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2과
세상의 빛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1-41약 101분 분량

제 12과: 세상의 빛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9:41).

9장에 이르면 장면은 바뀌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치유되는 또 다른 기적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9장이 8장과 연대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장은 내용 상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前者)가 대화나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후자(後者)는 기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주제에 있어 연결 고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초막절의 핵심 주제가 예수님의 선언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생수의 근원-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빛-그리스도”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소경된 한 사람이 치유되는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확증해주고, 또 그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장과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이번 기적 사건에서도 계시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 반응을 다룸으로써, “계시와 심판”이라는 주제 또한 함께 다루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으므로(3:19), 이 빛의 오심은 또한 필연적으로 심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구약>에서는 ‘메시아’의 도래(到來)와 관련된 것이며(사 29:18; 35:5),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기록과 더불어 이것을 새 시대가 도래한 표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눅 7:18-23).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경이롭고 은혜롭게도 고침 받는 기적 앞에서 보이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기하고 질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양의 목자로서 애초부터 자격 상실이며, 예수님이야말로 양의 참된 목자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주제가 이어지는 10장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 이처럼 10장에서는 일견 앞의 두 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새로운 주제, “양과 목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제뿐만 아니라 배경 역시 초막절로부터 3개월이 지난 수장절(the Feast of Dedication)입니다. 그러나 10장 역시 앞의 두 장과 함께 전체적으로 하나의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9장과 10장의 연결도 아주 자연스러우며, 9장은 10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를 위한 서론 내지 배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이에 대해 유대당국자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으므로(3:19) 고집스럽게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10장의 주제 도입을 위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화자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설교의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예컨대, 8장의 초막절 행사에서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설교는, 7장에서 횃불축제에 참가하시는 예수님의 행동과, 9장에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사건 사이에 위치해 있음을 봅니다. 두 사건이 하나의 설교를 감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9장은 8장과 10장을 연결해 주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아래 형식처럼 9장에서의 한 사건은, 8장과 1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편의 설교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1) 설교:
2) 사건:
3) 설교:
그리고 10장은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7장과도 균형과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아래 두 본문들을 비교해 봅시다:
1) 10:22-42;
2) 7:14이후;
구조. 이처럼 9-10장이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연결되고 있기는 하지만, 편의상 9장만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면 일곱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전형적인 “기적설화”로서, 기적과 그에 대한 결과들을 담고 있습니다.
1) 단락 1: 표적(1-7절)
2) 단락 2: 審問-이웃(8-12절)
3) 단락 3: 審問-바리새인(13-17절)
4) 단락 4: 審問-부모에게(18-23절)
5) 단락 5: 審問-바리새인(24-34절)
6) 단락 6: 계시-참 빛을 봄(35-38절)
7) 단락 7: 분리-빛과 그림자(39-41절)
각 단락은 연극 무대의 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며, 매 단락마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적 구성 외에도, 순환과 충돌 등도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배경. 이야기의 배경은 초막절 기간이라기보다는 그 직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문 중에서 시간이나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발견할 수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초막절 직후일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1) 소경이 고침을 받은 후에 그의 이웃이 그를 가리키면서 ‘앉아서 구걸하던 자’로 부르고 있는데 그가 앉아있던 자리는 분명 예루살렘 성전 입구일 가능성이 크고,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그곳에서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2) 그 소경은 예수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으로 가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3) 1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 예수님과 소경과의 만남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치려하자 성전을 떠나는 직후(8:59)에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 7-8장 전체에 걸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5) 7-8장을 통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갈등이 축제 기간 동안 심화되고 있는데, 9장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일차적인 배경이 아니라, 화자 자신의 배경 즉 공동체가 처해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의 배경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만, 본문 중에서도 이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 이러라”(22절).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흥미를 더해주는 일련의 수사적 장치들 즉 역설과 해학 등이 있습니다. 예컨대 유대당국자들의 질문과 선언, 고침을 받은 자나 그의 부모가 이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는 질문 등을 말합니다.
신학과 신앙
1. 표적(1-7절)

화자는 다시 독자들의 시선을 표적 사건으로 향하게 합니다. 본문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이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앞선 초막절 이야기와 어떤 연속성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절)
예수님과 이 맹인(盲人)의 만남은 의도적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우연의 조우였을 뿐이라는 암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그자를 보았다는 언급이 기적과 관련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연이 필연으로 연결되려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사람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제자들의 질문은 고대 근동 사회의 통상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의 불행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본인의 죄가 아니라면 부모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녀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십계명>에도 명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 5:9). <예루살렘 탈굼>에서도 불손한 자식들을 기르는 부모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처럼 버릇없고 불손한 아이들이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그들의 <성경> 해석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에 대한 보편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인간의 고통이나 악고(惡苦)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만 자신의 소명과 관련한 특수한 경우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경의 현재 처지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기회로 삼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답변을 고통에 대한 보편타당한 원리로 교리 화하고자 할 때, 이 역시 ‘유대’인들의 인과응보적인 사고방식만큼이나 위험한 것입니다. 즉 인간의 고통이나 악고의 문제가 필경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의도하신 것이라고 처방 내려서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절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4-5절)
이곳에서 사역의 주체와 관련해서 한 번은 복수형 “우리”가, 그리고 또 한 번은 단수형 “내”가 교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동역자로 초청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그러합니다(참고. 14:21; 20:21). 하지만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기간 즉 “그 때”가 있다는 인상을 5절에서 받을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지녀야 할 확신과 동시에 급박한 상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은 이미 앞에서 읽은 바 있지만(8:12), 그 때와 지금의 선언이 다소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 이전의 선언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반복은 보다 구체적인 상황 즉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즉 이제 곧 펼쳐질 기적 사건은 예수가 모든 사람의 빛의 근원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다른 앞선 기적 이야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행위 자체는 단 한 줄의 언급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이한 행동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6절)
<마가복음>은 이와 유사한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할 때에,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를 해주었습니다(막 8:23). 당시 사람들은 타액이 때로 치료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만, 후기 ‘랍비’ 문헌에 보면 타액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신비한 믿음에 대해서 경고하거나 금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초대 교부들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예수님의 행위를 두고 흙으로부터 인간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창 2:7). 다만 왜 그와 같은 행동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이 맹인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십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
이 장면은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의 그 유명한 일화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왕하 5:10-14). 이방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왔을 때, 선지자는 그에게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회복될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해주던 장면 말입니다.
화자가 본문에서 친절하게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실로암’(Silwavm)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칠십인 역>에서 ‘히브리’어 ‘실로’(j'Lov)를 ‘그리스’어로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요한’ 화자에게 예수는 “영적인 실로암” 즉 “보냄을 받은 자”(ajpostevllw, 아포스텔로스)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즉 그 맹인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을 때 시력을 회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이자 이미지로서, 그의 눈을 회복시켜 준 것은 ‘실로암’의 물이 아니라, “영적 실로암”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실로암’ 즉 ‘실로’라는 점은 ‘야곱’의 예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hloyv)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 즉 맹인의 눈에 침으로 이긴 흙을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은, 실은 맹인의 믿음을 세우고 도와준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다음 장면에서 보게 될 이웃 사람들의 심문에 대해서 이 사람이 자기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라는 사람 덕분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11, 15절).
2. 이웃의 심문(8-12절)
고침을 받은 사람을 바라보는 이웃의 놀라움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가 지난 38년을 맹인으로 살았던 그 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8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8-9절)
사람들은 한 편으로 놀라워하면서, 이 자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욕구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절)
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어떤 논쟁이 벌어지든,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태도와 증거는 한 결 같고 일관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
증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이며, 화자가 이 사람의 입을 통해서 선언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비록 두 번째 무대에서는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예수는 전체 이야기의 핵심 인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역할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증인이자,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진정한 주인공의 부재가 오히려 돋보이고 있다 하겠습니다. 무대 아래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이라면, 주인공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막의 기능이 여기에 있다 하겠으며, 화자 역시 이웃 사람들의 궁금증을 통해서 이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12절)
3. 바리새인들의 심문(13-17절)
세 번째 막에서 갈등과 충돌은 보다 심화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제와 관련된 내용도 조금 씩 확대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때 소경이었던 이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13절)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무슨 악의적인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어난 일에 대한 종교전문가의 견해를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재판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명한 독자라면 이제 곧 두 번째 심문이 시작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화자의 언급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14절)
기적 사건이 있은 후 안식일에 관한 언급은 이제 곧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서막과도 같습니다(참고. 5:10). 일반인들에게 기적은 신비와 경이로움 그 자체이겠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딜레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예수의 자기주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며, 부인하자니 예수를 “안식일의 무법자”로 몰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15-16절)
보다시피 심문의 초점은 안식일 위반에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이해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과 전승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긴” 예수님의 행위는 안식일 위반임에 분명하다는 것이 그네들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나 이사를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범법자를 칭송하고 따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참고. 신 13:1-5). 그들의 관심은 맹인 되었던 자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안식일을 범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도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피 심문자의 대답은 명쾌하고 단순합니다. 조금 전 이웃에게 했던 답변 그대로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였다면, 그의 답변은 “누가”에 있다 하겠습니다. 즉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답변은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 심문자의 답변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이 문제는 <요한복음> 전체를 두고 논쟁과 갈등의 주된 원인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분쟁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참고. 6:66-69; 7:12-13, 30-31, 43; 10:19). 종교 전문가들 사이에서 본류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를 놓고 자기네들끼리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은 해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해학적입니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절상)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전문가 집단이 비전문가에게 자문(諮問)을 구해오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에게 무슨 대답을 기대하며 이 같은 질문을 던졌을까?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7절하)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 부릅니다. 이 장면이 해학적이며 냉소적이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문(愚問)의 주인공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소위 현자(賢者)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었으며, 현답(賢答)의 주인공은 이들 ‘바리새인’ 현자(賢者)가 아니라, 무지한 맹인이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선지자”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의 대답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중에 그분을 가리켜 선지자로 부르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참고. 4:19). 여인의 경우처럼 이 사람 역시 영적인 눈이 밝아지고 있었던 것일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그 선지자”와 연계시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가 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 ‘모세’는 정녕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 때나, 그 이후 광야생활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위대한 기적사역 때문입니다. ‘모세’도 기적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한 말들이 있습니다(참고. 신 34:10-12; 신 18:15). 화자는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자신이 이야기의 결론에서 드러내려했던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선언을 예고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4. 부모에 대한 심문(18-23절)
네 번째 막의 주인공은 ‘유대’인들과 맹인이었던 자의 부모입니다. 화자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참고. 13, 15, 16절). 이들은 논쟁 끝에 맹인이었던 자의 부모를 부르기로 결정합니다.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8-19절)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맹인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모로부터 듣고 싶은 대답은 따로 있습니다. 즉 “아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의 기적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그 이유는 22-23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절)
그 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해 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부모의 심정은 진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목도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장성하였으니(아마도 13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임), 그에게 직접 확인해 보라고 다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화자는 부모의 이와 같은 태도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22-23절)
그러나 부모의 두려움을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가 단순히 기적을 행한다고 떠드는 사기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 경이적으로 나았고, 이로 인해 예수가 선지자라는 사실을 자식과 함께 인정하고 싶었겠으나 그들은 그 결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란 다름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출교 조치를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출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의 독자들 즉 “요한 교회”로 하여금 제자도의 헌신을 촉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당시 주변의 적대적인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맹인이었던 이 사람처럼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촉구인 것입니다. 진실로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겠지요.
5. 계속되는 심문(24-34절)
심문자들 즉 ‘바리새’인들은 부모로부터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시 그들의 아들을 부릅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주문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죄란 맹인이라는 지난 전력과 예수가 이를 고쳐주었다는 것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했다는 죄목(罪目)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유대’ 당국의 진단은 온당한 것이며, 예수는 죄인이란 점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역설 그 자체입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이 사람은 과연 당국의 주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명령에 순응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했고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이전에 했던 증언을 다시 한 번 거리낌 없이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죄인이라는 당국의 혐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당국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즉 그가 지금 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유대’ 당국의 혐의가 아무 근거 없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입니다. 정확하고도 사실적인 답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입니다. 다시 한 번 이들은 집요하게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물어봅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절)
이전에 했던 증언을 다시 한 번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은 그를 혼란스럽게 하자는 의도일 것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재 증언하도록 함으로써 행여나 이전의 증언과 다른 점이라도 드러나면,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몰라가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태도는 ‘바리새’인들만큼이나 확고부동합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다시 한 번 기막힌 해학과 조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조롱 섞인 이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맙니다. 그동안 짐짓 태연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모습을 짓던 모습이 결국은 위선이고 허위였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8-29절).
그동안 사실 확인을 위하여 그토록 집요하게 이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 심문하던 이들이 결국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주장은 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전문가로 자처하며 심문하던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노라”며 탄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피 심문자의 입장에서 수세(守勢)에 몰려있던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공세(攻勢)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0-33절)
이 사람의 탄식인 즉은 ‘바리새’인들의 불신과 무지(無知)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 참 이상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고백은 단순히 고백이나 증언의 차원을 넘어 복음 선포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예수라는 사람이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고,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가 아닌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義人)으로 불려 마땅할 터인데 그를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가 보여준 기적은 단순히 약한 시력을 회복시켜 준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람에게 시력을 주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창조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례 없는 이 기적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증거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이 사람의 고백이자 선언이요, ‘바리새’인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무식한 비전문가로부터 비웃음과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의 기분이나 감정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포효(咆哮)를 들어봅시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그러나 이 장면 역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작 자신들이 쏟아 붓는 비난과 정죄가 고스란히 자신들 위에 쏟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위로 쏟아지는 은혜의 빛을 피하다가 더욱 큰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참조, 요 1:4-5; 요 3:19-21).
6. 참 빛을 봄(35-38절)
이 사람이 쫓겨났다는 말은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이 처한 두 번째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어떤 도움말인가?
35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5-36절)
첫 번째 도움이 이 사람에게 빛 즉 시력(視力)을 선사해 준 것이라면, 이번의 도움은 새로운 차원 즉 “영적 시력”을 창조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가 보아야 할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인자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인자를 신뢰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감안해서 이해해 보자면 이런 식의 질문이 아닐까요: “네가 이런 상황에서 인자를 신뢰하여 구원을 받겠느냐?” 이 질문은 마치 광야의 “놋뱀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영적인 빛을 주려고 시도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7; 마 16:13).
이 사람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질문과 동시에 소원을 말합니다: “그 인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믿겠나이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과 논쟁 가운데, “그 인자가 누구인가?” 물으며 무지와 불신을 드러낸 적이 있긴 합니다만(참고. 12:34), 이 사람의 태도는 정 반대입니다. 그는 믿기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사람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그의 소원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이 역시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정체를 물어오는 불신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는 무시와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일관해 왔습니다만, 이번만큼은 다릅니다. 즉각적이며 단호하며 명쾌합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7-38절)
이 선언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중에 밝힌 그 선언과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참고. 4:26). 이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보였던 반응과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 물동이를 내던지고 동네에 들어가 “와보라, 내가 메시아를 만났도다!”하고 외쳤다면, 이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찬란한 빛을 대하며 엎드려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빛의 계시 앞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모습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보며 보였던 바로 모습입니다.
7. 빛과 그림자(39-41절)
마지막 무대의 첫 일성(一聲)은 전체 이야기(1-38절)에 대한 교훈적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절)
“내가 온 것은...”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와 같은 말씀은 <공관복음>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막 2:17; 마 5:17; 눅 12:49). 그리고 이와 같은 선언은 예수님을 인자와 연관 짓고 있는 다른 본문들과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참고. 막 10:45; 눅 19:10).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지는 일견 모순적이고 상충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관련된 이러한 일견 상충되어 보이는 듯한 발언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막 2:17; (2) 눅 19:10; (3) 막 10:45; (4) 요 3:17; (5) 마 10:34-36;
하지만 이 선언은 계시의 이중성 내지는 복음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양면성을 가지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대조적인 반응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인이 빛을 본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금 ‘바리새’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기 진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절)
결코 소경이 아니라는 자기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은 계시가 아니라 숨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교훈과 적용
1. 맹인과 그리스도
‘요한’ 화자는 기적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항상 그 이야기의 배경부터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이야기를 읽어갈 때, 각 이야기의 배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적인 핵심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단어입니다: 흥겨운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버린 혼주(婚主)의 절망(2:3),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왕의 신하인 아버지의 절망(4:47), 38년을 속수무책 앉은뱅이로 살아가고 있는 한 병자의 절망(5:5),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는 오천 명이 넘는 무리의 절망(6:9),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 갈릴리 호수 위에서 요동치는 고기잡이 배 안에 갇혀 떨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절망감(6:16-19).
화자는 이야기의 정말적인 배경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보조 장치도 함께 도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날이 흥겨운 잔치자리였다든지, 안식일이었다든지, 그곳이 ‘예루살렘’ 성전 이었다든지, ‘유대’인의 명절이었다는 등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의도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종교나, 성전이나, 종교인들이 그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깨뜨리고 변화시키는데 있어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무관심한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입니다.
맹인과 제자와 이웃들. 여기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의 상황은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요? 이 사람은 영화 <블랙>의 여주인공 ‘미셀’의 처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미셀’ 역시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였습니다.
왜 이 두 사람에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가? 두 사람은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상인으로 태어났으나 나중에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이 무엇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이 맹인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아마 衣食住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하는지 보면 알 것입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8절하). 그의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었는데 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아무튼 그는 시력(視力)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태어난 후 그날까지 계속해서 그런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점에서 완벽한 맹인이었으며, 그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이웃은 그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주는데 무슨 도움이라고 되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도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데, 이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웃에게 그는 거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먹을 것만을 던져주면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맹인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줄 힘도, 관심도 없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맹인의 처지는 이들 이웃 때문에 더욱 절망적으로 비취는 것입니다. 곁에 누군가 있으되,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야말로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맹인을 아예 죄인 취급하고 있습니다: “랍비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것으로 지나치면 그만일 것을 왜 멀쩡한 사람 죄인 취급하는 심사는 또 무엇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기야 이 사람들 지난 번 ‘사마리아’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 바 있습니다. 당시 그들 곁으로 한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짐짓 모른 체 하며 그냥 스쳐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늘의 눈에 그 여인도 필경 죄인으로 비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나 이 맹인에게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도움은커녕 절망감만 더해줄 뿐입니다.
기왕 제자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화자 역시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질문의 내용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들의 질문인 즉은 인생의 고통이나 질병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 모두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고통과 질곡을 죄와 연관 지으려 합니다. 예컨대, “내가 죄가 많아 내 자식들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식 말입니다. 세상만사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욥’의 세 친구들처럼, 이 세상에서 우연이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많은 일들이 마치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죄악 된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성경>은 지지하고 있는 듯합니다(룻 2:3; 4:1).
또 다른 하나는 질문자들의 태도와 관련한 것입니다. 화자가 고발하고 있는 제자들의 태도란 과연 무엇입니까? 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한가하게 신학적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그 시간에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를 도울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인가? 자기들이 할 수 없다면 선생님에게 이 사람을 고쳐줄 수 없느냐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명색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유대’ 공동체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정녕 애통해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교회는 없는 것인가? 정녕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이웃도,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 공동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맹인과 그리스도. 절망은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태초의 그 혼돈과 무기력으로 되돌려놓으려 합니다. 절망의 아들은 자포자기(自暴自棄)입니다. 누가 이 절망과 허무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절망을 이기려고 감히 시도라도 해 보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맹인 이야기를 앞선 장면과 나란히 다시 한 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절망으로 성전(聖殿)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집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가장(家長)이 가출(家出)을 해버린 것이지요. 아내와 자식들을 내버렸습니다. 바야흐로 “세상의 빛”이 낙조(落照)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 맹인을 지나치게 됩니다. 아닙니다. 지나친 것이 아니라 그 맹인 앞에 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보았고 그리고 섰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처럼 이 만남도 그야말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의 조우(遭遇)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이번에는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절망과 허무와 배신감을 안고 피해 달아다는 상황입니다. “내가 다시는 주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노라”하며 숨어버린 선지자 ‘예레미야’가 처했던 그 상황입니다(참고. 렘 20:9).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 앞에서 멈추어 섭니다! 할렐루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 어떠한 절망도 하나님을 좌절시킬 수는 없다.” 그 절망이 ‘바리새’인들의 미움과 배척 때문이었건, 제자들과 이웃의 무관심 때문이었건, 맹인의 상태가 어떠했든, 하나님의 계획과 관심을 좌절시킬 수는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은 강력한 흑암의 세력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삼킬 수는 없다는 선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취하시는가? 왜 성전과 ‘바리새’인들은 내버리면서 보잘 것 없는 한 맹인은 구하시는가?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알지도 못하는 이 맹인, 예수가 누군지 알지도, 찾지도 않았던 이 맹인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합니까?
1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지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6, 18)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 즉 그분의 긍휼만이 그 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원인이나 의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맹인의 고난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히 4:15)
‘헤세드’는 늘 행동을 수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고난에 대한 값싼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것이니 잘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식의 처방 말입니다. 이와 같은 처방은 아주 경건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이나 질병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고난의 의미나 목적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 두 권의 저서는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주 유익할 것입니다: (1) Scott Paek, 「아직도 가야할 길」; (2) Eugene Peterson,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인생 자체가 실은 고난의 연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열자(列子)는 “인생에서 고통을 빼고 나면 남는 시간이 과연 얼마인가”라고 묻습니다. 석가도 사해(四海) 중에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욥’도 “인생은 고난 가운데 났나니 불티가 날음과 같다”고 장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고난 중에서, 내가 “하나님,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절규할 때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서 나와 함께 절규하고 계신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오늘 이 맹인이 겪게 될 기적도 결국 그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관심어린 ‘헤세드’의 징표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하).
이 맹인은 실은 “내 버린 자”의 상징입니다. 절망의 상징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교회도, 목회자도 거절하고 돌보지 않은 자입니다. 안동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식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행운아였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이제 180도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빛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전에 맹인이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과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 활기차고 목적 있는 삶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2. 사역자와 동역자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님이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분은 결코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되지도 않을 일, 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사람들의 선심을 사거나 미혹시키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그를 쫒아 다녔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를 찾아다녔는데, 예수께서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상). 예수님은 이처럼 찬물 끼얹는 데는 도사(道士)입니다(참고. 눅 9:57-62).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하나의 “표적” 즉 통로인 것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더 큰 오해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들이 해야 하는 그 무엇 즉 과업으로 오해했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바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는 개개 피조물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광대이거나 배우일 것입니다. 조연이 주연의 역할을 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남편이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아내가 가장(家長)이 되고자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훈계할 수 없고, 학생이 선생을 인도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물며 감히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이 맹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그 일이란 과연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그것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정열과 시간과 그리고 돈을 투자합니다. 요즈음 대학생들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쌓기 위해서 휴학하고 해외 연수에 나서는 것도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나무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펙’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어의 ‘specification’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즉 “(특허) 명세서(明細書)” 또는 전문 분야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일”도 그와 같습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하고자 하는 일도, 누구나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특별한 명세를 지닌 일, 즉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라고 명시(明示)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공생애”(public ministry)일 텐데, 요약하자면 “치유”(治癒)와 “축사”(逐邪) 그리고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책임감, 결의, 열정, 그리고 헌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 것이지요. 사실 모든 일에 있어 이와 같은 덕목(德目)이 없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요리를 할 때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나머지 한 손만으로 대충대충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요리에 흥미가 없거나, 또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거나 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손끝에서 맛있는 요리가 탄생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음식 맛이 손끝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훌륭한 선생은 대개 배우기를 즐겨하는 훌륭한 학생입니다. 나이 열둘에 성전에 머물며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묻고 하는 예수님을 보고 그 부모가 왜 집으로 따라오지 않고 성전에 그냥 머물러 있었느냐고 책망하자, 아들은 오히려 그 부모를 책망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성전에서 배우는 일을 그가 “해야 일”로 여겼다는 반증입니다.
깨달음은 배움에서 오는 법, 어린 시절부터 그분은 자신의 소명을 주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훗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 그 대상이 어디 사는 누구든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여리고’의 외로운 ‘삭개오’라 해서 예외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분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앉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사마리아’의 한 고독한 여인은 어떻습니까? ‘요한’ 화자는 이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고하듯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자신이 직접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된 양들로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 10:16).
하지만 헌신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도 들고, 돈도 써야 하며, 재능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헌신에는 이보다 훨씬 큰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의 목숨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이마저도 거쳐야 할 일로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기왕에 하는 일이라면 억지로 하기보다는, 이처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훨씬 유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뜻을 당연히 존중하고 받들어야겠지요. 그래야 보는 아버지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독생자”란 아버지의 흉금, 진심, 또는 가슴이란 뜻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중 또한 꿰뚫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책임과 사명만으로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히 4:15). 예수께서 “해야겠다”고 하신 이유는 그 일이 자기 아버지의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만이 필요의 전부가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 즉 ‘헤세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동업으로의 초청.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해야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 이 얼마나 놀라운 제안입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함께 일할 동업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대개 동업은 어딘가 부족하고 아쉬운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기 마련입니다. 자금이나 기술 모두를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은 남과 동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은 나누고 싶어 해도 부귀영화는 혼자 가지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습니까!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빚보증을 서지 말 것. 둘째 돈을 꾸어주지 말 것. 셋째, 동업을 하지 말 것.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그분의 친구들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연약하고, 무지하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제자들에게 동업을 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너무 순진하신 것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자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일까(참고. 2:24-25)? 아니면 혼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기가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했음일까? 다 틀렸습니다. 도대체 소경이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만일 이와 같은 동업 제의를 받는다면 심정이 어떠할까? 대박이구나 하며 눈이 번쩍 뜨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거 내가 잘못 걸렸구나.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에게”하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동업을 요청받았을 때, 다른 사람은 어쩌고 나한테만 그런 제안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참고. 21:21). 이럴 줄을 아셨던지 예수님은 동업 제안을 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묻고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 16, 17). 그리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21:15, 16, 17).
사랑은 행동하는 것만큼 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말이나, 느낌이나, 각오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필요로 할 때, 필요로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 “내가 여기 있소”라고 말해야 합니다. 제 아내의 불만은 내가 필요해서 찾을 때마다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곁에 있어도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보자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어도 아예 포기하고 잘 찾지를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집에 자전거가 한 대 있는데, 탈 때마다 덜커덩거려 그냥 거실에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내 소유이긴 하나 별로 가치 없는 재산 목록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든지 버려도 하등 아깝지 않은 그런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행여 주님에게 내가 이런 소유가 아닌지 자문(自問)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찾을 때마다 내가 없다면, 그분이 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내가 듣지 못하고 딴 짓하고 있다면, 그러다가 마침 다른 집 문이 열려있어 그곳으로 들어가 버리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혹시 이런 나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고전 3: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합니다(15:15). 친구가 찾을 때, 친구가 아쉬울 때, 내가 모른 체 한다면 나는 과연 그의 친구일까요?
3. 날이 새면 집 지으리

규장 문화사에서 출간한 <사랑의 편지>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히말라야’산맥 아래 ‘카투만두’라는 조그만 왕국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의 낮은 따듯한 봄날 같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히말라야’의 찬바람 때문에 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이 나라에 전설적인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긴 이름의 새 입니다.이 새는 따듯한 낮에는 종달새나 꾀꼬리 마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즐깁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히말라야’의 찬바람이 눈발을 날리며 찾아오는 혹독한 밤이 되면 이 곳 저곳을 방황하면서 끝없이 이렇게 울어댄다고 합니다:
아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날만 새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
밤이 지나고 낮이 다시 봄날 같은 낮이 됩니다. 이 새 위로도 햇볕은 따듯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 새는 지난밤의 고통이나 다짐은 다 잊어버리고 따듯한 봄의 향연에 빠져버립니다. 다시는 밤이 안 올 것처럼 집짓기를 잊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밤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고, 이 새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다시 이렇게 울어댑니다:
아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날만 새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즉 늘 결심은 하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반복되는 후회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상징이자 교훈일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늦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시절 다 허송(虛送)하고 막판에 끗발 내는 사람을 두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사사기>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습니다. 힘 있고 건강한 젊은 시절을 만용(蠻勇)과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송세월 하다가, 좋아하던 여인의 배반으로 머리털 과 눈알이 다 뽑히고 난 뒤에야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하나님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 ‘삼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최후가 장렬(壯烈)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자랑스럽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삼손’의 처지나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는 새의 처지나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밤이 오리니.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전 3:1). 그리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전 3:2). 전도자는 젊은 시절에 이와 같은 심정을 토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 이와 같은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철들자 환갑이” 된 셈입니다. 본인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나이가 들고 은퇴할 시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도자의 이 말씀이 전에 없이 깊이 와 닿는 느낌입니다. 하루하루가 아쉽고, 정년(停年)을 좀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강의와 더 좋은 연구를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심정이셨나요? 제자들에게 동업을 제안하시면서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왜 그런가요?
나 같은 사람이 본인의 대학원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처럼, 내 은퇴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전에 무엇인가 이루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학위 과정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학위를 주어 졸업도 시켜야 합니다. 또 매년 실적 평가를 통해서 연구비를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늘 쫓기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독려하고 야단도 쳐야 합니다. 이것은 아마 기간 내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건설업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왜 이처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마감 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좀비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서, 해가 지고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되고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둠이 깔리면서 낮 동안 숨어있던 좀비들이 여기저기 구멍에서 기어 나와 활동을 개시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에 전율하면서, 낮이 참 짧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 짧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시간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 “밤이 올 테니 서둘러 낮 동안에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 밖에 계신 분, 하루가 천년 같으신 분이 시간에 쫓길 리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가지신 분, 그래서 언제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내일 재개(再開)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시간이 짧다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좀 먹는다”는 말은 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돈 뿐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유를 가지신 분조차도 “밤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그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 인생에 언젠가는 밤이 올 것이라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설교자로서 내가 이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 교회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만일 부모라면, 내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훈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이 그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면 그는 내 자식이 아니라 세상의 자식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아이는 영원한 아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놓치거나, 게을리 한다면 기회는 두 번 다지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다 큰 자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든 그르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더 나아가 필경은 자식들이 나를 가르치려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가르친다? 순리(順理)가 역리(逆理)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부모에게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게으름의 대가가 찾아온 것이지요.
아직은 낮이라. 내 인생에도 언젠가는 이처럼 밤이 오겠지요. 그런데 내 인생의 밤이 반드시 죽음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시점이 바로 내 인생의 밤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을 그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될 그 때가 바로 내 인생에 밤이 찾아온 시각이 아닐까요?
밤은 혼자 오지 않습니다. 그 밤과 함께 주님도 다시 오십니다. 마치 도적과도 같이 홀연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그 때에는 상냥하고 친절한 동업자로서가 아니라, 단호하고도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동업하겠다고 제안해 보아야 이미 때가 지난 후입니다. 더 이상 동업자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분과 동업할 수 있는 기회는 그분이 다시 오실 그 때까지 만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인생의 밤이 오기 전까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절). 그분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나봅니다. 서두르지는 않되, 그렇다고 느긋하게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그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오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번 한 주의 일은 무엇입니까? 올 한 해에 반드시 “해야 할” 과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일이 내 일이기 때문입니까? 행여나 “내 일”이 하나님의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이점이 걱정이 되었던지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솔직히 사람들의 동기 유발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었으면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하라.” 아, 먹어서 남 줍니까? 공부해서 남 줍니까? 열심히 피아노나 기타 배워 남 줍니까?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주로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언젠가는 그 모든 지식이나, 재능이나, 기술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은사”로 거듭나게 될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섭리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자기 개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시험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학생은 도와주려 해야 도와 줄 길이 없습니다. 내가 그 학생 대신 답안지를 기록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써놓은 답안지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단 일점이라도 점수를 주게 되지요.
하나님의 동역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동역자들이고 친구들입니다(고전 3:9).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활용하실 지를 생각하면 즐겁고, 가슴이 뛰며, 흥분이 되지 않습니까? 은사는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오지 않습니다. 한 뿌리, 한 줄기로부터 여러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은 것처럼, 우리의 은사도 지극히 작은 한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응용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요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당연한 내 일을 마치 남의 일로 여기며 하릴 없이 세월을 죽이고 있는 자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권고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4. 빛이 어둠에 비취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 <로마서>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35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인 것이지요. <욥기>의 핵심 주제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셔서 일장 훈시를 하고 계십니다(참고. 욥 38-41). 그분의 훈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께서 ‘욥’에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계시(啓示)의 역설이자 신비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말할 때, 대체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독단”(獨斷)과 “독선”(獨善) 등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조(自嘲)와 냉소(冷笑)로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감히 그분의 뜻에 대적할 수 있겠느냐?”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엘리’의 태도가 이와 같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그에게 와서 장차 ‘엘리’와 그의 집안에 내릴 하나님의 저주를 알려주자,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하).
누가 그분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며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대단한 믿음의 표시인 것 같습니다만, 이와 같은 태도는 실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자유란 결코 한 가지 방식에만 제한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실 때, 어떤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하시거나 집착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실 때, 나와 한 마디 상의함도 없이 단독으로 처리하실 수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나의 의지에 반(反)해서 일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와 상의하기도 하며, 내 생각을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일관성이 없으며, 변덕스럽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획일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격적이라 함은 가변적(可變的)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늘 열려있다는 말이지요.
기적의 요구. 예수님의 기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상의하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불위(無所不爲)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구할 뿐입니다. 그분께서 나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내 믿음이 그분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점 ‘요한’ 화자에게 있어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 중에서 적어도 여섯 개의 이야기 속에서 주님은 한 결 같이 “믿음의 시험”을 명시적(明示的)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컨대, “가나의 결혼”에서 포도주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여섯 개의 빈 항아리를 물로 채워야 가능했던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1-11).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아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을 먼저 시험하십니다. 자기 집으로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아비의 요구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4:50). 믿고 가보라는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화자는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더라”(4:5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앉은뱅이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의지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요 5:6-8).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먼저 물으심으로써, 최소한 그의 의지를 시험하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믿음의 요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들의 믿음이 아니라 사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6).
이제 우리는 여섯 번째 기적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무슨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하실 것인가? 그분의 기이한 행동과 함께 주목해 봅시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6-7절). 이 무슨 뚱딴지같은 행동이며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적은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왜 그냥 그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하신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 근처를 지나치실 때, 두 맹인이 길 가에 앉았다가 큰소리로 자비를 구하자 단순히 그들의 눈을 만지심으로써 볼 수 있도록 해주신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도 유명해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참고. 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처럼 짓궂게 이 소경을 조롱거리로 삼으려 하시는가 말입니다! 무슨 심술이 발동하신 것인가요?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당시 사회에서 용납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 때문입니다. 침을 뱉어 진흙 반죽을 만드는 행위는 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안수(按手)는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는 것이지 진흙을 눈에 바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병자라도 안식일에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치료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분은 이처럼 사람들의 분노와 미움을 자초(自招)하고 계신 것일까? 무슨 자학증(自虐症) 환자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적어도 이 소경에게는 믿음의 시험이었으며, 기적의 조건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결코 눈을 뜰 수 없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아닌 듯하니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그곳에 가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왜 그럴까? 왜 믿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느껴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한 번 ‘베팅’(betting)에 내 모든 것을 다 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지구상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 그토록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할까?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복음의 명령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잃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체면과 명예, 재산과 시간, 취미와 특기 등 말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도 같은 생각이었던 같습니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봅시다.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 5:10-12)
‘나아만’은 왜 화가 났을까? 왜 선지자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그의 요구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었으며, 그대로 따라 했다가는 내 자존심과 명예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나라의 대장군이 일개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일곱 번 씩이나 말입니다. ‘나아만’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의 면면을 보면 ‘나아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정말 힘들고 복잡한 것이었을까? 정말 창피스러운 것이었을까? ‘나아만’의 종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3-14)
맹목적 믿음. “맹목적(盲目的) 믿음”이라 함은 말 그대로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소경의 믿음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는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은 것입니다. 눈이 멀었으니 보고, 따지고 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이유, 그 처지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하).
그가 여전히 눈이 먼 채로 어떻게 ‘실로암’ 연못가로 걸어갈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의 손을 이끌어 데리고 갔는지, 아니면 맹인 특유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여 물어물어 찾아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곳을 찾아갔는가가 아니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네 눈을 씻어라”는 그 말에 순종하여 눈이 먼 채로, 즉 맹목적으로 찾아갔다는 점입니다.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바로 이와 같은 맹목적 믿음일 것입니다.
눈언저리에 진흙을 잔뜩 붙이고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한 편으로 가련하고, 측은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참으로 한심하고, 미련하며, 어리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주변의 이웃들, 종교인들, 그리고 사도들의 모습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바로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不滅의 神이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죄인으로 죽었다는 선언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 모두에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누가 믿게 될까?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자가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누구를 믿게 하십니까? 믿으려 하는 자를 믿게 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순환 논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믿음과 구원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 더 이상의 나은 해답은 없을 듯합니다. 복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암의 능력. 화자가 본문에서 친절하게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실로암’(Silwavm)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는 <칠십인 역>에서 ‘히브리’어 ‘실로’(j'Lov)를 ‘그리스’어로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요한’ 화자에게 예수는 “영적인 실로암” 즉 “보냄을 받은 자”(ajpostevllw, 아포스텔로스)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즉 그 맹인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을 때, 시력을 회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이자 이미지입니다. 즉 그의 눈을 회복시켜 준 것은 ‘실로암’의 물이 아니라, “영적 실로암”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실로암’ 즉 ‘실로’라는 점은 ‘야곱’의 예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hloyv)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과 어처구니없는 요구는 결국 맹인의 믿음을 세우고 도와준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예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매일처럼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요구와 권면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내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나는 무슨 말씀을 들었으며, 무엇을 행했습니까!
5. 그는 선지자라
본인이 대구에 처음 와서 출석했던 교회가 현재 범어동에 위치한 “아멘교회”로서, 당시는 개척한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교회였습니다. 목사님도 삼십대의 젊으신 분으로서, 교회 부흥에 관해서 의욕이 넘치던 분이었으며, 나도 그 점이 좋아 그곳에서 대학-청년부를 맡아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교회가 조그만 건물 이층에 전세 들어 있던 터라 특별히 청년부 모일 곳이 없어 주일 오후면 우리 집에서 모였으며,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교회 청년부뿐만 아니라, 경북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우리 집에서 별도 성경공부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아내는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 돌보랴, 매주 열 서너 명 되는 친구들 저녁 식사 마련해 주랴 어려움이 여간 아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많이도 힘들고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 덕분인지 청년부는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교회 목사님은 신바람이 나서 길목에 영어 성경공부 안내 현수막을 달아 우리 모임을 더욱 널리 알리려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훗날 목사나 전도사 또는 목사 사모가 된 제자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습니다.
내가 당시 그렇게 열심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그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철저하게 신봉하였고,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모 교회였던 미국의 ‘버클랜드’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배운 것을 이제 이곳 대구 땅에서 가르침으로써, 내가 배운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가고 있었습니다.
모임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새롭게 믿음을 시작한 사람은 교회 예배 시간에 서로 간증을 하려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권장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정 예수를 만난 자라면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태까지 어둠 속에 지내다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새로우며, 신기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청년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역시 무엇이든 젊을 때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운명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새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어 넘쳐 포도주 자루를 터뜨리는 것이지, 묵은 포도주는 아무리 담아두어도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새 신자들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들은 쉽게 반응하며, 쉽게 결단하고, 헌신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새 신자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와보라!”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늘 이런 경험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나를 새롭게 해주고, 내 믿음을 굳건히 해주며, 내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시시콜콜한 고민을 할 틈이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친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큰 기쁨이고 자극이 됩니다.
맹인의 이웃.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자루에 담아두면 그 자루가 터질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참고. 막 2:22). 아니나 다를까! 나와 새롭게 변화된 청년들을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였겠습니까? 예수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같은 교회 식구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신앙의 연륜이 꽤나 오래된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왜 교회 놔두고 집에서 성경공부 하느냐?” “교회에서 무슨 분파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냐?” 등등의 불평이 줄을 잇기 시작합니다. 미움과 질시가 발동한 것이지요.
혹시 나는 이와 같은 미움과 질시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동료 교회 지체들로부터 말입니다. 만일 없었다면 죄송하지만 나는 참으로 한심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맹인의 이웃처럼 말이지요. 이 사람과 그의 이웃은 지금 각기 다른 이유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기쁨과 환호로, 그의 이웃들은 투기와 질시로 말입니다. 아,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 사람을 연상해 봅시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그 아래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 이것이 성전의 모습이었구나! 아, 내가 지난 시절 속절없이 앉아있던 거리의 모습이 이러했구나! 하늘이 저렇게 생겼구나! 저것들이 양과 염소란 말인가! 내 부모님들은 어떤 모습일까? 집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의 눈앞에 전개되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이름과 의미가 무엇인지 일일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한 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러나 오, 통재라! 그의 이웃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히 아무런 감동과 감흥이 없습니다. 새로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저 무미건조한 무성(無聲) 흑백 영화에 불과합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또한 오늘 같을 뿐이겠지. 늘 보는 그 성전, 늘 만나는 그 사람들, 늘 듣는 따분한 그 설교, 늘 반복되는 일, 대망의 그리스도가 오면 어쩔 것이며, 안 온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경이 눈을 뜨자 말자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친절하고 다정한 이웃들이 선물과 면류관을 들고 자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포근한 꽃밭이 아니라, 가시와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보니 그동안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劣惡)한 상황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눈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환난의 도구. 나는 정말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내가 두고 온 아름다운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 내가 거듭나 처음 간증을 하던 그리운 내 모(母)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예배는 얼마나 즐겁고 감동적이었던가! 설교 시작 전에는 꼭 누군가 간증 문을 들고 나와 읽었으며, 설교 후에는 늘 십 수 명씩 재 헌신이나 믿음의 결단을 하겠다고 강단 앞으로 나오던 그 장면! 그리고 회중석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모두들 기쁨과 감격과 부러움으로 이들 모습을 바라보고 박수치고 격려해주던 모습! 그들은 정말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가! 나를 전도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찾아주던 집사 부부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성경공부와 친교를 나누던 아름다운 지체들! 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 다 때려치우고 이곳에 그냥 눌러앉아 살아?”
내가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과 같은 그곳, 나의 ‘갈대아 우르’였던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의 동쪽과도 같았던 이곳 대구 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내가 태어난 그곳 교회에서 어린 아이로 받아먹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모유(母乳)만 빨아먹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점차 모유가 맛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질문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여 뿔뿔이 각 지역으로 흩어지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선교가 가능했을까?
이야기 속의 맹인도 이웃으로부터 집중적인 질문 공세를 받지만 않았어도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간증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 해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11절)는 말 외에는 할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의 간증은 지극히 짧고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간증은 충분히 강력하고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간증은 복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복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소개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는 한 가장 짧게 정의해 봅시다. 더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증거 내용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더 강력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가정이든, 기본이 튼튼하면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마 7:23-27). 그의 간증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기본에 충실하면 응용과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기본이 부실하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8-23)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거나, 또는 세상의 재물이나 유혹이 왔을 때, 쉽게 쓰러져 버립니다. 대개 내가 간증이나 전도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조롱이나 박해나 멸시가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력한 증거는 반드시 환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 즉 세상이 나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 말입니다.
하지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될 수가 없을 진대(마 10:29), 복음 전도에 내가 만날 환난이나 핍박도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가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직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 기본체력을 튼튼하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모가 부모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자녀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강력하고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강력하고 집중적인 저항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차가 빨리 달릴수록 바람의 저항이 커지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요? 바람의 저항이 커진다고 차를 멈출 수야 없겠지요.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한 더 힘 있게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숙의 도구. 하나님께서 이웃의 조롱과 멸시를 허용하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이 맹인은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이 그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웃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리고 뒤에는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을 듣고 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는 선지자니이다”(17절).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심문을 통해서 그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참고. 33절).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그 기적이 마침내 이 사람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 여인이 한 ‘유대’인 남자에서 “그 선지자”를 거쳐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난 것처럼, 이 남자 역시 그분을 만난 것이지요. 하지만 ‘유대’인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반쪽짜리 지식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자”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3:2). 기적의 이면(裏面), 즉 표적을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심판관과 심문자로 앉아있는 ‘바리새’인들은 불행하게도 ‘니고데모’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사마리아’ 여인이나 맹인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처음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의심합니다(16절). 그리고 기적에 의문을 제기하다가(18절), 예수님을 죄인이라 칭합니다(24절). 더 나아가, 그 출생을 알 수 없는 무식한 자라고 단언합니다(29절).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소경으로, 그리고 죄인으로 선고받기에 이릅니다(41절).
이야기 속의 두 주인공의 운명이 어쩌면 이렇게 엇갈릴 수 있을까요?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었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겨 버렸으니 말입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이처럼 갈라놓았을까? 나는 지금 어느 쪽인가?
담대해야 할 이유. 내가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 부흥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 부흥은 전도의 결과인 것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인생에 소금과 빛을 뿌려주겠다는 강렬한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겠다는 욕구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저 사람의 인생이 주님에 의해서 재창조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나 충동이 없으면 복음 증거는 사실 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동기는 때로 저항과 조롱과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는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6.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몇 년 만에 외국 생활에서 돌아온 아들 부부와 오래 만에 식사를 함께 하면서 내 아버지는 달라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셔야만 했습니다. 첫 숟갈을 뜨기 전에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아들 부부의 모습 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그나마 이 아들이 장남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국내 유수 대학교에 직장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거의 반년이 지나도록 집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습니다. 참다못해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하는 그 잘난 하나님이 어찌 네 직장하나 구해줄 수 없단 말인가?” 그분의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신 것이겠지요.
“도대체 당신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저들이 어쩌다가 골수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까?” 누가 이렇게 내 아버지에게 물어본다면 그분은 무어라고 답하실 수 있을까? 아마도 아주 귀찮다는 듯이,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내 아들에게 직접 물어봐.” 뭐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직접 물어보셨다 한들 속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도 내가 어떻게 거듭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참고. 요 3:8)? 누가 바람을 보았으며, 누가 성령을 보았습니까?
이웃들. 이처럼 볼 수 없는 것을 보려는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자기네들 사이에서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종교 전문가에 물어보아야겠다며, 맹인이었던 자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옵니다. 참 딱하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본인으로부터 이미 대답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또? 그렇게도 할 일이 없었던지 말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에 관하여 무엇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굳이 일의 본말(本末)을 알고 싶었다면 차라리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그 모든 일의 당사자였으니 말입니다.
오래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업 시간에 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되면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모르는 것 있으면 질문 하라고 아무리 독려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수업이 끝난 후에 동료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게 별 소용이 없는 일임을 곧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경이 소경에게 길 안내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이들 이웃이 무엇을 알고 싶어 이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전문가들. 이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이미 이 사람을 불러 한 차례 심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경의 이웃처럼 자기네들 사이에서도 이견(異見)이 분분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신학적으로 완벽합니다. 즉 누구든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죄를 범한 것이 되니, 예수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가 죄인이 맞기는 한데, 어찌 죄인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들의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시 146: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 29:18);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자가당착”(自家撞着)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선림유취(禪林類聚)·간경문(看經門)에 다음과 같은 남당정(南堂靜)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수미산은 높디높아 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須彌山高不見嶺)
바닷물은 기어 바닥에 닿지도 않네 (大海水深不見底)
흙을 뒤집고 먼지를 털어도 찾을 수 없으니 (硽土揚塵處尋)
머리 돌려 부딪치니 바로 자신이로구나 (回頭撞着自家底)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피해만 자초하게 되었다”는 남당정의 시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 이들 ‘바리새’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지 않고 안다고 우기다가 자초(自招)한 결과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며 우기고 있는 것일까? 대개 전문가들은 자신이 인지(認知)하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것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엉뚱한 폐해(弊害)를 낳기도 합니다.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패러다임 혁명>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물리에서 고전물리학의 지식으로 현대 양자론을 해석하고 평가하려 했던 시도가 그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과학의 발전을 막은 자가 다름 아닌 과학자 자신이었던 것이지요.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안경을 통해서 볼 때, 예수가 죄인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죄인이라”(24절).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절하). 일견 겸손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의 태도 같습니다. “불가지론”은 그야말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잘 몰라야한다” 또는 “알아서는 안 된다”가 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전문가라 자처하는 자들이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판단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참고. 막 6:3). 이들이 과연 겸손한 불가지론자인지, 아니면 그의 출생에 대해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불가지론자인지 말입니다. 그들의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가 죄인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이들의 발언은 바둑으로 치면 연거푸 결정적인 패착(敗着)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진실을 알고 싶었다면 마땅히 질문부터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검사가 죄인을 취조(取調)하는 것과 같습니다.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날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자주 보는 장면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일장 연설 내지는 훈계로 쓰고는, “내 생각은 이런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하고 묻습니다. 질문을 받은 자가 답변을 시작하려 하면 그는 자기 생각을 결론으로 마무리해버립니다.
여기서도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놓고서는 의례적인 질문을 한두 가지 던집니다: “그 자가 네 아들이 맞느냐?”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지?” 질문의 의도는 뻔합니다. 즉 “제발 네 아들이 아니라고 그래”이겠지요. 그래야 기적이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사람의 신뢰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의 간증은 거짓이야. 기적은 무슨...” 이렇게 되면 당연히 예수의 신뢰성도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아, 인간이란!
소경의 부모.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아들이 맞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맹인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대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자식이 눈을 뜨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주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답변입니다. 이 장면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투우(鬪牛)와 투우사(鬪牛士)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목적과 결론을 정해놓고 투우처럼 달려드는 율법 전문가와 이를 교묘하게 피해 달아나는 투우사 같은 부모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멋진 풍자와 해학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이들 부모가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을까?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모른다고 덧붙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누가 해 주다니요? 아니 언제 누가 해주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다만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설명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 이러라”(22절).
이들 부모가 마음속으로부터 과연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두려워 스스로 말하지는 못하고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소서.”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멸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육체는 멸할 수는 있으나 영혼은 멸할 수 없는 종교 당국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부모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무서워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생각을 말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고, 축출하고, 왕따 시키는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서야 되겠습니까? 종교가 전제군주가 되어 온 나라를 획일적으로 몰아가는 나라가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국가, 우리 도시를 성시(聖市)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성도(聖徒)였으며, ‘예루살렘’은 성시(聖市)였습니다. 그런대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이 용납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은 퇴출되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명목상의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이 부모처럼 말입니다. 이런 곳에는 창의성이 없고, 개발과 혁신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은 회칠한 무덤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과 비슷한 상황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주기도문”(Lord's Prayer)은 하나님의 뜻이 대한민국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지,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제도나, 조직이나, 기관이라기보다는 이상(理想)이며, 정신(精神)이요, 운동(運動)이 아닐까요?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정신이 대한민국을 뒤덮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기적의 당사자. 그런데 여기 공회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즉 기적의 당사자입니다. 그는 부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도 다른 것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25절).
이것이 그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신앙의 토대와 기초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엉성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모르는지 확실히 아는 것만큼 더 확실한 지식이 있을까요? 강의 중에 질문을 하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질문을 못하겠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보면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려버립니다. 그 이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큰 이유는 그나마 아는 것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영역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지요. 컴퓨터 하드디스크 상에 비어있는 공간과 차 있는 공간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힌 후, 이제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즉 그의 체험을 들려줍니다. 설교나 훈계나 아닌 간증(干證) 말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하).
과연 어떤 설교나 교훈이 이보다 더 강력할 수 있을까요? 이제 간증을 들으며 수세(守勢)에 몰린 쪽은 그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조롱과 해학으로 가득 찬 재판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으며, 재판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볼까요?
“내 간증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걸 보니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나 보네”(27절); “거 이상하군.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도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하니”(30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않고 경건한 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31절); “창세 이후로 아무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자가 없거늘,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겠습니까?”(33절)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인정한 소경이 이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학적 지식을 갖게 될 줄이야! 반면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안다고 기세등등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무지할 수 있다니! 참으로 기막힌 역전이요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어떻게 이와 같은 반전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모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정의할 수 있습니까?
7. 모두를 위한 질문
무식하고 천박한 소경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개망신을 당하고 만 ‘유대’ 종교 전문가 집단. 그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버렸으며,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맹수처럼 포효(咆哮)하는 이들 모습을 한 번 볼까요: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완전히 이성을 잃은 패자(敗者)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향한 비난과 정죄가 정작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피하려다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빛과 어둠의 분리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을 서막 이후 지금까지 반복해서 관찰해 왔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정말이지 유신론자가 되는 것보다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소경은 이제 사회적 죽음을 당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선언 받았으니 말입니다. 예수에 대한 솔직하고 거침없는 증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어찌 이 사람에게만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의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처럼 행동하면 나도 똑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시험 삼아 내가 말끝마다 예수님 이야기를 꺼낸다고 상상해봅시다. 얼마 안 가서 나와 대화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버리겠지요. 내가 증언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멋들어지게, 효과적으로 증언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모두가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칭찬보다는 대부분 반대나 무관심을 기대하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미워 배척했다면 그의 패거리도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예수님의 이와 같은 경고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의 품으로.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어디로 쫓겨났을까? 바깥 어두운 곳이었을까? 그곳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전에 자기가 했던 행동을 놓고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울부짖음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 20:7-10)
언젠가 이 본문을 놓고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묵상할 기회를 갖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만, 한 마디로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고 있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놓고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유혹하고 또 강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두 동사, “권유하다”와 “이기다”는 각기 “유혹하다”와 “힘으로 눌러 이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적인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결혼을 빙자한 성 폭행자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이 맹인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까요? 모르긴 해도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외로움” 등으로 크게 위축되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라도 당연히 그랬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그는 또 다른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눈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의 몸은 세상 밖 어두운 곳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또한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내쫓긴 곳은 ‘아담’이 내쫓겼던 “에덴의 동쪽”도 아니었고, ‘예레미야’가 내던져진 어두운 지하 감옥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던져진 곳은 주님의 품속이었습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35절상)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일대 일로 그를 만나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 자신이 의도했던 것도, 그를 내던진 자들이 의도했던 바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의 표현대로라면, “고난 받은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려는 참입니다(참고. 시 119:71).
한 집사님이 추석을 맞아 조상 묘역에서 잔디를 깎다가 기계 날이 돌에 맞아 튀어나와 그분의 다리에 박혀버렸습니다. 이분은 그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나서 조상의 묘역을 다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자손 사고 나는 것도 막아주지 못하는 그런 조상은 있으나 마나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고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고 대들었다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늘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더 힘들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절규하신 것도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러 하셨다면, 그분의 사도들이 예수께서 이제 곧 그들을 떠날 것이라는 말에 크게 당황하고 실망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14:5, 8). 하지만 주님께서는 동요하는 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고 다짐하셨습니다.
<삼손 이야기>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20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 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0-23)
‘삼손’은 하나님께서 언제 그를 떠나신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아오셨는지도 몰랐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언제 다시 그에게 돌아오셨을까요?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떠나는 순간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실은 처음부터 늘 그와 함께 계셨던 것이지요. ‘삼손’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있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나실인’(ryzIn, 나시르), 즉 “분리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것은 이 맹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는 결코 혼자 고아처럼 남겨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삼손’에게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도 찾아오신 것입니다. 혼자 남겨져 있었을 그에게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35절).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찾아갔으며, 그를 만나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지금 이 시점에 왜 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한 것일까요? 일견 지금 그에게는 불필요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왜일까? 그는 눈을 뜨기 전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대로 쫓아 행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냥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갔을 리는 없습니다. 그는 믿었고, 행했으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게 되었습니다(11절). 뒤이어 그가 선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17절).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는 확신도 갖게 되었습니다(3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지금 예수께서 묻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체득(體得)해서 알고 있는 그 모든 지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설령 중요하다 해도, 그것으로 “인자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인자를 네가 믿느냐?” <성경>은 이 질문을 모든 개개인이 대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것 무엇이겠습니까? 목숨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맹인에게 복음, 즉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진정 구원받기를 원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인자”일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결국 <성경>의 핵심 인물은 인자, 즉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이름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죽기 전에, 그분의 제자들이 어떻게 그분을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분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괴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요지인 즉은,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 선생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불교의 고승(高僧)들께서는 심심찮게, “부처가 되려면 부처를 잊어야 한다”고 선문답하듯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질 새라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도, “예수쟁이가 되려면 예수를 잊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정신인 것이지,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차를 타면서 누가 그 차를 만들었는지, 그 차를 생산한 회사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운전하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두 번에 걸쳐 그분은 자기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지(롬 10:13), “누구나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주(主)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절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미루고 있습니까?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요?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이제 비로소 이 사람은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인자를 믿습니까?”
8. 우리도 맹인인가?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물론,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은 그야말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그 말을 뒤집어 다르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예외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예수님의 말들을 몇 군데 찾아 모아보았습니다. 가히 <난센스 모음집>이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일관성을 찾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12:47).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3:18);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도대체 어느 말씀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을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참고. 마 12:39; 16:4; 눅 11:29). 하지만 ‘요나’가 누굽니까?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교사로 가는 것이 싫어 도망치던 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나중에 억지로 가서 설교를 하긴 했습니다만, 자기 설교를 듣고 이 족속이 믿고 회개하자 그게 보기 싫어 하나님에게 불평과 항의를 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께서는 자신이 이 선지자와 같다는 말씀인가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강의하실 때, 쉽고 평이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요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 화자들은 그분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합니다(마 13:34; 막 4:34). 오죽 했으면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예수님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자면, 천국의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2). 참으로 예수님의 인격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입니다. ‘요나’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더 낫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도대체 이 세상에 왜 왔는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해. 그러나 모두가 다 구원받아서는 안돼!” “나는 모두를 사랑해 그러나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이게 뭡니까? 마치 무슨 코미디극 대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이 소위 “개그” 수준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역 차별.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분의 말씀은 지독한 편애(偏愛)와, 멸시와, 저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편애란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에 대한 것이요, 멸시와 저주라 함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편애란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겠다는 것”이요, 멸시와 저주는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하나님의 편애도 문제지만, 저주와 모독은 더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하게 잘 보고 다니는 사람을 못 보게 하겠다는 저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슨 원한이 많이 맺혔기에 이토록 그들을 혐오하신다는 말입니까!
물론 우리는 ‘요나’의 불평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쪽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이 살아오던 이방 족속이 어느 날 설교 한 번으로 회개했다고 해서 다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오던 이스라엘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역차별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역차별 하신다는 점은 “포도원 품꾼”에 관한 비유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참고. 마 20:1-12). 하루에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자나,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다가 해질 녘에 잠시 들어와 일을 한 자나 똑 같이 받습니다. 이것은 정의(正義)가 아닙니다. 이에 가장 오랜 시간 일 한 자가 화가 나서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탕한 동생을 둔 형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에 대해서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눅 15:11-32). 오히려 그 동생이 죽이고 싶도록 얄밉습니다. 자기 몫 다 써버리고서는 돌아와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란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그런데요 그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지 않습니까! 그것도 또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 치더라도, 잔치 비용으로 왜 형 돈을 쓰느냐 이겁니다.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이 역시 역 차별의 전형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대중들 앞에서 이들을 모독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쪽은 오히려 예수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다면, 방탕한 작은 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어줄 수 있다면, 불과 한 두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꼭 같은 품삯을 줄 수 있다면, 왜 이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아량과 자비를 베풀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태도는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절). 마치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지금 ‘바리새’인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더욱 큰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는 것이지요.
내일이 아닌 오늘. 우리는 심판에 대해서 말할 때 늘 미래에 다가올 종말의 심판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살아있으면서 맹인이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양치기 소년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시도 때도 없이 늑대가 쳐들어온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대다가 정작 늑대들이 왔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던 그 소년의 처지 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절친했던 한 친구도 지금 이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직장 생활과 결혼 그리고 유학 등으로 이십여 년을 만나지 못하고 지내다가, 수년 전 어떻게 연락이 닿아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 아내가 암에 걸려 위중하게 되었다며 잠깐 돈 좀 꾸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도와준다는 기분으로 기백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이 돈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 만나는 고등학교 동기들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돈을 빌어서는 갚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골프 접대를 하겠다며 가까운 친구들을 한 때 자신이 근무하던 ‘말레이시아’까지 초청을 해서, 친구들은 모두 부부 동반하여 갔습니다만, 그는 공항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그냥 돌아와야 했습니다. 얼마 후 친구들이 그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미안하게 되었다며 다시 한 번 이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이겠거니 하고 찾아 갔습니다만, 이번에도 허탕이었습니다.
이 친구 사는 게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펴져 완전히 사기꾼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절친했던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들이 한 번 씩 부부 모임을 갖습니다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친구로 대접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 내세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아무도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 자체가 그를 향한 동료들의 심판일 것입니다. 그는 실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연습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운명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는 이 금언을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젊어서부터 아주 고약한 훈련, 즉 남을 속이고 약속을 어기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여기까지 가져 온 것입니다.
눈먼 자들. 그런데 더 큰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친구들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자신 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영화 <식스 센스>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내 친구처럼 눈이 멀었다고 하시는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뭐, 우리보고 맹인이라고? 미친 거 아냐? 귀신 들린 자가 따로 없구먼! 어리석은 ‘사마리아’인 같으니라고!” 이것이 이들의 반응이었습니다(참고. 8:48; 10:20).
똑같은 선지자, 똑같은 설교, 똑같은 아버지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 이처럼 극명하게 다를 수가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로키’ 산(Rocky mountains) 지역에는 미 대륙을 동서로 나누는 “로키 산 분계 령”(continental divide)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이 분계 령은 작은 수로(水路)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수로를 기점으로 물이 서부 태평양과 동부 대서양으로 나누어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은 내천 중앙에 있는 한 작은 돌멩이입니다. 이 돌멩이가 한 방물의 빗물을 태평양의 물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또 대서양의 물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 또는 “거침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선언 때문에 걸려 넘어집니다. 십자가가 자신의 죄와, 허물과, 무지와, 그리고 무능력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류의 고상한 스승으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며,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구해주는 거룩하고 고상한 예수를 누가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문제는 십자가의 고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볼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는 불필요했고, 또한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 없다는 사람을 누가 도우려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들이 맹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이들에게 변명하고 핑계할 기회조차 없다는 선언인 것이지요. 안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7장과 8장이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연결될 수 있다면 9장과 10장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네 장 모두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음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본문 속에 드러나는 주제나, 단락 구분, 기타 수사적 기법 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너무 어려운가요?).
2.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과 앞에서 소개한 다른 기적들(가나의 혼인 잔치;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을 비교하되, 배경 설명에 초점을 맞추어 토의해 봅시다.
3. 기적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기적의 당사자(맹인과 그리스도)와 주변 인물들(이웃, 부모,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4.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5.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6. 본문 이야기는 그 주제, “세상의 빛”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까? 소경을 중심으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