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의 떡(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36-40약 11분 분량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는 금언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면, 교회는 이 떡을 먹음으로써 건강하게 자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가 이 떡을 제대로 먹지 못했거나, 또는 먹었으되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교회는 병이 들거나 무기력해 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무기력증에 걸려있는 수 없이 많은 교회나 교인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생동감이 넘쳐나며,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습니까? 먹는 음식이 우리교회 체질이나 수준에 맞으며, 먹은 음식은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른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어른이 유아 용 분유를 먹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의(36-40절)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마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가장 어려운 본문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교리문답 책(敎理問答冊)도 아니고, 따라서 <성경>의 특정 한두 구절을 가지고 어떤 신조(信條)나 교리(敎理)를 세울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강론이 포함하고 있는 본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운 교리들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리란 오늘날 대부분의 “개혁 교회”(Reformed Church)가 신봉하고 있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강령은 영어의 첫 글자들을 따서 흔히 ‘TULIP’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물론 “칼빈의 5대 강령”이 “칼빈주의”의 전부도 아니며, “칼빈주의”와는 대척점(對蹠點)에는 “아르미안 주의”로 부르는 전혀 상반되는 신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리라 사료됩니다.
다만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이 상당 부분 “칼빈의 5대 강령”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입니다.
전적 타락(全的墮落). 그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타락에 관한 것으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 여기서 무능하다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선언과 그 선언으로부터 어떤 주장이나 신조를 이끌어내는 문제는 분명 별개의 것입니다만, 우선 이 첫 번째 강령의 주장, 즉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본문은 이곳에서보다는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 세 절은 우선 타락의 문제가 어느 특정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함께”;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타락의 영역은 전 포괄적이며 입체적이라고 말합니다: (1) 윤리․도덕적 타락-“의인은 없나니”; (2) 지적(知的) 타락-“깨닫는 자도 없고”; (3) 의지(意志)의 타락-“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과연 이런 상태를 전적 타락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개선을 위한 실 날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제 전 인류가 아닌 한 개인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3-17)
정말 절망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각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느 하나 온전한 구석이라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상태를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고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지적으로 그대로 두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개선(改善)의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로마서>를 주목해 봅시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8)
바로 여기에 첫 번째 강령의 또 다른 주장, 즉 인간의 무능에 대한 근거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며, 설령 안다 해도 그것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도 같은 주장을 펼치고 계시는 것일까? 무리를 향한 그분의 질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36절).
무리가 기적을 보았으나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 선택. 이처럼 믿음이 인간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에게로 나아올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5대 강령”의 두 번째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상);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상).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우리의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主權的 選擇)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29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관한 선언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17장 여러 곳에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동일한 내용을 엿들을 수 있습니다: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 6, 9, 24)
하나님께서 언제 이 사람들을 선택해서 예수님에게 건네주셨을까? <에베소서>는 그 일이 창세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상)
이것이 선택의 교리입니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것은 처음부터 의도되고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오늘 그리스도 안에 나와 여러분이 있고 우리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밖에서 행하신 일이므로,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이점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즉 우리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담보되는 곳입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실패나 돌이킴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한 속죄론. 하지만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유기(遺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점을 명시적으로 강조하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분의 말씀 속에 이점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상);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상). 이 말씀의 이면(裏面)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요 10:26);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다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선택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5대 강령”의 세 번째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유기가 적극적인 행위였는지 아니면 선택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렇게 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의 선언입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4-16, 18)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며, 제한적이라고 했으니 그것이 무자비하거나 맹목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선택과 관련해서 여기서 인용한 <에베소서>나 <로마서>의 두 본문에서 배경음악처럼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는 것은 “은혜”와, “선물”과, 그리고 “긍휼”입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으며, 그야말로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대 강령”의 네 번째 주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인간의 의지나 선택을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인간을 마치 아무 생명도 없는 한낱 인형이나 기계 다루듯 합니다. <에베소서>도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엡 2:1).
하지만 우리가 이 강령의 첫 번째 주장, 즉 “전적 타락”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 은혜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인형이나 기계가 무슨 의지(意志)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어떻게 내 인생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활동하고 있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나는 그분의 은혜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억누르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은혜를 억누르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톰슨’(F. Thompson)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천국의 사냥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울음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 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감으로...
성도의 견인. 이제 우리는 다음 세 절에서 강령의 마지막 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관한 주장입니다.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38-40)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창세 이전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처음부터 영원한 선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즉 부활과 함께 누리게 될 생명과 지금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 서로 다르다거나, 상충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며, 앞으로 올 것이라”는 점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5대 강령”은 많은 논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하는 바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관한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그 의도에 따라 이 강령을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