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계시의 결과(2)-너희도 가려느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67-71약 8분 분량
<성경>은 어떤 점에서 독특한가? <신약>으로부터 두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디모데후서>가 선언하고 있는 바는 <성경>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성경>이 단순한 책이나 죽어있는 “글”(즉 문자)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서막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말씀”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위로나 안식,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히브리서>의 말대로, 읽는 이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쾌하며, 또 두려워지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들을 수시로 만납니다. 조용히 쉬고 싶은 데 불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웃이 나를 짜증나게 합니다.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억지로 내 숟가락에 얹어주는 아내 때문에 아주 불편하고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어릴 적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부모님 때문에 화나고 짜증났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겠다고 해 놓고서 도망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한 농부의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이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을 때마다 늘 “예”하고 대답은 합니다만, 실은 한 번도 지시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참고. 마 21:28-32).
<성경>도 그런 점에서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대부분의 청중들과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리고 불평하며 그 자리를 떠난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처음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몰려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한 결 같은 반응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어려웠단 말인가? 우리는 압니다. 왜 그들이 떠났는지.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합당치 못한 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요? 눈이 뒤집히는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었고, 그 위에다 긴 설명과 해설까지 덧붙여주었음에도 한사코 떠나는 자를 무슨 수로 도울 수 있겠으며,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일까? 이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일관되어 보입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신 것처럼 보입니다. 작은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했을 때, 아버지가 그의 안전을 염려하기보다는 그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서 요구대로 들어준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눅 15:11-12). 왜 그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집에 눌러 앉혀두지 않았을까? 우리의 묵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누가복음>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기에 충분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57-62)
여기서 예수님의 태도는 심술궂으며, 일관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일관되기는커녕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왜 자신을 따르겠다는 자에게 칭찬과 격려는 고사하고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따르기는 하겠으나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고 뒤따라가겠다는 요청을 왜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가족에게 작별 인사할 틈조차 줄 수 없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이러한 태도나 자세는 모두 “합당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기드온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무리가 ‘기드온’을 따라나섰습니다만, 이들 중 삼백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합당치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떤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일까요? 우리는 알지 못하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자신의 강의를 “어렵다”며 떠나가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말리지 않았던 것도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도 성공에 이르는 길이 이와 같지 않을까?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차이를 아는 것 말입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된 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합당한 질문. 이런 예수님께서 태도를 바꾸어 남아있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 질문은 단순히 합당한 질문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내 말에 동의하느냐?”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소연에 가깝게 들립니다: “너희들은 떠나지 않겠지?” 하지만 이 질문은 강의가 실패로 끝났음을 시인하는 예수님의 자조(自嘲)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초청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를 가려내기 위한 초청인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는 “모두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초청이 필요한 것입니다. 초청이 없다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은 자 중에는 ‘베드로’가 있었는가 하면, ‘가롯 유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반응. 그러므로 누구든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영어 단어에서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ibility)은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실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핵심 어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미성년자나 금치산자(禁治産者)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자들로서, 이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아무런 권리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이들을 정상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참고로 우리 사회는 짐승들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금치산자나, 미성년자나, 짐승이 아닐진대, 내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져야할 책임 중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면 응답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응답이 즉각적이며, 공개적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응답처럼 말입니다.
이 장면은 얼마나 극적인지 모르겠습니다. 훗날 그가 보여줄 또 따른 모습, 즉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모습만큼이나 극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베드로’의 고백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즉흥적이며 감상적인 고백이나 헌신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세 가지 위대한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첫째, 예수님 외는 쫓아 따를 만 한 한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보았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예수에 버금가는 그 어떤 사람도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영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분과의 만남을 계속할수록 확대되고 증가되었다는 데에 대한 확신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을 믿어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에만 국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피안의 세계 즉 하나님에게 속한 저 세상에서 온 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가장 가슴이 찔렸을 텐데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남은 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아무런 미동(微動)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마귀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날 그 자리가 바늘방석과도 같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불편함을 참고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설교의 초청에 대해서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왔다면, 교회는 벌써 ‘가롯 유다’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침묵함으로써,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배신의 싹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담배를 정말 끊기를 원한다면, 끊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