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4): 제비 뽑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23-24약 10분 분량
“정직이 최 상책”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진심(眞心)은 결국 통한다”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정직이 항상 최선인 것은 아니며”, “진심은 늘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직함이나 진심을 내보이려는 사람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저자 ‘스콧 펙’(Scott M. Peck) 박사는 사랑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항상 배신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심한 도박꾼들.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은 무관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에 대한 무관심은 실은 그 사랑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시체를 옆에 두고 제비뽑기라니요!
요즈음 들어 이런 풍경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장례식장에는 의례히 밤을 새워 화투치기를 하는 조문객들이 있었습니다. 상주(喪主)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함께 밤을 새우다보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간혹 이게 도(度)를 넘어 도박(賭博)으로 번져 조문객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여기에 왜 왔는지 잠깐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주나 망자(亡者)의 편에서 보자면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슬퍼해야 할 시간에 돈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 장면은 <수난 이야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대목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죽은 죄수의 유품(遺品)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병사들이 나누어가지려고 제비뽑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죄수의 옷을 가져가는 것이 호송 병사의 특권이라 해도, 그것을 가져다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무슨 값비싼 귀중품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戰利品)도 아니라 집에 가져가 대대(代代)로 기념할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화자는 이 장면을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장면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네 명의 병사가 한 조를 이루어 죄수 한 사람을 호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복장(服裝)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신발과 ‘터번’이라 불리는 일종의 모자와, 허리띠, 속옷, 그리고 겉옷과 속옷입니다. 병사 네 사람이 각기 원하는 유품을 하나씩 취하고 나면 하나가 남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한 가지가 속옷이었던 같습니다.
지금 병사들은 그 속옷을 누가 가져 갈 것인가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노름판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것을 그냥 네 부분으로 찢어 나누어가질 수는 없었을까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속옷은 마디가 없이 그냥 한 올로만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네 등분으로 나누게 되면 모두 풀어져서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통째로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서로 가져가겠다고 주사위를 제비뽑기를 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까?
참 무심(無心)하고 무신경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체를 곁에다 두고 어떻게 도박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인지. 하기야 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죄수 한 사람의 죽음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일일이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 자체가 오히려 전문 직업인으로서 구차스러울 뿐인 것이지요. 우리는 화장터에서 눈물 흘리며 작업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수의(囚衣)를 입히는 직업 장례사가 슬픈 표정을 짓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일에 전문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모든 거추장스러운 감정 따위는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훈련을 쌓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박.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도박을 벌였던 사람은 병사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충성심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내 모든 것, 내 생명까지도 단 한 번의 ‘배팅’에 다 걸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랬을까? 내 시체를 곁에다 두고 도박을 벌이고 있는 저 무심하고 무관심한 병사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스튜더트 케네디’(Studdert Kennedy)라는 사람은 이 장면을 떠올리며 지은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저들, 저 병사들이
거기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구나.
그들이 거기서 주사위를 던지는 동안,
그는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그 십자기 위에서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지.
하나님의 세상에서 죄를 없애버리려고
나의 그리스도, 그분도 결국은 도박사였던 게지.
스스로 목숨을 던져
이 세상을 구속하시려고 말이지.
이윽고 고통은 끝이 나고,
서쪽으로 해가 기울기 전에,
그날 피로 물든 면류관을 머리에 쓴 채,
그는 자신이 이미 승리하였음을 알았음이라.
시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비극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세상을 구하려고 그리스도는 엄청난 모험과 도박을 감행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간혹 있으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헛된 죽음일 뿐입니다(참고. 롬 5:7).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배신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박.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도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큰 도박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담’을 창조 속에 포함시킨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의 내용인 즉은 하나님의 권위에 버금가는 지위와 지식과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흙에 불과했던 그를 초자연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의 신분이 초고속으로 수직 상승을 한 것이었습니다. 한 줌의 흙이 신적인 존재가 되다니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은 창업(創業)하자말자 어긋나버렸습니다. ‘아담’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배신을 하기로 작정을 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그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동기가 아닌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자면, 그의 무관심과 무신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 그 각별한 나무가 항상 각별하게 보이고 또 그렇게 인식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나무의 열매가 동산의 다른 나무들의 열매처럼 그냥 따먹어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부모가 다른 부모에 비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 남편이 다른 여자들의 남편과 구분이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아내와 남의 아내와 구별이 안 되면 어떻게 될까? 주일이 다른 요일들과 구분이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존재의 의미가 각별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게 모두 무관심의 결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특별한 언약의 말씀이 특별하게 들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엄청난 지위와 권한을 부여했는지 별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뱀이 바로 그 틈을 타고 들어왔을까요?
아무튼 하나님의 원(原) 창조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를 바로잡으려고 두 번째 창업, 즉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통한 재창조(再創造)의 모험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의 진심이 통했을까? ‘요한’ 화자는 세상의 반응을 서막에서 이렇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세상은 무지했고, 무관심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진심을 외면했거나,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조차 그랬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1).
따라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죽음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게 보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먼 산 불구경 하듯 그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렸든지. 이보다 훨씬 이전,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에도 이 백성이 그랬습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이 파괴되고 흩어지고 있었는데도, 그 비극을 나의 것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들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겠습니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애 1:12).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알고 안 뒤, ‘예레미야’과 같은 고통을 한두 번쯤은 겪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령 충만하여 가족이나 이웃에게 가슴 벅찬 기쁨을 소개하고 전해 본 경험 말입니다. 그 때 내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나화 함께 환호하며 기뻐했습니까? 내게 감사의 표시라도 해주었습니까? 죽게 된 사람 살려주었다고 손을 붙잡고 돈 봉투라도 들고 왔습니까? 십중팔구 그들은 내게 안타까움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무관심으로, 때로는 조롱과 무시로, 때로는 적개심으로 말입니다.
나의 가족이나 이웃도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불렀던 그 애가(哀歌)를 재창(再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주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겠나이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또한 주님이나 하나님 아버지처럼 늘 배척과 배신과 무관심을 복음 증거의 대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도박사의 심정으로 살아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예언의 성취.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관심의 절정, 즉 그 하찮은 “제비뽑기”마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 원대하고도 신비한 계획 속에 미리 포함시켜 놓으셨다면, 내 일생에서 내가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수모나 모욕이나 적대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요한’ 화자가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궁극적인 의도였을 것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절).
우리는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이 <시편:22>이 그 배경이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즉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해석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신약>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27:39; 막 15:29; 눅 23:35. 참고. 시 22:8). 그런 점에서 이 시가 예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 시인이 그리고 있는 대적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한 바 있습니다(시 22:19; 요 19:24; 마 27:35; 막 15:24; 눅 23:34). 혹자는 그래서 이 시를 “제 5 복음서”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신약>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시의 시인과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마 27:46; 막 15:34).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서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재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서 대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분 역시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의 공포를 함께 경험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고난을 그냥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계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고난 받는 자와 죽어가는 자와 동일 시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외로움과 공포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이 시인과 동일한 처지에서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과 구원을 베푸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나 이 시인의 경험과 예수님의 경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죽음을 모면했으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일부(21-31절)는 ‘메시야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확신에 찬 선언, 즉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1절)는 시인의 경우처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승리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 시인처럼 오늘날에도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22-26절) “회중”(27-31절), 즉 교회 모두에게 찬양의 동기가 되는 구원인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