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두 부활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18-20약 8분 분량
<요한복음>의 “다락방 설교”(요 14-17)와 <마태복음>의 “감람산 설교”(마 24-26장)는 둘 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설교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져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의 반응이 두 곳 모두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추측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강론의 벽두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즉 사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했고 두려웠습니다. 이것이 두 설교에서 느껴지는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감람산 설교”는 그 내용마저 아주 비장하고, 음산하기까지 합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난리와 난리”; “기근과 지진”; “멸망의 공포”; “시체와 독수리”; “임산부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한 마디로 지구의 종말이 목전에 와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임박한 종말을 대비해야 할 것 만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감람산 설교의 주제가 종말에 관한 것일까? 사실 많은 설교자나 신학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람산 설교를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에 관한 설교로 간주하여, 종말에 관한 시간표 짜 맞추기에 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연계하여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감람산 설교의 주제는 한 마디로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고 없는 상황에서, 그분의 제자들이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관한 설교라는 말입니다.
설교 내용 중에 등장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은 “만일”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설교 중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지옥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만일 기도하는 모습이 공안 당국에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곧바로 처형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익히고 배워야 합니다. 결국 감람산 설교나 다락방 설교나 모두 마치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부하들을 내보내는 중대장이나 연대장의 최후 지시사항과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분위기는 엄숙하고, 비장하며, 심각하고, 침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휘관이라면 전쟁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총알이나 부비트랩이 그들을 피해가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주 솔직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도 아니고,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곳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곳곳에서 전쟁과, 환난과, 기근과, 지진과, 그리고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 같은 상황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선택은 모든 무거운 짐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마침 그분이 떠나신다고 하니, 나도 함께 데리고 가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혹시 ‘베드로’가 이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자기도 선생님과 함께 가겠노라고 의기양양하게 나섰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핀잔이었습니다. 불가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대신에 그가 들었던 말씀은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고, 나중에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참고. 13:36-38). 이 무슨 헷갈리게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그분이 나를 데리고 갈 수 없다면, 나중에 그분이 가고 없는 세상에서 내가 무슨 재주로 그 선생님을 따라 해 볼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어느 용사가 있어 감히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시늉이라도 내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즉 선생님과 함께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다면 남은 대안은 무엇일까? 한 가지 밖에 없는 듯합니다: “선생님이 가고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단히 절망적이게도 그 길은 없어 보입니다. 알다시피 이 비정한 세상에서 ‘고아’(孤兒)를 위한 가정은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의 단상(斷想)을 정리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님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홀로 남아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해답의 단초를 구하기 위해서 방금 물었던 질문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가고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 지금까지 내가 선생님의 강의를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질문의 전제(前提)가 틀렸음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 한 번도 이 세상에서 고아처럼 내버려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네 집이 이미 마련되어있다”(참고. 2절). 자기가 살 집이 마련되어있는 고아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남으로써 가능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이별의 유익이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절). 고아처럼 남겨질 일이란 결코 없을 것임을 보장하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음인지,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추호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이 말씀은 일견 쓸데없는 반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의 두 번의 말씀보다 더욱 구체적입니다. 즉 고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시며, 또 다른 보혜사가 아닌 그분께서 몸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언제를 말합니까? 직전에 언급하신 또 다른 보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보혜사의 형태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19-20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부활 후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리고 “그날에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있든, 세상에 남아있든 이 세상은 빛을 거부하므로 결코 그분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참고. 1:5, 10).
제자들의 부활. 그러나 제자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또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9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제자들이 살아남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들 또한 살겠음이라”(19절하).
주님은 여기서 두 단계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주님의 부활에 이는 제자들의 부활 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육체적인 모습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부활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그 특유의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보다”; “살다”, “알다” 등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단순히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영생의 영역에 속한 단어들로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세상은 그대로 “눈 먼”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새롭게 눈을 떨 것이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알지 못하던 영적 진리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우리의 화자는 이 지식이 곧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마지막 부활. 하지만 부활절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 국한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즉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것입니다. 다락방 강론이 온통 종말론적인 어휘들로 가득 차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시 오리라”는 말씀도 넓게는 종말의 재림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도 종말론적인 의미의 “때가 되면” 또는 “그 날에”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사 26:20; 합 2:33-34; 히 10:27-28). 또한 “그 날에”(20절)는 “종말에는”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사 2:11; 4:12; 막 13:32).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이자 표적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이 말씀도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그분의 제자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 즉, 그분이 지금 떠나시는 것은 단지 이 모든 일을 위한 준비작업 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지금 선생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나를 향해서 무어라고 외치고 있을까요? 먼저 산 정상에 오른 이들이 힘겹게 뒤따라오는 등산객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외칠까?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