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랑과 신랑 친구: 두 교회 이야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3:22-30약 10분 분량
한 미국인 목사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스펜스’(Spence)입니다. 이분은 아주 인기 있는 설교자였으며,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분이 섬기던 교회는 많은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웃 교회에 젊고 유능한 목사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용모는 준수했고, 설교 또한 훌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주일 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스펜스’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 보니 앉아 있는 교인이 몇 사람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어느 한 집사님이 일어나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모두들 이웃 교회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내가 ‘스펜스’ 목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펜스’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머금고는, “우리 모두 그 교회로 갑시다” 하며 교인들과 함께 그 교회로 갔습니다.
그 후 스펜스 목사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담임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은퇴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삶을 누리며 여생을 보냈을까요?
두 교회 이야기. 정말 그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 목사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요한교회”와 “예수교회”였습니다. 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각각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교회는 모두 같은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를 전하고 증언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개척 시기로 볼 때 “요한교회”가 “예수교회”보다는 아마 몇 년 앞선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교회”는 개척하자말자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참고. 눅 3:7). ‘요한’ 목사의 사역은 실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성공적인 사역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더니”(마 3:5).
그의 교인 중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군인, 부자, 세무서 직원, 유대 관원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교회”를 개척한 예수님도 실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목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가 환생한 것으로 믿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이었던 ‘헤롯’ 왕도 ‘요한’ 목사를 왕궁에까지 불러들여,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교인으로 등록을 할 정도였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이처럼 “요한교회”가 교세(敎勢)를 확장하며 소위 대형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을 무렵, “예수교회”가 새롭게 개척이 되어 근처에 들어섰습니다. 담임 목사 예수님의 목회 비전이나 목적 그리고 신학적 입장은 ‘요한’ 목사와 똑 같았습니다. 그러니만치 두 교회는 이제 힘을 합쳐 이전보다 더욱 활기차게,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교회”를 더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교회”가 “요한교회”를 누르고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교회”는 성장이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교회 등록 교인들마저 “예수교회”로 옮겨 가는 통에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수평이동이 오늘날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두 교회의 명암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한 사람은 성공하는 목회자로 급부상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한 목회자로 이전의 명성이 점점 쇠락해 가기 시작합니다. 만일 내가 ‘요한’ 목사이거나 그의 추종자라면 어떤 기분일까요?
본인이 근무하는 경북대학교에는 대학 교회를 위시해서 CCC, IVF, SFC등 여러 선교 단체들이 있습니다. 모두 대학선교라는 동일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직들입니다. 대학에 교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여럿 있으니 대학 선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상호 협력과 격려를 위하여, 그리고 유익한 정보를 나누기 위하여 매주 목요일 정오 대학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합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모이는 교인들의 수를 보면 늘 이삼십 명에 불과합니다. 각자 자신들 만의 사역에 바쁜 탓에 잘 모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단체들은 대학교회가 주도가 되어 교인들을 전도하고 흡수해 가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대학교회는 나름대로 교회가 주도가 되어 제반 사역을 수행해 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선의로 봐 준다 해도, 마치 이들 각 단체들은 일종의 ‘제로 섬’(zero sum)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 역시 경쟁교회인 “예수교회”가 급성장해 가는 것이 탐탁치만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주변의 동료 ‘유대’인들과 자신들이 하는 사역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25절). 논쟁의 주제는 ‘요한’ 목사가 수행하고 있던 “침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교회”의 교인들과는 같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사는 침례에 대한 무슨 교리나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의 목사 ‘요한’에게 찾아와서 늘어놓는 불평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선생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니라”(26절).
그들의 불평인 즉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오지 않고 인근 “예수교회”로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인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그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뭐 이런 것이겠지요:
“목사님, 당신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목사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 야단도 좀 치고, 절대 우리 교회 근처에서는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문 닫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요한’ 목사의 “팬클럽” 회원들입니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소위 “요사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특정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위한 “사모”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박사모”; “노사모”; “이사모”; 등등. 이들 회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의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친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의 신변이 위협을 받거나 또는 명예가 실추될 만 한 일이 발생하면 거의 이성을 잃은 듯이 막가파 식의 대응과 보복을 합니다. “사모”의 대상이 정치인일 경우 이들은 민족이나 국가나, 정의나, 대의명분보다는 그 정치인을 우위에 놓습니다.
지금 “요사모”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요한’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마)보다는 ‘요한’ 목사의 카리스마를 더 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기보다는 “요한교회”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요한’ 목사는 불평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그리고 그는 교회 문을 닫고, 당회장 직도 사임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그는 마치 이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일러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칭송한 이유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능력에 찬 사역이나 설교와 같은 “위대한 높아짐”이 아니라, 반대로 “위대한 낮아짐” 즉 겸손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 다 이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잠시 그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안도감(安堵感)과 만족감으로 지극히 평화롭고 기쁨에 찬 모습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하). 이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후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과 흡사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
그런데 사실 은퇴해야 할 자는 요한 목사님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감히 판단컨대, 작금의 우리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선지자적 역할도 제사장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윤리·도덕적 파탄은 사회적 공분의 수준을 넘어 아예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반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선도적으로 대응하고, 전문적인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지도 못합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요 멘토(mentor)는 목사나 신부나 승려가 아니라, 과학자나 정치가입니다. 그렇다고 탁월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풀어주어 시대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대도 어느 교회도 디폴트나, 은퇴 선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 “침례 요한” 목사님이 기쁨으로 은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신랑이 아니라, “신랑 친구”(shosben)일 뿐이라는 점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신랑 친구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내 인생에서나 교회에서 아무런 책임 있는 역할을 맡지 않으려 하는 것도 심각한 정신 장애로 보아야 하지만, 매사에 주연(主演) 노릇만 하겠다는 발상도 과대망상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분명 과대망상의 정신 질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전 4:6). 사실 이 말씀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두고 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젊은 시절 두 손 모두를 가득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미 많은 은사와 직분을 주셨음에도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고, 나머지 손도 가득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이른바 담임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대략 25여 년 전 일입니다. 경북대학교 캠프스에서 처음 개척 예배를 드린 후에 교회는 제법 성장해 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믿음의 분량에 만족하지 못하고 양 손에 가득 채우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어쨌든 교회는 성장했어야 했고, 그 교회는 내 것 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왜 그 때 스펜서 목사님이나 침례 요한 목사님처럼 못했는지 참 후회가 남은 부분입니다.
본인은 미국에 있을 때 침례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침례교회가 다른 교단과 무엇이 다른지 전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아무튼 지금의 사회는 너무 복잡다난 하여 한 교회가, 또는 목회자 한 사람이 감당해 나가기에는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대경지방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지방회의 20년 이후, 아니 10년 이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미자립 교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성도 두서너 명 출석하는 교회들로 이루어진 지방회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침례교의 이상과 정신을 논한다는 자체가 사치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방회가, 우리 교회가 정말 사회의 저 변방으로 아주 내몰리기 전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가해 봅니다.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며,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