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광야의 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3:13-15약 9분 분량
기독교의 유별남이 무엇입니까? 즉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행하게도 ‘니고데모’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만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만(4, 9절), 예수님의 대답은 五里霧中이었으며, 여전히 그는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같은 질문을 되 뇌이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인가?”
동기는 달랐지만 예수님을 찾은 어느 부자 청년도 처지는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 막 10:17-27).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부르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에게 다짜고짜 십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일러줍니다. 그 청년은 그까짓 것들은 이미 다 지켰노라고 호언장담입니다. 이제는 그가 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는지 짐작이 갑니다.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네가 가진 모든 재산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충고입니다.
그 청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걱정스럽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기들을 향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제자들은 충격 가운데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막 10:27).
왜 이렇게 예수님의 강의는 어렵기만 합니까? ‘니고데모’도, “부자 청년”도,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마저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요즈음에는 형편이 좀 나아졌습니까?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세상의 지식이란 지식은 다 접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넷티즌’들은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현대판 ‘니고데모’나, “부자 청년”이나, “그 제자”들은 없습니까? 지식이나 정보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만 가고,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쉽기만 한데, “거듭나는 법”이나 “천국에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도 덩달아 늘어가고 있을까요? 오히려 영적 문맹율(文盲率)이 더 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련한 ‘니고데모’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13-21 사이의 본문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이상하게 끝이 났지만, 이번에는 화자 자신의 해설과 독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약속. “너는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니고데모’는 거듭나기 위해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적․영적 자산,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을 총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책임 소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과연 이 말씀이 명령처럼 들립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물속에서 숨을 쉬며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무엇입니까? “물안경을 쓰고, 산소 통을 매야 해.” 이것이 명령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내 편에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는 거듭나야 한다.”는 명령이나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니고데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 3:5).
치명적인 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위해서 할 수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를 <민수기>에 등장하는 “광야의 뱀” 이야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지금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페트라’가 있는 ‘에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4-9)
하나님을 원망하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自業自得이라 해야 할 것이나,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처방전이라고 내놓은 것이 한 마디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자에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낫는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된 치료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독이 퍼졌으면 이를 제거할 무슨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온 몸에 퍼진 독만 제거하겠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뱀의 독은 그들의 영혼에 까지 퍼져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거입니다. 영혼의 독, 즉 “죄”라고 하는 맹독(猛毒)을 치료할 처방전은 없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거론할 의도였다면 차라리 그들로 하여금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금식하며, 회개토록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새 삶을 살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함으로써 온 몸에 퍼진 독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뱀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들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조신(操身)하면서 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뱀에게 물려 온 몸에 독이 퍼진 자들이나, 뱀에게 물려 죽은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잘못을 유야무야(有耶無耶)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무슨 말입니까? 이 <전도서>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일상의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돈이 없어 이웃 가게로부터 늘 외상으로 사먹던 한 실업자가 어느 날 가게 주인에게 와서 이제 취직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제대로 돈을 주고 사가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동안 밀린 외상값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가게 주인이 뭐라 하겠습니까? 밀린 돈부터 갚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제대로 된 거래를 해가기 위해서 이 사람은 이전의 빚을 모두 갚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살인자가 법정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앞으로는 절대 살인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를 무죄방면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바르게 살겠으니 이전에 저지른 모든 잘못들은 없었던 일로 해 주십시오.”하고 말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그래, 알았다.”하시면서 지난 모든 일들을 없었던 일로 해 주십니까? <전도서> 기자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죄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지나치는 분이 아닙니다.
이전의 죄이든 현재의 죄이든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장대에 걸린 놋뱀”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놋뱀 아래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기도는 정말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처방 같지만, “광야의 뱀” 모조품이나 기념품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면 어떨까요? 무슨 상징물이나 기념물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만,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사람들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 囚衣를 찾겠다는 광적인 열정은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옷에 무슨 신통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열정적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광야의 뱀” 모조품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거나 예배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제시하신 유일한 처방은 “장대에 걸린 놋뱀”을 그냥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냥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 “놋뱀”을 향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고, “놋뱀”의 형상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닐 필요도 없으며, “놋뱀”이 아닌 다른 처방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지극히 간단명료한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장대에 달린 광야의 놋뱀”은 다른 아닌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 자신” 임을 그려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었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자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시인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 즉 간증과 전도까지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와 삶을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구원에 대해서 공동체 예배 시에 간증하고 고백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고 계신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그렇게 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의 예배 시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초청과 헌신의 시간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구든 만나서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구원”에 대해서 입으로 시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결단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