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6):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8-12약 11분 분량
본디오 빌라도
(19:8-12)
‘위키’ 백과사전에서 “정치”(政治)를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하고 있습니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다의 “正”(정)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는 뜻의 “攵”(등글월문 = 攴)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不調和)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氵= 水)과 건축물(台 태)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것은 물(水)의 넘침에 의한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 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정치”란 상당히 고상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단어를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리는데 사용해 왔습니다. 예컨대, “정치적인 사람”하면 아주 술수나 음모에 능하고, 속이기를 잘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예사롭게 이용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정치인이란 기껏해야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경우 신뢰도 평가에서 항상 가장 꼴찌를 차지하는 기관과 집단이 국회와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이처럼 정치에 대해서 낮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영어권에서도 “정치인”(politician)과 “정치가”(statesman)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정치인”이란 앞에서 말한 그대로 오직 자신과 그가 속한 당(黨)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정치를 하는 소인배(小人輩)라고 해야겠지요.
반면 “정치가”는 정치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나라의 중요하면서도 큰일들을 탁월한 능력과,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가지고 수행해 갑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동기도 이타적이고, 애국심에 불타며, 헌신과 희생정신이 투철합니다. 아주 큰 정치를 하는 대인배(大人輩)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정치가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가이사의 친구. 제 5대 유대총독(재직 26-36년)으로 지낸 ‘빌라도’(Pontius Pilatus)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할까? <사도신경>에 자신의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로마인이 되어버린 ‘빌라도’.그를 정치인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정치가라 해야 할까?
그의 인격적 단면에 대해서는 앞선 설교에서 한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총독 취임 시 로마 황제를 그린 군기(軍旗)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거나, ‘예루살렘’ 시의 수로(水路)를 건설하기 위하여 성전(聖殿) 금고에서 자금을 유용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을 학살하는 등,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는 정도입니다.
이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황제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황제가 그를 이 자리에 앉혀준 임명권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호칭에 그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아무나 “황제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상류층 지도급 인사들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영예(榮譽)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원로원 의원들이나 특별히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이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떻게 이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의 근위대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야누스’(Aelius Sejanus)와의 친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세야누스’와 가까운 자라면 누구나 “황제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누리던 영예는 얻었다기보다는 돈으로 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돈이나 연줄을 이용해서 그토록 원하던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계속 지키고 싶겠지요. 특히나 임명권자가 ‘티베리우스’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 황제는 변덕스럽기로 악명 높은 자, 누구든 자기의 지위를 위협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하는 아닌 게 아니라,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역모(逆謀)에 연루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 때 그를 따르던 많은 지지자들도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당연히 ‘빌라도’에게 황제의 신임을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참칭(僭稱)하는 한 ‘유대’인 피의자가 나타나 새로운 두려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를 1차 신문해 본 결과 정치적으로 로마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은 섰습니다(참고. 18:38; 19:4; 6). 그런데 그의 태도가 영 부담스러웠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혐의에 대해서 아주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고요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대’ 땅에서 최고의 권력자인 자기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섰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다루어본 적이 없었던 이 같은 피의자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 하니, 갑자기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해 온 것입니다(8절). “더 큰” 두려움이라 함은 그가 정말 “신의 화신”(化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던 터라, 만일 그렇다면 그를 잘못 다루었다가 신의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컨대, ‘바나바’를 대동한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앉은뱅이를 치료하여 걷게 하자, 그곳 주민들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라며 놀라 경배하려 했던 에피소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행 14:11).
‘빌라도’ 역시 이 사람이 신의 화신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해소(解消)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의 출신지역이 어디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인간인지 또는 정말 하늘로부터 온 자인지 묻고 있습니다(참고. 9절상).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부질없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 이유는 첫 대면에서 ‘빌라도’가 보여준 반응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빌라도’가 예수님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들려준들 무슨 새로운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진리에 대하여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자가 아닙니까(18:38)? ‘빌라도’의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희롱하는 빌라도”라는 어구(語句)가 탄생되기도 했습니다. 즉 확고한 신념이나 도덕적 중심이 없는 정치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물며 지금 ‘빌라도’의 의도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진대, 새로운 계시에 눈을 뜰 일말의 희망조차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습니다.
이제 다급해진 쪽은 피의자가 아니라 재판관입니다. 내심 두렵고 불안해지는 자신을 숨기려 허세를 부려봅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절).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황제의 친구야”입니다. 피의자에 대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빌라도’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 발언이 자기를 올무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그토록 뽐내고, 자랑하며, 지키고 싶어 했던 그 지위와 영예가 결국 자신의 최대 약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몰랐던 것이지요. 정치인의 최대 약점은 무엇일까?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정치 평론가가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재자의 최대 약점은 그가 누리는 절대권력 그 자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하겠습니다.
정치인 가야바. 노회(老獪)한 ‘가야바’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영예로운 대제사장 직을 어떻게 거머쥐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인 ‘안나스’의 자금력과 정치력 덕분입니다. ‘유대’ 국가가 로마 속국이 된 이후부터 대제사장 자리는 부패와 비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지역 로마 총독에게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아첨을 잘하며,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임명된 대제사장은 로마의 충성스러운 협력자로서, 로마의 안위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야바’는 ‘유대’에서 ‘빌라도’ 버금가는 정치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자기 뜻을 어기고 예수를 풀어주겠다니!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리들을 선동하여 ‘빌라도’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즉 예수를 방면(放免)하면 “가이사의 친구”가 아니라 ‘가이사’의 적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황제의 신임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반역의 땅 ‘유대’에서 혁명을 꿈꾸는 한 왕을 ‘빌라도’가 도와주었다는 소문을 황제가 알게라도 된다면 ‘빌라도’가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친구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역모(逆謀)로 중앙 권력 무대에서 사라진 지금,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安危)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있으며, 정치 십 단(段)인 ‘가야바’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스스로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야바’가 로마 총독을 이처럼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의 땅 ‘유대’에서 치안의 책임을 맡은 최고 책임자가 그의 임명권자인 황제에 불충(不忠)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유대’ 땅에서 말입니다. ‘유대’가 어떤 곳입니까? 로마에 대한 증오와 저항이 제국(帝國) 내 어느 지역보다 더 극열한 곳에서, 로마의 총독이 로마에 불충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니 말입니다! ‘빌라도’는 치욕으로 온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의 왕”보다 자신의 신변을 더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황제의 친구”에 그토록 집착했건만, 이제 보니 한 번도 황제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진정 “황제의 친구”였다면,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이점 ‘가야바’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왜 그토록 예수님을 제거하기를 원했을까?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하는 이 자가 그의 지위를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누리고 있던 종교적 특권과 지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결국 ‘가야바’ 역시 진정으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모르겠습니다(참고. 요 15:14-15). 내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고 안달할 필요조차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빌라도’와 ‘가야바’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가 될 기회가 없었을까? ‘빌라도’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로마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전혀 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리고 싶은 의지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행동도 취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가 그토록 예수님을 살리려 했으면서도,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그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의 편에서 설명하자면,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큰 두려움은 우습게 여기고 작은 두려움에 자신을 내주었습니다. 작은 두려움이란 “황제의 친구” 자리를 놓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가야바’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살려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큰 두려움이란 “그리스도의 친구” 자리를 놓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나 현실에서 누가 ‘빌라도’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도 ‘가야바’의 편에 섰거나, 또는 ‘빌라도’의 처신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갑”(甲)의 위치에 있다 싶으면 소위 “갑질”을 했을 것이고, “을”(乙)의 위치에 있다 싶으면 ‘가야바’처럼 사람들을 선동해서 “갑”을 마녀사냥 하듯 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는 ‘빌라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야바’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요한’ 화자 자신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다성성(다聲性)을 이 두 등장인물에 투영시켰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라바’든, ‘빌라도’든, ‘가야바’든, 무리든,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을 친구로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는 이들이 그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무슨 악한 생각과 계획을 세우든, 그 악한 계획조차도 그분의 섭리를 위한 재료로 활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빌라도’와 ‘가야바’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알아두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 사실을 ‘빌라도’에게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참고. 11절상).
하나님의 신비가 정말 크고 놀라울 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