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7):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13-16약 11분 분량
“Ibis ad crucem!”
(요 19:13-16)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형(死刑)이 반인륜적이라 하여 많은 국가에서 중단하였거나, 시행을 장기간 유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소위 문명국가로 불리는 미국에서조차 여전히 사형이 집행되고 있습니다. 사형 방법으로는 총살형(銃殺刑), 교수형(絞首刑), 독가스 형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형의 방법이 보다 잔혹하고 끔찍합니다. 아주 야만적이었던 거죠. 참수형(斬首刑)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죄수의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단두대(斷頭臺)를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망나니가 등장합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시대에는 십자가형을 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만, 당시 로마인들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형에 대해서는 로마인들조차 공포로 몸을 떨 정도였다.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죽음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타키투스’는 그 같은 형벌을 비열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형벌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람들은 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악인이 죽어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죽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체는 독수리나 까마귀 떼들이 와서 파먹도록 했다. ‘카르타고’고 이 제도를 도입했고, 로마는 이들로부터 이 처형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은 로마 본토에서는 결코 시행되지도 않았고, 지방 속지(屬地)에서 그것도 노예에 한해서 시행되었다. 로마인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로마 시민을 구속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그를 때리는 행위는 더욱 심각한 범죄이다. 더 나아가 그를 죽이는 행위는 거의 존속 살인에 가까운 짓이거늘, 그를 십자가에 매단다고 한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잔혹한 행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범죄 행위이다.” 이처럼 십자가 형벌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두렵고 끔찍한 것으로서, 노예나 범죄자에게나 해당되는 형벌을 예수께서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역사적 순간. 예수님은 노예도 아니었고, 범죄자도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고(18:38; 19:4, 6), 그를 풀어주고 싶어 했으며, 실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재판을 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立地)마저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 선고만 남은 셈입니다. 마침내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결정을 선포합니다: “Ibis ad crucem!”(“너를 십자가형에 처하노라”).
그런데 <성경>은 왜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장면을 생략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분명 자신의 최종 판결을 군중들 앞에서 선포했을 텐데 말입니다. 영화에서 때로 일부 장면들을 무성(無聲)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도 같은 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무리의 함성에 파묻혀 ‘빌라도’의 선고가 아예 들리지도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지못해 쫓기다시피 판결을 내리고 있는 재판관과 그를 둘러싼 ‘유대’ 무리들이 주먹을 내지르며 즐거워 환호(歡呼)하는 모습을 무성으로 처리함으로써, 관객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어지는 화자의 해설을 보면 그 역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조롱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한’ 화자는 자신의 분노를 ‘빌라도’를 통하여 대신 전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빌라도’의 심정은 지금 어떤 것일까? ‘가야바’를 위시한 일단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패배의 수모(受侮)를 맛보았으니 말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모독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받은 모독을 되돌려주어야겠지요. 그가 어떤 복수를 꾸미고 있을까?
그는 이 역사적 장면을 먼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돌을 깐 뜰(gabbaqa,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있더라”(13절). ‘빌라도’가 모든 사람들(‘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이 보는 앞에서 위엄과 격식을 갖추어 재판 석에 앉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재판이 법적인 권위를 갖춘 공개적인 재판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요. 뭐 이런 의도일까요? 즉 하나님의 백성이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방인 재판관을 억지로 떠밀어, 그들의 왕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종 선고가 내려지던 시와 때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14절상). ‘유대’인들은 이 시각에(정오) 모든 일을 멈추고 집에서 무교병을 꺼내고, 양(羊)을 도살(屠殺)하여, 사실상의 유월절 행사를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날은 목요일 오전입니다. 알다시피 이날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출애굽”의 엄청난 은혜를 목도하고 체험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이들 조상은 무교병을 만들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야훼’ 하나님 즉 “유대의 왕”이 이집트의 왕 ‘바로’를 이기고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체험을 했습니다. 바로 그 시각에 지금 이들 후손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유월절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 날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이번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반격이 압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회심의 일격(一擊)을 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4절하). 그의 선언은 조롱과 멸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뭐 이런 심사겠지요: “보라, 너의 왕이라고 하는 자를. 이 자가 너희 왕이라고? 이 별 볼일 없이 생긴 이 자가?”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막힌 복음의 아이러니를 보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출애굽”을 성사시켜줄 “유대의 왕”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기를 원하는 예수입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수가 “유대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재판관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선언은 실은 ‘요한’ 화자의 고발이면서, 책 전체를 흐르는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15 절상).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립니다. 이전보다 더 격렬하고 단호한 태도로 말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절중).
무슨 다른 반응을 기대하고 물었을까요? 행여나 그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하고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책임 소재에 관한 한 대못을 박자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은 바로 너희 ‘유대’인들이야!” 하지만 ‘유대’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搖之不動)입니다. 이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댑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하).
화자는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외쳤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대답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이 선언은 직전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이 왜 의미심장한 것일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대제사장 이스라엘은 지금 단순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었던 “메시아 대망”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짐짓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수 천 년 동안을 그토록 고대해오던 “하나님의 왕국”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나라요 민족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로마의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예수를 얼마나 혐오했으면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인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는 지금 종교인, 특히 소위 하나님의 종(從)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사악한 짓을 할 수 있는지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점은 우리가 도무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도서>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원래 신정국가(神政國家)로 출발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왕으로 직접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모세’나, 사사(師事)나, 선지자들은 왕의 대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사무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주변 국가들을 돌아보니 모두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국가들이 더 강력해 보였고, 더 효율적으로 보였으며, 더 멋있게 보였을까요? ‘사무엘’에게 마침내 자신들도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 ‘사무엘’은 백성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고 이를 불쾌하게 여겨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오래 전에도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이스라엘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시편>은 이것이 인류 공통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가릴 것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1-3).
‘시날’ 평지에서 있었던 ‘바벨’탑의 반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흩어지는 대신에 한데 모여 이렇게 외쳐댑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과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겠다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만큼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왜 ‘가야바’는 ‘가이사’를 섬겼으면 섬겼지, ‘야훼’ 하나님은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들 모두가 한 가지 동기(動機)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가졌던 그 동기입니다. 뱀이 그에게 심어주었던 그 동기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그 동기란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그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자율(自律)과 독립을 원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담’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으나, 그것을 통제할 능력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자유와 자율을 얻었으나 그 대가는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마저 지배할 그 자유는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을 갖게 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야바’가 하나님 아들 대신에 ‘가이사’를 선택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호세아>가 일찍이 예언했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호 3:4).
그 결과란 이스라엘이 태초의 그 어둠과 혼돈과 공허 속에 지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스스로의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회든, 외부로부터 통제가 필요합니다. 대개의 민주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삼권분립의 원칙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힘을 가진 자가 멋대로 날뜁니다. 독재자가 나타납니다. ‘가이사’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이사’는 자신이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김정은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다가 역설적으로 ‘가이사’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일부러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의 해학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빌라도’와 ‘가야바’는 ‘가이사’의 친구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러한 ‘가아뱌’에게 “유대의 왕”을 내주었습니다. 마치 “이 사람이야말로 네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왕이야”라고 훈계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오늘에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세상은 제발 교인답게 살라고 오히려 걱정해줍니다.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습니까? 왕의 지배를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자율을 찾아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지 자문(自問)해 볼 일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