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1과
간음한 여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53-8:11약 25분 분량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7:11)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워낙 유명해서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경구(警句)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일견 죄에 대하여 용서와 관용이 지나쳐 오히려 방조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타인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자격이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은 교훈과 적용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 주제는 더 깊은 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이 이야기가 <초막절 에피소드와 강론>(7-8장)의 흐름을 끊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신학적인 주제 선언과 관련해서는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 읽기의 핵심은 이 이야기와 “초막절 강론”의 주제를 여하히 연결시키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이 여인의 이야기가 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본문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7-8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것과 동일합니다. 즉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과 유대 당국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긴장감과 적대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를 향해 적대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당사자를 보면, 법정에서 고소인과 피고소인이 벌이고 있는 공방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감과 관련하여 아래 구절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 7:24; 8:15-16; 7:46-52; 8:13.
이처럼 사악한 무고(誣告)와 음모와 적개심이 판을 치고 있는 초막절,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활보하고 있는 “빛의 축제”에, 예수님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던 한 어둠의 여인이 이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여인은 이날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이들 질문이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일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이 에피소드를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NIV 성경>을 보더라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믿을 만한 사본들과 다른 고대의 증거들에는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주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도 대부분 그와 같은 주석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가장 오래된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에는 이 내용이 빠져있습니다. 둘째, 12세기 이전의 어떠한 <신약> 해설자도 이 단락에 대한 주석을 한 적이 없습니다. 셋째, 10세기 이전의 동방 교부나 서방 교부들 역시 한 결 같이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배경.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있었던 사건을 다룬 것으로서, 자료의 성격상 <마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소위 “논쟁 대화”(막 11:27-12:37)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이 “설화세계”(說話世界)의 삶의 자리, 즉 예수님 당시의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다루고 있는 “논쟁 대화”의 핵심은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중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공동체의 배경, 즉 공동체를 위한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요한’ 공동체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현대 교회가 당면한 실존적인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다시 한 번 묵상해 볼 가치는 있다 하겠습니다.
구조. <간음한 여인>은 아주 짧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1. 배경(7:53-8:3)
2. 전개(8:4-6)
3. 발단(8:7-9)
4. 결말(8:10-11)
이리하여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아주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 차 있어 신학이나 신앙적 메시지뿐만 아니라, 정서적 즐거움도 아울러 맛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7:53-8:3)
예수님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이 사실은 이곳에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배경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종종 전하고 있습니다: 눅 19:47-48; 21:37-38.
53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7:53-8:2)
이를 배경으로 사건의 전개를 위해서 하나의 덫이 교묘하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덫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쳐놓은 것입니다. 이들은 간음하던 한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와 어떻게 처리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한 함정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3절)
이들의 주장인 즉은, 그 여인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간음으로 입증이 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여인은 물론 상대방 남자도 함께 죽여야 합니다. 어떻게 죽여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신명기>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그런데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자를 “유부녀”로 지칭하고 있어, 과연 예수님 앞에 끌려나온 이 여인도 유부녀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의 미쉬나(<오경>에 대한 주해서의 일종)에 의하면, 간음에 대한 처벌 규정이 기혼녀의 경우보다 약혼녀의 경우에 더 가혹하게 적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전자(前者)의 경우에는 목을 매달며,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 간음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 여인의 신분은 위의 두 경우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나이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12세 이하이면 미성년자로 처벌이 면제되지만, 12세 6개월 이상이면 교살 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처벌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만일 그냥 둔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함정은 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로마 당국 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든 예수님이든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였다가는 로마 당국의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2. 전개(8:4-6)
이제 이야기의 전개 부분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진퇴양난의 위기 때문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절)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께서 무슨 선택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화자 스스로도 그렇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절상)
그러나 바로 이런 위기나 긴장 때문에 기대감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면 분명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비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입니다. 사실 현대 독자들은 그 대답을 화자 자신만큼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야기의 첫 번째 청중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상식적인 독자가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전혀 뜻밖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6절하)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의 기대가 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긴장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의 행동은 대답보다는 더 많은 질문들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저의는 무엇이며, 땅에 무슨 내용을 썼을까?” “이를 바라보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등과 같은 질문 말입니다.
3. 발단(8:7-9)
참지 못하고 조급하기는 우리보다 ‘유대’인들이 더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7절상)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고 있었든, 그분의 의도가 무엇이든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빨리 자신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달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유머감각을 가지기를 기대한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요? 예컨대, ‘유대’인들 중 연로한 대표자 한 사람이 나와, 그도 역시 예수님처럼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화답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은 행동 말입니다.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써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을 때, 정몽주는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로써 자신의 결의를 대신했다는 역사 기록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분께서 무엇을 의도하셨던 예수님의 의도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상대를 잘못 택하신 듯합니다. 행여 땅에 쓴 내용이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율법이나 선지자의 메시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상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고 계셨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만, 다음 구절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너는 허망한 충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출 23:1-2); (2)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은근과 암시가 통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단도직입적으로 무식하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알아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주 투박하면서도 상식 밖의 답변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하)
그 동안 긴장과 기대로 본문을 읽어 오던 독자들의 호기심과 욕구가 극적으로, 그리고 통쾌하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아, 바로 이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게로구나. 수사학적으로 멋진 반어법(反語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바울’도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3:10). 이로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악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으로는 방관자였고, 적극적으로는 음모자이거나, 아니면 무고한 가해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을 들어야 할 사람은 이들 뿐이 아닙니다. 흥미를 가지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이야기 속의 대중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s나아가 화자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자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듯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4. 결말(8:10-11)
드디어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외치던 극적인 선언보다는 다소 잔잔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주기는 합니다만, 실은 같은 주제를 반복 선언하는 효과를 지니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11절하)
의로운 하나님 자신도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 실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찍이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이렇게 해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 역시 초기의 기대가 만족되었으므로,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이 누구신데 저들에게 질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나, ‘바리새’인들이라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했다면,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단순히 그 때나 지금이나 보편적인 메시지로 다가올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마지막 말씀은 일종의 보충적인 해설이 되는 셈입니다. 화자가 노리는 그 효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얻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한이 없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용서를 해준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죄를 죽도록 미워하십니다.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그냥 덮어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 죄 가운데 거할 수 있겠느냐고 ‘바울’은 반문하고 있습니다(롬 6:1, 15).
교훈과 적용
1. 여인이 들은 복음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는 어딘지 수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선 이야기는 일부 <성경> 사본에는 없다는 해설과 함께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후대에 추가로 삽입해 넣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을까? 무슨 의도로 했든, 본문의 위치가 초막절 관련 본문의 배경이나, 전후문맥의 내용과도 딱히 어울리지 않는데 왜 이 이야기를 이곳에 삽입했을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무대의 주인공인 여인입니다. 간음을 하다 붙잡힌 모양입니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요즘처럼 누군가 현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놓은 것도 아니고, 여인 스스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할 일을 미리 알려준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그냥 길거리에서 애정 표시를 했을 리도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했다고 말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누구나 가장 은밀하게 숨겨두고 싶어 하는 그 부분이 속수무책 노출되도록 내버려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우연히 노출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답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재주로 간음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현장에는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이 여인을 붙잡았을까요? 문을 그냥 박차고 들어가 거의 알몸으로 있었을 여인을 그냥 낚아채 왔을까? 그렇다면 함께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왜 안 보이는 것입니까? 어디 뺑소니라도 쳐버렸을까요? 아니면 일부러 놓아주었을까요? 아무튼 지금 무대 위에는 여인만 끌려나와 뎅그러니 꿇어앉아 있습니다.
죄를 더욱 죄 되게 함. 아무리 이것저것 생각해 보아도 여인이 무슨 함정에 걸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범행 현장에서 이처럼 꼼짝없이 붙잡힐 리가 없습니다. 요즈음에도 함정수사라는 것이 있듯이, 이 여인도 사람들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대개 함정수사를 통해 얻는 증거물들은 재판과정에서 증거자료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이 함정에 걸렸으니, 그의 잘못이 없다고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함정에 걸려든 것이든, 우연히 발각된 것이든, 여인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음행 의사를 분명히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무죄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인의 죄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 비해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은 솔직히 숨길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크고 작은 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화자는 두 죄악을 구별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가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여주려는 것은 여인의 죄악이 아니라, 살기등등해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입니다. 이들의 죄악을 심히 죄 되게 보이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인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비와 동정과 관용과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니, 도대체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가 왜 더욱 큰 죄로 보입니까? 이들 자칭 의인(義人)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의 사악한 권능과 본성을 의인화(擬人化)를 통해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죄가 얼마나 치명적으로 교활하고 사악한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0-13)
요약하자면 이것입니다. 즉 죄가 얼마나 사악한가 하면, 거룩하고 선하며 생명을 줄 계명을 이용해서,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 즉 예수 잡아 죽이는 일을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인이나, 음행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 모두 한 낱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이 여인의 음행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싶다는 일념 앞에 한 여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인격이나 명예 등은 한 낱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동료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도구 내지는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모습도 얼마나 이들과 유사한가! 나에게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자식이나, 친구는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인가 아니면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인가? 거룩한 소명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 개인적인 야망을 혹시 소명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에게 교회 부흥과 성장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교회의 성도들은 목회자 개인의 영달(榮達)이나 만족을 위한 도구인가 또는 그가 먹이고 보살피고 섬겨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 이처럼 거룩한 소명이 언제든지 끔찍한 해악으로 돌변할 수 있다니!
즐거움과 흥겨움의 초막절 축제가 아닌 게 아니라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소위 거룩한 소명 때문에 음모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있음을 봅니다. 이 여인은 그 소명의 제단 위에 바쳐지는 한 낱 희생양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이들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을까? 이들의 주장인 즉은, 그 여인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간음으로 입증이 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여인은 물론 상대방 남자도 함께 죽여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그런데 이 여인은 과연 유부녀였을까? 그렇다면 결코 죽음을 면할 수는 없는 노릇! 여인의 나이는 얼마였을까? 열두 살 아래였다면 처벌이 면제되겠지만, 열두 살 육 개월 이상이라면 역시 교살 형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정이나 질문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대적자 들의 관심사는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만일 그냥 둔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단으로 몰릴 것이고, 그렇다고 죽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함정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당국 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형 집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든 예수님이든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였다가는 로마 당국의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보석 같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닌 그들을 향한 계시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눈을 바라보라는 계시 말입니다.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4-5)
정말 다행인 것은 이들 모두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서는 하나 둘 씩 떠나가기 시작합니다(9절). 하지만 그들이 내려놓았던 그 돌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죄는 고백하지도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나도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 이제 그 자리에는 자유롭게 된 여인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여인과 예수님 두 사람만 남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필사적으로 알몸을 감추려고 예수님과는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담’이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잎으로 알몸을 가린 채 나무 뒤로 필사적으로 숨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에게 다가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처럼,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여인을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제 곧 무엇을 하시려는지 암시를 받게 됩니다.
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11절). 여인은 자신의 대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인을 산의 정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정상에 올라 산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산의 정상, 즉 이야기의 극적 절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11절).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입니까! 이 여인은 지금 왜 자신을 정죄하는 자가 없는지, 왜 아무도 자기를 정죄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듣고 있습니다. 왜 아무도 이 여인을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왜 아무도 그녀를 정죄할 수 없습니까? 예수님조차도 말입니다.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오늘 내가 들어야 할 복음도, 그리고 오늘 내가 선포해야 할 복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듣고, 선포해야 할 복음도 이것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모든 기적들, 즉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 죽어가던 소년이 살아난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요동치던 바다가 잠잠하게 된 기적, 바다 위를 걸은 기적 모두를 합친다 해도,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는 은혜의 말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 우리의 모든 소망과 우리의 모든 구원이 영원토록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시다. 찬양합시다.
2. 여인이 살아야 할 복음
얼마 전 한 제자의 주례를 맡았는데, 그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 이제 삼사 개월 후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는 삼사 개월 만에도 태어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제자의 신부 역시 본인의 제자였으며,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연예인 동정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도 이 제자처럼 연예인들의 혼전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서 마치 무슨 영웅적인 행위라도 한 것처럼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혼전정사(婚前情事)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이처럼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혼전정사야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혼외정사(婚外情事)조차도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종의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럽 사회는 혼외정사(婚外情事)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가히 지상낙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언론에서 종종 보도되고 있습니다만, 주부들이 노래방을 출입하면서 외간 남자들을 상대로 성 매매로 돈벌이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이전에 본인이 살던 대구시 수성구에 무려 사천 여개의 노래방이 있다고 하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구청에서 노래방과의 전쟁을 선포했겠습니까. 이처럼 문란하고도 난잡한 성적 타락이 비단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수년 전 미국 성공회에서 한 동성연애자를 교단 주교로 서임하여 교단은 물론 미국 사회 전체가 찬반 논쟁으로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동성애는 분명히 반성경적이라고 하는데 반해, 지지하는 쪽에서는 교회가 동성연애자들조차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무지 무엇이 진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만 해도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성애 자체가 이미 합법화 되어버렸으며, 캐나다의 연합교단이나 미국의 한 장로교단에서는 동성애자를 아예 목회자로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서버렸습니다. 이들 국가에 있는 한인교회도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기도 합니다. 나는 이들 목회자가 <로마서> 1장 26-27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해 질 뿐입니다.
복음의 은혜. 이 여인은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그저 추측으로 가름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에 한껏 고무되어 다시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 여러 남자들을 전전하면서 화류계의 여왕으로 살아가다가 나이 60이 넘어서야 명예퇴직을 했다.
둘째, 예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아 근처 교회 회원으로 등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때때로 옛 날 생각이 나고, 그 때마다 견딜 수 없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면서 살아갔다. 참고로 죽을 때까지 끊기 어려운 세 가지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노름과 사기와 바람피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셋째, “어찌 내가 개처럼 토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보냐”하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이전의 생활과 결별을 한 채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 재활치료 센터를 세워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갔다.
이들 중에서 은혜의 복음에 가장 가까운 생활 방식은 무엇일까요? 셋 모두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자비는 이 여인이 어떤 삶을 살든, 어차피 허용하고 관용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도 끊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이 아닙니까! 아닌 게 아니라, 본인도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배우는 상대가 <성경>을 모르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게 합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큰 흠집이라고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배우는 자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속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 걸려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과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과는 도저히 조화가 안 됩니다. 우리의 ‘손 롱’군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홍수 이야기>를 읽다가 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홍수로 전 인류를 전멸시키셨습니까?” <요한복음>과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복음의 요구. 사도 ‘바울’은 복음은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살려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죽은 자를 살려줄 뿐만 아니라, 살아난 자가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은혜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능력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 무지한 자는 반대로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 바로 죽어서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구원 이후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으니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의 요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었던 “출애굽”의 복음은 그들이 단순히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이 아니라 광복(光復)을 맞이할 것이었습니다. 광복이란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 즉 정체성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소명은 ‘야훼’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에 힘입어, 홍해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요단’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요구이고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로 치자면 “성령 충만의 삶”이 복음의 능력이자 복음의 요구이듯이 말입니다. 은혜가 진정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은혜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의 생각과 태도가 달리 나타나야 합니다. 은혜는 용서와 자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의이기도 합니다. 은혜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바라시는 바는, 바로 이 세 번째 생활 방식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하). 회개를 전제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의 삶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회개할 능력도 없습니다. ‘칼빈’의 “철저한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에 새롭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도 용서의 능력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실로 용서받은 자는, 가장 먼저 자신을 용서하며, 그리고 다시는 죄의 강력한 인력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이 여인을 항상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이제 자존심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발견하고, 꿈과 비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 스스로 먼저 찾아가 빛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전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나누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나누며, 그에게로 데리고 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올바른 성문화(性文化) 교육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새 질서의 공동체로, 자유와 해방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나는 정말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음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복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이야기가 현재 자리에 있어야 할 당위성은 무엇입니까? 7-8장 전체의 배경이 되는 주제와 연관해서 설명해 봅시다.
2. 본문의 구성이나 수사적 기법 등에 대해서도 감상해 봅시다.
3. 복음의 능력과 성령 충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4. 나는 지난 한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