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예루살렘의 무법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19-24약 10분 분량
대통령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위엄이자, 국격(國格)이며, 권위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든 절대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 나라의 자긍심과 체통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일본 천황을 만날 때 머리를 숙여 인사한 것을 두고 미국 조야(朝野)에서 논란이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사회를 맡은 목사님의 제안으로 참석자 모두가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대통령과 영부인도 단상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청와대 의전(儀典) 팀에서 야단이 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대통령을 무릎 꿇게 했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의전의 관점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여러 사회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아 뜻 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판에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비종교인들의 적개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인들에게 비친 종교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타협과 독선과 오만과 무례함 그 자체일 것입니다. 굳이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종교가 화합과 일치의 중심에 서야 할 텐데 되레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으니 과연 종교의 목적과 기능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릇 어느 사회에서든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집단화 되고 세력화 되면,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하더라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마련인가 봅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는 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조직에 해(害)가 된다 싶으면 협박과 공갈도 서슴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원로 기자가 그의 칼럼에서 기자의 세 가지 터부, 즉 기자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충고인 즉은 기자는 절대 “지역 문제”나 “여성 문제”, 그리고 “종교 문제”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그 신문 불매운동에서부터 대규모 규탄 시위까지 일어나게 될 테니 절대 금기시 하라는 충고였습니다. 획일적이고 단세포적인 우리 사회의 치부를 꼬집고 비웃는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비웃음의 대상에 다른 조직은 몰라도 종교는 결코 들어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만, 슬프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는 이제 함부로 건드려서는 큰일 나는 위협적인 조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대 강 사업”, “고속전철 사업”, “이슬람 채권 법”, “남북문제”, 등등 정부의 웬만한 시책들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종교가 우리 사회의 무법자(無法者)가 되어간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요?
유대교와 그리스도.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종교는 당시 모든 여론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단(異端)이라는 구실로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초막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일반 대중들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3절). 이쯤 되면 종교가 아니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공안당국이나 정보부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독재정권 하의 경찰이나 정보부는 법과 질서 유지라는 본연의 의무보다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불법과 무법의 온상이 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대’ 당국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무법자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죄목(罪目)인 즉은 “안식일 위반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안식일을 위반하셨을까? 우리가 네 <복음서>를 유심히 읽어보아도 그분께서 단 한 번도 ‘유대’인의 명절을 거르시거나,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빠지신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설마 안식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그분은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으며, 따라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다 지켜야 했으며,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율법을 어긴 쪽은 ‘모세’의 자랑스러운 후예들로 자처하는 ‘유대’ 당국이라고 반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려야 할 종교가 살기등등하여 사람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이 얼마나 역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열광은 때로 무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능과 무관심을 감추기 위한 위선으로 활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위선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지금 이들 ‘유대’인처럼 말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그들의 반응은 펄쩍 뛰며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무심한 일반 대중들조차 ‘유대’ 당국과 한 통속이 되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한 통속이 되어 오히려 예수님을 정신 나간 사람 즉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누군가를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 또는 정반대로 “수구 반동”으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단”으로 규정하면 됩니다. 아무튼 이런 행위는 상대방의 주장이나 행동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는 지극히 감정적인 처사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단과 정통의 차이는 숫자상의 차이일 뿐”이라는 냉소(冷笑)가 이해될 법도 합니다.
안식과 창조. 왜 이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질문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도다”(21절).
여기서 “한 가지 일”이란 “단 한 번의 그 일”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일 년 전이었던지 아니면 몇 달 전이었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안식일과 겹쳤던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을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병자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던 그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5:1-9).
그날 이를 목격한 ‘유대’인들은 병이 나아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이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는가하며(5:10), 안식일에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 예수까지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5:16). 종교인의 심리 상태가 이정도 되면 가히 병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8년을 앓다가 나은 사람과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준 의사에게 축하와 감사는커녕 도리어 비난과 박해를 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그들의 모든 사고체계가 이토록 비뚤어지다 못해 고약한 고질병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거룩하고 선한 율법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이렇게 왜곡시켜버린 것일까? 안식일에 기적을 베풀어 병자를 살리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불법행위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안식(또는 휴식)을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레크레이션’ 즉 “재창조”(recreation)라고 말합니다. 이는 얼마나 성경적인 생각입니까! 안식이 항상 창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안식일과 관련해서 네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성”(성취); “쉼”(휴식); “축복”; “거룩.”
즉 안식은 창조의 결과이며, 완성이며, 그리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완성된 창조를 관조(觀照)하고 즐기도록 의도된 인간을 위한 축복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포로 된 자가 아니며, 인생의 목적이 끊임없이 땅을 경작하고 일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육체가 바쁘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쉬면 비로소 생각이 많아집니다. 사람은 쉬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구약>의 백성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은 단순히 완성된 창조를 기념하고 회고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반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안식년이 있었고, 희년(禧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원한 안식 즉 재창조(구속)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구약>의 안식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재창조 즉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약>의 이스라엘 즉 교회는 역사를 전혀 다르게 바라봅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가올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래의 안식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이미 성취된 안식을 되돌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기다리며 엿새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안식 속에서 기뻐하며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의 첫 날이 안식일을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일의 예배는 단순한 휴식 이상의 날입니다. 이날에 제자들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였고, 그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축제의 날로 삼았습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새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영원한 안식”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무슨 계명이니 율법이니 하는 것들이 자리할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설사 계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억지로 지키는 것과 자발적으로 지키는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안식과 할례. 그렇다면 안식일에 할례(割禮)를 주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22-24절). ‘유대’인들의 할례 법에 따르면, 난지 팔일 되는 아이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만일 그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랍비’들은 할례의 법이 안식법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논리인 즉은 할례는 언약을 성취하는 일, 즉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므로 안식일의 법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할례는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 가운데에서 가장 은밀하며 생명의 번식과 계승에 가장 중요한 생식기의 표피(表皮)를 잘라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에 정면으로 반(反)하며,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행위입니다. 결론적으로 할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생식기의 일부를 절단(切斷)하라고 하셨을까? 여기에 할례의 신비와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할례는 죽이는 일로서, 계약을 위반하는 자는 그렇게 죽겠다는 각오와 믿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갈라진 새의 시체 사이로 지나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창 17).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위중(危重)하며,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리한 도전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한답시고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생명을 살리는 일도 아닌 죽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합법적이라고 한다면, 같은 안식일에 한 사람 전체를 고치고 살려주는 일은 얼마나 더 합법적이며 칭송받아 마땅한 일인가?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를 장악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안식일 자화상(自畵像)은 어떤 모습입니까?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이고 있습니까? 나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