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엇갈리는 평가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10-13약 9분 분량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과연 예수님이 그곳에 올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를 찾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화자는 지난 에피소드에서 아예 대놓고 그들의 불신과 무지를 고발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단순히 고발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일까요? 이들 형제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시니라”(10절)는 설명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기법으로 볼 때, 화자의 이러한 설명은 분명 역설이며 조롱과 해학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명절에 참석은 했으되 형제들과 함께 가지 않았고, 자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참석이 아니라 은밀하게 혼자 참석했다는 것이지요. 동생들의 요청을 정면으로 묵살한 것이며, 우습게 여긴 행동이었습니다. 화자가 진정 의도하고 있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화자의 고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유대 당국자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불고 싶은 마음이 동생들의 동기였다면, ‘유대’ 당국자들은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무리의 행동 방식은 결국 같은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등에 올라앉아 함께 명성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나, 예수를 일찌감치 제거하여 자신의 명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나 결국은 한 통속, 즉 이기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들 두 무리는 함께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군상(群像)이라 하겠습니다. 형님과 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가 진정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동생들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미 와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찾아다니고 있는 당국자들 역시 어두움 가운데 있기는 매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화자의 조롱과 해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이들 뿐이겠습니까? 화자의 고발은 계속됩니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서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주저하는 소심하고 겁 많은 종교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 중 혹자는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12절). 하지만 이와 같은 평가는 자기들끼리 있을 때뿐이지 드러내놓고 그를 칭찬하거나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13절). 화자는 이처럼 심약한 종교인들도 아울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소심한 종교인에 속하는 자는 아닌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아예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침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비위(脾胃)에 맞추어 예수님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부당한 평가. 아마 예수님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가장 잘못되었거나, 전적으로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평가가 있다면, 그분을 “좋은 사람”(good man)으로 부르는 것입니다(12절). 과연 그분은 선하고 좋은 사람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에 대해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그를 “선한 선생”으로 불렀다가 오히려 핀잔만 들었습니다:
“네가 어찌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마 19:16-30; 막 10:17; 눅 18:18-30).
그리고 그분의 언행(言行)을 미루어 평가해 보아도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언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끝마다 자기 이야기나 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을 선하다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물론 그분이 그렇게 하실 때마다 항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예컨대, 그분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주 특별한 호칭, 즉 ‘아바’(!Abba)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아빠”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아주 친숙하게 부르는 단어인데,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곧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8:15).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중심적”인 발언은 <요한복음>에서 유별나게 일곱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ejgw...eijmi) 선언, 즉 “나는...이다”(I AM)라는 자기선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등등. “선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런 주장을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이 주로 자신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은 즐거워하다가 기뻐하였느니라”(8:56);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리고 자신의 공생애 초기에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 본문(61:1-2)을 두고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사야> 본문은 이렇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이사야서>조차도 결국 예수님 자신에 관한 예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그분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할 수 있었고, 제자들을 세상을 향한 전도자로 파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을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저지르는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루이스’(C. S. Lewis)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우리는 타인이 나에게 대해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뉘우치며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해줄 권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그가 내 물건을 훔쳤다든지, 내 욕을 하고 다녔다든지 등에 대해서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그래요. 괜찮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줄 권리가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까지 내가 용서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말도 안 되는 월권행위인 것입니다. 예컨대, 서 집사님이 나 집사님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내가 서 집사님을 용서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자기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죄까지 나서서 용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자를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한 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의 지붕을 뜯고 한 중풍 병자를 달아 내리자 그 병자를 보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또 한 번은 한 여인이 예수님이 머무는 집에 들어와 눈물을 흘리다 예수님 발에 떨어지자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주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 내가 이런 일을 지켜본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당연히 분노하고 어처구니 없어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 7:49).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자신을 늘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다녔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공연히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사회적 소요(騷擾)나 분란을 일으키는 자였지, 결코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타당한 평가. 오히려 예수님에 가장 그럴 듯한 평가는 그를 “미혹하는 자”로 부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로 규정하는 일일 것입니다(12절). 즉 그가 미쳤거나 또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본문에서 일부 무리가 평가하듯, “귀신들린 자”일 것입니다(20절).
나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날에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문해 봄으로써 이들 평가들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대망상증”이나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대합니까? 굳이 정신과 병동에 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널려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대할 때 처음 한 두 번은 이해하고 용납하려 합니다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피곤해지고 짜증이 납니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이들을 정상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무시작전으로 돌입합니다. 그들을 피하고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를 대적해서 이기려 한다든지, 그것도 분에 차지 않아 그를 잡아 죽이려 한다든지 하는 일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괜히 그랬다가 나까지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 특히 ‘유대’ 당국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를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반증입니다. 즉 그분을 미치기는커녕 지극히 정상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분의 강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권위와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절제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속이는 자”라는 평가는 어떻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잠시 속이기는 쉽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잠시 속이기도 쉽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을 수천 년 동안 일관되게 속이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이 정말 사기꾼이라면 그는 진정 모든 인류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기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믿고 따랐던 자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 세계의 잡다한 세계관들에 맞서 수천 년 동안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신봉해 온 “유일신론”자들입니다. 이들조차 예수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유일신 사상을 저버릴 정도였으니 속아도 이만저만 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는 그분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나에게 그분은 누구입니까? 내 모든 것을 다 걸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침묵입니까? 침묵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평가절하 하는 일은 없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