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생수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37-39약 8분 분량
대학 교수인 나는 우리 대학교 총장님이 보자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갑니다. 상급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나를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흐뭇함 때문입니다. 나는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행여나 무슨 중요한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부 부처 내에서 개각(改閣) 시기가 되어 하마평(下馬評)에 오르내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심정은 더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하루 종일 청와대로부터 전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장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많은 초청을 받습니다. 결혼이나 장례는 말할 것도 없고, 개업이나, 생일잔치, 취임식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초청을 받지 못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심하면 비분강개(悲憤慷慨)하기도 합니다. 나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그처럼 중요한 자리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깝지 않거나, 무슨 이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반대로 가까운 친지나 사업상 필요한 사람의 초청에는 가능한 한 꼭 참석하려 합니다.
물론 어느 자리에나 불청객도 있기 마련입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달려갑니다. 본인의 아들 결혼식에도 그런 사람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당시 총장 후보에 오른 동료 교수님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나하고 특별히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 아니었음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와서는 축의금을 내놓고 갔습니다. 시쳇말로 얼굴도장만 찍고 갔던 것이지요. 단 한 표를 위해서 말입니다.
초막절의 초청. 왕이나 대통령이 자기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아무나 초청하지 않을 것이며, 초청장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그 자리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방에 경호원들이 깔려 불청객을 색출해 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뿐만 아니라, 사업 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식을 완전히 깨어버리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한 임금님이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초청을 거부하는 것으로 부족했음인지 어떤 동네에서는 초청장을 들고 온 왕의 사신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정신 이상자이거나, 아니면 아예 죽으려고 작정을 한 자가 아니라면, 자기들 왕을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하고 모독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오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실화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마 22:1-14). 그러나 이번에는 비유가 아닙니다. 실화이며 하소연에 가까운 초청입니다. ‘유대’인들의 큰 명절 초막절 마지막 날에 왕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서 왕의 백성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37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일종의 비장함이나 강렬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하인들을 보내어 아들의 결혼을 알리던 장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당시 왕은 즐겁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만, 지금 예수님의 심정은 그렇게 한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날이 명절의 마지막 날이라는 점과,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치며” 초청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주 절박하면서도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정은 더욱 절박하고 초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단 위로 뛰어올라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위기를 느껴야 하는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명절을 찾아 모여든 군중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무관심하거나, 또는 적대적입니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모습이 이 장면이 주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복음의 위기가 있다 하겠습니다. 누구나 복음의 초청을 들을 때, 그 동일한 복음을 또 한 번 더 들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순간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늘 내일이 있다든지, 또는 기회는 항상 있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예수께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공개적인 초청은 이날이 사실상 마지막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분의 관심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국한될 것입니다.
위대한 초청.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즉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옮기기 전에, 초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하)
초청의 대상은 “누구든지”입니다. 즉 전 우주적이며 온 인류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였던 ‘유대’인들 만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까지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일본인도 들어야 하며, 중국인도 들어야 하고, 북한 사람들도, 리비아 사람들도, 인도 사람들도, 베트남 사람들도, 그리고 미국사람들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이처럼 광대하고 거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제한적이며 조건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들어보지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37절상).
조금 더 풀어보자면,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초청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모두가 목마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아들 결혼식에 초청장을 보냈을 때,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면 될 것입니다.
혹자는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혹자는 화를 내며 배척하였으며, 혹자는 초청장을 들고 온 사람을 미워하다 못해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왕의 초청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운명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무나, 단절이나, 좌절이나, 실의 속에 살아가면서도 복음에 목말라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지옥의 무시무시함도 판에 박은 종교적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를 조롱하며 경멸합니다. 실은 조롱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조롱하며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허기와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존재의 의미, 내 인생의 목적을 알고 싶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의(義)에 굶주리고 목마른 것은 아닙니까? 무엇인가 내 현재의 모습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불만과 갈증의 원인이 무엇이든 만일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부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시라고 주님은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37절).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이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 후 이 여인에게, 그리고 그녀가 살던 온 동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약속. 위대한 초청 속에 위대한 약속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 여인과 그 동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약속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우물물을 길으러 왔다 뜻하지 않게 그리스도의 생수(生水)를 마신 이방인 여인과는 달리, 초막절 주간 내내 “물의 축제”를 벌이고 있으면서도 “그 생수” 한 방울 마셔보지도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훗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사도 ‘바울’도 이런 교회를 향해서,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기도 합니다(참고. 고전 10:12). 그날 축제에 참석한 절대 다수의 무리는 물이 없어서 마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목말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위대한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와서 마시면 갈증을 해결하고 만족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봅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하).
무슨 말입니까? 생수가 내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내가 단순히 생수에 목을 축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곧 생수의 강 그 자체가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생수가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통해서 다시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처럼 사적(私的)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신 생수는 그 여인을 매개체로 해서 온 동네로 흘러넘쳤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듯이, 생명의 양식은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아 열두 광주리에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6:13).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곧 생수의 근원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마시고 풍족해 질 것이라는 약속이자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하)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먼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고 풍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누어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으니 나의 삶이 풍성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 하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셨습니까?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까?
그리고 생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늘 성령 충만을 받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와서 생수를 마시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