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5):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8-12약 11분 분량
대제사장 가야바
(요 19:8-12)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 나와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나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에 대하여 예언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예언은 이렇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살리라”(창 16:12).
과연 이 예언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성취가 되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최근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테러전쟁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창세기>의 이 예언을 상기하게 됩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도 혹시 이 예언의 말씀을 그의 유명한 저서 <문명의 충돌>에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국제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분쟁이 문명 간의 충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세계는 여러 문명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가장 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 서구(기독교권)와 이슬람권입니다. 서구는 국제관계에서 그동안 유지해 왔던 강대국으로서의 패권(覇權)을 지키기 위해 정치·경제적 압박을 지속할 것이며, ‘이슬람’권은 이에 대한 반발로 서구와 적대적 위치에 놓일 것이라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문명 충돌의 핵심입니다. 그의 이론에 여러 가지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작금(昨今)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전쟁을 보면서 그의 주장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자유-신성 불가침? 특히 최근 프랑스 잡지사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진이 일단의 ‘무슬림’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것에 전 세계가 격분하고 있습니다. 온 유럽이 테러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고, 온건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 사태를 보도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고 논평하기도 합니다.
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은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잡지사가 이런 만평을 실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동안 수시로 ‘이슬람’ 종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만평과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존경하는 선지자를 그리는 것조차 금기 시 하고 있는 판에 이번에는 그의 나체를 그려 조롱까지 해댔으니, 이 사람들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거의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이들 테러분자들의 만행(蠻行)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언론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언론에서 다루지 못할 주제는 없으며, 그 어떠한 견해도 억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금기(禁忌)도 금기 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같은 주장은 1968년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이미 천명된 바 있는 정신이기도 합니다(참고로 소위 68 프랑스 혁명의 시초는 한 대학에서 남학생도 여학생 기숙사를 함께 쓰도록 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인간의 자유에 어떠한 금기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프란체스코’ 교황의 입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이번 “샤를리 에브도” 사태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누구든 다른 사람이 가진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하며, 조롱이나 경멸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어머니를 모독한다면 나한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카톨릭’이 주류 종교를 이루고 있는 프랑스 인들이 듣기에는 상당히 거북한 말씀입니다.
본인도 이분의 생각에 대체적으로 동조하면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양비론(兩非論)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우선 “어떠한 금기(禁忌)도 금기 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보다 성경적이라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모순적인 주장입니다. 자기 모순적이라 함은 이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은 금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이 않다 함은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라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슬람 종교에서 제한하고 있는 금기 사항들은 어떻습니까? 예컨대, 그 종교의 창시자를 모독해서는 안 됨은 물론 그의 초상까지 그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 말입니다. 적어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이 종교는 그들의 하나님, ‘알라’보다 ‘무함마드’ 선지자를 오히려 더 경외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무슬림’들은 이 금기를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살인을 행하면서도, “알라는 위대하다”를 마치 주문(呪文)처럼 외쳐댑니다.
이들이 말하는 ‘알라’란 결국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그렇다면 이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내 종교에서 금기하고 있는 규례를 누군가 어겼으므로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처단(處斷)한 것이 됩니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반대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처단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이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믿고 있듯이 이방인들과 치르는 모든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불러도 좋은 것일까?
종교와 이념. 이쯤 되면 종교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립니다. 이념이나 사상 말입니다. ‘이슬람’이 아니라 ‘이슬람’ 주의(主義)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비열하고, 교활한 모습까지 띄게 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로 대표되는 예수님 당시 ‘유대’ 주의(Judaism)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금기 조항들을 만들어놓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하여 항상 처단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같은 “유대주의”의 편협함이나 사악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흥미로운 독서 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선교 여행에서 가장 큰 장애가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훼방은 폭력적이며, 은밀하고, 음흉하며, 늘 공범자를 참여시킵니다. 그리고 이들을 매수하거나 없는 사실을 말하게 합니다(참고. 행 4:17; 5:33; 6:11; 9:23; 12:2-3; 13:28, 45, 50; 14:2, 19; 17:5; 18:6, 12; 20:3, 19, 29; 21:27, 31, 35; 22:22; 23:2, 12, 30; 25:2, 7등).
이들 중 최악의 사례는 지금 ‘빌라도’의 관청 앞에서 벌이고 있는 소동일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법정에서 신성모독의 판결을 받았으면 자신들의 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면 될 일을, 굳이 ‘빌라도’의 손을 빌어 처단하고 싶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야바’의 교활함과 비열함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에는 직접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빌라도’를 공범으로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가야바’의 계책을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달라 하였으니”(행 13:28). 이 같은 술책은 ‘사탄’적입니다. 늘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공범자(共犯者)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재판에서 주모자와 공모자의 형량(刑量)이 다릅니다. 당연히 주모자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절하). 이 문장에서 “(넘겨준) 자(oJ, 호)”가 단수형으로 되어있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인물은 ‘가롯 유다’일 것인데, 그는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일과는 무관합니다. 다른 가능성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온 자들입니다(18:28). 이 문장에서 비교의 대상은 ‘빌라도’와 다른 한 개인이라 했으니, 남은 대안으로 대제사장 ‘가야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공회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모든 일의 주모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자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섰으며(11:49-53), 그분에게 신성모독의 혐의를 씌운 일에 대해서도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입니다(막 14:61-64). 그는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재판하는 권한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그 권한을 남용하였으며, 정치적인 사리사욕(私利私慾) 추구를 위하여 예수님에게 백성을 선동(煽動)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씌워 ‘빌라도’에게 넘겨 죽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다 할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사람들은 기독교에도 무수히도 많은 금기 조항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해서는 안 되는 규례들이 많고, 이를 어길 경우 하나님의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신약>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규례나 권고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행(善行)에 대한 보상과 악행(惡行)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 내용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이나 교회를 회피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진리란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 다를까? 도피성(逃避城)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할 곳, 즉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도피처가 아니라, 영원한 도피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religion)란 영어 단어는 “다시”(re-) “잇다”(regare), 즉 “끊긴 것을 다시 이어준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자”라고 합니다. 누가 무엇을 이어준다는 말일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힌트는 이렇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한 도피성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교회 역시 세상을 향한 제사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참고. 롬 15:16). 제사장의 임무는 관계를 맺는 일이지 끊는 것이 아닙니다. ‘가야바’처럼 선동하고, 음해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공모하고, 고발하고, 위증(僞證)하고,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제사장은 결코 관계 맺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령 모독죄. 하지만 <성경>에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어떻습니까?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죄만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 말입니다. 나는 대뜸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의 용서가 무제한적일 리가 없지. 이거 조심해야겠는걸.”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구절로 되돌아가봅시다. 과연 내가 이들 구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 성령이란 말인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하기에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들 질문에 일말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주님께서는 성령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강의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그 강의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바울’ 사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9-11)
우리가 성령님을 “돕는 자” 즉 “보혜사”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인격과 활동을 알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으므로 용서가 불가능하며 그것을 체험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의 이와 같은 도움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과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 아니라, 적극적인 초청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성모독의 죄도 포함됩니다. 누구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론>에서 오직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으로, 오직 그분의 도움에 의해서만,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요 16).
하지만 만일 누군가 성령마저 모독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해결책 같습니다만, 그를 저주하며 참형에 처해야 할까? 그를 상대로 집단 테러라도 가해야 할까?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8-19)
‘가야바’는 <신명기>(32:25)의 이 구절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취사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