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3): 내가 주를 보았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17-18약 12분 분량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는 결국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됩니다. 아이가 철이 들어 사려분별을 할 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산타크로스’가 더 이상 실존의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이제 더 이상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자부심일까? 꿈이나 ‘판타지’를 먹고 사는 철부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 되었다는 자존감일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도, 꿈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바램 인가 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영화들을 보면 이른 바 ‘판타지’ 계열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별들의 전쟁; Star Wars>을 위시해서, <스타 트렉>, <쥬라기 공원>,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인디아나 존스>, <아바타> 등은 비단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열광시켰던 영화들입니다. 특히 <별들의 전쟁>은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시리즈가 끝난 지 이십년이 지나, 다시 새로운 시리즈 제 1편 <별들의 전쟁: 깨어난 포스>가 최근 상영된 바 있는데, 상영 3주 만에 역대 최고의 흥행수입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같은 영화들에 대해서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이들 영화들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겠습니다. 즉 말도 안 되는 공상과 허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믿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어,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과 낭만을 자극하고, 추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산타크로스’처럼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굳이 이들 영화가 비과학적이라 하여 몰아내고 배척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얻게 되는 유익이 과연 무엇일까요? 공상과 상상을 내 마음으로부터 몰아내고 나면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허와 어둠과 혼돈(混沌) 외에 딱히 남는 것이 있을까? 이 모습이 아이가 철이 든 이후의 모습은 아닐까요? 도대체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그 해맑고 순진무구한 웃음, 그 많은 꿈과 희망, 그 많은 공상과 상상을 상실하면서 어른이 되어왔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최근 들어 내가 크게 한 번 마음 놓고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로 가슴 벅차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막막함이나 무기력뿐입니다. 매일 아침기도 시간마다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결심해보지만 작심삼일은커녕 저녁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두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얼마 전 김종필 씨가 구순(九旬) 잔치에서,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풍운아로서 참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그분도 이런 생각일진대, 하물며 나 같은 범인(凡人)이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인생이 정말 살 것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이분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꿈과 비전을 실천하며 살았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 노인이 된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웃음과, 꿈과, 열정과, 공상과, 상상력이 모두 소진되고, 그 자리를 외로움이나 고독, 그리고 적막과 허무와 쓸쓸함 등이 대신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생육하고 번성하던 활기 찬 창조의 날개 짓이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는 시기가 이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날개 짓이 완전히 멈추면 영원한 수면, 즉 반창조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만 남은 시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태야말로 창조의 요람이 되고, 모티브가 될 수 있다고 시인 장석남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촌들인 외로움, 고독, 적막, 허무, 쓸쓸함 등등의 안개와도 같은 이 말들이 어쩌면 우리들에게 창조적인 삶의 에너지를 넣어주는 정신의 대지일지도 모른다. 고독과 적막이 중매(仲媒)한 그 많은 문학이 그렇고, 허무와 쓸쓸함이 중매한 그 많은 음악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 얼마나 성경적인 상상입니까! 이 사람은 지금 태초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여 있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 말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이랬을까요? 몇 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아리마대 요셉’의 동굴을 찾아갔던 것은 선생님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무슨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였던 반응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었습니다(참고. 마 17:22-23; 막 9:30-32; 눅 9:43-45).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시 돌아올 테니 근심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했습니다(참고. 요 14:1-3).
아니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서, 다시 돌아온다고 했는데 왜 근심합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일상의 경험이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일은 공상이고 망상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죽음에 관한 것이지, 부활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가 무슨 신통한 믿음이 있어, 부활을 기대하고 그 동굴을 찾았겠습니까!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적막함과, 허무함과, 쓸쓸함을 안고 그 동굴을 찾아간 것 아닐까요?
새로운 창조, 즉 부활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하고 부르는 ‘마리아’의 대답 속에는 자신의 마음과 가슴으로 드러낼 수 있는 그 모든 사랑과, 믿음과, 기쁨이 녹아 있었겠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양이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참고. 10:3).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마리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관계를 말입니다. “아, 이제 내가 선생님에게 달려가서, 무릎 꿇고, 그분의 발에 폭풍같이 키스하며, 경배하리라”하며 달려가려는데, 아니 이 무슨 실망스러운 말씀입니까!
“나를 붙들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 하였노라”는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참고. 17절상). 그런데 어찌하여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다른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참고. 마 28:9).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 수 없다면, 왜 ‘도마’에게는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참고. 20:27)?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昇天)을 하셨다는 말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해서 아무도 일치되고, 만족할 만 한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가지 설명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를 붙들지 말라”를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육체적 접촉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여기서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을 이제부터는 혈과 육을 지닌 인간 예수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자는 것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맺은 새로운 관계란 영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육신(肉身)의 선생님으로 제한하거나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붙들지 말라”는 충고도 그와 같은 “(육신적 사고에) 머물거나”, 또는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육신의 대가(大家)를 들자면 단연 ‘베드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셨을 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참고. 마 16:21-22). 그리고 “변화 산”에서 초막을 짓고 영체(靈體)로 변화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그곳에서 계속살기를 원했습니다(참고. 마 17:4).
가서 이르라. 이 같은 요구는 당연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하신 예수님을 그렇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육신과 영체가 함께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육신적 사고를 교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참고. 마 17:5). 그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막달라 마리아’에게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17절하).
무엇을 전하라는 것입니까? 무슨 소식입니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소식입니다. 불가능한 소식입니다. 도저히 현실이 될 수 없는 소식입니다.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소식입니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공상이 현실이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당연히 ‘마리아’가 전할 소식은 그 강조점이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새롭게 듣게 될 소식은 “그분이 살아나셔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고 있다”입니다.
‘마리아’가 전할 소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는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17절하). 여기서 형제들은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성령님을 이들에게 보내심으로써,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현실입니다. 화자는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의 서막의 선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예수님의 말씀은 ‘룻’의 결단을 상기시켜줍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며느리가 그 시어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시어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룻’과 신자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선택한 자는 ‘룻’ 자신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삼아주셨겠습니까! 그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단순히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벅찬 이 소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혼자만 아는 비밀로 가슴 속에 묻어두거나, 아니면 떠들고 다니거나 입니다. 우리의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시기도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맹인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이 밝아진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음에도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고 다녔습니다(마 9:30-31). 바로 여기에 창조의 위력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힘 말입니다.
‘마리아’ 역시 너무 좋아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 소식을 안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이와 유사한 일을 겪었을 때 보였던 반응과는 백팔십도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장면은 내가 익히 아는 한 장면과 겹쳐지고 있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수가’ 성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쳐대던 그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페라 “사마리아 여인”은 세 번의 절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번의 절정 모두에서 핵심은 예수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첫 번째 절정은 예수님의 극적인 자기 계시, 즉 “내가 그라”고 밝히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으며(4:26), 두 번째 절정은 환희(歡喜)에 찬 여인의 ‘아리아’ 즉 대중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4: 29절하). 그리고 또 한 번의 절정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수가’ 성 주민들이 관객 즉 온 세상을 향해서 외치는 대 합창입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4: 42). 이 장면은 오페라의 ‘휘날레’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여인의 사랑의 고백에 이어, 극중 등장인물들 모두가 무대에 올라 거대한 환희의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베토벤’의 “song of joy”를 부르는 듯한 장면입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월 호 선장 이 준석 씨를 언급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얼마 전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의 중형을 내렸습니다. 판결의 요지인 즉은 배의 상태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선장이 이를 승객들에게 사전에 알려 대피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건 직무유기를 넘어,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에 의한 살인 행위입니다. 희생자 가족은 물론 우리 모두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판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이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이나, 임박한 종말과 심판에 관한 한, 나는 ‘마리아’이기보다는 이준석 씨에 더 가깝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을 역동적이며, 활기차게, 그리고 풍성하게 해줄 그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 출발점은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을 보았는가?”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