과 무법의 온상이 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대’ 당국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무법자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죄목(罪目)인 즉은 “안식일 위반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안식일을 위반하셨을까? 우리가 네 <복음서>를 유심히 읽어보아도 그분께서 단 한 번도 ‘유대’인의 명절을 거르시거나,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빠지신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설마 안식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그분은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으며, 따라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다 지켜야 했으며,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율법을 어긴 쪽은 ‘모세’의 자랑스러운 후예들로 자처하는 ‘유대’ 당국이라고 반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려야 할 종교가 살기등등하여 사람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이 얼마나 역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열광은 때로 무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능과 무관심을 감추기 위한 위선으로 활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위선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지금 이들 ‘유대’인처럼 말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그들의 반응은 펄쩍 뛰며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무심한 일반 대중들조차 ‘유대’ 당국과 한 통속이 되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한 통속이 되어 오히려 예수님을 정신 나간 사람 즉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누군가를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 또는 정반대로 “수구 반동”으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단”으로 규정하면 됩니다. 아무튼 이런 행위는 상대방의 주장이나 행동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는 지극히 감정적인 처사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단과 정통의 차이는 숫자상의 차이일 뿐”이라는 냉소(冷笑)가 이해될 법도 합니다.
안식과 창조. 왜 이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질문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도다”(21절).
여기서 “한 가지 일”이란 “단 한 번의 그 일”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일 년 전이었던지 아니면 몇 달 전이었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안식일과 겹쳤던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을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병자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던 그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5:1-9).
그날 이를 목격한 ‘유대’인들은 병이 나아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이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는가하며(5:10), 안식일에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 예수까지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5:16). 종교인의 심리 상태가 이정도 되면 가히 병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8년을 앓다가 나은 사람과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준 의사에게 축하와 감사는커녕 도리어 비난과 박해를 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그들의 모든 사고체계가 이토록 비뚤어지다 못해 고약한 고질병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거룩하고 선한 율법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이렇게 왜곡시켜버린 것일까? 안식일에 기적을 베풀어 병자를 살리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불법행위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안식(또는 휴식)을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레크레이션’ 즉 “재창조”(recreation)라고 말합니다. 이는 얼마나 성경적인 생각입니까! 안식이 항상 창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안식일과 관련해서 네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성”(성취); “쉼”(휴식); “축복”; “거룩”(참고. 창 2:3). 본인의 <창세기(1)> 교재에서 안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한 바 있습니다.
즉 안식은 창조의 결과이며, 완성이며, 그리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완성된 창조를 관조(觀照)하고 즐기도록 의도된 인간을 위한 축복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포로 된 자가 아니며, 인생의 목적이 끊임없이 땅을 경작하고 일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육체가 바쁘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쉬면 비로소 생각이 많아집니다. 사람은 쉬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구약>의 백성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은 단순히 완성된 창조를 기념하고 회고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반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안식년이 있었고, 희년(禧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원한 안식 즉 재창조(구속)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구약>의 안식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재창조 즉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약>의 이스라엘 즉 교회는 역사를 전혀 다르게 바라봅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가올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래의 안식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이미 성취된 안식을 되돌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기다리며 엿새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안식 속에서 기뻐하며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의 첫 날이 안식일을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일의 예배는 단순한 휴식 이상의 날입니다. 이날에 제자들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였고, 그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축제의 날로 삼았습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새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영원한 안식”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무슨 계명이니 율법이니 하는 것들이 자리할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설사 계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억지로 지키는 것과 자발적으로 지키는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안식과 할례. 그렇다면 안식일에 할례(割禮)를 주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22-24절). ‘유대’인들의 할례 법에 따르면, 난지 팔일 되는 아이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만일 그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랍비’들은 할례의 법이 안식법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논리인 즉은 할례는 언약을 성취하는 일, 즉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므로 안식일의 법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할례는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 가운데에서 가장 은밀하며 생명의 번식과 계승에 가장 중요한 생식기의 표피(表皮)를 잘라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에 정면으로 반(反)하며,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행위입니다. 결론적으로 할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생식기의 일부를 절단(切斷)하라고 하셨을까? 여기에 할례의 신비와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할례는 죽이는 일로서, 계약을 위반하는 자는 그렇게 죽겠다는 각오와 믿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갈라진 새의 시체 사이로 지나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창 17).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위중(危重)하며,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리한 도전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한답시고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생명을 살리는 일도 아닌 죽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합법적이라고 한다면, 같은 안식일에 한 사람 전체를 고치고 살려주는 일은 얼마나 더 합법적이며 칭송받아 마땅한 일인가?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를 장악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안식일 자화상(自畵像)은 어떤 모습입니까?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이고 있습니까? 나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5. 그리스도-출생의 신비
출생의 신비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관심의 대상은 단연 예수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들, 그리고 상식을 뛰어 넘는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그분의 발언들이 그의 기원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논쟁의 핵심은 “과연 그리스도가 언제, 어디서 오는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성분을 묻는 질문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님. 드라마의 경우라면 극적 효과를 위하여 대개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신비가 드러납니다만, ‘요한’ 화자는 정반대로 아예 처음서부터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놓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독특한 문학적 형식 중의 하나도 바로 <서막>에 있음을 배운 바 있습니다. 화자는 <서막>에서 그리스도의 신비, 즉 그의 초자연적 기원을 노래하며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1-3)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신비한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즉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라는 모순 말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모순과 역설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선언 또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당연히 세상은 이와 같은 역설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지요. 그래서 화자는 세상의 무능력한 반응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5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 5, 9-11)
세상은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하며”, 따라서 “영접하지 못합니다.” ‘요한’ 화자는 세상의 무지와 무능력에 대해서 마치 사도 ‘바울’과 합창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발은 이것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진단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우리는 지금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세련된 지식인이고 겸손한 종교인입니다. 지식과 종교가 겸손을 갖추지 못하면 세상에 해악만 끼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자신의 무지(無知)를 폭로하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 전문가란 없으며, 어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어린아이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성경.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 전문가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로 통칭되는 일단의 무리가 그들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들을 일반 ‘유대’인들과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 무리는 아주 세련되고 지적(知的)인 종교인입니다. 명절을 위해서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릅니다. 예컨대, 일반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해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하고 물었던 것에 반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공회(公會)의 음모를 이미 다 꿰뚫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25절)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회보다 더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국이 예수님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강의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국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서야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냥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26절).
당연히 그리스도의 출생이나 신분에 대해서도 모를 리가 없겠지요. 그들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27절). 그들의 말인즉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처럼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에 대해서야 모를 리가 없겠지요. 오늘날 우리도 그분의 출신이나 배경 그리고 가족관계까지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한 이들의 지식입니다. 어디서 그와 같은 지식을 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성경>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말라기>는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라(말 3:1)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에게는 이와 같은 신비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타당한 논리이며, 당시 일반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상식이자 교리(敎理)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출현에 관한 유일한 본문이었을까? <미가서>는 이와는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즉 출생의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출신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도 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음을 <마가복음>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4-6)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근거도 그들의 <성경> 즉 <미가서>입니다. <다니엘>도 ‘그리스도’는 옛적부터 항상 있어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그리스도와 예수. 그렇다면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기존의 전승들을 모두 거부했던 것일까?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기원에 관한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의 ‘도그마’는 그 자체로서 역설이자 아이러니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역설이라 함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한편으로 완벽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아는 지식은 정확하고 완벽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절). 그들이 정학하게 알고 있는 바대로, 예수는 ‘나자렛’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갈릴리’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전무(全無)했습니다.
“예수는 알되 그리스도는 모른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이는 마치 “로미오는 읽었으되 줄리엣은 읽지 않았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자의 무지와 위선을 폭로하는 해학이자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절하).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궤변(詭辯)이 가능하다는 진단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상대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예수께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까? 예수의 자가진단입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절). 대화의 기본을 전혀 모르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를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발언 태도는 교만하며, 발언 내용은 그야말로 신성모독(神聖冒瀆) 그 자체입니다. 누가 이런 자와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할까!
당연히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30절상). 그들의 미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미묘한 변화 또한 감지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요?
빛과 어둠의 “분열과 분리”입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31절). 이러한 분열은 마치 출애굽 당시 홍해 물이 둘로 갈라지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분열이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기도 합니다: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1-5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사람들 사이를 화평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분열시키고 분리시킵니다. 세상에서 분리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빛과 어둠의 분리를 극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제는 공개적인 방법이 아닌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 빛의 무리는 한 목소리로 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절).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든 와서 무엇을 행하든 이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곧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보다 더 낫다”는 선언인 것이지요. 이는 실로 반어법적인 진리 선언의 백미(白眉)이자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6. 그리스도-歸去來辭
시간과 땅. 우리 누구나 태어날 때 한 아름의 선물을 안고 태어납니다만,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기회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공평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지파 별로 거주지를 공평하게 할당받은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공평하다는 것은 어떤 획일적인 의미의 공평함이 아닙니다. 모든 지파가 똑 같은 면적이나 똑 같은 주변 환경을 지닌 땅을 할당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주사위”를 던져 나타난 결과대로 승복하고 따랐다는 점에서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각 지파의 미래는 처음에 어떤 땅을 처음에 차지했느냐가 아니라, 이후 각자의 땅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공정한 사회였으며 기회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대 점차 이스라엘은 불공정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고, 주인과 노예의 계급이 나타나고, 지파끼리 뺏고 빼앗기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기도 했으며, 나라는 둘로 쪼개진 채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이방족속들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맙니다.
이들 중 ‘가나안’ 지도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지파들은 소위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즉 ‘르우벤’과 ‘갓’과 그리고 ‘므낫세’ 반(半) 지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운명은 그들이 처음 이 땅을 갖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 지파는 주사위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보기에 좋았으므로, 공동체 안이 아니라 공동체 주변에서, 이방 세계에 양다리를 걸친 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에게 ‘요단’ 동편은 “그 땅” 즉 언약의 땅이나 섭리의 땅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임의로 사고 팔 수 있으며,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내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안식년”이니 “희년”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위기. 이스라엘에게 땅의 관리만큼 중요한 사안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시간 역시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위해서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관리하도록 맡겨두신 것입니다. 내가 그 주인일 수가 없지만, 또한 그 노예로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시간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내가 주인으로 소유하려 할 때, 즉 내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자 할 때,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가 되어버린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시간의 노예로 살아간 결국은 사망이자 죽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영원히 땅에 구속되어 땅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시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마치 공기와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의 문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공기 중의 산소를 들이마시고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내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합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이렇게 할 때만이, 시간의 노예나 주인이 아니라 시간의 관리자 즉 시간의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시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을 맡기셨을까? 재창조(re-creation)의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재창조란 구속 즉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데서부터 구출하고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안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시간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놔두거나 우리가 시간을 임의로 사용할 때, 시간은 필경 우리에게 허무와 무의미와 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에 동참할 때 시간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시간은 결국 하나의 위기로 우리에게 와 있다 하겠습니다. 위험과 기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시간.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항상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일정한 속도로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을 반복하고 있는 지구를 연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구의 움직임을 바꾸거나 궤도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시간이 이와 같았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다 못해 ‘유대’ 공회는 성전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들을 충동질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을 앞장 서 주도하고 있습니다(32절). 참고로 이들 두 집단은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결코 한 통속이 될 수 없는 무리들인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데에는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가 된다는 俗說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들 두 적대 세력은 그들 앞에 나타난 새로운 적대세력, 즉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고 이를 제거하는 일에 서로 손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제 곧 제거될 것입니다. 즉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승선(乘船)해 있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그분 스스로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
자기를 없애려는 음모(陰謀)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사라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실로 역설적이며 해학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이 예수님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잡아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께서 가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을 떠난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그분께서 가신다는 말은 그들을 내버리시는 것이며, 이는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왜 심판입니까? 그들을 그냥 어둠 가운데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계획대로, 자신들이 정한 삶의 시간표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1:24)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1: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1:28)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무기력함입니다. 그들은 지금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향해서 일찍이 이렇게 충고한 바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사 55:6).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눅 4:19)를 알지 못했고, 기회가 열려 있을 때, 스스로 그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로 자신을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늦었어!”라며 한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탐구나 연구나 조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언제인지, 언제 나에게 오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理性; reason)으로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를 알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시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 계시, 즉 “은혜의 때”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드러날 뿐입니다. 감추어져 있으며 동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배와 같습니다(마 13:44). 농부는 그 보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을 찾으려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 밭을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을 뿐입니다.
언제, 그리고 누가 그 보배를 그곳에 갖다 놓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고린도 후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농부는 그 보배를 보는 순간 그 가치를 알았을 뿐입니다. 그가 한 일은 집에 돌아가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그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 했을 때, 이들이 보여주었던 오해에는 더 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헬라’인들에게 가서 가르칠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사실로 드러나게 될 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몰랐던 그 “은혜의 때”를 ‘헬라’인들이 듣고 알아듣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먼저 전파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아이러니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요한’ 화자는 이 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화자 자신의 서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과 교회의 증언, 그분의 표적과 강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대화 등이 총동원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화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유대’ 공회가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잡아 죽일 수 없었던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아무도 “그의 때”와 “그가 가는 곳”에 함께 할 수 없으며, 함께 갈 수 없다는 점이 그 이유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일을 중단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없었으며, 오직 그분 스스로 떠나실 뿐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교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ejxagoravzw, 엑사고라조)(엡 5:16). 여기서 “아끼라”는 동사는 “구속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시간을 구속하라” 즉 “시간을 재창조하라”입니다. 시간을 죽이지 말고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간을 재창조하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우리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도 없고,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으며, 우리를 함부로 없앨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도 온 우주를 향해서 우리와 함께 이렇게 합창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7. 그리스도-생수
대학 교수인 나는 우리 대학교 총장님이 보자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갑니다. 상급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나를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흐뭇함 때문입니다. 나는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행여나 무슨 중요한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부 부처 내에서 개각(改閣) 시기가 되어 하마평(下馬評)에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심정은 더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하루 종일 청와대로부터 전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장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많은 초청을 받습니다. 결혼이나 장례는 말할 것도 없고, 개업이나, 생일잔치, 취임식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초청을 받지 못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심하면 비분강개(悲憤慷慨)하기도 합니다. 나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그처럼 중요한 자리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깝지 않거나, 무슨 이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반대로 가까운 친지나 사업상 필요한 사람의 초청에는 가능한 한 꼭 참석하려 합니다.
물론 어느 자리에나 불청객도 있기 마련입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달려갑니다. 본인의 아들 결혼식에도 그런 사람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당시 총장 후보에 오른 동료 교수님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나하고 특별히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 아니었음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와서는 축의금을 내놓고 갔습니다. 시쳇말로 얼굴도장만 찍고 갔던 것이지요. 단 한 표를 위해서 말입니다.
초막절의 초청. 왕이나 대통령이 자기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아무나 초청하지 않을 것이며, 초청장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그 자리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방에 경호원들이 깔려 불청객을 색출해 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뿐만 아니라, 사업 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식을 완전히 깨어버리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한 임금님이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초청을 거부하는 것으로 부족했음인지 어떤 동네에서는 초청장을 들고 온 왕의 사신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정신 이상자이거나, 아니면 아예 죽으려고 작정을 한 자가 아니라면, 자기들 왕을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하고 모독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오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실화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마 22:1-14). 그러나 이번에는 비유가 아닙니다. 실화이며 하소연에 가까운 초청입니다. ‘유대’인들의 큰 명절 초막절 마지막 날에 왕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서 왕의 백성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37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일종의 비장함이나 강렬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하인들을 보내어 아들의 결혼을 알리던 장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당시 왕은 즐겁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만, 지금 예수님의 심정은 그렇게 한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날이 명절의 마지막 날이라는 점과,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치며” 초청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주 절박하면서도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정은 더욱 절박하고 초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단 위로 뛰어올라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위기를 느껴야 하는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명절을 찾아 모여든 군중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무관심하거나, 또는 적대적입니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모습이 이 장면이 주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복음의 위기가 있다 하겠습니다. 누구나 복음의 초청을 들을 때, 그 동일한 복음을 또 한 번 더 들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순간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늘 내일이 있다든지, 또는 기회는 항상 있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예수께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공개적인 초청은 이날이 사실상 마지막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분의 관심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국한될 것입니다.
위대한 초청.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즉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옮기기 전에, 초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
초청의 대상은 “누구든지”입니다. 즉 전 우주적이며 온 인류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였던 ‘유대’인들 만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까지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일본인도 들어야 하며, 중국인도 들어야 하고, 북한 사람들도, 리비아 사람들도, 인도 사람들도, 베트남 사람들도, 그리고 미국사람들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이처럼 광대하고 거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제한적이며 조건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들어보지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37절상). 조금 더 풀어보자면,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초청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모두가 목마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아들 결혼식에 초청장을 보냈을 때,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면 될 것입니다.
혹자는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혹자는 화를 내며 배척하였으며, 혹자는 초청장을 들고 온 사람을 미워하다 못해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왕의 초청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운명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무나, 단절이나, 좌절이나, 실의 속에 살아가면서도 복음에 목말라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지옥의 무시무시함도 판에 박은 종교적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를 조롱하며 경멸합니다. 실은 조롱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조롱하며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허기와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존재의 의미, 내 인생의 목적을 알고 싶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의(義)에 굶주리고 목마른 것은 아닙니까? 무엇인가 내 현재의 모습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불만과 갈증의 원인이 무엇이든 만일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부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시라고 주님은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37절).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이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 후 이 여인에게, 그리고 그녀가 살던 온 동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약속. 위대한 초청 속에 위대한 약속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과 그 동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약속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우물물을 길으러 왔다 뜻하지 않게 그리스도의 생수(生水)를 마신 이방인 여인과는 달리, 초막절 주간 내내 “물의 축제”를 벌이고 있으면서도 “그 생수” 한 방울 마셔보지도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훗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사도 ‘바울’도 이런 교회를 향해서,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기도 합니다(참고. 고전 10:12). 그날 축제에 참석한 절대 다수의 무리는 물이 없어서 마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목말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위대한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와서 마시면 갈증을 해결하고 만족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봅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하).
무슨 말입니까? 생수가 내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내가 단순히 생수에 목을 축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곧 생수의 강 그 자체가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생수가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통해서 다시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처럼 사적(私的)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신 생수는 그 여인을 매개체로 해서 온 동네로 흘러넘쳤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듯이, 생명의 양식은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아 열두 광주리에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6:13).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곧 생수의 근원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마시고 풍족해 질 것이라는 약속이자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하)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먼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고 풍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누어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으니 나의 삶이 풍성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 하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셨습니까?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까? 그리고 생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늘 성령 충만을 받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와서 생수를 마시고 있습니까?
8. 그리스도-분열의 전도사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것들을 분리하셨습니다: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별과 달과 해; 낮과 밤; 남편과 아내; 사람과 짐승. 우리가 이해하건대 이들 모든 분리는 조화와 질서를 위한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요즘 유행어로 소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안전장치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질서와 조화가 너무 밋밋하고, 단조롭다고 느꼈음일까요? ‘아담’은 왠지 모험을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무엇인가 더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아 오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왜냐하면 그는 창조력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산을 더 멋있고, 더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할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은 그 자체로서 더 이상 무엇인가 보탤 것이 없는 완벽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아담’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놀고먹는 일밖에는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담’이 보탠 것은 “타락”, 즉 새로운 분리와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묶어놓으신 것이 풀어져 버렸으며, 하나로 있던 것들이 둘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짐승; 형과 동생; 이웃과 이웃; 언어와 언어; 민족과 민족;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조화는 부조화와 되어버렸고, 화음은 불협화음이 되어버렸으며, 질서는 무질서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는 다시 원래의 모습,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즉 태초의 무질서로 돌아 가버렸습니다(참고. 창 1:2).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면, 두 번째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은 그 두 계보의 분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영구화(永久化) 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계보는 타락 이후 마치 기차 철로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역사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초막절에서 보게 되는 장면도 바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화합과 화평의 전도사가 아니라, 분리와 분열의 명수(名手)라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이점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결국 진리가 있는 곳에 분리와 분열과 소요와 논쟁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탁월한 침례교 목사였던, ‘찰스 스펄젼’도 종교적 갈등과 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가치 있다고 여기는 종교적 진리가 없거나, 아예 아무런 종교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고 싶지는 않다.” 사실 양보나 타협은 잃어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명예나 재산이나 또는 생사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나 또는 <성경>을 변론하느라 누구와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싸워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피 흘려 지키고 싶어 했던 지고의 가치는 아니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의 분리. 내 이웃에 사는 한 분은 나 같은 목사를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자기에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를 정말 존경한다고 합니다.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려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살려면 이렇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도 본인처럼 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막절에 참여해서 그냥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갔어야 했습니다. 잠시 하나님 아버지 생각은 접어두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다가 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어려운 사람,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냥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고, 고쳐주면 됩니다. 아, 그분 스스로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했으면, 그분도 나처럼 사람들로부터 아주 겸손하고, 속이 깊다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참지 못하고 꼭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한다면, 좌중의 분위기는 완전히 꽝이 됩니다. 그 주제가 나와야 될 자리가 아닌데 나왔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이지요.
즐거운 초막절에 예수님이 했던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분 역시 그냥 조용히 있지 못하고 결국 사단(事端)을 일으키고 맙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물이 넘쳐나는 이 축제에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그분은 정말 사람들에게 물을 먹인 것입니다. 그분은 이웃과 평화롭게 사는 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샬롬’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의 분리.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누군가 돌출적인 발언을 해도 대충 눈감고 넘어가줍니다. 괜히 거들었다 분위기만 어색해질 테니 참는 것이지요. 하나 만일 그런 자리에 종교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나, 또는 반대로 종교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날 축제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죽이 끓듯 여기저기서 소요(騷擾)와 분쟁(紛爭)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자기네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무리”라 함은 “뱀의 후손”이거나 “어둠의 자식”에 대한 통칭일 것입니다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리 중에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를 일러 “그 선지자”라고 합니다. ‘모세’가 일찍이 예언했던 선지자를 일컫는 것이지요(참고, 신 18:15). 또 한 무리는 그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무리는 이에 반대하며, 그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준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같은 촌구석에서 위대한 ‘메시아’가 나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성경>에 따르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이며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합니다(참고, 믹 2:5-6). 사실 이 구절조차도 유대인들보다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더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분열의 전도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까!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출생이나 신분에 대해서 그토록 잘 알고 있다고 핏대를 올리며 싸우고 있으나, 정작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아이러니는 이들 무리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토론과 토의와 쟁론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그리스도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패커’(J. Packer)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패커’나 ‘요한’ 화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며, 만남이며, 교제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순종에 이르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날 예수에 대해서 쟁론을 벌이고 있는 이들 무리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분리.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서 무성하게 말만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에 대한 추측과 이론과 주장과 설명들 말입니다. 그런데 분쟁과 소요는 무리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종교 전문가들 즉 ‘유대’교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성전 치안을 맡은 사람들 말입니다.
종교나 이념은 한 가지 점에 있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코 양보나 타협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에 더 나아가 상대를 굴복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살(射殺)도 불사합니다. 이 역시 ‘샬롬’을 위해서입니다. 종교적 ‘샬롬’ 말입니다. 거룩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스도’를 위해서 따로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할 사람들이, 지금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 치안을 맡은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으며, 심지어 압도되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이 말은 전적으로 타당한 평가이긴 하지만, 이렇게 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기는 고사하고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본인의 경우를 반추해보더라도 이들의 심성은 정말 부드럽고 경건하기까지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루스 밀른’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명령을 수행하는 로마 병정들과는 달리, 아주 평화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경건한 ‘레위’ 인들이었습니다.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운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에 잘 속아 넘어가는 법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순진하거나 무식한 사람들이나 예수를 쉽게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왜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무식하다거나 순진하다고 조롱을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너희들이 정말 율법에 대해서 무식하기 짝이 없구나! 율법을 모르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아야 해”(참고. 47-49절).
아, 이거 정말 입에 담지 못할 모독이군요. 교인들을 얼마나 우습게 알았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흥분할 것 없습니다. 조롱과 욕설과 모독이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식하고, 저주를 받을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이 아니던가요!
그들 중의 한 사람 ‘니고데모’가 이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무식하게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자들은 이 무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구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결부터 먼저 내릴 수 있는가?’’(51절). 그의 질책은 지극히 율법적이며 성경적이라 아무도 반박할 근거가 없습니다(참고. 신 19:15-19; 17:2-5).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 절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면서 마지막 안간 힘을 써보지만, 이 역시 자신들의 무지를 또 한 번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겼던 무리들의 무지에 스스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 얼마나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입니까!
교회의 연합. 이쯤 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주목해 봅시다. 그 중에서 화평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여기서 “화평”(eijrhvnh, 에이레네)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샬롬’에 해당되는 단어로서, 아주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사람들과의 화평”이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과 할 수만 있다면 사이좋게 지내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의 서신에서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무슨 위선이며 모순입니까! 초막절을 온통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지금 우리에게 화평을 주문하다니요! 분열과 갈등은 나 하나로 족하다는 말씀이신가? 아니면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는 억지입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말씀은 정작 우리 자신에게는 위로나 마음의 평화보다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세상에 검과 분열과 갈등을 가져다주었다면, 우리 역시 그분과 운명 공동체가 됨이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로 가라고 하시는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갈등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아야 하는 험난함이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마 10:16).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거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9. 그리스도-세상의 빛
미국 ‘라스베가스’의 MGM 호텔에 가면 두 개의 유명한 쇼(show)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의 쇼”이고 또 하나는 “불의 쇼”입니다. 내가 본 것은 “불의 쇼”였습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사차원의 무대 장치하며, 무대를 압도하는 등장인물들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하며, 아주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유대’인들의 초막절도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두 장관(壯觀)이 있었는데, “물의 축제”와 “불의 축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팔일 동안의 축제 기간 동안 낮에는 “물의 축제”를, 그리고 밤에는 “불의 축제”를 번갈아가며 즐기고 기념했다고 합니다. 초막절이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면서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두 축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물의 축제”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바위로부터 물을 내어,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었던 역사적 사건(출 17:1-6)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의 계속되는 보호와 인도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하고 외쳤을 때, 무리들이 받았을 분노와 충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그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에게 혹시 ‘모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을까요?
아닌 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내려주었던 광야의 ‘만나’를 떠올렸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1). 이래저래 “초막절”과 “오병이어”의 기적은 “출애굽”의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불의 축제”는 어떻습니까? 한 ‘유대’ 전승은 “불의 축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축제 첫 날의 말미에 사람들은 성전 내 “여인의 뜰”에 황금 촛대들과 그 각각의 곁에 네 개의 황금 항아리와 네 개의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제사장에 속한 젊은이들이 손에 36리터에 해당하는 기름 항아리를 들고 가서 황금 항아리에 붓는다. 사람들은 그들 손에 횃불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동시에 레위 인들은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인의 뜰까지 나아간다. 이 축제는 밤새 새벽까지 계속되며, 또한 매일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지속된다. 실로 이들은 축제 기간 내내, 잠 한 숨 제대로 안자고 이 행사를 즐긴다. 새벽녘에 한 제사장의 느린 템포의 나팔이 서서히 울려 퍼질 때, 이 축제는 그 날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이 역시 “출애굽”의 경험을 회상시켜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참고. 출 14:19-25). 즉 이 빛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었던 바로 그 빛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시편>도 ‘야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빛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7:1; 44:3).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물과 빛으로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시 19).
이 축제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외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12절).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일곱 번의 그 유명한 선언, “나는...이다”의 두 번째 선언입니다. 타오르는 횃불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리들이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보았던 “‘야훼’의 사자”(출 3:12)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내가 바로 그다.” 만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다면 그들은 다시 한 번 큰 충격과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광야의 만나”, “바위에서 솟아난 물”,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역사적 유물이 아니더라는 말이지! 우리 선조들의 “출애굽”이 다만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상징이고 실존(實存)이었다는 말이지! 그토록 친숙하고 익숙하던 초막절이 갑자기 전혀 새로운 얼굴로, 아주 낯선 모습으로 지금 그들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의미의 탄생. 그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조명(照明)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책의 서막에서부터 반복해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
빛이 그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과학적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하고, 관찰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빛이 없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광합성(光合成)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빛의 자외선은 우리 몸속의 콜레스테롤을 변화시켜 비타민 D를 생성합니다. 비타민 D가 결핍되면 골격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존재(存在)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생명이 있음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비출 때,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나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 존재의 의미가 탄생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세상이나 내 주변 환경이 기적적으로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 환경은 그대로 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바라보던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반드시 이렇게 묻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롬 12:2)
이 구절은 내가 자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국가와 민족을 개조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고 말합니다. 내가 매일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성인(成人)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교회학교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성경공부의 “교훈과 적용”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회개와, 간증과, 헌신과, 결단으로 공부를 마치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끝난 후에도 영적인 분위기의 여운을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개적인 발언의 위력입니다. 그리고 진지한 모임이라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공부 시간 내내 다른 사람 이야기로 시간 끌다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으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이런 사람을 혐오합니다. 왜 그렇게 세상과 타인에 대해서 관심과 걱정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자식 때문에도 걱정이 많습니다. 버릇없는 자식 때문에 걱정입니다. 신앙심 없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때문에 걱정입니다. 썩어빠진 공무원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어라”(마 7:5).
이제는 왜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이곳에 위치해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참으로 짓궂게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들 역시 문제의 여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한쪽은 자기 확신이라는 동굴 속에서, 또 다른 한쪽은 무의미와 허무의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두 동굴 속에 무엇이 들었든 빛이 없어 어둡기는 매 일반이 아니겠습니까!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이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이나, 결국 그 어둠의 동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진단입니다. 그리하면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임재와 인도. 그 약속은 이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무슨 약속인가요? 순종의 축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지난 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말씀하시던 ‘야훼’ 하나님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을 기리는 초막절에 직접 백성들의 눈앞에 바로 “그 빛”으로 현현(顯現)하셔서, 들려주는 아주 오래되고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부담이 됩니다. “나를 따르라”는 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순종”이나 “구속”은 썩 유쾌한 단어들은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나, 정부에서 가급적 이들 단어들을 사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되레 극심한 반발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여러분에게 “목사인 나를 따르고 순종하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축복이 될까요?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만큼 인생에 큰 축복은 없다고 말입니다. 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와 같은 경우를 수시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동의 <우리 집 교회>에 가서도 수시로 감사와 칭송을 듣습니다. 대호 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행한 결과가 이후 어떻게 그의 삶을 변화시켰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대호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 가족 분들이 그 친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늘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만, 나는 그 때마다 오히려 대호 군 자신의 순종의 축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래서 부모와 스승은 반 팔자라고 하는가봅니다.
그래도 이 “순종”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편지 않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무리가 순순히 그를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을까요? 정 반대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떠올려 봅시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른 것이 아니라,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의 뒤를 따랐습니다(참고. 출 13:21-22; 민 9:17-23; 10:35-36).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지금 이스라엘을 향해서 명령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인도하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약속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녕 너를 버리지 아니 하겠고, 내가 정녕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니”(히 13:5).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분을 따를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이와 같은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그렇게 섬기겠다는 헌신의 약속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그러므로 이제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살아라”라고만 했다면 여인이 들은 메시지는 복음이 아니라 새로운 율법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너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잘 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인 즉은 우리를 고아(孤兒)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 아래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빛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고 인격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분이 내 속에 있습니까?
10. 일치하는 두 증인-아버지와 아들
한 번은 기독교 대학생들을 상대로 <구약성경 해석학>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필자가 일반 교인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다분히 학문적이라 딱딱하기도 하고, 또 교인들 대부분이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 내내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인의 강의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심지어는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항의성 질문도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그 단체의 지도자라는 간사가 던진 질문은 영 못마땅했습니다. 질문의 요지인 즉은, 교회 회중의 대부분이 그렇게 어려운 내용들을 잘 몰라도 신앙생활 잘 하고 있으며, 교회 교육이나 목사님의 설교도 이런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향평준화 하자는 것이지요.
대개 독재 정권일수록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똑똑하면 나라를 통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 때문일 것입니다. 간사의 항의성 질문이 당연히 잘못된 것임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일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이곳에서 그 모두를 다 설명하기는 시의 적절(時宜適切)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명색이 최고의 지성인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한다는 단체의 학생들이나 그 단체의 지도자가 가진 자세가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한국 교회의 앞날을 위해서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탁월성”으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탁월성이라 함은 단순히 “영적(靈的) 탁월성”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知的) 탁월성”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입니다(사실 이 둘을 구분하는 자체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그나마 영적 탁월성에 대해서도 이 간사는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성”(靈性) 또는 “성령 충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듯이 성령 충만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충만하게 열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말합니다(갈 5:22-23). 다시 말하자면 영적 탁월성은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 즉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탁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기도를 잘 한다든지, 찬송을 잘 한다든지, 무슨 초월적인 능력이나, 성령의 은사를 나타낸다든지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성령의 열매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James Packer).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은혜가 없이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는 은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적 탁월성은 어떻습니까?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간부터 지적인 목마름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사실 <성경>은 그냥 읽어서는 대부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우리와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역사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수천 년 전에 써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냥 믿음으로 “아멘!”하며 읽는다고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 간사는 자신이 교회 회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듯이 보이나, 실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거나 또는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고 싶은 의지나 의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인의 강의 내내 강의실을 들락날락 전화 받기에 바빴으며, 강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 때문에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다른 일이란 그가 속한 교회의 “전도 집회”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만.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유의 지도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정열적으로 아주 바쁘게 사역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자신의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는 그렇게 크게 목마름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 자식의 영혼에는 관심이 많으나 정작 나 자신의 영혼에는 영 관심이 없는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더러 공부 안한다고 들볶으면서 정작 자신은 집에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부모 말입니다. 그 간사는 학원 선교다, 이단 퇴치 운동이다 해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의 사무실에 가보면 이런 저런 계획들이 칠판에 가득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사역을 위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죠. 학생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주제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것이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신앙인인지 행정가인지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좋지 않은 것들을 먼저 배우고 있는 듯 보여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 간사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 강의의 일차적인 목적은 일반 학생들이 아니라 자네를 제자 삼는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진리의 빛이 자신에게 비추었을 때 자신은 슬쩍 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대변자 노릇을 자청하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빛에 대해서 오히려 도전하며 비판하는 자세로 대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 예수님을 대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자신들에게 비췄을 때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 말대로 최소한의 증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매사에 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 세상이 어떠한 모습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에든 구두 계약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진실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일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을 말한다면, 굳이 증인을 동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진리 그 자체시라면 그분께서 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실 때, 굳이 다른 증인을 대동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칠 때, 굳이 빛이라고 선언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내리는 결론일 수밖에 없으며,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검증이나 증거는 필연적으로 불가능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증거가 왜 아무런 증인도 필요치 않은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이전의 말씀과는 상치됩니다. 즉 그분은 이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5:31). 그러면서 그분은 여러 다른 증인들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침례 요한”; “기적”; “성부 하나님”; “성경”(참고. 5:33-39). 예수님께서 다른 증인은 몰라도 “침례 요한”의 증거까지 필요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었습니다(5:34).
그런 분이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셨나요? 아무런 증인도 필요치 않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증거는 증인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결단의 순간, 곧 피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 서게 합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든지, 또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시하든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달린 것 같습니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선택 즉 심판의 위기 앞에 노출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7:454-52). 이것은 예수님의 말대로 “육체에 따른”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의 판단을 타인에게 내리시지 않습니다(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판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심판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므로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조건도 자동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증거해도 그 증거가 참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증거는 곧바로 심판을 수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약해 봅시다. 만일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한 주장을 일삼으면서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분의 증거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배척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정말 자기 아버지가 보낸 자요, 그 안에 생명과 빛이 있으며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라면, 세상은 세상적인 검증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확증적인 증거를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빛으로 나아오든지, 어두움 속으로 돌아가든지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곧 심판입니다.
하지만 기존 질서 속에서 안정을 누리고 있는 자라면,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특유의 “오해”로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진심으로 묻는 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수님을 보라”일 것이기 때문인데,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5:37).
그러나 그들은 끝내 빛으로 나오기를 거절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롬 1:28). 이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과신(過信), 즉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참고. 롬 1:22).
11. 그리스도-하늘로부터 온 자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이 질문이 왜 모든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중요한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중요하다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지금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까지 결정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이 질문은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 왜 이 질문이 그들에게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습관이 있지만, 그들은 당시 종교를 종교답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예수님의 답변 방식이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듯한 “에고 에이미”(ejgw eijmi), 즉 <구약>에서 등장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대답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
이와 같은 주장들은 누가 보아도 도가 지나친 발언임에 분명합니다. 정상적인 ‘유대’인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들에게는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바로 자기가 그 하나이신 전능자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경쟁하는 자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의 카리스마에 도취된 자가 아니라면 이런 망언(妄言)을 내뱉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직전에도 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12절)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들은 가장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 말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성난 투우처럼 예수님을 향해 돌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분노하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절).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이 알았을 리 없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전형적인 오해의 질문입니다: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 아무도 갈 수가 없다고 하니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적어도 ‘랍비’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음부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고의로 살인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주 희박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살인에 대한 <창세기>의 선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다시 말하자면 자살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살 역시 생명의 피를 흘리는 행위이므로 살인죄로 다스릴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얼마 전에도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했을 때, 그분께서 ‘헬라’인들에게 선교를 하러 가는 것인가 하고 물은 바 있습니다(7:35). 이번의 질문도 그 질문만큼이나 흥미롭고도 심오한 예언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역설인가?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이 아주 통찰력 있게 설명한 바 있듯이,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정옥배 역). IVP, 서울: 1985.
예수님 스스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죽노라.” 문자적으로 이 말은 자결(自決)임이 분명하며. 그 점에서 ‘유대’인들의 질문은 역설임에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정 음부, 즉 “죽은 자에게 내려”갈 것입니다.
위로부터 온 자.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을 정복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생명의 가능성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슬리 뉴비긴’, 145쪽.
그리고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위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위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원래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23절상).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를 흐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또 다른 방식의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경고이자 예언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절).
그런데 여기서 “내가 그”(I am he)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原文)에 따르면 “에고 에이미”(ejgw eijmi)로서, 직역하자면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 “나는”(I am)입니다. 즉 주어와 동사만 있고 보어(補語)가 없는 문장이 되어버립니다. ‘랍비’들조차도 이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누구냐(25절상)?”
예수께서 “나는”이라고 했으니, “(네가 말하는 그) 내”가 누구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그들의 분노와 냉소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문장의 술어가 누구냐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술어가 예수님을 기술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분은 이제 더 이상 마치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말하여 온 자”라고 하면서, 질문에 대한 직답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대답은 ‘바리새’인들 궁긍즘을 풀어주기에는 썩 만족스럽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에고 에이미”(ejgw eijmi), 즉 “나는...이다”의 술어 즉 보어를 알고 싶은데 예수님은 오히려 한 발 빼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실 이야기가 많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나,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6절).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닫지 못하더라”(27절).
위로 들려야 함. 그래서 일까요?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될 그 시간과 그 사건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절). 즉 인자가 십자가 “들린” 후에야 비로소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들다”(uJyovw, 휩소오)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동사가 이곳에서는 능동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수동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1-32).
누가 그를 든다는 말입니까? 이 두 곳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즉 “인자의 들림” 즉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유대’인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들림”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죽노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한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협력 사역에 그들이 보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들다”와 관련해서 떠올려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롭게 하다”(doxavzw, 독사조)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13:31-32). 이 구절들은 이미 <이사야>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제 조금 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대로, 과연 그분께서 십자가 “들린” 후에 ‘유대’인들이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는가? 우리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들린” 당연한 결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28절).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조차도 여전히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서 무지(無知) 내지는 부인(否認)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예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예수께서 두 번째 오시는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날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바로 이날에 ‘유대’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그 때 얻게 될 지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때는 모든 것이 끝난 이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울어대는 청개구리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바깥 어두운 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그 때가 언제입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누가 이 은혜를 선포해야 합니까? 교회입니다. 내가 그 교회입니다. 헌신합시다!
12. 진리와 자유와 제자
이 단락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절). 이 구절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자유”에 관한 선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모든 인류가 가장 받고 싶고 누리고 싶은 선물 목록 제 일번입니다. 신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표현과 결사의 자유, 사업이나 연구에 있어서의 자유, 시험으로부터의 자유 등. 역설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유에 대한 욕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간절한 욕구는 우리 모두 무엇인가에 구속(拘束)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폭군이 과연 누구인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때조차도 좌절이나, 불만이나, 불편함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억압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거의 모든 영화의 주제도 자유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존 스토트’ 목사님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복음을 자유라는 용어로 제시하는 것”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존 스토트’,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한화룡. 정옥배 역). 서울: IVP. 1993, 55쪽.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도 공적 사역을 처음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한 주제가 바로 자유였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 선언은 <이사야>의 메시지를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사 61:1-2).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자유”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주저하거나, 힘들어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유는 <성경>이 약속하는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제안대로, 오늘날 복음이나 구원에 대해서 막연한 불편함이나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단어로 다가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만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감이 없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그동안 이 단어를 너무 좁은 의미로만 사용해 왔다고 지적하고, 아주 포괄적으로 새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 스토트’, 57-70쪽.
그에 따르면, 자유에는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우리가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즉 해방과 탈출입니다. “구속(拘束)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대한민국이 일제 36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얻은 것이 바로 이 자유입니다. 광복절은 바로 이 자유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도 그러합니다. ‘이집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과 탈출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영적인 영역으로 확대해 봅시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이집트’의 ‘바로’ 왕, 즉 구속자(拘束者)는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죄”(Sin)와 그로 인한 죄책감이라는 데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죄를 의인화(擬人化)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죄”라는 녀석이 계명을 이용해서 우리를 그의 노예로 삼아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일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양심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동물이며,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마저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은 나무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무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삭개오’처럼 지붕 위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유(용서)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의 모습으로 내가 사는 세상으로 들어오셔서,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 대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용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를 구속하던 폭군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Self)이었습니다. “나 자신”이라 함은 곧 “자기중심성”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고 합니다만, 실은 내 마음과 뜻에 포로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마치 지구 중력(重力)처럼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 자신”(Self)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없을까? 하나님께서 두 가지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두 계명이 그것입니다. 하나는 그분을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들 계명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나 자신”(Self)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과 이웃에 구속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을 가장 윗자리에 놓고 나의 자율성을 선포하며, 이웃과 하나님을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 어딘 가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살펴보면, “자기중심성”이라는 죄가 얼마나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사랑”; “자기도취”; “자기주장”; “자기선전”; “방종”(self-indulgence); “자기만족”; “자화자찬”; “자기 연민”; “이기주의”; “완고함”(self-will).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권능으로 이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인격 즉 하나님의 양자(養子)의 인격을 내 안에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 새로운 인격이 내 속에서 변화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나는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으며, 지금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우리를 구속하던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항상 괴롭혀 왔던 보편적인 두려움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지의 것”; “신비”; “핵으로 인한 멸망”; “질병”; “사별”; “노쇠”; “죽음.” 이뿐 만이 아닙니다. 고대의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두려움들조차 지금까지 살아남아 활개 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부적”(符籍)을 갖고 다니며, 승강기나 고층 건물에서 4층과 13층을 아예 없애버리는가 하며, “오늘의 운세”는 여전히 주요 일간지에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심리적인 마비 상태를 가져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곰팡이와도 같아서 어두운 데서 가장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이 모든 두려움들이 놓여 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이 그기에 있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의 권세는 사라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하신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 즉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그 모든 폭군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와 광복. 그러나 우리의 자유는 단순히 해방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라는 동전의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자유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구속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속되어야 할 더 큰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광복절(光復節)은 단순히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독립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 “빛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 세상에 비추는 것은 세상이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한민국 광복절의 의미와 목적은 대한민국이 원래 가지고 있는 그 자존(自尊)과 정체성(正體性)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일단 소수 민족이 차별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그 민족은 자존감과 존엄성을 누릴 자유를 갖게 됩니다. 나라가 자유롭지 못할 때는 독립국의 지위가 거절되고, 언론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진리가 부정되며, 민족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자존감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도 단순히 ‘바로’ 왕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새로운 주인 ‘야훼’ 하나님에게 구속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자 이스라엘의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속(救贖)이라 부릅니다(그동안 억압과 관련하여 사용해 왔던 동일한 한글 발음을 지니는 용어 拘束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속(救贖)이란 “구원하여 속한다”는 의미로서, “일정한 대가를 원 주인에게 지불하고, 새로운 주인의 소유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의 몸값으로 지불한 것은 “양의 피”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구속(救贖)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만, 자유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중요한 빛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란 무엇입니까? 즉 “내가 무엇을 위해서 자유롭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이 만드시고 의도하신 대로 진정한 “내 자신이 되는 자유”를 의미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유. 나는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완전하며 절대적인 자유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유라는 것이 분명 무엇이든지 절대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분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며, 시험을 하거나 시험을 받으실 수도 없으며, 악을 참으실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참고. 히 6:18; 약 1:13; 합 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유는 완전한 것입니다. 자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에게는 독단적이거나, 변덕스럽거나, 일시적이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멸(自滅)이며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를 그의 참 자아(自我)이신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 찾으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유, 무제한적인 자유라는 것은 실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면(실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도 거의 확실하게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유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는 자유입니다.
물고기를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그가 물속에 있을 때만 가능해집니다. 물은 물고기가 자신의 물고기다움, 물고기로서의 정체성과 성취와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환경입니다. 물이 주는 제한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어떻습니까? 정당한 국가 권력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데서부터 온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13:1-7).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물은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나를 나 되게 하는 고유한 영역은 어디 있는 것일까? 사랑의 구속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속합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유롭기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는 사랑 안에서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나는 어떻게 진정한 내 자신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질문을 달리해 봅시다: “나는 정말 제자입니까?”
13.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종종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사실 태생적 한계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O 型”의 피를 가진 부모 사이에서 탄생하는 자녀들은 모두 “O 型”의 피만 가지게 됩니다. 다른 혈액형은 결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멘델의 법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가 행한 완두콩 실험과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네 선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경험을 통해서 ‘멘델’의 “유전 법칙”(遺傳法則)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 금언을 일반화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개는 개를 낳고,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으며, 사람은 사람을 낳는다. 이것은 과학이고 원리 선언입니다. 간혹 백인 부모 사이에서 흑인이 탄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그 자식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왕에 “유전 법칙” 이야기가 나왔으니 태생과 관련한 또 다른 우리네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즉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속담이 그것입니다. 이 속담에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베여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환경의 영향이나 지배를 받는 것이 사실이나, 유전적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본인도 나이 들어가면서 내 모습이나 기질이 어쩌면 이전의 내 부모님을 그토록 빼닮았을까 하고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모습이나 체질이나 기질이 그러하다면 행동 방식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행동이란 결국 체질이나 기질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한 밤중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가 신학이나 종교적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가진 그 모든 지식과 종교적 체험과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격 목록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런 저런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혼자만의 신념이 아니라 ‘유대’인 모두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런 신념을 가지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자기에게 다가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의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즉 ‘유대’인이라고 하는 태생적 한계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신앙이나 불신은 지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거듭남”이 그 대답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거듭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우리는 ‘니고데모’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믿는 바에 지극히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서 모순(矛盾)을 팔던 상인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을 팔면서, 동시에 세상의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창도 가지고 있다고 광고해대는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모순의 자식들. 그러나 지금 예수님과 맞붙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창과 방패”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기만(欺瞞)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믿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모든 축복들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15:6). 자신들 역시 그러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반응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행동이 초(楚)나라 상인의 “창과 방패”와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말은 하면서, 살의(殺意)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나 하나님의 아들은 잡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누가 언제 물어보아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나 역시 이들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될 법한 일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도 내가 그분을 내 속에서 지우고, 없애버려도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그냥 그분은 묵묵히 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매일처럼 죽이고 또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주장들마저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석같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을 앵무새처럼 암송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에 거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초보적인 단계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행동의 지표로 삼아야 할 기억나는 말씀이 없습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칼처럼 내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주어야” 할 텐데, 불신자의 영혼은 고사하고 내 영혼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리트머스 테스트” 하나 해 봅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금언은 <성경>의 어느 책에 등장하고 있습니까? 내가 증오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떠올려야 할 그분의 말씀은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대형교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질타하고 있는 소형교회 교인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회적 대 재난이나 참사가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원성과 저주를 퍼부어대기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시민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들 질문에 단 하나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과연 나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주장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항변한다면,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 하였느니라”(39-40절).
이들이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다면, 그들의 아버지는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고 없애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나는 또한 누구의 자식입니까?
마귀의 자식들. 진실은 때로 참혹하고, 불편하며, 고통스럽습니다. 예수께서 드러내는 진실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의 행동이 실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반대자들의 생각, 즉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다만 착각일 뿐이며, 실은 다른 아버지의 자식들이라는 진단입니다. 다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히 그 아버지의 기질과 행태를 따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44절상).
부전자전이라는 것이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일까? 예수님은 그에게 두 가지 타이틀을 헌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살인의 원조”이며 다른 하나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즉 그의 이름은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그의 인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아비”로서 마귀의 가장 탁월한 전술 중의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과 대등한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치명적인 전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믿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네 아버지는 원래부터 없다”고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대 마귀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귀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상상 속의 가공적인 인물일 뿐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마귀 따위는 없어!”
그래서일까요? ‘가롯 유다’는 마귀가 자기 속에 들어와 예수를 팔아넘기도록 꾀었다는 사실을 잘 분간하지 못했습니다(13:27).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교회에 내는 헌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긴 자가 마귀인 줄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행 5:3). 마귀는 ‘가인’의 분노와 질투를 적절히 활용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도록 유도했습니다(창 4:7-8). ‘에덴’ 동산에서 ‘하와’는 자기가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주가 마귀가 아니라 뱀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창 3:4, 13). 이스라엘의 왕 ‘아합’도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시리아’와의 전쟁에 나가 결국 ‘길르앗 라못’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마귀 때문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왕상 22:21-23).
안타깝게도 그날 초막절에 모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던 그 무리들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오래된 마귀는 오늘 지금도 여전히 살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아브라함’의 자식이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말이지. 그러니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행할까 개의치 말게나.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게나. 어차피 영생은 따 놓은 당상이니 말일세.”
두 본성. 과연 그럴까요? 만일 이 말이 거짓으로 들린다면 나는 ‘사탄’의 음성을 인식하고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 해서 옛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로 하여금 성령의 본성과 싸우게 합니다. 더욱 거세게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진단만 내릴 뿐 처방은 없습니다. 해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다음 설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14. 그리스도와 아브라함
망언(妄言)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미친 소리” 내지는 “헛소리”입니다. 그리고 망동(妄動)은 “미친 짓”을 말합니다. 최근 우리가 들어본 가장 대표적인 망언을 꼽으라면, 일본이 방위백서에서 발표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일 것입니다(물론 이 주장은 2005년부터 계속 해오던 것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망동은 일본의 극우파 교수 한 사람과 의원 세 사람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울릉도를 방문하겠다고 인천 공항을 통한 입국 시도(試圖)를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순신 장군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또는 “이순신 장군이 8.15 조국 광복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필경 그 사람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할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태어날 수가 없고,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습니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절). 이 역시 망언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주장은 실은 “나는 하나님이야”하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살고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제 격이라”고 말을 합니다. 과연 경건한 ‘유대’인들, 오직 “유일 신” 신앙으로 똘똘 뭉친 종교적 열성분자들이 이런 사람을 그냥 가만히 놔 둘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도대체 네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미친 소리를 지껄이느냐는 것이지요. 금방이라도 잡아 죽일 것 같은 기세입니다.
아브라함. 지금 예수님과 반대자들 간의 논쟁은 가히 점입가경(漸入佳境) 수준입니다. 각기 서로를 비난하고, 정신이 온전한가를 물으며, 서로의 혈통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습니다. 혈통에 관한 논쟁의 핵심 인물은 단연 ‘아브라함’입니다. 이 논쟁도 예수님께서 먼저 自招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강론 때문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우리가 언제 노예라도 된 적이 있었단 말인가?”하고 당장 반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이곳 8장에서만 무려 열한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재미있습니다. 한 번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37절상).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39절하). 부정적인 평가인 셈입니다. 즉 예수님의 두 평가는 상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평가는 각기 진실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다하겠습니다. 진실의 양면이란, ‘아브라함’은 역사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즉 육신과 혈연의 계보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계보로 보자면, 그는 영적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이스라엘 개개인의 전형(典型)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참고. 롬 4). 즉 그는 내 아버지이자 곧 내 자신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전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전형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인격과 신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평가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은 전혀 ‘아브라함’적이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창세기>와 <히브리서>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소명(召命)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즉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의 소명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명을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떠나라”와 “가라”입니다. 여기서 “떠나다”는 “버리다”는 뜻인데, 이는 절교(絶交) 내지는 단절(斷絶)을 말합니다. 또한 “내려놓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버리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입니다. 불교 용어를 빌자면 “출가”(出家)인 셈이지요. 이전에 내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규정해주던 그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의 이름 ‘아브람’마저도 이제 곧 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를 <신약>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브람’의 이전 이름이 지나가고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17-20)
여기서도 어부들은 “버렸고”(즉 “내려놓았고”), 또 “따라갔습니다.” 어부(漁夫)가 사도(師徒)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마가’는 이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족과 평생직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 그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와 같은 소명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의 백성이 되라고 하실 때, 나로 하여금 내 있는 곳에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집착하던 그것들,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던 그것들, 취미나 습관, 지위나 명성, 심지어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이나, 공동체마저 떠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소명은 떠나고,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버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어디론가 “가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라면, 그저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이라는 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바울’의 경우라면 ‘헬라’ 세계가 그가 가야할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이 무슨 나침반이나 지도나 여행 매뉴얼이라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뿐이었습니다. 본인은 여기서 “믿음”을 “창조적 개척정신”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창조적 개척정신”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8-9),
이처럼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지고 소명을 좇아간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소망이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겠지요.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는 ‘하란’의 풍요에 연연하지 않고, 가족과 친지들을 뒤로 하고, 소망을 항해 이동해 갔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하지만 지금 이들 반대자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요지인 즉은, 악을 쓰고 덤벼들고 있는 이들 모습에서 ‘아브라함’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 사회적 명예나 특권들을 단 한 치도 떠날 생각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하지만 이거 너무 나간 것 아닌가요? ‘아브라함’의 믿음과 소망을 칭송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고, 또 보고 기뻐하였다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다면 모를까, “예수의 때”를 바랐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반대자들의 질문, 즉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분께서 무어라 하셨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대답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들의 질문은 그냥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구체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어차피 망언으로 끝나게 될 뿐이었습니다. 즉 공허한 소리가 될 것이며, 예수님의 행위는 망동(妄動)이 될 것입니다.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마치 지뢰밭에서 지뢰를 밝는 일이 너무 쉽듯이,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곳곳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지천으로 늘려있습니다. 단지 몇 가지만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영존하는 말씀”이고, “만물의 주인”이며, “세상의 빛”이고, “생명의 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고, “선한 목자”이며, “참 포도나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대학에서 본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라면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 직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나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유대’인들이 물었던 그 질문,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그냥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내가 답변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예수께서 반대자들의 질문을 되받아 오늘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신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진정 의미 있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일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질문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답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유일한 대답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에게 들려주어야 할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대답은 “나는 아브라함이니 이다”가 아닐까요?
15. 그리스도-성전을 떠남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이 되어야 함을 앞선 설교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대답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들은 답변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하고 있습니다(59절). 그나마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대화가 이제 폭력으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가슴을 닫습니다. 스스로 어둠과 죽음 가운데 남아있겠다는 각오와 결단입니다. 왜 좋지 않은 일에는 결단하고 행동하는 일이 이처럼 쉬운지 모르겠습니다.
초막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느낌은 축제의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와 불신, 살기(殺氣)와 광기(狂氣) 일색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동생들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아예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 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7:1)
그들이 독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느리(8:59)
하지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모습 인가요! 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어둠과 죽음 가운데 방치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초막절의 절정은 “물의 축제”와 “불의 축제”입니다. 거기다가 두 축제의 영적인 의미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덤으로 들은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7:37);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어 “생수”를 마시지 않았고, “세상의 빛”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들어 그를 치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은 이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도피.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리들이 바라는 대로 되었습니다.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 없애버리고자 했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순순히 사라져 준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 예수를 잡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숨어서 몰래 성전을 빠져나갔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두 번 다시 예수를 마주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떠나주었으니 이제 두 번 다시 그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렴 몰래 빠져 나간 자가 다시 제 발로 걸어들어 올 리는 만무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의 미친 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것이고, 핏대 올려가며 더불어 논쟁을 벌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간섭과 잔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일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도 없는데, 참으로 속이 후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평상시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결말이 과연 그들 인생에 축복이 될까?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 것이 축복이 될까?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가 없는 것이 유익이 될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들입니다. 무리들은 예수에 대해서 아무런 해를 끼칠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에서 예수를 몰아낸 결과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은 나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주어 탁월한 삶을 살도록 하려고 왔습니다. 더 이상 어둠 가운데서 헤매지 않고, 질서와 균형 잡힌 삶을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이며, 무엇이 무의미한 일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려고 왔습니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도 되는지 혜안을 갖도록 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런 분을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과 영역에서 몰아내고 멀리할 때, 내가 얻게 되는 유익은 과연 무엇일까요? 역시 대답이 필요 없는 한가한 상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유기. 그러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화자의 설명은 단순히 “유익과 손실”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소극적으로 그들을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냥 “지나쳐버린”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이들 종교 지도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무지와 죄악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각자의 “갈대아 우르”에 머물기를 원했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선택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그렇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영영 그렇게 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해주시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포기한 자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1: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1:28).
왜 그분은 어떤 자는 구원해 주시고, 어떤 자는 내버리시는지 정말 알 길이 없습니다. 순전히 자기 뜻대로 그렇게 하신다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체 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그런데 정말 슬프고 끔찍한 사실은 버림받은 자는 자신이 정녕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삼손’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21절). 영웅이 비참하게 노예로 전락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즉 이스라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경제적 파탄과 부도는 개인이나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이 내려온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패했으며(출 17:11), ‘아이’ 성을 공략할 때에도 ‘여리고’의 승리에 취해 있다가 망신을 당합니다(수 7).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즉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진중에 두고 ‘블레셋’과 싸울 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였으니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사무엘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10-11)
나중에 패배의 소식을 들은 제사장 ‘엘리’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할 명장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함께 했는데도 이처럼 개망신을 당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었습니다. 훗날 ‘비느하스’의 아내가 유복자를 낳으면서 고백한 내용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4:21-22)
한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한 국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면, 교회라고 예외일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곧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있는 이 장면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비켜갈 것인지에 대한 예고이자 예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 사이에서 이점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 없는 예수교회.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떠나고 있는 이 모습 또한 극적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징은 이것입니다. 즉 이제 ‘유대’ 성전은 그리스도 없는 성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버린 성전, 하나님이 없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무슨 건물이나 장소에 제한받으시는 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에게 장막이나 성전은 ‘임마뉴엘’의 징표이자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막 속에 지성소가 없고, 언약궤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신랑 없는 신부 처지가 되어버린 셈이지요.
<성경>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교회와 성전으로부터 예수를 몰아낼 수 있으며, 죽일 수도 있다고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오늘 나는 어떠합니까? 매일처럼 기도를 하는데, 실은 하나님은 듣지 않고 딴 곳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 마음에 아무런 갈등이나 불편함이 없었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라 생각하며 감사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내 혼자였기 때문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 응답 받았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공중기도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 예배를 인도하시며, 지켜보고 계실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들 질문에 대한 유일한 의미 있는 답변은 무엇입니까?
연습과 토의
1. 7-8장을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선언(자기 계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예수님의 형제들, 무리들, ‘유대’ 당국자들, ‘바리새’인 등)의 태도 및 대화 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의 <서막>에서도 이 두 주제를 이미 선언한 바 있습니다.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2. 7-8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겪는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이단이고, 또 율법을 파괴한 자로 일찌감치 규정짓고서는 그를 죽이려고 작정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조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축제일 행사에 나타나는 자체가 마치 스스로 인민재판정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요한’ 화자가 초막절 축제를 묘사하고 있는 방식이요 의도입니다. 그를 향한 크고 작은 일련의 비난과 고소들이 무엇인지 상기해 봅시다.
1) 7:12, 47;
2) 7:15;
3) 7:21;
4) 7:42 외;
이들 각각의 비난과 고소에 대해서 화자는 “역설”이나 “침묵” 등과 같은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올바른 지식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아래 연습을 통해서 올바른 화자의 기대에 부응해 봅시다.
1)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소 내용에 대해서(참고. 7:17-18).
2) 세 번째 기소에 대하여(참고. 7:22-23 및 5:17-30).
3) 네 번째 기소에 대하여(7:27-28, 37-38, 40-43).
3. 독자들은 초막절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당시 ‘요한’ 공동체가 처했을 “삶의 자리”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주위로부터 오는 온갖 위협과 협박, 그리고 두려움이 배경 음악처럼 묻어나오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든 ‘유대’교 공동체 혹은 ‘유대’ 국가와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유대’교와 통합되어있기를 원했다고 ‘한스 킹’은 말합니다. 결국 기독교는 ‘유대’교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비교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는 어떠한 종류의 비난과 고소를 받아가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나를 고소하는 자가 없습니까? 내가 가진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없다면 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4. ‘유대’인들의 질문,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5. ‘아브라함’과 관련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특히 “나의 때”에 관한 예수님의 주장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과연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때를 알고 기대하며 살았을까?
6.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에 대해서 묵상하고 토의해 봅시다. 나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멸하고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성령 충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