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2): 마리아야, 랍오니!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11-16약 10분 분량
KBS TV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 하나를 꼽으라면, 매주 월요일 저녁 10시에 시작하는 “가요무대”입니다. 이 프로가 2015년 가을, 방영 3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이는 세계 TV 방송 사상 초유의 일로, 단일 프로그램이 그토록 오랜 방송 기록을 세운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이 프로를 애청하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이 프로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방송될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그 프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프로를 그렇게 좋아할까?
이 프로가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품어왔던 그 숱한 그리움을 내대신 노래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을 노래하는 그 많은 노래들 중에서 저 유명한 노래 <동백 아가씨>의 노랫말을 한 번 기억해 보기로 하지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 아가씨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되, 새로운 이름이 동백 아가씨가 된 것이 글쎄 그리움 때문이랍니다.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곁에서 지켜보던 동백나무의 꽃잎마저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아는 <목포의 눈물>에는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이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네,
못 오실 님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눈물
여기 목포의 아가씨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 때 자기 가슴을 도려내어 함께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쳐 한(恨)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요무대>는 사랑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 6ㆍ25 사변 당시 이북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군대 침상에 누워 잠 못 이루는 한 병사가 노래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어릴 적 함께 고향에서 놀던 친구들, 심지어는 가난했던 시절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하숙집 주인에 대한 그리움마저 노래가 되어 흘러나옵니다. 한국의 가요, 특히 트롯토를 우습게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람의 정서요, DNA입니다. 아쉽게도 요즘 노래에는 이런 시(詩)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리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쉬움입니다. 미련이며, 후회이며, 안타까움입니다. 이것이 쌓이면 한(恨)이 됩니다. 우리는 왜 그리워하며 아쉬워합니까? 왜 후회하며, 한탄합니까? 젊었던 시절에는 그리움이 쌓일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희망과 포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그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면 할수록,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을 뿐입니다. 그 때 같이 놀던 그 친구들, 함께 다니던 그 장소들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왜입니까? 바둑처럼 지난 것을 복기(復棋)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인생이 바둑 같다고 합디다만, 복기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바둑과는 전혀 다르다 하겠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총구를 떠난 총탄을 다시 총구 속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려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들을 복구할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말했듯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 여인은 지금 왜 여기서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날도 아닌 부활절 아침에 말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환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점에, “동백 아가씨”를 부르고 있으며,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가슴은 빨갛게 물들었고, 예수님 돌아가실 때 함께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을 부여잡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리움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이 영영 오지 못할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억누르고 마지막 예(禮)를 갖추려고 무덤에 와보니, 그분의 시체마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희망과 환희의 부활절 아침을 그날 ‘막달라 마리아’는 절망과 슬픔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 여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즉 지난 삼년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과, 사도들과, ‘갈릴리’의 여인들 역시 불신과 절망으로 이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사전에 듣지 않았던 것도 아니나,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정작 돌아가셨을 때, 그들 역시 함께 죽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죽어버렸으니, 사실 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들도 한 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이 믿음이 이제는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각자는 생업(生業)을 위해 원래 있던 그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마을로, 그리고 바닷가로. 그러니까 역사상 첫 부활은 믿음이 불신으로,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던 날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여인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불신의 대표적인 사도(師徒)를 꼽으라면 ‘도마’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를 “의심 많은 도마”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의심 많은 자가 아니라 아예 불신자(不信者)였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솔직하며, 고집스럽고,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의 일단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거부하고 불신하는 태도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소망(所望)이 있을 리 없습니다. 소망도 믿음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절망이 깊었으면, 함께 걸어가며 자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인줄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때 가졌던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그가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버렸으니 이제 ‘메시아’에 대한 그 소망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죽고, 소망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왜 여기서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입니까?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울고 있을까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은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사랑을 제일이라 하는지 말이지요. 믿음과 소망은 비록 사라졌을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그리움이 되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의 순애보 ‘막달라 마리아’!
지난 삼일 내내 울고 또 울었건만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두 천사가 그녀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운다고 대답합니다(14절). 이들이 천사인줄도 몰랐던 것이겠지요. 오직 사라진 주님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이들이 누군지 알 겨를도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일까요? 그래서 이 말을 하고 그녀는 몸을 돌이켰는데, 바로 그 순간 동굴 입구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운 그 사람, 애타게 찾던 주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누구인지 이번에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냥 동산지기 인줄로만 알았다고 화자는 전합니다(14절). “왜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렇게 묻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삼일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님이 지금 내 앞에서 서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다 분명 주님의 모습 또한 변해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왜 울고 있으며, 누구를 찾는지. 그런데 ‘마리아’의 대답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몽고메리’(J. B. Montgomery) 목사님은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입니까? ‘반하우스’(Barnhouse) 목사님이 이 여인에 대하여 느낀 그의 감동을 본인의 감정을 섞어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한 남자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다. 삼일 밤낮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면서 울고 또 울어 가슴은 텅 비었을 터인데, 여전히 흘릴 눈물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동굴을 몇 번이나 왕래했을까! 그리고 무려 백 파운드의 침향과 몰약과 함께 세마포에 싸인 그 시체를 마치 깃털 취급하듯 옮기겠다고 요구하고 있다니! 힘센 장정도 혼자서는 옮기기가 어려운 그 무게를 전혀 고려함도 없이 말이다. 이처럼 그녀는 선생님을 사랑했던 것이다. 비록 믿음과 소망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은 아직도 남아있기에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 땅과 하늘을 통 털어 이처럼 위대한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동산지기에게 이 말을 하고서 ‘마리아’는 다시 등을 돌려 동굴 안을 들여다봅니다. 지금 동산지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심정이 아닌 것이지요. 그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동굴 안을 다시 수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부른 것입니다. 이 순간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의 공허와 흑암과 혼돈은 마치 들을 귀라도 가진 인격체인 것처럼,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반응하여 나아옵니다(창 1:2-3). <시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서 이미 단순한 유기물질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닌 그 물질들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사로’를 구성했던 그 원자와 분자들이 마치 먼 시간 여행을 역주행 하듯 공허와 흑암과 혼돈을 헤치고 거슬러서 다시 현실로 살아나옵니다(11:43-44).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야말로 찰나의 지체함도 없이, 그녀는 응답해 옵니다: “랍오니”하고 말입니다. 이 짧은 순간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마리아’ 안에서 태초의 천지창조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믿음과 소망이 다 사라지고, 공허와 흑암과 혼돈으로 가득 찬 ‘마리아’의 영혼이, 창조의 명령을 들은 것입니다: “‘마리아’야 너에게 빛이 있으라.” 그 순간 ‘마리아’는 ‘나사로’가 겪었던 그 일을 겪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오신 것처럼, 그녀 역시 죽음의 동굴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즉 ‘마리아’는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응답, “랍오니” 속에 이 모든 일이 다 녹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부활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 지부터 먼저 묻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요?: “아, 나는 정말 부활하고 싶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단 말이야.” 적어도 후회와 미련으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자라면, 더욱 처절하게 부활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부활이 모두에게 쉽게 믿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의 말대로, 부활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려놓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 없어, 후회와 미련과 그리움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부활은 내가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자 약속입니다. 부활은 내가 그토록 간구하던 그것을 이루어놓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고 싶다는 그 소망 말입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그 소망 말입니다. 이것들은 다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헛된 꿈을 가능한 현실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