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3과
제 13과: 양의 목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0:1-42약 103분 분량

양의 목자/하나님의 아들
(10:1-42)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10장에서 다시 한 번 “기독론”(Christology)의 주제가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 “양과 목자”의 담론에서도 그렇고, 두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수전 절” 기간 동안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대화에서도, 중심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화자의 의도는 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배경과 상황을 동시에 바라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배경은 소위 “설화세계”의 배경, 즉 예수님 당시 적대적인 ‘유대’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 배경은 화자 자신이 처해있는 소위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역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겪었던 바와 같은 배척과 학대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담론에서 자신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목자”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은 신기로울 만치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주는 이미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나 이방인에나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지도자나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서의 이미지와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의 배경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우주의 주(主)로서의 통치자와 구속자(救贖者)의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에스겔> 34장의 담론에 의하면 양 무리의 목자를 자임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며,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의 불성실함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하는 일이란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역은 양 무리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짓 목자들은 영적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만, 보다 넓게는 율법 교사나 메시아를 자처하는 선지자들을 비롯한 종교 전 영역에 걸친 지도자들을 총괄하는 무리들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와 그가 속한 교회의 상황에서 거짓 목자의 대상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신들과 영지주의 등과 같은 사이비 종교적 가르침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좁게는 주후 70년 이후의 ‘얌니아’파 ‘바리새’인들로 국한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답변은 다소 폭넓게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는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와 하나 되는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명칭은 그 대상이 누구인가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구조. 10장은 양과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1-18절)과 수전절 기간 동안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22-39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아래에서 보듯 공통적으로 세 개의 소(小)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마지막에 화자 자신의 해설 내지는 보고(報告)로 끝내고 있습니다. 즉 첫 번째 단락의 예수님의 강론은 그 강론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과 논쟁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가 하면, 두 번째 단락의 대화는 예수께서 ‘요단’ 동편으로 피신하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 단락 1: 양과 목자(강론)(1-21절)
(1) 비유(1-6절)
(2) 비유를 묵상함(7-18절)
(3) 분쟁(19-21절)
2) 단락 2: 수전절의 예수(대화)(22-42절)
(1) 예수와 그리스도(22-30절)
(2)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31-39절)
(3) 요단 동편으로 피신함(40-42절)
10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만, 화자가 이를 다른 장들(8-9장)과 주제에 있어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는 제 12 과의 “문학과 역사”에서 8-10장들이 상호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나는 아래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1) 8장과 9장의 주제와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2) 9장과 10장의 주제 및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3) 8-10장을 관통하는 통일된 주제는 무엇인가?
배경. 19-21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 중에, 맹인이 눈을 뜬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혹자는 이 내용이 9:39-41 바로 다음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26-29절 사이에서 양과 목자에 관한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두고, 이 부분은 19-21절 다음에 와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본문의 내용을 재구성할 때, 10장 전체의 설화적 배경은 수전절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양과 목자에 관한 비유(1-5절)의 문학적 배경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주장인 즉은, 이 비유가 실은 두 개의 비유가 합성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비유(1-3절상) 속에는 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도적과 목자로서 이 두 인물 모두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가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유(3하-5절)가 보여주고 있는 바는 양과 도적, 그리고 양과 그들의 목자와의 관계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담긴 주장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이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는 ‘유대’ 지도자들을 “낯선 자”(ajllovtrio", 알로트리오스)로 정죄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 10장의 배경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처음 비유가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양의 우리 속으로 들여가려고 애쓰고 있는 도적과 목자로서, 이곳에서 중심인물은 목자가 아니라 문지기입니다. 이 비유 역시 두 번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경고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양의 목자에게 마음을 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학자들이 이와 같은 두 비유의 혼재설(混在設)에 입각해서 본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이 같은 구분은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하겠습니다. 신학자 ‘베커’가 잘 관찰하고 있는 바대로, 이 비유를 하나의 비유로 받아들이면, 다섯 절(1-5절)의 구조는 긍정적인 진술(2-4절)이 부정적이며 대조적인 두 진술(1, 5절)로 둘러 쌓여있는 형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진술이라 함은 목자가 양에게로 와서(1-3절상), 양들을 방목지로 인도해 간다는 진술을 말합니다(3하-5절). 이 두 일은 논리적으로 연결된 것이며, 비유가 핵심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간다는 점 말입니다. 따라서 1-5절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취급해야지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위(7-18절)는 이 비유에 대한 묵상으로서, “문”과 “목자”에게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도적과 “낯선 자”에 대한 설명과 이들과 양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재의 본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10장의 첫 단락(1-21절)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이야기>와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9장의 초막절 이후의 시점일 것입니다. 한편 10장의 두 번째 단락(22-39절)은 RM 이후의 한 시점 즉 수전절 기간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측건대 예수님께서는 초막절과 수전절 사이의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신 것으로 보입니다. 수전절은 <구약>에서 명시한 정기적인 절기는 아니고,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독재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속박에서 벗어나 ‘예루살렘’ 성전을 재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축제의 이와 같은 성격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아 여부를 묻는 등 그와 관련된 논쟁을 촉발시킨 배경으로 작동한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강론: 양과 목자(1-21절)
1) 비유(1-6절)
목자와 양에 관한 이 비유에서 목자는 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로,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적은 양 우리의 담을 몰래 넘어가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목자는 도적과 달리 양들과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양들을 알고 있고, 양들은 목자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인도에 따라 초원으로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만, “낯선 자”는 피합니다.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5절)
이 비유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근동지방의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입니다. 양들은 낮에 방목을 위해서 흩어져 있다가 밤이 되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보호를 받습니다. 양 우리는 때로는 방목지에서 급조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집 근처의 뜰에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우리 안에 주인이 다른 양들이 섞여 지낼 수도 있습니다. 아침이 되어 목자가 와서 그의 양들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내어 모은 다음 다시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뜯게 합니다.
근동지방의 방목지는 어느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목자는 양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고, 방목지가 모두 평평한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때로는 험한 계곡이 나타나기도 하고, 짐승의 공격도 있어서 그대로 두면 양들은 근처 사막으로 넘어가 배회하다가 죽어버리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근동지방에 목자가 없는 양은 상상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낮 동안 목자는 양들이 한가로이 방목지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도록 내버려둡니다만, 저녁이 되면 다시 자신의 양들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 모읍니다. 이 때 신기하게도 멋대로 섞여 지내던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고 그에게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호주 등과 같은 방목지에서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즉 양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목자의 복장을 하고 기막히게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불러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다 도망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도적과 강도를 목자에 앞서 먼저 언급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특히 9:40-41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한 저주 바로 직후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목자가 정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양들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지기가 특별히 하는 일이라고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 뿐입니다(참고. 막 13:34-36; 눅 12:35-38).
3절과 4절 사이에 유난히 “그”(또는 “자기”)가 수차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여러 무리의 다른 양들이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이들 여러 양 무리 중에서 오직 자기 양들만 불러냅니다. 그리고 양들을 불러낼 때에도 이름을 부릅니다. 물론 모든 이름이 동일한 이름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설화세계 속의 유대인들이나, “요한 공동체”의 회중들이라면 누구나 비유의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비유 속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절)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흐르는 “무지”(또는 오해)의 모티브를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2) 비유를 상고함(7-18절)
이어지는 본문은 비유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묵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묵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단락은 구문론적으로 긍정적 진술과 부정적 진술이 일종의 대조병행 형식으로 반복적 배열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A(7절); B(8절); A(9절); B(10절).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7-10절)
그런데 이곳에서 예수님에 관한 “양의 목자”에서 “양의 문”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곳에서 본문 변조가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양의 목자든, 양의 문이든 이 은유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분명 구원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 가신다는 점에 있어 양의 문이 되시며, 그가 또한 우리를 돌보신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도 합니다(참고: 요 14:6; 시 118:20). 특히 10절 후반의 말씀은 복음의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측면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은유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두 번째 은유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교차대구의 수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A(11절); B(12절); B'(13절); A'(14절).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11-13절)
“선한”(kalov", 칼로스) 목자라 함은 “진정한” 목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선한 목자와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삯군”은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삯군”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삯군”은 양이 자기의 소유도 아니고, 그러므로 그들을 돌보지도 않으며,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도 않습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은 다시 한 번 “선한 목자”의 특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우리는 이 대목에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지식” 즉 “아는 것”에 관한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적 사고에 따르면 “지식”이란 단순히 사물을 보고 그 의미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지식이란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종교의 영역에서 적용하자면, ‘그리스’적 사고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인식 내지는 묵상 정도가 될 것입니다만,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사고는 예컨대, <아모서>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1-2).
이 같은 배경에서 14-15절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양과 목자가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가 깊은 교제를 통해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와 같은 관계를 상호 “안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이어지는 16절에서 예수님의 묵상의 초점은 다시 처음의 비유(1-5절)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
비유에서 등장하는 “울타리”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입니다. 만일 구원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면, 목자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찾아와야 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다른 민족들에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해했던바 예수님, 즉 “세상의 구주”도 바로 그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4:42).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의 울타리 외에도 다른 울타리에 속한 앙들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목자의 죽음이 그 모든 민족들을 다 안게 될 것입니다(참고. 11:50-52; 3:16; 6:51; 12:20, 24, 31-32). 다른 울타리에 든 양들 또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예수님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참고. 29절, 6:37-39, 44-45, 64-65).
그렇다면 누가 이들 양을 모을 것인가? 다름 아닌 목자 자신입니다: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열방을 위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이 될 것인 즉, 이는 그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을 위해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던 것처럼, 열방을 향한 사역은 예수께서 보내실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하). 이와 같은 사상은 <마태복음>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러므로 다른 우리에 속해 있는 양들은 그대로 고립된 채 내버려질 것이 아니라, 한 목자의 보호 아래 한 울타리 속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두 무리의 양이 한 무리로 통합되는 일은 예수님의 희생의 열매이며(15, 17-18절), 하나님과 사람과의 각별한 관계의 결과입니다(14-15절). 여러 ‘바울’ 서신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지지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5:12-21; 고후 5:14-21; 엡 2:11-18).
목자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미 선언한 바 있지만(11, 15절), 나머지 두 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7-18절)
다만 이곳에서는 비유에서 본 것과 같은 상징이나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제의 핵심은 17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18절에서 이를 다시 확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간파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을 위한 아들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들의 죽음이 아버지의 사랑을 촉발시켰다거나 원인을 제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고 구체화시킨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세상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내놓았으면 하셨고(18절), 아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로 아버지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상대를 향한 서로 간의 사랑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아들의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아버지는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고, 아들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내던졌습니다.
둘째,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상이 함께 결합하여 그러나고 있습니다. 즉 아들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부탁하신 사역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역들과 마찬가지로 그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성취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자신의 생명을 다시 취하실 것이며,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부활은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17:1, 5, 11).
3) 분쟁(19-21절)
이 놀라운 선언은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을 분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19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19-21절)
여기서 이들 ‘유대’인들이 ‘유대’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또는 일반 대중들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이 구별이 애매모호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7:11-13).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 중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7:31, 32, 40-43). 그 때와 마찬가지로(7:40-43), 지금 이곳에서도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이 9:40-41에 바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어 9장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 일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느 때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11장에서도 그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1:37).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언급은 당시 그 상황이 불확실하고 긴장이 조성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단락에 대한 연결고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 긴장과 불확실한 상황이 폭발하여 마침내 수면 위로 분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24-39절).
2. 수장절과 예수님(22-42절)
첫 단락의 배경이 “초막절”이었다면 두 번째 단락의 배경은 “수장절”(또는 “수전절”)입니다. 이 단락은 다시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참고. 문학과 역사), 각 단락의 주제나 분위기가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처음 두 단락이(22-39절) ‘유대’인들의 불신과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세 번째 단락(40-42절)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며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처음 두 단락의 주요 등장인물이었다면, 기적을 통하지 않고 오직 침례 ‘요한’의 증언만을 통해서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세 번째 단락의 핵심입니다. 처음 두 단락에서 논쟁의 핵심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으로서, 핵심어는 각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두 주제는 실은 동일한 주제의 다른 측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가 ‘메시아’인지 묻습니다(24절). 그분의 대답은 1-18절 사이에 있는 양과 목자에 관한 강론을 연상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절)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선언을 바탕으로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강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36절). 예수님의 강론과 선언은 수전절과 맞물려 그분의 사역에 관한 의미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22-30절)
“예수는 과연 그리스도인가?” 이것이 처음 단락의 논쟁의 핵심입니다. 이 논쟁은 수장절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논쟁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장절이 제정된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수장절은 <성경>의 다른 절기들과는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전 2세기경 ‘시리아’는 독재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Antiochus Epiphanes)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Antioch)이라는 지명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잔인무도하였고, 자신의 제국 내에서 ‘헬라’의 최고신 ‘제우스’를 섬기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는 주전 167년 12월 25일, ‘예루살렘’ 성전 내 제단에 ‘제우스’ 상을 만들어 돼지를 잡고, 그 위에 피를 뿌리는 등, 극도의 가증스러운 이방제사를 행하였습니다. 그의 만행은 <다니엘서>에도 기록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에 분개한 ‘유다 마카비’와 그의 아들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일련의 영웅적인 전쟁을 통해서 ‘안티오커스’ 군대를 퇴치하고,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성전을 재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후 이 날은 연례적으로 열리는 즐거운 축제의 날이 되었고, 예수님 당시까지도 이러한 축제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날은 축제일로서 아무도 눈물을 보이거나,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날 역시 초막절처럼 불을 사용했기 때문에 “불의 축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단지 초막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장절 축제는 집에서도 기념할 수 있도록 하였고, 팔일 동안 지켰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여덟 가지가 달린 촛대를 써서, 매일 하나씩 점등을 하거나 또는 첫날 여덟 개의 불을 모두 밝힌 후 매일 하나씩 꺼나가거나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수장절은 유대 역사에 있어 위대한 독립 기념일 같은 날이었으며, 이날 ‘유대’인이라면 ‘유다 마카비’같은 영웅적인 인물의 재등장을 기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메시아’ 즉 ‘그리스도’ 논쟁이 가열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축제 기간이 12월말이니까, 초막절보다 약 3 개월 후로서 비교적 추운 시기였습니다. 22절의 겨울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 사이로 다니셨다는 것도, 추위를 피해서 그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22-23절)
그러나 이 표현은 보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겨울”은 그가 다른 곳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어두움”과 병행되는 상징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브루스 밀런’). 마침내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는 암시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처한 상황은 이로부터 수개월 후에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서 모여서 거부와 배척의 찬바람을 맞게 될 것을 예고해주고 있는 듯합니다(행 5:12).
한편 ‘비슬리-머레이’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추운 겨울은 ‘유대’인들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전절의 축제가 “적그리스도”로부터 종교적 자유와 해방, 그리고 진정한 종교의 승리를 기리고 기념하는 것이긴 하지만, 추운 겨울은 대망의 ‘메시아’를 속절없이 기다리다 얼어붙은 ‘유대’인들의 심령을 상징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구세주가 올 어떠한 징조도 없습니다만, 바로 그들 가운데 많은 무리들이 ‘메시아’로 인정하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들의 거룩한 율법이나 전승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며, 그래서 그의 가르침과 행동은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과연 무엇을 알기는 원했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24절)
마치 참다 참다 못해 물어보는 질문 같습니다. 그동안 예수께서 많은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명시적으로 그가 ‘메시아’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습니다(딱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메시아’ 임을 수긍하신 적은 있습니다만, 이는 공개적인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참고 4:25-26). 물론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I AM) 선언, 즉 “생명의 물”(7:37-38), “세상의 빛”(8:12), “양의 목자”(10:11) 등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모든 선언들이 결국은 자신이 ‘메시아’ 또는 “하나님 나라의 왕” 임을 드러내려는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이점이 실로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다시 한 번 즉답을 회피하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25절)
우리는 여기서 ‘요한’ 화자가 소위 “메시아의 비밀”을 유지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도다”가 그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밝힌 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의 진의(眞意)인 즉은, 아마 그동안 대중들을 상대로 가르치고 행하신 그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고도 남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나 볼 눈을 가진 자라면 깨닫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고로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신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즉 그들은 예수의 양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긴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6-27절)
“선택”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님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역시 이점에 있어 예외는 아닙니다. 예컨대, 이 말씀은 37-38절과 함께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7-38절). 인간의 책임에 대한 환기(喚起)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첫 번째 단락의 주제, 즉 “양과 목자”에 관한 묵상을 듣게 됩니다. 즉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그를 따르는데, 이는 그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참고. 14-15절).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목자의 음성”과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란 목자가 양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관계이며, 목자는 목숨을 내놓으나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16-17절). 바꾸어 말하자면, 양들은 결코 길을 잃거나, 없어지거나, 누군가의 공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단락의 나머지 구절들이 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28-30절)
2) 하나님의 아들(31-39절)
“그리스도면 밝히 말씀하소서.”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이 과연 진정어린 것이었는지는 예수님의 답변(25-30절)에 대해서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31절)
이와 같은 자기 파괴적인 모습은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참고. 8:58), 그 때와 달리 예수님의 대응이 이번에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때처럼 이들의 물리적 폭력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폭력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질문은 깊은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피려 하느냐(32절)
자신이 행한 일들 중에서 어떤 일이 과연 신성모독에 해당하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질문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기적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니만치,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30절) 강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단어는 “아름답다” 또는 “고상하다”는 뜻입니다(막 14:6; 눅 8:15; 딤전 4:6).
분노는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뿐, ‘유대’인들의 귀에 예수님께서 제기하는 질문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답변이 그들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했건, 그리고 그 일이 어떻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예수께서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이 같은 혐의는 복음서 전체를 두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유대’ 공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만 신성모독 죄를 부과합니다만, 예수께서 자칭 하나님으로 칭했으며, 그 때문에 신성모독을 행했다는 죄목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마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재판 장면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막 14:61-64). 이 재판에서 대제사장이 예수가 신성모독을 행했다고 선고한 것도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아’로 칭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면서 덧붙인 추가 설명, 즉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식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30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곧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칭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인식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으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5:17-18). 그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성은 존재나 인격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 하나라는 점을 상기시켜준 바 있습니다(5:19-30). 예수님의 당시의 답변은 30절과 관련한 ‘유대’인들의 오해에 대해서 여전히 유효한 답변으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의 반발에 대해서 예수님은 <시편>의 한 구절로 자기변호를 시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34절)
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2:6-7)
이는 ‘유대’ 특유의 논리전개 방식입니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논점을 확립하고 자기주장을 정당화 하는 방식 말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절은 첫 번째를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으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신”의 정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세 가지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사사; (2) 하나님의 천사들; (3)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이 중에서 세 번째 견해가 가장 그럴 듯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의미인 즉은 이런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기에 충분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자기야말로 그러한 칭호를 받기에 얼마나 더 합당한가!”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5-36절)
그리고 예수님은 “기적의 의미” 즉 “표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호소하고 계십니다.
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8절).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지난 번 초막절에서처럼 이들을 피하여 떠나가십니다(8:5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절)
전능자 하나님의 정하신 기한이 이를 때까지 선한 목자도, 그의 양도 그 때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3) 피신(40-42절)
‘유대’ 지도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인하여 주님은 ‘요단’ 동편으로 피신하십니다. 이곳은 침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이며, 예수님에 대하여 강력하게 증거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40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0-42절)
이제 이야기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입니다(참고, 1:28-34). 이곳은 침례 ‘요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곳입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그의 증언도 함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요한’을 기억하며, “그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는 화자의 설명이 다소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침례 ‘요한’의 명성에 견주어 볼 때, 그 자체로써도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은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을 터인데, 선지자에 대한 평가로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유대’ 전승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곧바로 이어서,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덧붙이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같이 말한 것은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체험한 후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침례 ‘요한’의 증언이 참됨을 증명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침례 ‘요한’의 증언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가 참된 예언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았던 침례 ‘요한’에 비하면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탁월한 권위를 지닌 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그를 믿게 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화자가 서막에서 침례 ‘요한’에 대해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으며(1:7),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이자 가장 위대한 표적이 될 “나자로의 기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11장). 독자들은 벌써부터 “나자로의 기적”이 가져다 준 새로운 믿음의 확장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11:45; 12:9, 17-19).
교훈 및 적용
1. 양의 목자
첫 번째 단락의 문학적 양식은 일종의 강론으로서, 이 강론은 비유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근동지방의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것입니다. 양들은 낮에는 방목을 위해서 흩어져 있다가 밤이 되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울타리는 때로는 방목지에서 급조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집 근처의 뜰에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울타리 안에 주인이 다른 양들이 섞여 지낼 수도 있습니다. 아침이 되어 목자가 와서 그의 양들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내어 모은 다음 다시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뜯게 합니다.
근동지방의 방목지는 어느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목자는 양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고, 방목지가 모두 평평한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때로는 험한 계곡이 나타나기도 하고, 짐승의 공격도 있어서 그대로 두면 양들은 근처 사막으로 넘어가 배회하다가 죽어버리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따라서 근동지방에 목자가 없는 양은 상상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낮 동안 목자는 양들이 한가로이 방목지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도록 내버려둡니다만, 저녁이 되면 다시 자신의 양들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 모읍니다. 이 때 신기하게도 멋대로 섞여 지내던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고 그에게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호주 등과 같은 방목지에서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즉 양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목자의 복장을 하고 기막히게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불러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다 도망친다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듣고 있었을 설화세계 속의 당시 ‘유대’인들이나 해설자의 공동체 회중들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쉽게 파악했을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비유 속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6절).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한복음> 전체에 깔려있는 “무지” 또는 “오해”의 모티브를 대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세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지기와 두 목자. 비유의 중심인물은 단연 두 목자로서, 화자는 두 목자의 특성을 대조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거짓 목자의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그리고 있는 거짓 목자들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무리가 아니라, 시대를 두고두고 하나님의 나라 안팎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양들을 헷갈리게 하는 거짓 지도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을 위하여 염려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이 그들 때문에 염려하고 울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나라의 백성들 참으로 불쌍합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이들 지도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무릇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이들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양의 유익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비유에서는 이들을 도둑이요 강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치인이라면 늘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사기치고 도둑질합니다. 만일 그가 종교지도자라면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사기치고 돌아다닙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그의 책 서문에서도 신부, 목사, ‘랍비’, ‘이맘’, ‘샤먼’ 등 여러 종교지도자들은 여느 정치인들과 같이 세력을 키우려는 야심을 보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 「이슬람」, 장병욱 역. 을유문화사: 서울. 2003.
이들 지도자들은 때로는 횡포와 독재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12절).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그가 백성들을 위하여 울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염려해야 합니다. 잦은 말의 실수나 경박한 언행 등으로 그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늘 불안합니다. 물가에 애 내어놓은 부모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이들은 분열과 분파를 조장합니다. 분열과 분파하면 ‘고린도’ 교회가 유명합니다(고전 1:10-12). 이 교회는 원래 사도 ‘바울’이 개척하고 양육한 곳이었는데, 그가 가고 없는 틈을 타서 거짓 지도자들이 슬쩍 들어와 자기들이 무슨 큰 영적 은사를 지닌 자들인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이나 신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전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그래서 현재 이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색깔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뭐야? 그것은 ‘바울’의 신학이고, 나의 목회철학은 그렇지 않아”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실력자나 된 듯이 온 교인들을 개혁과 개도의 대상으로 삼아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정작 개혁의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알지 못하고 말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도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이념적 갈등이 해방 직후의 상황처럼 심각합니다.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과 반목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도무지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정부나 언론의 발표를 믿지를 않습니다. 툭하면 음모론으로 뒤집어씌워버립니다. 아니면 괴담을 퍼뜨립니다. 이러한 사회적 대혼란의 중심에 국회나, 시민단체나, 얼굴도 이름도 없는 네티즌들이 있습니다.
소위 새로운 개혁 세력임을 자처하는 일부 정치 지도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 본인이 온갖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당사자들입니다. 일부 언론도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언론의 논조(論調)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십 수 년 전으로 되돌아 온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들은 온 국민을 마치 개도하고 선도해야 하는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교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의로운 자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칭 “의인”으로서 나머지는 모두 개혁과 계도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성 ‘프란시스’의 기도처럼 분열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합과 단결을,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위하여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의 관심사는 오직 양들의 영적 성숙에 있었습니다. 양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애절한지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5);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8-29).
참된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솔로몬’ 시대에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의 태도의 차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거짓 어머니는 그 아이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만, 진짜 어머니는 그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참된 목자라면 마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일련의 행동들을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가 양들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내어, 그들보다 앞서 가며 인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호주 등지에서 보는 목자의 모습은 이와는 전혀 대조적입니다. 그는 양들을 불러내기는 하지만 인도하거나 앞서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호령하고 매를 들고 내몹니다. 횡포와 독재로 일관하는 것이죠.
앞서 말한 ‘솔로몬’의 재판에서 왕은 두 여인의 태도를 통해서 진짜와 사이비를 가려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를 죽이려고 위협하지 않고서도 그보다 더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비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절).
이것입니다! 즉 아이는 본능적으로(냄새나 색깔을 통해서) 그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참된 목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바로 양들의 반응을 통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은 어떻게 목자를 알아보았으며, 어떻게 그를 따르게 되었을까요? 이곳 우리 집 식구들도 전도사님이 없는 것은 용하게도 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오랜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입니다.
2. 선한 목자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두 은유는 “양의 문”과 “선한 목자”입니다. 서로 상반된 은유 같기도 합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인격이나 사역의 이중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자동차의 두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분을 “대제사장”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희생 제물”로 그리고 있으며, 이곳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가 하면(1:29), <베드로서>는 그분을 “목자 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5:4).
“선한 목자”는 <요한복음>에서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ejgwv eijmi), 즉 “나는...이라”는 선언의 네 번째에 해당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단순히 윤리․도덕적인 “선”(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황홀한”, “고상한”, “참된” 등의 의미가 더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부를 때 색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부를 때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스스로는 어떤 호칭을 더 선호하셨을까?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을 때, 그분은 그를 핀잔하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교정해 주셨습니다(참고. 막 10:17-18).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선과 악, 또는 윤리나 도덕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체험과 교제의 영역임을 일깨워주시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청년이 하나님을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는 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참고. 3:2). 한 ‘달란트’를 받아 땅 속에 그냥 묻어둔 어느 종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종의 눈에 비친 주인의 모습은 “마음이 굳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었습니다(참고. 마 25:24). 즉 아주 딱딱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며, 계산에 능숙한 주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종은 그러한 주인이 두려워서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땅속에 묻어둔 것입니다. 행여나 이자 남기려고 사업에 투자했다가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누군가에 대해서 “아름답다”거나 “고상하다”할 때는 그 사람의 맛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취향이나, 인격이나, 색깔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만남과 사귐의 결과로 체득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 사람에 관한 책을 읽었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어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인 것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지식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서, “아름답고 고상하며 참되신 나의 목자님”하고 부를 때 나는 이미 그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지금도 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선한 목자”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뛰고, 그러면서 죄송하기도 하고, 동시에 감격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양의 목자로서 하신 일이 나를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어”, “인도하고”, 또한 “앞서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참고. 3-4절). 이는 그분의 보살핌과 양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앞서가는 이 목자가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를 향해서 그렇게 가고 있을까요?
목숨을 버림. 죽음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11, 15, 17, 18절). 그것도 거짓 목자와 대조해서 언급하고 있어 목자의 참 모습을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거짓 목자는 어려움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양들을 내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야 하고 도망치는 자라고 말합니다(12절). 그러나 참 목자는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가르치고, 양육할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합니다.
그것도 억지로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17절);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절). 그분의 자발적이고 주권적인 의지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를 놓고 우리는 여러 공범들을 거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 “로마 병정들”; “유대 공회”; ‘본디오 빌라도’; ‘유대’인들; 등등. ‘존 스토트’ 목사님도 이점에 관해서 그의 대표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한 장(章)을 할애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지금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죽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과 관련해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책임자는 성부 하나님이시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에서 영웅호걸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예수님의 때 이른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는 그분의 죽음은 창세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도 바로 이 죽음을 위해서라고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바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대로, 예수님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제주도의 한 목장에 가서 목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백성의 죄”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라 부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양들을 대신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은 또 한 편으로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설령 누가 그렇게 했다 한들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만족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조건을 스스로 충족시키고, 만족시킨 행위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대속”은 “자기희생”(self-sacrifice)과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이라는 양면의 동정과 같다 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공의(公義)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스스로를 죽였다는 말인가? 우리가 대속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이 같은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한 목자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양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누구를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속의 한계 내지는 범위를 알게 됩니다. 어려운 용어를 빌자면 소위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이 그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양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양들의 수가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수는 얼마나 될까? 소위 말하는 144,000일까? 나도 그 속에 들어있을까? 누가 그 속에 들어있을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들 질문 중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까?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우리네 잠언이 이 경우에 얼마나 합당하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누가 양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고, 엿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롯’과 함께 ‘소돔’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까? 과연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면 받지 못했을까? 우리들 중 십중팔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평가는 다릅니다. 그는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신약>은 그를 “의로운 롯”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가롯 유다’는 어떻게 할까요? 과연 그는 예수님의 양이었을까? 예수께서는 그를 향하여, “마귀”로 부르고 있습니다(참고. 10:70-71). 이처럼 우리는 목자 장 예수께서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내가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서로를 앎.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4-15절).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내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것, 남에게 내가 알려진다는 것, 우리 모두가 병적일 정도로 집착해 있는 것들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난무하는 그 수없이 많은 글들도 결국 한 가지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는 참으로 치유가 어려운 질병입니다.
이것도 부족함인지 또 다른 집착 증세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정신적인 관음증이라 부르고 싶은데, 타인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호기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인터넷 상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인에 대한 끝도 한도 없는 유언비어나 괴담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컴퓨터를 켜서 처음 뜨는 인터넷 창을 우리 학교 홈페이지로 해놓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내용들로 가득 찬 상업용 창들을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아침에도 가장 먼저 신문 보는 일을 삼가려 합니다. 온갖 잡다한 세상일들로 하루를 시작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나를 한사코 알리고 싶은 병적인 집착과 타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관음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공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상태를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결코 쉼이 없겠나이다.” 그의 진단은 정말 예리하고 정확한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우리는 혼자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아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공동체 즉 교회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담’ 목장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황야의 무법자”나 ‘람보’로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속칭 “예배만 드리고 가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목장도 없고, 목자도 없으며, 그렇다고 내 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해 혼자 멋대로 살아갑니다. 혼자 와서 풀을 뜯어먹다가 돌아갑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전도하며, 혼자 말씀 묵상합니다. 다른 양들이 <신약> 묵상할 때 자기는 <구약> 묵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혼자 은혜 받았다고 야단입니다. 느닷없이 간증이나 헌신하겠다고 뛰쳐나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며, 선교사가 되겠다거나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교회를 소란하게 합니다. 정말 골 때리는 양입니다.
아, 불쌍한 양! 이 양은 지금 자기 이름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4-15절).
예수님은 나를 부르실 때 나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양은 다 같은 양이며, 소는 다 같은 소, 염소는 다 같은 염소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 있어 나는 어느 양과도 구분되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한 마리의 양입니다. 그분은 나를 다른 양들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르다고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군가와 같아질 수가 없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넓은 그 길을 보며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나에 대해서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다른 교회와 같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의 이름이 있고,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의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저 그분은 나에게, “너 자신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우리 교회>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목장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목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양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3. 풍성한 삶, 풍성한 목장
우리나라 국민의 40% 정도가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통계 자료가 최근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매 년 약 15,500 명 정도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지난 번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 피해로 사망한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와 노후에 대해서 불안하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은 무려 80%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에 대한 비율이 이 정도라면, 기독교인들만을 상대로 조사를 한다면 어떤 수치가 나올까 궁금해집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실하고 의롭다던 ‘욥’조차도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다”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서 자신을 늘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누가 감히 자신을 ‘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느끼는 고통이나 불행지수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소외감 때문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이웃이나, 정부나, 국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특별히 강한 듯합니다. 언론이나 방송도 이를 부추기는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디에선가 희생양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일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 폭설이 내려 교통대란을 빚었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기상청이 일기 예보를 너무 안이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방송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즉 실제 내린 눈의 양이 60 센티미터였는데, 예보한 양은 30 센티여서 제대로 대비를 못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에게 닥친 재난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흥미로운 책 하나가 나왔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라는 사람이 쓴 <소셜 애니멀>이라는 책인데, 저자는 이 책에서 학계나 정계 또는 재계에서 예외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판단하는데 서툴다. 우리는 일과 돈과 부동산이 행복에 기여하는 정도를 과대평가한다. 친밀한 유대감과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은 과소평가한다. 친밀함에 대한 갈망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퇴근 후 친구들과 한 잔 하거나 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은 사회적 활동들이다. 출․퇴근처럼 혼자 하는 활동은 행복에 해롭다... 사람들은 이성과 의식을 강조하지만 실은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고, 무의식이 의식보다 강력하며,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저자는 지금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풍성한 삶”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면, 그는 이 책에서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설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가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말입니다. 이 무슨 엉뚱한 주장입니까!
풍성한 교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교재 <우리교회의 이상과 정신>에서 이미 배운 것들입니다(교재 참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또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핵심 사역과 관련해서 한 쌍의 동사를 만나게 됩니다: “매다”; “풀다”. 무엇을 매고 무엇을 푼다는 말입니까? 두 동사는 불가분 한 단어를 목적어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관계”입니다. 즉 관계 맺기야말로 교회의 핵심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강조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도 바로 이 관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누구든 이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 나라에서 행세하며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들 말로 “샬롬”은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라 함은 이 관계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수직적 관계 맺기의 사역도 있습니다. 아래로는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이나 세상과의 관계 맺기가 있을 것이고, 위로는 모든 관계 중에서 으뜸 되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재에서 이들 세 관계를 십자가 그림, 즉 “관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낸 바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 중앙에 교회가 있다면, 위로는 하나님, 옆으로는 교회 지체, 그리고 아래로는 세상이 있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도 아닌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강론하시는 바로 이곳에서 “풍성한 삶”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10절).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이 구절을 묵상하며 더욱 폭넓게, 더욱 깊게 체험하며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과연 “풍성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풍성한 목장. 그것은 결국 “살롬”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주변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삶 말입니다. 이는 소위 “관계의 십자가” 정 중앙에 있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의 삶이자,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샬롬”이나, “의로움”이나, “공동체”나 한 결 같이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난 주 서울에서 고등학교 동문 신우회의 조찬 예배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여러분들이 수 주 전에 들었던 “목자의 음성”(10:22-23)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자신을 ‘셀’ 교회의 목자라고 소개하는 한 후배로부터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10장은 우리 교회 식구라면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할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에서도 이곳으로부터 중요한 원칙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시작할 때 이들에 대해서 합의를 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누군가 우리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배우고 알아야 내용이 바로 이 책에 담긴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에 해당합니다. 신약교회로 치자면 “소요리 문답”에 해당된다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매 주 예배 때마다 우리 교회의 “목적”과, 세 가지 목표에 대해서 재확인하고 함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의 목적인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이란 결국 “관계의 사역”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세 가지 목표란 결국 다름 아닌 세 가지 관계의 사역을 충실하게 구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 목장”은 그 첫 번째 관계, 즉 성도 간의 수평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목장을 통해서 “가정”(家庭)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정 말입니다. 가정에 부모와 자식이 있듯이 목장에도 영적인 애비와 자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영적인 고아(孤兒)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혼자 전봇대처럼 서 있거나, 또는 ‘람보’나 황야의 무법자처럼 휘젓고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을 체험하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실제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체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체험은 용서와 화해일 것입니다. 가족 간에는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우리는 기억상실증이나 치매 환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색맹 환자가 되기도 합니다. 붉은 색이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사 1:18).
그러나 목장에서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곳이 아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도 양이나 동료로부터가 아니라 목사나 목자로부터 받는 상처가 더 깊고 큽니다. 쉽게 상처받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인내심이 약하고 성급한 족속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면 절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말이 운명공동체이지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평생을 서로 깊이 사귀어 온 것도 아니고,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입니다. 그러니 목장을 이루어 가정을 체험하자는 이상과 정신은 한낱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가 피차 아무 상관도 없다고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고, 영적으로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즉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피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마치 DNA의 이중 나사 구조처럼 그렇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 끊으려 해야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 즉 “끝까지 책임지는 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 겪게 되는 또 하나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지나치게 이단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대개 이단들이 가족이나 친지의 관계보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더 중시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정통 교회일수록 <성경>의 기준을 현저히 낮추거나, 완화시켜버립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더구나 책임지는 사랑에는 칭찬과 격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해서 감정을 건드려야 하는 경우도 있기에 더욱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피상성(皮相性)을 꼽았습니다만, 이런 관계는 그야말로 피상성의 산물 즉 적당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가 나의 인격적 성숙을 위해서 조언이나 지시나 권면을 해줄 때, 기분 나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화가 나고 서운하다면 다음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들 말씀이 두렵거나 비위에 거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자의 소유가 되었지만, 나는 내 의지에 반해서 억지로 교회에 와 앉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장을 선택합니다. 내가 선택한 목장과 목자이므로, 목자의 온당한 요구에 열심히 순종하며 따릅니다. 훈련받기를 자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이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밉고 고운 정이 쌓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이가 되는 것이지요. 피상성을 넘어 그야말로 서로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강론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세 번이나 언급을 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11, 15, 17절). 처음 두 번이 양과 목자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나머지 한 번은 목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절).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든지,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는 나를 안다”라는 등의 표현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선언에 포함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얼마나 동감하고 계십니까? 나의 깨달음은 이런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드러내어 이야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저 불쌍한 영혼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줄꼬, 저들을 위해서 누구를 보낼꼬?”
성자 하나님: (이 장탄식을 금방 알아차리고)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버지가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아니, 네가 정말 가겠단 말이지?”
성자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의 순종이 저들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그래,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 바로 나의 뜻이란다. 너는 그 동안 나와 둘이 아닌 하나로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이 관계를 지속시켜갈 것이지 않니? 누구든 자기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사랑하지 않니? 너는 나와 하나이므로 내가 너를 통해서 내 뜻을 이룸은 결국 내가 너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란다. 내가 널 사랑하므로 널 보내지 않을 수가 없구나, 가거라.”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여 기꺼이 죽으려 함은 이해가 되는데, 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기에 이처럼 장황히 설명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무튼 서로를 향한 숭고한 사랑이 결국 나와 여러분을 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은 풍성한 관계 즉 풍성한 삶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 목장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찬양합시다.
4. 다른 양들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서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입니다만, 신약 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참고. 마 16:18-19).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10절)은 “관계사역”의 열매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풍성한 삶”에 가장 근접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샬롬”을 꼽은 바 있습니다. “샬롬”을 무엇이라 했던가요?
양(羊)으로서 누릴 수 있는 “샬롬”은 무엇일까? 즉 양은 어떻게 “샬롬”을 누릴 수 있을까? 대답은 “목자의 양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목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시편> 23은 완벽하게 “샬롬”을 누리고 있는 한 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하고, 순진무구하고, 어리석은 짐승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성질이 아주 까다롭고, 겁이 많으며, 조심성이 많다고 합니다. 예컨대, 이들은 목자보다 앞서 걸어가는 법이 없고, 또한 아무데서나 잘 드러눕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눕게 하려면 서너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집단의식과 사회성이 강한 이들인지라 누울 때 주변에 다른 동료 양들과의 부딪히는 일이 없어야 하며, 누워있는데 파리나 다른 해충들이 와서 괴롭히지 말아야 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여 찾으러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필요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때만 마음 놓고 풀밭 위에 드러눕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그 양의 목자입니다. 시인이 지금 이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양은 너무나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샬롬”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행복해.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지극히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참고. 1-4절),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염려와 불안이 없습니다(참고. 6절).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성품이나, 생각이나,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목자 또한 이 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이심전심의 사귐이 있을 뿐입니다. “아, 이 목자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양은 지금 이렇게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넘치는 잔. 그러나 과연 이 양은 목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 잔이 넘치는 것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지금 목자의 마음이 그렇게 편해 보이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다소 수심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자에게 무슨 걱정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이제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목자의 근심은 무엇입니까? 잠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기적의 성취에 관한 부분인데, 화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6:11-13).
‘마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무리는 “목자 없는 양들”입니다(참고. 막 6:34).그런 자들이 이날만큼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며, 먹고 남은 떡의 양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동네에 큰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이웃 사람들은 축하한답시고 자식들까지 데리고 와서는 온 가족이 실컷 먹고 마셔댑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갈 때에는 남은 음식마저 발발이 싸서 챙겨갑니다. 모르긴 해도 이날 기적의 음식 대접을 받은 무리들 역시 원도 한도 없이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있는 중에도 연신 각자의 호주머니 속으로 빵을 챙겨 넣기에 바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두가 식사를 끝낸 후 남은 빵 조각을 모아 보니 열두 바구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잔이 넘치고 넘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은 음식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버리고 갈까요? “고수래!”하면서 말입니다. 흔히 맹수들은 자신이 사냥한 먹이 감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주변에 아무리 다른 먹이 감이 서성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불리 먹고 나면 아무 생각이 없는 법이지요. 나중에 허기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이야 그까짓 남은 떡 부스러기 정도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요? 들고 다니다가 다시 배고플 때 먹게 하려고요? 나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날 그 무리나 사도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을까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큰 아들은 과연 헤아렸을까요? 한 마리 사라진 양을 찾느라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이해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시편> 속의 양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목자 없는 양들”이나, 그날 그 기적을 목도한 사도들이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나, 탕부(蕩父)의 큰 아들이나, 그리고 지금 주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 모두 내 잔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잔이 넘치는지 비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고플 때는 내 배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 배가 불러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곳간도 곳간 나름입니다. 늘 비어 있다가 어쩌다 한 번 채워진 곳간 주인은 아까워 퍼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퍼주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채운 곳간인데” 하며 망설입니다. “내 곳간 비었을 때 너희들 언제 한 번이라도 채워 줘 본적이 있느냐?”하며 오히려 한풀이를 하려 합니다. 인심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부나 헌금도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연습과 훈련, 그리고 부모가 하는 것을 본 자식들이 자라서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믿습니까?
다른 무리. 지금 주님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신 것일까? 당연히 자기 양들이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 것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겠지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냥 즐거워 할 수만은 없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행여 지금 그분의 마음이 아프게 전해져오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을 아주 부담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장(牧者長)과는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매우 성숙한 그분의 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녀의 성숙도는 그가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느냐로 결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롱’군은 어찌나 부모의 마음을 끔찍이도 헤아리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실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유학을 가라고 하는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곳에 와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매 달 월급을 아껴 부모에게 십만 원씩 송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월세 방이 겨울에 난방도 잘 안되고 해서 시설이 좋은 곳으로 옮겨주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면 월세가 더 들어 부모에게 송금할 돈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냥 지금 있는 곳에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출석도 그렇습니다. 내가 나오라고 하니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이라도 빠지게 되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월요일 아침에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합니다. 이 친구는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를 못합니다. 나는 이런 친구를 “의로운 이방인”(righteous gentile)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목자의 양으로 자처하며 살아가는 나 말입니다. 정말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탁하시니 그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마지 못해 순종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정말 바쁜 일이 있는데도 목장의 사정이나 목자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희생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목장 모임에 가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서너 명 모이는 목장에 내가 빠졌을 때 상심하는 목자의 얼굴이 어른거려 마지못해 목장 모임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이런 것들이 모두 ‘헤세드’의 지극히 작은 예들에 불과한 것이지요.
지난 달 안동에 가서 우리교회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습니다. 교회학교의 달라진 분위기 하며, 동관 목장의 아름다운 모습과 동관 목자의 헌신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썼으면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정도라고 자랑했습니다. 부럽다는 듯이 듣고 있던 장 전도사님께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전도 좀 하지.”
우리 전도사님 역시 목장 밖의 다른 양들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강박감(强迫感)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이와 같은 강박감으로부터 자유스러운 날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했으면 그만이지 강박감은 무슨...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도 ‘바울’조차도 같은 강박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나도 이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모든 일을 억지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도조차도 마지못해 복음 전도를 해야 했다고 말하는데, 그 동기가 즐거움이나 소명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한 무리, 한 목자. 지금 주님은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 때문에 노심초사,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습니다. 이들 무리 역시 주님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버릴 양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분의 근심이 큰 것입니다. 원래의 배경에서 보자면, 우리 밖의 무리는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들은 언젠가는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될 잠재적 양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 무리에 대해서 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까? 그것이 나의 목자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성숙한 신자라면 주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에 나의 관심사도 함께 머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즐겁든, 마지못해 억지로 하든,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든, 주님과 동일한 시선으로 그 무리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9:4상). 이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영광스러운 기적을 함께 체험하자는 초청입니다. 주님께서 큰 무리가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이겠느냐” 하셨을 때도, ‘빌립’이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곧바로 펼쳐질 오병이어의 기적에 함께 참여하자는 초청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 밖의 양들에 대해서 그토록 애착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세드’ 즉 그놈의 정(情) 때문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 양들은 목자가 직접 낳고, 몇 년에 걸쳐 먹이고, 입히고, 길렀던, 그래서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처럼 애절한 사랑이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부모의 사랑을 맛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가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직접 전도하여 양육하면서, 혹시나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할까하면서 가슴 졸이고, 한숨 쉬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교회 내의 다른 지체나 또는 어린 양들에 대해서 이처럼 애절한 관심과 간섭과 기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창조교회 시절 교회에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기쁨과 함께 기대와 근심으로 맞아들인 것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자라게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 중, 세 번째가 세상을 향한 수직적 관계 사역, 즉 선교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목장은 진정한 ‘샬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벌써 마음속으로 깊이 느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가 허전하고, 목장 모임이 힘이 없고, 특별히 기다려지거나 설렘이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며, 모여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설교나 찬양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만, 매 번 위로받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근심하고 원통해 하는 하나님을 오히려 우리가 신원(伸寃)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녀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그 때부터는 부모를 어린아이처럼 돌보고 위로해 주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목장은 양들이 목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장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여호수아> 목장에서 목격한 바 있습니다(참고. 수 1:16-18).
실로 <여호수아> 목장은 이제 새로운 목장 개척을 위하여 목자로 파송할 성숙한 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수 년 내로 목장을 여섯 개로 늘릴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실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여섯 번째 목장 개척을 위하여 세워놓은 회원 모두가 동의하고 참여하는 세부 실천 방안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가고 있습니까?”
선교재단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재단 기금은 얼마로 작정하였으며, 달성을 위해서 매년 얼마씩을 적립하기는 합니까? 아니면 그냥 한 번 해보는 소리입니까? 선교는 내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노심초사하면서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습니까?
5. 목자의 음성
지난 일여 년 동안 내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나와 함께 <요한복음> 공부를 해 왔습니다. 총 다섯 명인데 이들 중 두 학생은 믿는 자들이나, 나머지 세 사람은 난생 처음으로 <성경>이라는 것을 대하게 된 자들입니다. 당연히 처음 모임을 시작할 당시에는 글자 한 자, 단어 하나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만, 일여 년 함께 해온 결과 이제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르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교회나 신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많이 해소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함께 모이는 시간 내내 거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주로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만 있습니다. 아무리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우며, 때로는 짜증이 마구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너무 반응이 없어 그동안 들인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나는 결국 속으로 이들이 <성경>에 대해서 영 관심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도교수라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싫다는 말도 못하고, 달리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포기하고 끝나는 시간만 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 있을 때면 아주 궁금해 하고 답답해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하고 나머지 두 동료에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일 년 정도 공부를 했으면 믿음이 생길 줄로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믿음이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자 은혜의 선물이라고 배워온 터라, 자신들은 아직 그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가슴 뜨거운 체험도 없고, 은혜라고 생각할 만 한 아무런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관한 설교는 본문 3장 16절과 관련해서 행한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는 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떤 해답을 마련해주어야 할까요? 나라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아니라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후 지금까지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단 한 번도 가슴 뜨거워지는 신비한 체험을 한 적도 없고, 무슨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을 목격한 적도 없으며, 방언을 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는 자로 자처하며 살아왔습니다. 무슨 근거로 내가 이처럼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까? 혹시 내가 그동안 엄청난 착각 가운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집요하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과 똑 같은 질문을 또 던집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24절).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분명하게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요구입니다. 행여나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믿고 따를지 누가 압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대답을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26절). 이 얼마나 두려운 판결이며 끔직한 선고입니까? 그런데 만일 나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의 확신이 없다고 고민하는 내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절망적인 선언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나나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까? 내 제자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들이 믿음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일까요? 누가 우리를 우리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길에 지팡이로 막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내 스스로 “나는 신앙이 없어, 옳은 방법으로 믿고 있지 않아”하고 하면서 스스로를 부적격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어떤 태도와 모습과 행동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을 가진 자라면,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망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왜 믿는지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나에게 닥치는 웬만한 일들에 대해서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라면 경건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선교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는 자라면 의심이나 불안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믿음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러울 지경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목자의 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무리의 믿음.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이 말씀은 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내가 무리 속에 속하는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무리 안에 있느냐 또는 밖에 있느냐에 따라 내 믿음이 달려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리와 함께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 무리에 속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자의 믿음 생활이란 결국 우리 다수의 믿음 생활과 동일할 것입니다. 교회나 개인이나 용기가 솟는 날도 있고, 또 의기소침한 날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을 옮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들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어쩔 수 없이 애매모호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러니까 믿음의 역설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도 없고, 따라서 일일이 다 짚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확실성보다는 오히려 신뢰와 희망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증거할 수도 없는 어떤 것에 우리의 전 삶을 걸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큰소리를 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우리가 믿는 바가 모두 진실이고 사실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더더욱 진실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B. B. Taylor). 건전한 불가지론자가 되자는 주장과 흡사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보다는 행동에서 더 많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기관이나 이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변화하는 어떤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지만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수술을 앞두고 수술대 위에 누워 불안해하는 마음과 비슷합니다. 의사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유일하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수술 중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의사가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술이 끝날 때까지는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고 있던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누가 우리와 함께 하실지 알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일 것입니다. 즉 다음과 같은 약속을 알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어떤 날에는 사도들과 같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날에는 길 잃은 양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리에 속하는 근거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확신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앗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절). 이것이 하나님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유명한 <로마서> 8장에서 전 우주를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그렇다면 우리는 때때로 목자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인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날에는 그것이 휘파람 소리처럼 들릴 것이고, 또 다른 날에는 혀를 차는 소리처럼, 또 어떤 날에는 사랑의 노래처럼, 또 다른 날에는 분노의 저주처럼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항상 어떤 분명한 단어나 문장으로 들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의 일상 중에 어느 순간 들려오는 내 가슴 속에 고요하게 들려와 내 영혼을 회복시키고 소생시키는 음성일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목자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무리와 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듯이 양(羊)들은 결국 양들입니다. 그들은 쉽게 겁먹고 당황합니다. 누가 떠미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결정을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내리며, 이유도 없이 박치기 대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무리 속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목자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나의 생존뿐 아니라, 기쁨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리의 일원으로 속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든, 또는 믿음을 원해서 이 자리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양들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그 누구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앗아갈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 어떻든지, 우리는 여기에 있고 또 여기에 속해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이제 우리는 나와 <성경> 공부를 하는 내 제자들에게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 듯합니다. 나의 상담 내용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잠시 경찰이나 군인의 제복(制服)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왜 제복을 입습니까? 제복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정해진 규범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컨대, 군복을 입은 자는 마땅히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믿음의 회중 앞에서 행하는 “공중 고백”(흔히 간증이라고 하지요)이 제복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담배를 끊기 위해서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금연(禁煙) 선언을 하는 효과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금연 선언을 하고 금연 클럽에 가입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신비에 대해서 완전하게 다 알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천국에 가서도 다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에 누가 감히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기 전까지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다고 고집부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비록 겨자씨만 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태어나서 스스로 먹고 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양을 양육시키는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다.” 확신이 없어 고민하는 내 제자들에게 내가 해 준 말은, “그 어머니 품속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는가!”였습니다.
우리는 목자의 양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양의 목장 안에 속해있으며, 그분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증거도 이보다 더 나는 증거는 없습니다. 할렐루야!
6. 아들과 아버지
매년 벽두가 되면 대통령은 신년교서(新年敎書)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한 해의 시정 목표와 포부를 밝히는 자리입니다. 당연히 교서의 내용과 분위기는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현실이 녹녹치 않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야당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야당 대변인은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반박하고 비평하며 흠집을 냅니다. 그렇게 되면 교서의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내용까지 희석(稀釋)되어버립니다. 처음에 교서의 내용에 상당히 고무되었던 사람들조차 그 기분이 반감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어느 정당이 집권을 하건 매년 반복되는 현상이며,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닙니다. 소위 정치와 정치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지요.
목사의 설교도 대통령의 연두교서와 같은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설교가 끝나고 난 뒤 설교의 내용을 놓고 이런 저런 신학적 평가를 하면서 설교에 흠집을 가하기 시작하면, 감동적으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조차 그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느낌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강의나 기적을 목격하고 믿고 따랐습니다만, 또 한편으로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 시비나 트집을 잡아 그분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 하는 무리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들을 ‘유대’인으로 통칭하고 있습니다만, 주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흠집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잡아죽이려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31절).
정치적 올바름. 도대체 이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가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ednes)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민한 주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자제하고 회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그는 동성연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서는 안 될 것이며,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드러내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이나 단체를 선호하는 발언을 해서도 안 됩니다. 적어도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좋고(好) 싫음(不好)이 분명한 사람은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설교자의 설교는 어떻습니까? 다음과 같은 설교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고로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든 그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는 만세 전부터 우리에게 복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우리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또한 상처받은 데는 없습니까? 괴로움을 받지나 않았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에게 나아오십시오. 그가 당신을 성공과 기쁨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이스라엘의 ‘시드기야’ 왕 시절에 제사장 ‘바스홀’이 하던 설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의 설교에 상처를 받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백성은 오히려 위로와 안식을 느꼈으며, 현실에 더욱 만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바스홀’은 체질적으로 이 같은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직업이 제사장이 아닙니까! 제사장의 최대 관심사는 현상유지와 체제 보존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혁명과 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이 내세(來世)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모습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만일 목사가 교회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며,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한 사람의 성도도 빠져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바스홀’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절 선지자 ‘예레미야’는 정반대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화평이 아니라 협박과 공포로 일관했습니다.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렘 20:4-6)
‘예레미야’는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말했고,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이야기했습니다. 현상 유지가 아니라 영적 혁명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던 방식대로 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연히 아무도 그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는 제사장 ‘바스홀’에게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통재라, 하나님의 종(從)이 하나님의 종에게 이처럼 무참히 얻어맞을 수 있다니!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스홀’이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라, ‘예레미야’가 예고했던 대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바스홀’의 설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 것이지요. 당장에는 달콤했습니다만, 나중에는 해가 되고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배척당하고 있는 모습 또한 그분의 말도 안 되는 설교 때문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절). 이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설교입니다. 익히 알다시피 “요한 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즉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는 <요한복음>만큼 더 좋은 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막에서부터 이 주제에 대한 선언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 들어왔습니다.
혹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개인이나 집단과 이에 관한 논쟁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요한복음>의 서막에서부터 깊이 묵상하며, 중요한 구절들을 암송하려고 애써야 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해 왔으며, 지금까지 내가 암송할 수 있는 구절들은 과연 몇 개나 되며, 이들을 상호 연결시키면서 상대를 압도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물쭈물 하다가 압도를 당하는 편입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여기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 선언만큼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잘 드러내는 선언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과연 여기서 그분은 자신이 곧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
하지만 관점에 따라 ‘유대’인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과민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선포가 아니라, “뜻과 의지”에 있어서 하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부부가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할 때 두 사람의 생각이나 뜻이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듯이 말입니다.
특히 이 선언이 나온 배경을 보면 더욱 이와 같은 이해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께서는 지금 양(羊)들의 영원한 안전, 즉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29절).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신자들을 향한 계획에는 아들이나 아버지의 뜻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발언으로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선언을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때에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7-18).
결국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선언은 아들과 아버지는 “본질에 있어 하나”(one in substance)라는 선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능력이나 영광”에 있어 동등하다는 선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흉금(胸襟)이자 본심(本心)입니다. 아들을 아버지의 “독생자”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1:14). 본인이 “독생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도 이 구절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였습니다.
기적의 증거. 하지만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과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항상 같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하는 자들의 반응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막무가내로 내뱉고 있는 이 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전에 비해서 사뭇 다르다는 생각입니다(참고. 8:58-59). 충돌이나 논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먼저 따져 묻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야말로 정곡(正鵠)을 찌르는 것으로서, 아주 강력한 논거(論據)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 관한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진위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그의 말이나 생각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고 합니다. 누군가를 입학이나 입사시키려할 때, 면접관은 지원자가 직접 작성한 본인 소개서가 아니라 타인이 써준 추천서를 더 신뢰합니다. 노상에서 강도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무관심한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이교도였습니다. 그 사람만이 적절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선한 사마리아 인”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점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행한 기적으로 나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그 모든 기적들이 그분의 말을 지지(支持)하고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대자들은 그분의 기적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33절상).
그들은 지금 예수께서 행한 기적들이 과연 그분의 말을 지지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문제는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자고 말합니다. 오직 관심이 있다면 어떻게 이 자를 없애는가 하는 것인데, 그의 말을 문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예수님 사후(死後)에 ‘유대’ 공회가 사도(使徒)들을 대하던 것과 같습니다(참고. 행 4:13-20).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에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이신 행적에 대해서는 경이로움과 존경으로 대합니다. 그분을 인류의 성인(聖人)으로, 스승으로 떠받들고 모시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런 저런 기대나 요구 사항이 많으면서도,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에 사는 한 분은 나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목사이면서도 한 번도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은 하나 믿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은 지라,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 논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뭐라, 내 행적이 아니라 내 설교가 문제라고? 과연 내 말에 문제가 있는지 한 번 따져봐?”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4-36절).
사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두 번째 논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몰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는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의 요지인 즉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언하는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나야말로 아들의 칭호를 받기에 얼마나 더 합당한가!”
더 무슨 말로 논쟁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입니다. 속으로 예수를 잡아 죽일 적개심만 불태우는 것 외는 말입니다(39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매끄럽지 못한, 단도직입적인 그분의 태도와 설교가 죽도록 미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는? 우리는 서로를 향한 제사장이면서, 이 시대를 향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목적은 길 잃고 헤매는 성도나, 하나님 모르고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행 2:37; 30)?
그래서 나와 교회의 존재는 큰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위정자들, 세금 떼어먹는 자들, 비 오는 날 몰래 오염물질 내다버리는 악덕기업주, 미성년자들에게 술 담배 파는 비양심적인 상인, 남의 시험지 베끼는 학생들, 남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정품이 아닌 복사판을 사용하는 사람, 영화 불법으로 다운 받아 보는 사람들, 일요일만 교인인 사람들, 낙태로 돈 버는 의사들, 동성애자들, 악덕 변호사들, 부패 공무원들, 다수에 편승하여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야비하고 비겁한 족속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적이고도,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사회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시험 삼아 ‘리트머스’ 시험을 한 번 해봅시다. 아래 세 가지 평가 항목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에 o 표시를 하면 됩니다.
(1) 아무도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모른다. 그래서 나 때문에 논쟁이고 뭐고 있을 이유가 없다( )
(2)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교회에 출석하는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며 모든 사람의 친구로서, 아무도 내가 가진 믿음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
(3) 가는 곳마다 예수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다소 꺼려하는 편이다( )
7. 요단 동편에서
독재정권이나 공산정권일수록 더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공화국, 인민, 민주주의, 등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모든 좋은 단어들은 다 망라되어있습니다. 과연 북한을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 명칭은 북한의 현재 상황에 대한 해학적 표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북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북한의 공식 명칭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소위 역발상(逆發想)의 좋은 사례가 되는 셈입니다.
‘예루살렘’도 그렇습니다. ‘살렘’ 즉 ‘샬롬’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도시, 거룩의 도시, 화해와 화평의 도시가 살의(殺意)와 음모(陰謀)와 증오(憎惡)와 감시(監視)와 통제(統制)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배가 있고, 설교가 있고, 성전이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빛이 아니라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빛은 오히려 어둠에 둘러싸여 그 광채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도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거리는 활기가 넘쳐나고, 늘 새로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실은 그 도시는 죽어있었습니다. 어둠이었고 적막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근 삼 년을 쏟아 부은 ‘예루살렘’ 선교의 결과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피리를 불었으나 그들은 따라 춤추지 않았으며, 슬피 울었으나 그들은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참고. 11:17; 눅 7:32). 오히려 그분을 질시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낙담과 실의를 안고 ‘요단’ 동편이라는 무대 뒤편으로 쓸쓸히 퇴장해야 할 시점이 온 듯합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안식을 누릴 때가 온 것입니다. <전도서>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그동안 너무나 힘든 사역을 홀로 감당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활동을 접고 일상(日常)의 평범함으로 되돌아간다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으며,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역의 짐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안식년을 누린다 한들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화자도 이에 동의라도 하듯, ‘요단’ 동편을 가리켜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침례로 시작한 예수님의 공적(公的) 사역이 이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참고. 1:28-34). 사실 ‘요단’ 동편은 ‘예루살렘’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도시의 분주함 대신에 시골의 한적함이, 젊음의 활기 대신에 노년의 무기력이, 꿈과 도전 대신에 상실과 무의미로 상징될 수 있는 곳이 ‘요단’ 동편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무슨 큰일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무슨 새로운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자원해서가 아니라 도망가듯 피해 간 곳에서 말입니다.
묵상의 시공. 내가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 한 후 잠시 서울에 머물 때가 있었습니다. 은평구 신사동이라는 곳인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곳에 간 첫 주일, 예배를 위해서 찾아간 교회가 목양 침례교회로서, 젊은 전도사가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들어서니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와 두 아이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맞이하던 전도사 부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직장 때문에 이곳 대구에 온 이후에도 한 동안 십일조를 그 교회로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난데없이 당시를 회고하는 것은 당시 그 전도사가 내게 들려준 한 간증을 이야기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개척은 했으니 새벽 기도회와 수요 예배는 드려야 했는데, 예배당에서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분의 아내도 있었네요! 아무튼 이와 같은 경험이 훗날 그 전도사의 영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시간, 그분을 홀로 대면하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함께 하는 통성 기도, 예배를 위한 대표기도, 신앙 간증, 성경공부, 목장 교제, 이들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이들은 결코 하나님과의 독대(獨對)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만일 대체하려 한다면 내 신앙은 위선이고, 허위이고, 가식이며, 거짓입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는 그분의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엄청난 특권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피 흘리기까지 합니까?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이 회심 후에 어디를 갔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했으며,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홀로 지냈는지 알고 있습니다(참고. 갈 1:17-18). 주일 예배에서 선포할 단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적한 ‘요단’ 강 저편 광야에서 나라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대한 설교자 예수께서는 과연 무엇을 하셨을까? 평범한 일상(日常)으로 되돌아 안식을 누리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분에게 일상과 안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늘 하던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화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지나치듯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거기 거하시니”(40절하). 이게 그가 전하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분이 그 해 겨울, 즉 생애의 마지막 6개월을 아무 생각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보냈을까? 그리고 그 이듬해 봄 마지막 유월절,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셨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의미 없는 시간, 의미 없는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특별히 ‘요단’ 동편의 그 장소와 그 시간은 그분에게 있어 큰 축복과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정확한 주문은 상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체험해 보고 교회에서 간증으로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 내가 나의 소명(召命)에 충실할 때, 즉 내 인생의 목적에 충실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화자의 답변을 들어봅시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절).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운명조차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와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닌, 거칠고 무지한 촌구석 ‘베다니’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 안식이란 전적으로 무위도식(無爲徒食)이나 “무활동”(無活動)이 아니라, 정중동(停中動)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든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을 구현(具現)하면서 사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 각각에 각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나와 <우리교회>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본능적으로 구현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라는 언급에 주목해야 합니다. 적은 무리, 작은 교회, 소그룹이 주는 유익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보다 친밀하고 개인적인 교제가 있고, 위로와 안식이 있으며, 영혼의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명의 사도들만을 상대로 깊이 있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하시기도 했지만, 우리가 보듯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 그 자체가 자랑이고, 덕(德)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웃으로 불과 몇 사람만 정해주셨더라면 얼마나 기분이 가볍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내가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으로 서너 사람이면 족하다고 지정해 주셨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오 년이고 십 년이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태정아, 너는 교회 장로로서, 그리고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교회일과 학교 일만 열심히 하면 돼, 그게 네 인생의 목표야”라고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고생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충실한 증인. 도대체 지금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일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 보내고, 주민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알리려고 이런저런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친북 단체나 정치인이 보내는 눈길은 싸늘합니다. 그런 방식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는커녕 오히려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논리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훗날 남북이 하나가 되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오늘날 침묵하는 남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 때 당신은 왜 침묵하였소?”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친구나 제자나 가족 중에 어느 날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했을 때, 나에게 와서 왜 이전에 그렇게 가까이 지내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거나 원망을 한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나도 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만 현재에 충실해지고 싶을 뿐인 것입니다.
복음의 씨를 지금 여기서 뿌리고 싶은 것입니다. 설령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일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요단’ 동편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도 씨를 직접 뿌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뿌려진 씨가 추수할 때가 되었을 때, 가서 수확을 하신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발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씨를 뿌렸던 자는 침례 ‘요한’이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무슨 새로운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침례 ‘요한’에게 들었던 그 복음이 기억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41절).
오늘 우리가 비록 슬픔으로,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서라도 씨를 뿌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에 안성맞춤이거나 무르익은 때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일은 영원히 내일로 남아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행여 내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어느 누군가 울면서 씨를 뿌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전도자의 신실하고도 정확했던 그 증거로 말미암아 오늘 나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말씀을 전하라”고 권고한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훗날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브루스 밀런’의 설명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브루스 밀런’, 205쪽.
기적을 행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에 대한 필수적인 표시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침례 요한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다른 차원에서 끼친 영향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증인에 대해서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추천장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모든 설교자, 모든 교사, 모든 증인이 이와 같은 추천의 말을 듣기를 열망하기 바란다.
비전 2012. 하지만 대개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될수록 우리는 축소 지향적이 됩니다. 전도나 봉사 등과 같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교회 내에서의 행사나 봉사, 개인적인 성경공부 등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나는 성경공부 시간에 여러분들이, “여태 이런 공부는 처음 해 보았다”느니, “다른 교회에서 다른 지도자들은 왜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느냐?”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성경공부는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만, 이것은 성경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제발 우리는 이런 식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교인이나 다른 목사가 <성경>을 어떻게 배우고 가르치든 우리가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고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결단이나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될 일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이나 헌신의 주체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소감이나 깨달음을 나눌 때에도, 다른 지체를 향해서 설교를 하려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수업시간에 설교나 교훈은 선생이 하는 것이지 학생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헌신의 내용도 막연하게 가아니라, 구체적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제발 그냥 열심히 살겠다든지, 범사에 감사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살겠다든지, 어떤 일에 감사하다든지 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입각해서 헌신하는 연습과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 현장의 하나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매 주 예배 시간에 앞서 우리의 목적과 목표를 보고 읽습니다. 하지만 늘 구호에만 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과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올 한 해의 결의나 세부 실천 계획을 세웠습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비전 2012 같은 것이 있습니까? 예․결산표 말고 말입니다. 동관목장 2012 비전이 있습니까? 교회 학교를 위한 올 해의 교과과정이나 담당 교사는 있습니까? 선교를 위한 실천 계획은 무엇입니까?
토의와 연습
1. <요한복음> 10장이 주는 지배적인 분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 교재 <요한복음(1)>의 표지 사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0장이 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본문이 되는지 토의해 봅시다.
2. <요한복음> 10:10을 암송해 봅시다. 아직도 이 구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우리교회>를 출석하는 신앙인일지는 모르겠으나, 목장에 속한 양은 아닙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풍성한 삶”이란 무엇이며, 나는 이곳에서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몸과 영혼은 항상 따로 놀고 있습니까?
3. “다른 양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사에 대해서 각자가 느끼는 바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참고. 16절). 우리가 개척하겠다고 하는 여섯 개의 목장에 들어올 “다른 양들”을 생각하며 내가 “오늘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지 나누어봅시다. 아니면 그냥 구호에만 그치고 있습니까? “내일”은 영원히 “내일”일 뿐이며 결코 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지금 여기”만 있을 뿐입니다.
4. 나의 존재가 이웃에 대해서 부담이 되고 있습니까? 아래 세 가지 평가 항목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에 o 표시를 해봅시다.
(1) 아무도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논쟁이고 뭐고 있을 이유가 없다( )
(2)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교회에 출석하는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며 모든 사람의 친구로서, 아무도 내가 가진 믿음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
(3) 가는 곳마다 예수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다소 꺼려하는 편이다( )
5. “교촌치킨” 가게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