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낮 열두 시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7-10약 11분 분량
한 미국인 관광객이 멕시코의 작은 어촌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어부가 잡는 크고 싱싱한 물고기를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는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그거 잡는데 얼마나 걸렸나요?”
어부 왈, “별로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미국인 방문객은 재차 묻습니다: “왜 좀 더 시간을 들여 물고기를 잡지 않습니까?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부는 자기가 잡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방문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럼 남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요?”
“늦잠 자고, 낚시질 잠깐 하고, 애들이랑 놀고, 마누라하고 낮잠 자고, 밤에는 마을에 가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기타 치고 노래하고, 아주 바쁘지요.”
미국인이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사실 제가 하버드 대학 MBA입니다. 제 말 들어보세요. 당신은 매일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낚시질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수입이 생길 것이며, 더 큰 배도 살 수 있겠지요. 큰 배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배를 몇 척 더 살 수 있고, 나중에는 수산 회사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작은 마을을 떠나 더 큰 도시나 아니면 뉴욕으로 이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부가 묻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리죠?”
“20년, 아니 25년 정도요.”
“그 다음에는 요?”
“당신 사업이 진짜로 번창했을 때는 주식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거죠.”
“백만장자? 그 다음에는 요?”
“그 다음에는 은퇴해서, 바닷가가 있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늦잠 자고, 아이들이랑 놀고, 낚시질로 소일하고, 낮잠 자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어울려 마시고 노는 거죠.”
이 이야기는 LG경제연구원에서 발간한 <2010 대한민국 트렌드>라는 책에서 소개한 내용으로서, “느린 삶” 즉 ‘다운 시프트’(down-shift)가 현대 사회의 한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들였지만, 이제부터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시간이 돈이 아니라, 돈이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시간. <신약>의 성도들 특히 우리의 사도들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강박감 속에 살다 갔습니다. 우리는 이를 <서신서>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 역시 공생애 기간 동안 홀연히 임할 종말에 대해서 이런 저런 비유를 들어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이어지는 “달란트 비유”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입니다(참고. 마 25:1-13, 14-30).
그러나 오늘날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했다간 필경 이단 취급을 받게 됩니다. 범신론적 윤회설이나 또는 무신론적 진화론에 심취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종말론자(終末論者)는 어리석고 무지한 종교적 광신도로 비췰 뿐입니다. 이들에게 시간의 역사는 그저 끝도 한도 없을 뿐입니다. 그것이 윤회를 하든, 일직선으로 나아가든 끝이 없기는 매 일반입니다. 당연히 종말론은 무시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베드로’ 사도도 종말론의 처지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일찍이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 중에서 다섯 처녀를 어리석은 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을 바깥 어두움 가운데 내버려두라고 하셨으며, 한 달란트 받은 자를 향해서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 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게으름을 악(惡)함과 동격(同格)으로 놓고 계십니다.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허송세월(虛送歲月)한 것이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창조의 일주일을 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즉 ‘요한’ 화자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시작으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첫 만남, 제자들의 전도, 예수님의 ‘갈릴리’ 여행, 그리고 ‘가나’에서의 첫 기적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를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일주의 마지막 날, 즉 “제 사흘 째”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진술로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창세기>의 “창조와 안식의 패턴”이 이곳에서는 “안식과 재창조(구속)”로 바뀌고 있는 장면입니다.
시간에 대한 ‘요한’ 화자의 각별한 관심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화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시기가 “유월절”이라고 밝히고 있으며(2:13), 한 동안 이곳을 떠나 있다 두 번째 방문할 때에도 그 시기를 “유대인의 명절”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5:1).
‘갈릴리’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역시 “유월절”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6:4), 그가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도 “초막절” 기간이었습니다(7:2). 그리고 “수전절”이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던 것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10:22).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도 ‘예루살렘’에 계셨으며(12:1), 이번 방문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유월절”이 될 것이었습니다(12:1).
이처럼 ‘요한’ 화자에게 있어 시간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핵심 단어를 꼽는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 “그 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2:4)
(2)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7:30; 8:20)
(3)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4)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5)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16:23)
(6)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7:1)
나에게 시간은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습니까? 내가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또는 다른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시간을 지불하든,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다시 유대로. 나처럼 남은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 답하실까? 그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유대로 다시 가자”(7절후). 이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초청이자 일종의 중간고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나사로’를 도우러가자”; “우리가 ‘베다니’로 가자.”
‘유대’로 다시 가다니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라는 강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항변은 당연하고도 이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그 의미 없는 시간으로 되돌아가다니요? 그건 정말 시간 낭비예요!” 제자들은 그렇게 외치며 시간의 주인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유대’로 돌아가는 일이 왜 의미가 없으며, 쓸데없는 짓일까요?
제자들의 답변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후). 겨우 위기탈출을 했는데, 다시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유대’로 다시 돌아갈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제자들 모두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도마’가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 그렇습니다. 그들 모두는 선생님과 함께 잡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마치 선문답(禪問答)을 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9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일까? ‘유대’로 돌아가는 일, 즉 쓸데없는 일을 다시 반복하는 일과 낮 열두 시간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기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 그분의 심중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낮이 열두 시간이든, 백이십 시간이든, 다시 ‘유대’로 돌아가서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우리 누구나 한 번 실패했던 일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의 심중을 헤아리기보다는 내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 ‘예레미야’가 우리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실패와 배신의 아픔을 최고의 문학적 수사학을 발휘해서, 가장 절절히 들어내고 있는 책을 든다면 <예레미야 애가>일 것입니다.
누가 그를 배신했습니까? 누가 그를 실패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의 처절한 고통을 들어볼까요?
4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8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애 3:4-6, 8-9, 12-13)
그는 지금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활쏘기 연습을 하듯 그를 고통의 대상으로 삼으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억울함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세게 하나님을 향해 대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선지자의 말을 빌면, 하나님에게 속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7-8)
그래서 그는 다시는 이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굳게 맹세하고 다짐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9절상).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아무렴요. 당연하지요.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자들도 같은 심정입니다: “다시는 ‘유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 수치와 모멸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큰마음 먹고 호의(好意)를 베풀었는데, 돌아온 것은 감사는커녕 비난과 배신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예레미야’의 편에 서면됩니다. 그리고 손 털고 돌아섭시다: “다시는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다시는 실패의 현장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럴수록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계속 들어봅시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절하)
그는 지금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무심한 백성과 적대적인 제사장과 사제들이 있는 그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얻어맞고, 치욕을 당하고, 옥에 갇혔던 그 현장으로 말입니다. 하도 억울하여 나도 선지자의 편에 서자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을 따라 나설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나오미’를 따라간 ‘룻’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슴 아프지만 ‘오르바’를 따라 새 희망을 찾아나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시간의 주인.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9절).
혹시 ‘예레미야’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말씀을 들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 이 말씀은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낮이 무려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낮이 겨우 열두 시간밖에 없지 않느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즐거운 시간은 짧게, 괴로운 시간은 길게 느껴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9하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절하-10절)
아, 그분의 방점(傍點)이 여기에 있었군요! 낮의 길이야 춘하추동(春夏秋冬) 수시로 변하는 것이지만, 이 말씀만큼은 너무나 자명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사실 요즈음이야 밤도 대낮처럼 훤하게 밝아 실족할 염려가 거의 없겠지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거리는 그렇지 않았겠지요. 전기불이나 무슨 인공적인 조명등이 있지도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예수님께서 영적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낮이나 빛에 대해서 그분께서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그 자신이 빛이요 낮이라는 선언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시간의 주인이며,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주제 선언을 다시 한 번 듣고 있는 셈입니다.
나는 매일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나는 시간의 십일조를 그분에게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매일처럼 “아, 내일이면 집 지으리” 노래를 반복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 저녁 홀연히 주님께서 오신다면 그 시각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