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계시의 결과(1)-회피와 도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약 11분 분량
(60-66절)
며칠 전 제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결혼식에 주례사 듣기 위해 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장터 같은 결혼식장 안 밖의 소란한 분위기 때문에 도무지 주례사를 읽을 기분조차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는 경우라도 가능하면 5 분 안에 짧게 끝낼 수 있도록 원고를 준비해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나마도 채우지 못하고 2-3 분 정도 읽다가 중간에 대충 끝내버렸습니다. 도저히 더 계속하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간에 졸고 있는 학생, 지겨워하거나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싶으면, 나는 강의를 대충 마무리해 버립니다. 계속하고 싶은 열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에게 최근 새로운 고통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안동 우리 집 교회”에서 <창세기> 공부를 하는 일입니다. 장 전도사님의 요청으로 시작은 했습니다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내가 만든 교재의 내용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대부분 힘들어하고, 그래서 중간에 조는 분들도 속출(續出)합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한 내용은 다 생략하고 서둘러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이 배우기 싫을 때 으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 꼭 알아야 돼?” <창세기> 공부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컨대, “창조의 날”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 이분들 하시는 말씀은 “그냥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지, 이것들을 왜 배우고 알아야 돼?”입니다.
어려운 강의. “생명의 떡”과 “피와 살”에 관한 예수님의 강의도 정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냥 따라 믿기도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나만큼 미련하셨던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왜 좀 더 재미있고 쉽게 하실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분의 태도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강의 중간에 들고 일어나 예수님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대들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1-42절);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잘 모르면 겸손하게 손을 들고 일어나 질문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선생님에게 화를 내며 대들고 있습니까? 화를 내야 한다면 선생님이 아니라 무지한 자기에게다 대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는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아닌가요? 알량한 내 지식으로 해박한 선생님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화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책의 서막에서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1).
계시의 결과는 항상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분리가 그것입니다. 빛에 속한 자라면 고백과 헌신으로 나아오는가 하면, 어두움에 남겨진 자는 회피와 도피를 선택합니다. 본문은 어두움에 남겨진 자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수군거림” 즉 불평과 불만이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어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좀 더 쉽게 풀어주셨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어려운 질문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1-62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치 고승(高僧)의 선문답(禪問答)을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이 다시 올라가다니요? 이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의 죽음과 승천(昇天)에 관한 말씀일까요? 아직 그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야기의 진행 상 이르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다 끝났는데도 극장 측이 관객들로 하여금 떠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다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야기를 결말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시작까지 보는 일은 정말 하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죽었던 인물들이 다시 살아나고, 해결된 실마리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 드는 등,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버린다면 정말 싱거운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시간 비행기를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당시로 되돌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우주와 인류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태초의 상황, 즉 말씀이 육신이 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신다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상황으로 영원히 되돌아가버리신다면, 지금 인류의 상황은 어떻게 되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 대해서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지금 사도 ‘바울’이 그려주고 있는 이 상황은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신다면”, 나 역시 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마치 지구가 창조 이전의 그 상황,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 1:2) 그 절망스럽고 끔찍한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도전인 즉은, “그래도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강의가 어렵다며 불만하고 있을 테냐?”는 도전입니다.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뭐 어렵다고?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뭐 이런 질책이 아닐까요?
육에 속함. 예수님의 강의는 정말 어려웠을까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고 예수님께서 진단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진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63절).
제자들이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고, 볼 수도 있었으며,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볼 수만 있었다면 하고 말입니다.
한 번은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눅 11:27).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낳고, 보고, 길렀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꾸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사람들의 허(虛)를 찌르는 데는 정말이지 달통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몰랐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 다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3:6).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 때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7).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 그렇게 고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침례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며,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요 은혜의 산물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이들이 아직 어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여전히 육에 속해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경>은 그저 윤리․도덕경이나 삶의 지침서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내지는 마음의 안식이나 위로를 얻는 장소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내 연구실에 ‘베트남’에서 온 ‘손롱’이라는 유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요즘 성경공부를 통해서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수시로 나에게 질문을 가지고 옵니다. 한 번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도시 곳곳에 불교 사원이 있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때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들 사원에 가서 빌거나 또는 승려들의 조언을 들음으로써 해결을 받곤 했는데, 여기서는 어디로 가면 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에 가면 된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면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교회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네가 곧 교회이고 성전이기 때문이다. 네가 성전이라는 말은 네 속에 성령이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네는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네. ‘니고데모’처럼 말일세.”
이제 그도 <니고데모 이야기>를 성경공부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실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시라도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다는 기대와 소망 가운데, 그를 우리교회로 인도해 올 작정입니다. 우리와 함께 공동체 삶을 통해서 그가 거듭나고, 자라고, 지도자로 성숙하게 하고 싶습니다.
어둠을 사랑함. 제자들이 예수님의 강론을 어려워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듣고 싶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 ‘요한’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요한’ 화자는 마치 사람들이 바퀴벌레와 같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바퀴벌레의 속성은 빛을 보면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둠이 좋고 더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진단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변호를 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악하지는 않아. 진리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 진리에 우호적이지만 다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할 뿐이야.”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요한’ 화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21).
진리에는 중간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부하거나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 살든지, 또는 거부하든지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결코 나를 피해가는 법이 없습니다. 기차 건널목 위에 고장 난 채로 서있는 자동차와 그 안에 갇혀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살기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차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 차가 아까워 그 안에 앉아있겠다고 해서 기차가 나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유기의 예정. 이처럼 선택에는 결과와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닐 때에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이나 “출애굽” 당시 이집트 ‘바로’ 왕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운명과도 같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강의를 어려워했던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이유도 그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된 유기(遺棄)로 인해서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피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임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군거리고 떠나는 많은 제자들과 넓은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의 고백과 헌신을 따르겠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