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歸去來辭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32-36약 9분 분량
시간과 땅. 우리 누구나 태어날 때 한 아름의 선물을 안고 태어납니다만,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기회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공평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지파 별로 거주지를 공평하게 할당받은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공평하다는 것은 어떤 획일적인 의미의 공평함이 아닙니다. 모든 지파가 똑 같은 면적이나 똑 같은 주변 환경을 지닌 땅을 할당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주사위”를 던져 나타난 결과대로 승복하고 따랐다는 점에서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각 지파의 미래는 처음에 어떤 땅을 처음에 차지했느냐가 아니라, 이후 각자의 땅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공정한 사회였으며 기회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대 점차 이스라엘은 불공정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고, 주인과 노예의 계급이 나타나고, 지파끼리 뺏고 빼앗기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기도 했으며, 나라는 둘로 쪼개진 채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이방족속들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맙니다.
이들 중 ‘가나안’ 지도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지파들은 소위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즉 ‘르우벤’과 ‘갓’과 그리고 ‘므낫세’ 반(半) 지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운명은 그들이 처음 이 땅을 갖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 지파는 주사위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보기에 좋았으므로, 공동체 안이 아니라 공동체 주변에서, 이방 세계에 양다리를 걸친 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에게 ‘요단’ 동편은 “그 땅” 즉 언약의 땅이나 섭리의 땅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임의로 사고 팔 수 있으며,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내 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안식년”이니 “희년”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위기. 이스라엘에게 땅의 관리만큼 중요한 사안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시간 역시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위해서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관리하도록 맡겨두신 것입니다. 내가 그 주인일 수가 없지만, 또한 그 노예로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시간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내가 주인으로 소유하려 할 때, 즉 내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자 할 때,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가 되어버린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시간의 노예로 살아간 결국은 사망이자 죽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영원히 땅에 구속되어 땅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시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마치 공기와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의 문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공기 중의 산소를 들이마시고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내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합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이렇게 할 때만이, 시간의 노예나 주인이 아니라 시간의 관리자 즉 시간의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시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을 맡기셨을까? 재창조(re-creation)의 사역을 위해서입니다. 재창조란 구속 즉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는 데서부터 구출하고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안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시간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놔두거나 우리가 시간을 임의로 사용할 때, 시간은 필경 우리에게 허무와 무의미와 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에 동참할 때 시간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시간은 결국 하나의 위기로 우리에게 와 있다 하겠습니다. 위험과 기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시간.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항상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일정한 속도로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을 반복하고 있는 지구를 연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구의 움직임을 바꾸거나 궤도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시간이 이와 같았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다 못해 ‘유대’ 공회는 성전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들을 충동질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을 앞장 서 주도하고 있습니다(32절). 참고로 이들 두 집단은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결코 한 통속이 될 수 없는 무리들인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데에는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가 된다는 俗說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들 두 적대 세력은 그들 앞에 나타난 새로운 적대세력, 즉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고 이를 제거하는 일에 서로 손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제 곧 제거될 것입니다. 즉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승선(乘船)해 있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그분 스스로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절).
자기를 없애려는 음모(陰謀)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사라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실로 역설적이며 해학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이 예수님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잡아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께서 가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을 떠난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그분께서 가신다는 말은 그들을 내버리시는 것이며, 이는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왜 심판입니까? 그들을 그냥 어둠 가운데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계획대로, 자신들이 정한 삶의 시간표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썩어짐의 종노릇하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1:24)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1: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1:28)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무기력함입니다. 그들은 지금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향해서 일찍이 이렇게 충고한 바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사 55:6).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눅 4:19)를 알지 못했고, 기회가 열려 있을 때, 스스로 그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로 자신을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늦었어!”라며 한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탐구나 연구나 조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언제인지, 언제 나에게 오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理性; reason)으로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를 알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시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 계시, 즉 “은혜의 때”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드러날 뿐입니다. 감추어져 있으며 동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배와 같습니다(마 13:44). 농부는 그 보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을 찾으려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 밭을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을 뿐입니다.
언제, 그리고 누가 그 보배를 그곳에 갖다 놓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고린도 후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농부는 그 보배를 보는 순간 그 가치를 알았을 뿐입니다. 그가 한 일은 집에 돌아가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그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 했을 때, 이들이 보여주었던 오해에는 더 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헬라인들에게 가서 가르칠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사실로 드러나게 될 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몰랐던 그 “은혜의 때”를 헬라인들이 듣고 알아듣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먼저 전파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아이러니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요한’ 화자는 이 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화자 자신의 서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과 교회의 증언, 그분의 표적과 강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대화 등이 총동원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화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유대’ 공회가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잡아 죽일 수 없었던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아무도 “그의 때”와 “그가 가는 곳”에 함께 할 수 없으며, 함께 갈 수 없다는 점이 그 이유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일을 중단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없었으며, 오직 그분 스스로 떠나실 뿐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교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ejxagoravzw, 엑사고라조)(엡 5:16). 여기서 “아끼라”는 동사는 “구속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시간을 구속하라” 즉 “시간을 재창조하라”입니다. 시간을 죽이지 말고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간을 재창조하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우리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도 없고,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으며, 우리를 함부로 없앨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도 온 우주를 향해서 우리와 함께 이렇게 합창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