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또 다른 보혜사(1)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15-17약 10분 분량
이번 설교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같이 한 번 외워볼까요?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의 창조와, 성자(聖子) 하나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과 그리고 심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령(聖靈)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합니다. 이분에 관해서는 그저, “성령을 믿사오며”가 고작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를 빼고 나면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느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거의 매 책마다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정체(正體)나 사역(使役)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입니다. 이해는 고사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령님을 거론하기는 하나, 대부분 자신의 관점이나 특별한 체험으로 그분을 인식하고 일반화 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을 성령님의 사역과 혼동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성령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아니라, 그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바탕으로 사역이 있지 사역을 바탕으로 존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해가 있고 그로부터 햇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야 할 것이며, 성령님과 성령님의 사역 또한 구별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그 순서가 뒤바뀌면 늘 피곤하고 쓸데없는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며, 모두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곳에서 성령님에 관해서 체계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강의를 하시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작정하고 성령님 특강을 하신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다른 주제들에 곁들여서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문학적인 일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님에 관한 다락방 강론은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 다락방 강론에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그렇게 자주 등장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다락방 강론의 배경이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강론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며, 지배적인 분위기는 당연히 침울과 침통, 아쉬움과 서운함, 두려움과 비장함 등일 것입니다. 이별을 앞둔 두 연인(戀人)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될 것이며, 임종 직전 ‘야곱’과 그의 침상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자식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상상해 봅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법이지요. 무슨 특별한 주제가 있어서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정 또한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특히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고 할 때의 기분 말입니다. 나라면 어떤 말을 남기고 떠날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바대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이자 동시에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주신다.”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언급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본인은 이곳에서 성령님에 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쌓으려 하기 보다는 ‘요한’ 화자가 다락방 강론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식을 따라, 성령님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번 본문이 그 첫 번째입니다.
인격적 존재. 내가 묻고 싶은 첫 질문은 “성령님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입니다. 존재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인격적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개나 고양이 등과 같은 소위 반려(伴侶)짐승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것입니다. 동물 애호가나 동물보호단체 등의 입장을 보면 반려짐승을 거의 인격적 수준까지 올려놓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짐승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들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누이로, 오빠로, 부모로까지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이라고 함부로 대했다가는 사회적인 지탄이나 벌금형은 물론, 심하면 감옥에까지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전 우주에서 인격적 존재는 하나님과, 천사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는 오직 인격적 존재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둘째 아들 학우는 어린 시절, 스님을 스님으로 부르지 말고 그냥 “스”로 불러야 한다고 우겨댔습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님”은 존경과 사랑의 표현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에서 “님”자를 빼고 “하나”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존경하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냥 예수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그냥 성령으로 불러도 좋을까요? 소위 “성령집회”라는 곳에서 부흥강사들이 종종 하듯이, “성령 받아라” 하며 마치 물건 내던지듯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닐까?
성령님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소위 ‘내거티브’ 방식을 시도해 보려 합니다. 한 때 유행했던 유명한 한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겠습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고문구인지요! 성령님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은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은사”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중생”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결”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계시”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적 충동”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화평”이나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신자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무슨 “개성”이나 “기질”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지금까지 열거한 성령님에 관한 목록은 모두 “그것”에 불과합니다. 즉 비인격적 실재(實在)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요한’ 화자는 성령님을 “그것”이 아닌 “그분”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언급하실 때마다, 남성대명사 “그”(ejkei'no", 에케이노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참고. 14:26; 15:26; 16:8, 13, 14). 그리고 성령님을 처음 소개하고 있는 17절에서는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중성 대명사 “그”(oJ, 호; aujto, 아우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위로자”, “조언자”, “변호인” 등을 뜻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들으시고, 말하시며, 증거하시고, 확신시키시며,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가르치고, 명령하시며, 금지시키시고, 갈망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친히 부르짖으십니다(요 14:26; 15:26; 16:7; 행 2:4; 8:29; 13:2; 16:6, 7; 롬 8:14, 16, 26, 27, 갈 4:6; 5:17, 18). 또한 우리는 성령님께 대하여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그분을 근심시킬 수도 있습니다(행 5:3, 4; 엡 4:30). 이 모두 인격체에 대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적 존재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격적 하나님. 그렇다면 어떤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가능성은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이거나, 천사이거나, 또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단순히 “보혜사”가 아니라 “또 다른 보혜사”(a[llo“ paravklhto”,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르다”가 의미하는 바는 “첫 번째와 같은 두 번째”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보혜사”임을 함축하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님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은 두 번째 주자(走者)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예수님이 보혜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요일 2:1).
그렇다면 당연히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 모든 인격적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냥 “영”(靈)으로 부르지 않고 “거룩한 영”(聖靈)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함이 그분에게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시며(참고. 고전 2:10-11; 요 1:12-13; 눅 1:35),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참고. 시 139:7-10). 즉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며, 이는 또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신 31:6; 수 1:5; 히 13:5);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모든 축도와 모든 침례식(또는 세례식)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부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마치 이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세례명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패커’ 박사는 그의 책에서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거나 무슨 물건처럼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며, 그분은 다른 어떤 분이기에 앞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관계. 인격적 존재는 인격적 관계를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이 없으면 인격적 관계도 불필요합니다. 나와 돼지 사이에, 나와 고양이 사이에, 나와 내 컴퓨터 사이에 인격적 관계는 없으며, 또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인격적 관계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분과 나의 구별이 있습니다. 인격적 구별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헌신과 순종이 있습니다. 헌신과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범신론(汎神論)적 세계관에는 인격적인 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이고, 신은 모든 것”(All is god and god is all)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신과 나 사이에 인격적인 구분도 없습니다. 여기서 구별된 자아(自我)란 벗어던져야 할 환상에 불과합니다. 나를 벗어버리고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은 일견 성경적 이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적 구분이 없으며, 인격적 사랑과 교제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견 문맥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맺게 될 성령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인격적 사랑은 서로를 별개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지, 상호 구분을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져 내가 그고, 그가 나라는 치매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격적 사랑은 또한 억압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참된 구속(救贖)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속에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 속에 거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참고. 8:31-32),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인격적 교제로 그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계십니다(17절).
그러므로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패커’ 박사의 말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소유하고 계신가? 성령님께서 나의 전부를 소유하고 계신가, 아니면 나의 일부분만 소유하고 계신가? 나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가(엡 4:30), 아니면 그분의 이끄심을 받고 있는가(롬 8:12-14; 갈 5:18-24)?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 이번 한 주 그 해답을 찾아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