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3): 팻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19-22약 9분 분량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攝理)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분의 신비한 섭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압축적으로 잘 요약해 놓은 한 문장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이와 같은 고백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 같은 고백을 한두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바로 이점이 성도(聖徒)로 살아가는 축복이자 특권일 것입니다. 고해(苦海)와도 같은 인생 항로에서 자유와 안식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빌라도’나 ‘가야바’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에 일조(一助)를 하였으니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칭찬은 몰라도 비난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고 우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난할 수 있으리요!” ‘가롯 유다’도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참고. 롬 9).
섭리와 운명. 하지만 사도의 이 고백은 성도의 자유방임(自由放任)을 용인하는 면허증은 아닐 것입니다. 자유방임적인 태도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테니 될 일은 결국은 될 것이고, 따라서 어떻게 살든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운명론(運命論)과 혼돈하면 이런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오히려 매 순간 내가 나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충고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그 충고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라야 하겠습니다: “내 앞에 놓인 여러 가능한 선택들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것이 될까? 한 치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여러 가능한 선택”이라 했습니다. 즉 이들 중 어느 것을 택하든 윤리․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선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는 선택들에 대해서야 크게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어려움은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최고 지도자라면 매일처럼 당면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나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소위 “빅 데이터”(big data)에 의존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통계에 의존한다는 말인데, 그동안 축적한 통계의 분량이 많고 체계적일수록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최근 미국에서 IS(이슬람 국가)에 참여하려는 몇몇 청소년을 사전에 체포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정부가 “빅 데이터”에 의존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일상사(日常事)를 손바닥 보듯 일일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옳으냐는 별개의 문제이겠습니다만.
“빅 데이터”란 결국 그동안 쌓아놓은 지식과 정보입니다. 탁월한 지도자라면 이 “빅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동물적인 감각(感覺)과 결단력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상상(想像)과 열정(熱情)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바리새’인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울’에게는 열정은 있었으나 지식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엄청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는 그토록 많은 잘못된 지식을 안고 살아왔을까? 상상력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결여되면 유연성(柔軟性)이 떨어집니다. 이럴 경우 지식은 교리(敎理)나 이념(理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교리나 이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경직(硬直)되면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갖고 있는 보편적 오해 중의 하나는 이 책을 교훈이나 교리문답 모음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당 앞에 늘 걸려 있는 현수막도 “새 신자 교리 과정”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의 대부분은 교리가 아니라, 이야기와 노래와 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딱딱하게 머리로써만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고 맛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즉 <성경>을 신학 책이 아니라, 국어책 대하듯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이야기했더니, 천주교에 오래 몸담아 왔던 노부부께서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에서 그렇게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바리새’인 ‘사울’이 <구약>의 지식에 거룩한 상상의 날개를 달았다면,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바울’이 되는 순간, 지식과 열정을 동시에 갖추게 됩니다. <구약>의 “빅 데이터”를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재해석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기적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님께서는 ‘사울’이 가진 지식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이와 같은 사역을 “조명”(照明; enlightenment)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만일 그에게 <성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로마서> 8:28의 그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계시가 마른하늘에서 벼락 치듯 그에게 내려 왔을까? 그에게 계시는 점진적이었습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이럴 때 딱 적합한 말씀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즉 “옛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거기다 새로운 것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자(孔子)의 이 말씀을 역으로 이해하자면, “옛날에 배운 것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알 수가 없다”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옛것은 <구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성경>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계시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성경>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천국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하며, 배우되 열정적으로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천국 체험 수기나 책들이 나와 많은 신자(信者)들을 열광시킵니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열광하면 될 텐데, 이 같은 책을 전도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꼭 한 마디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거 봐, 정말 천국은 있는 것이라고”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 된 적이 있는 유명한 책,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책은 6세 때에 교통사고로 2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알렉스’라는 소년의 아버지가 쓴 것으로, 그는 이 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아들 ‘알렉스’가 그 책 내용이 거짓이라고 고백하는 바람에 교회와 기독교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아마존’이나 ‘뉴욕타임즈’ 등 유력 일간지들 대부분이 참으로 황당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의 존재 자체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식하거나, 유식하더라도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도 선(善)을 이루시는 것일까?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고백하는 바일까?
싫지만 그렇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들을 활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르실 수 있다.”
세 가지 언어. ‘빌라도’가 한 일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붙여놓은 “나사렛 예수, 유대의 왕”이라는 팻말이 그것입니다. 당시 죄수를 처형할 때 처형 이유를 적은 팻말을 그의 몸에 두르게 하거나, 또는 죄목(罪目)을 적은 팻말을 십자가에 붙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죄목은 “백성을 선동한 자”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죄목이 아니라, 죄수의 이름과 호칭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문구(文句)를 선택한 것이지요.
그것도 한 가지 언어가 아닌 세 가지 언어로 말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결과적으로 온 세상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임을 알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라고 알려주었을까? 다름 아닌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온 세상을 향해서 이 메시지, 즉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 팻말이 ‘유대’인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빌라도’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재판 내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치욕을 한꺼번에 되갚아줄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거센 항의가 들어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칭했으니 “나는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노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이들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빌라도’가 그의 전 재판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구세주, 예수. 표면적으로 그의 보복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이 마지막 행동은 <수난 이야기>의 정점(頂點)을 찍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역설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세계의 지배자 로마 제국(帝國), 그 제국의 한 재판관이 온 세계를 향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팻말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어 ‘유대’인이라면 이를 모를 리 없고, ‘라틴’어로 쓰여 있어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당시 온 세상 사람들의 사실상의 모국어(母國語) ‘헬라’어로 쓰여 있어 전 세계가 그 팻말에 쓰인 내용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요한’ 화자를 대신하여, “예수는 세상의 구주(救主)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마치 <시편>의 한 구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두 당사자, ‘빌라도’와 ‘가야바’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 죽음에 대한 예언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가야바’가 한 일은 그가 일찍이 예언했던 바대로, 예수의 죽음이 그의 백성과 온 민족을 구속(救贖)하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며(참고. 11:49-50), ‘빌라도’가 한 일은 그 예수가 이스라엘과 세상의 구주(救主)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즉 두 사람은 합작하여,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 즉 세상의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만유(萬有)의 주(主)임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을 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