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사로가 죽어 기쁘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1-15약 9분 분량
배가 아플 때에는 금식(禁食)이 최고의 약이며, 피로에는 잠이 최고입니다. 두 경우 모두 휴식을 의미합니다. 위(胃)를 쉬게 하는 것이나 심신(心身)을 쉬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인들은 죽음을 가리켜 영원한 안식 즉 “영면”(永眠)이라고 했나 봅니다. 삶이 그만큼 치열하고 고달팠다는 역설인 것이지요. 하기야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한다면, 죽음은 그 반대, 즉 안식이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죽음보다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통 가운데 살더라도 죽어서 안식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시인은 지금 질병 가운데서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생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사로’라면 어떨까요? 그는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무슨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죽어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조상 ‘아브라함’ 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 거지 ‘나사로’처럼 말입니다(참고. 눅 16:9-31).
그렇다면 이 사람을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까? 정말 애매합니다! 만일 ‘나사로’ 본인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무어라 할까? 변화산(變化山)에서 ‘베드로’가 했던 말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내려가기 싫다는 것이지요. 누가 좋은 자리 버리고 낮고 낮은 그 진흙탕 속으로 다시 돌아 오려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왕궁을 버리고 이스라엘, 즉 교회와 함께 광야로 나갔던 ‘모세’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 당회 장로의 자리를 버리고 해외 선교사로 자청했던 ‘바울’ 사도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지금 제자들은 ‘나사로’의 답변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여 (그가)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 물론 이 말은 그가 푹 자고나면 병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이겠지만, 잠을 죽음 즉 “영원한 안식”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인다면 제자들의 말은 진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잠이 들어 기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이번에도 잠은 단순한 잠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을 직설법으로 다시 전달하면 이렇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내가 기쁘다.”
이 무슨 심술입니까! 우리는 대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죽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뒈져서 속이 후련해.” 예컨대, 독재자의 폭정과 억압에 시달리는 백성이라면 그 독재자가 죽었을 때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카다피’가 죽었을 때 대부분의 ‘리비아’ 백성들이 환호하던 장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왜 기뻐하셨을까? 사랑하던 자가 죽어 천국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고 있어 기쁘다는 것일까? 그분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지체하신 이유도 그가 죽어 소생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나흘이라 함은 ‘유대’ 전통에 의하면, 완전한 죽음 즉 소생(蘇生)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 동안 ‘나사로’라는 한 인격체는 완전히 부패하고 분해하여 단순한 유기물질과 무기 원소들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즉 그야말로 흙으로 되돌아 간 것이지요.
“나흘”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손을 써볼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암시입니다. 질병의 경우라면 의사의 기술, 좋은 의약, 그리고 환자 자신의 의지가 삼박자 조화를 이루어 치유와 회복의 경이를 이루어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자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경우는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의사의 목소리도, 유족의 통곡도 그를 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그래서 예수님은 기쁘다는 것입니까? 선생으로서 나는 학생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어 기뻐할 때가 많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이 잘 알지 못하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내가 알아서 이를 가르쳐줄 때 아주 의기양양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보다 잘 알지 못해서 기쁠 때가 아주 많은 거예요. 남보다 돈이 더 많아서 기쁘고, 더 건강해서 우쭐해지고, 더 많이 알아서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제 내가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일까? 아주 유치해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분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15절상).
예수님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침착함을 넘어 아주 냉혹하고 비정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죽든 말든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권면은 그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은 우리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는 데에는 익숙해 있습니다만, 정작 함께 아파하거나 동참하는 데에는 어색해 하고 낯설어합니다. 그래서 그냥 침묵하고 있으면 될 일을 애써 무엇인가 말하려 하다가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욥’의 세 친구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기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분의 삶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만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왜 기뻐하셨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해 봅시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상).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방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 때문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이 여러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날 주변에 몰려든 많은 이웃들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1상). 하나님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아닐까요?
대개 고통은 나누고 싶어 하나, 기쁨이나 영광은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대개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배 아파하고, 우는 자를 고소해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누리고 있는 자신의 기쁨을 우리와 나누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부하들을 사랑하는 사령관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아, 그야 그분이 그리스도니까 당연하지.” 이렇게 답하신다면 당신은 아직 기독교인이 누리는 신비하고 황홀한 기쁨을 제대로 체험해 본 적도 없는 아주 슬픈 사람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 때문에 기뻐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손 떼가 묻은 작품, 즉 내가 키운 제자 때문에 기뻐해본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없다면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해하고 비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노하고 질투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해서는 그런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나의 어디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냥 내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이렇게 통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정말 어떤 존재란 말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말인가?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내가 아끼던 자전거가 탈 때마다 말썽을 부린다면 그 자전거를 어떻게 할까요? 나 같으면 팔아 치워버리든지 아니면 창고 안에 그냥 내버려두든지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창고에 그냥 내버려두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분은 우리를 교회로 불러내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를 배우고, 자신을 제어하며, 순종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영광스럽고, 황홀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렇지 않든, ‘나사로’는 모두의 기쁨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영광스럽게 사용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는 어떻습니까?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인’ 성의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야이로’의 죽었던 딸은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사망의 음침한 세력들이 예수님과 맞닥뜨리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과 생명의 주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를 만나셨을 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에베소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 역시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있었으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는 지금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내가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24절)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도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내 누이들이 나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들이 나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내 친구들, 내 이웃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그들과 부활의 영광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생명의 손으로 나를 안수(按手)해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