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무자격 교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14-18약 12분 분량
“초막절”이 시작될 즈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사는 “과연 예수가 그곳에 나타날 것인가?”였습니다. 그런데 명절이 반쯤 지났을 때, 그분은 나타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처음 은밀하게 참석했다는 화자의 설명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성전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공개강좌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대중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중들의 질문이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일까?”에서 “이 사람의 강의는 과연 믿을 만한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5절).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갈릴리’에서만 다니셨던 예수님께서(참고. 1절), 지금 대중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그분의 행동을 헌신이라고 해야 할지, 용기라고 해야 할지, 어리석은 만용(蠻勇)이라고 해야 할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의 신비한 시간표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순종의 결단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결코 그 때를 알 수도 또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일까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대’인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들은 놀라서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드러내놓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만 놓고 볼 때는 예수님이 공인된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따라서 당연히 글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을 가르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로고스’ 즉 “말씀” 그 자체와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세 <공관복음>에서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한 결 같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마 7:29; 막 1:22; 눅 4:22).
그렇습니다. 그분이 가르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며, 기존 질서나 교육 체계에 대한 존경이나 인정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를 우습게 알고 경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심한 불쾌감과 모욕감으로 치를 떨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들이 반발하는 진짜 이유였던 것입니다.
전승 대 계시. 예수님은 과연 이들의 주장대로 무자격 교사인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사범대학을 졸업한 적도, 교사 임용 시험에 응시한 적도, 그리고 교사 자격증도 없습니다. 그분은 마치 무면허 돌팔이 의사와 같습니다. 조리사 자격증 없이 영업하는 식당 주인과 같습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없이 개업하는 변호사와 같습니다. 무면허 대리운전사와 같습니다. 아무런 학위도 없이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의 규범으로나 오늘 우리 사회의 규범에서 보더라도 그분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평가에 대해서 정작 예수님 자신은 그분의 자격과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우리는 이 답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이것입니다: “만일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자격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것과 같은 그런 자격증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일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축적해 온 인문학이나 사회학이나 철학 또는 자연과학 등과 같은 전승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가르쳤다기보다는 드러내 보였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계시”란 그야말로 “드러냄” 일 것인데, 예수께서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세상에서 과부의 심정을 가장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남편의 심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내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한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면 되는 것이겠지요. 화자는 이곳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품 즉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心情), “속마음”, 또는 “진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별도의 자격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계시의 진위.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진위(眞僞) 여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분은 친절하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무슨 말입니까?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위조 화폐를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진짜 화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떤 물건의 무게나 길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공인된 저울이나 잣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수업 시간에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교과서나 논문을 참고하면 됩니다. 나도 설교를 행할 때에 항상 나보다 더 높은 권위를 앞세워 말하고자 애씁니다. <성경>이나, 유명 학자, 또는 언론 및 방송의 보도를 인용하려 합니다. 내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러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가 없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불러내어 심문하고 판단할 법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의 주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외적인 판단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스스로 진실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뜻을 기꺼이 행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분께 순종함으로써만이 예수님의 주장을 시험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그 가르침이 하나님께로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일찍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6:29). 이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공인된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소 간접적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유용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의도나 동기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은 스스로의 영광이 아니라, 보내신 자 즉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 말씀은 가르치는 자의 동기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만일 누구든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가르치는 자라면, 그가 얻고자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명성입니다. 대가 이런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책이나 논문을 쓰거나, 정당이나 학파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그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슨 예수 조직이나, 단체나, 기관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을까?” 이 질문은 <요한복음>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내 학생 중의 한 사람이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의 여러 본문으로부터 대답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본문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의 위기.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을 믿고 행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시 수도 서울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말만 믿고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죽음을 맞게 된 시민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피해를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나중에 낭패를 보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우리의 모든 지적, 영적 안전장치를 내던져버리고 무조건 예수님께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너무 위험천만한 주장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환논리(循環論理)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와 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1:39).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나다니엘’의 질문에 예수님을 먼저 만났던 ‘빌립’도 그가 체험한 바대로 “와 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1:46). 이곳에 등장하는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며, 그들은 오히려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ㅡ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계시의 전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와 보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중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 또한 우리 심중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심중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했으며, 그 계시가 올바른 것임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와 계시. <성경>은 우리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이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복음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던가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입니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이 가는 내용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영생극락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갈 수 있는 지에 관해서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 즉 교회를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만이 계시를 가르칠 자격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사의 자격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교회에서 아무나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무나 설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렇다!”입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전제를 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교사 자격증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여기서 몇 가지 나름대로의 성경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첫째, 그는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대해서야 이론(異論)이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흥미롭게 전해야 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흥미와 관심을 촉발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분히 교수 방법이나 기술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똑 같은 식재료(食材料)를 가지고서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집니다. 오죽했으면 음식 맛은 손끝에서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식재료가 처음부터 썩 좋은 것이 아닐 때에는 요리사의 손은 더욱 중요합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똑 같은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순전히 전하는 사람의 기술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복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맛없는 음식이거든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한 소식으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음식은 살리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리기 위한 복음으로 죽이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제반 교육이나 훈련에 만사 제치고 참여해야 합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훌륭한 교사의 자질이나 은사는 바로 이와 같은 첫 단계에서부터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은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입니다만, 예수 믿은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서툴거나 관심이 없다면 나에게는 교사의 은사가 없다고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은 딴 일을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찬양 인도도?
둘째, 그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고 전하고 싶은 열정 말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이 열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단순히 한 유대인 남자에 불과했습니다(참고. 4:9). 그러나 점차 그분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한 남자에서 선생으로, 선생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 곧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여인은 미쳐버렸습니다. 물동이 내던지고 마을로 내달아 온 동네 사람들, 그 동안 자기를 경멸했던 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인은 불을 삼켰고, 그 불을 세상을 향해서 내뿜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신이 들린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감추고 숨기는 짓이야말로 더 요상하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도 기적이지만, 뜨거운 불을 차가운 얼음으로 바꾸는 일도 그에 못지 않는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지금 그 기적을 행하고 있는 장본인은 아닌가요?
셋째, 마지막으로 또 다른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최소한 신학교는 졸업은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리고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공인된 신학교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문 교육 기관이 하릴 없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형편으로 신학교를 다니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람이 속한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를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강조해 왔듯이 교회의 리더십은 교단이나, 지방회나, 총회가 아니라 교회 회중들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중이 인정하는 자격증이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다른 교단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가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회중교회를 지향하는 침례 교단에서만큼은 이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미국 남침례회에서는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