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랑과 신랑 친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3:22-30약 10분 분량
두 교회 이야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요한교회”와 “예수교회”였습니다. 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각각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교회는 모두 같은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를 전하고 증언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개척 시기로 볼 때 “요한교회”가 “예수교회”보다는 아마 몇 년 앞선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교회”는 개척하자말자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참고. 눅 3:7). ‘요한’ 목사의 사역은 실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성공적인 사역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더니”(마 3:5).
그의 교인 중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군인, 부자, 세무서 직원, 유대 관원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교회”를 개척한 예수님도 실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목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가 환생한 것으로 믿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tetrach)이었던 ‘헤롯’ 왕도 ‘요한’ 목사를 궁중에까지 불러들여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교인으로 등록을 할 정도였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이처럼 “요한교회”가 교세(敎勢)를 확장하며 소위 대형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을 무렵, “예수교회”가 새롭게 개척이 되어 근처에 들어섰습니다. 담임 목사 예수님의 목회 비전이나 목적 그리고 신학적 입장은 ‘요한’ 목사와 똑 같았습니다. 그러니만치 두 교회는 이제 힘을 합쳐 이전보다 더욱 활기차게,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교회”를 더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교회”가 “요한교회”를 누르고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요한교회”는 성장이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교회 등록 교인들마저 “예수교회”로 옮겨 가는 통에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수평이동이 오늘날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두 교회의 명암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한 사람은 성공하는 목회자로 급부상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한 목회자로 이전의 명성이 점점 쇠락해 가기 시작합니다.
만일 내가 ‘요한’ 목사이거나 그의 추종자라면 기분이 어떨까? 본인은 매달 “우리 집 교회”를 올 때마다 “노화동 교회”를 지나칩니다. 그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 교회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우리 집 교회”를 바라보는 기분이 과연 어떨까?”하고 상상해 봅니다. 아니면 반대로 이런 상상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근처에 누군가 젊고 패기에 찬 젊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우리 집 교회” 식구들이 모조리 그쪽으로 몰려간다면, 황 목사님이나 장 전도사님이나 여러분들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본인이 근무하는 경북대학교에는 대학 교회를 위시해서 CCC, IVF, SFC등 여러 선교 단체들이 있습니다. 모두 대학선교라는 동일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직들입니다. 대학에 교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여럿 있으니 대학 선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상호 협력과 격려를 위하여, 그리고 유익한 정보를 나누기 위하여 매주 목요일 정오 대학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합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모이는 교인들의 수를 보면 늘 이삼십 명에 불과합니다. 각자 자신들 만의 사역에 바쁜 탓에 잘 모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단체들은 대학교회가 주도가 되어 교인들을 전도하고 흡수해 가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대학교회는 나름대로 교회가 주도가 되어 제반 사역을 수행해 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선의로 봐 준다 해도 마치 이들 각 단체들은 일종의 ‘제로 섬’(zero sum)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 역시 경쟁교회인 “예수교회”가 급성장해 가는 것이 탐탁치만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주변의 동료 ‘유대’인들과 자신들이 하는 사역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25절). 논쟁의 주제는 ‘요한’ 목사가 수행하고 있던 “침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교회”의 교인들과는 같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사는 침례에 대한 무슨 교리나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의 목사 ‘요한’에게 찾아와서 늘어놓는 불평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선생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니라”(26절).
그들의 불평인 즉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오지 않고 인근 “예수교회”로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인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그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뭐 이런 것이겠지요:
“목사님, 당신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목사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 야단도 좀 치고, 절대 우리 교회 근처에서는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문 닫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요한’ 목사의 “팬클럽” 회원들입니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소위 “요사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특정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위한 “사모”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박사모”; “노사모”; “이사모”; 등등. 이들 회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의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친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의 신변이 위협을 받거나 또는 명예가 실추될 만 한 일이 발생하면 거의 이성을 잃은 듯이 막가파식의 대응과 보복을 합니다.
“사모”의 대상이 정치인일 경우 이들은 민족이나 국가, 정의나 대의명분보다는 그 정치인을 우위에 놓습니다. 수년 전 아세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북한의 응원단이 그들의 지도자 김정일에게 보여준 바 있는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이들은 김정일의 초상이 그려진 현수막이 빗물에 젖었다고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구르는 등 거의 발작 수준의 증상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지금 “요사모”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요한’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요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마)보다는 ‘요한’ 목사의 카리스마를 더 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기보다는 “요한교회”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맥 형성이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교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최신 음향 기기나 교육 시설 등이 신생 “예수교회”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요사모” 회원들의 행복의 조건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사람(person); (2) 소속(position); (3) 소유(possession).
불행의 씨앗들
그러나 “요사모” 회원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조건들 때문에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을 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선생에게 쪼르르 달려와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26절).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행복의 조건들이 오히려 인생을 더 큰 “고해”(苦海)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내 인생 뿐만 아니라 남의 인생까지도 말입니다.
예컨대, “소유”(possession)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합니다. 항상 남과의 비교로 고통은 오히려 더해갑니다. ‘엘리자벳 엘리엇’(Elizabeth Elliot)은 고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나 또는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갖게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대도 <성경>은 온통 이 소유의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가인’, ‘레아’와 ‘라헬’, ‘요셉’의 형들, ‘사울’ 왕, ‘요사모’ 회원들 모두 다른 사람에게는 있으나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늘 인생이 괴롭고 불만족스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도 한 때는 “예수교회”의 열성 회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금지시키려 했습니다(참고. 막 9:38). 시기심이 발동한 결과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을 때, 그를 시기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동기라는 것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복음이 널리 전파될수록 당국은 ‘바울’을 더욱 학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참고. 빌 1:14-17). 투기심도 이정도면 가히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person)에 대해서 거는 기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사야>가 토로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말은 “판단할 가치조차 없다” 또는 “고려할 만 한 가치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대도 우리 대부분은 이 가르침을 무시하다가 큰 낭패를 당하며, 그 수렁에서 한동안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인생을 고해라고 합니다만,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의 대부분이 실은 인간관계 때문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간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교인은 목사에게, 목사는 교인에게, 그리고 목사는 목사에게 실망과 배신감과 고통을 안겨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요사모” 회원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목사에 대해서 깊은 실망을 느끼고 “요한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일이 훗날 “예수교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사모” 회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자(牧者)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전날 밤 깊은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기도할 때조차도 함께 동참하기는커녕 태평스럽게 단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한 번도 “실망스럽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들이 한 시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고 책망하시긴 했지만, 이는 실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으므로 실망할 이유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 피차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나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믿었던 사람 때문에 실망하여 배신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소속”(position) 즉 지위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 내지는 보험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종의 도피성인 셈입니다. 닫힌 사회일수록 이 세 가지 인연의 벽은 높고도 강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이들 세 가지 인연으로 맺어진 모임이나 단체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이들 단체들의 송년회를 알리는 현수막이나 안내판이 전국 곳곳을 도배하다시피 해놓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산간벽지의 한 초등학교조차도 동창회만으로는 부족했음인지 제 몇 회 무슨 반 동기회까지 조직하여 송년회를 가질 정도입니다. 본인이 살고 있는 경산시 남산면에도 아무개 종친회로 부족했음인지 아무개 종친회 남산면 청년회 지부도 있습니다.
왜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임이나 단체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것일까? 왜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 혼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벌일 때에나, 무슨 사업을 시작할 때에나,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하기보다는 항상 주변에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고질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모임이나 공동체를 통해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출신이나 성분, 소속이나 지위가 치명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이 조직 속에 나를 두려고 안달인 것이지요. 그것을 얻기 까지 만족이 없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도피성이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