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역자와 동역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4약 8분 분량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님이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분은 결코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되지도 않을 일, 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사람들의 선심을 사거나 미혹시키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그를 쫒아 다녔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를 찾아다녔는데, 예수께서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상). 예수님은 이처럼 찬물 끼얹는 데는 도사(道士)입니다(참고. 눅 9:57-62).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하나의 “표적” 즉 통로인 것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더 큰 오해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들이 해야 하는 그 무엇 즉 과업으로 오해했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바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는 개개 피조물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광대이거나 배우일 것입니다. 조연이 주연의 역할을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남편이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아내가 가장이 되고자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훈계할 수 없고, 학생이 선생을 인도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물며 감히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이 맹인을 앞에 두고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그 일이란 과연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그것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정열과 시간과 그리고 돈을 투자합니다. 요즈음 대학생들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쌓기 위해서 휴학하고 해외 연수에 나서는 것도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나무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펙’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어의 ‘specification’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즉 “(특허) 명세서(明細書)” 또는 전문 분야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일”도 그와 같습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하고자 하는 일도, 누구나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특별한 명세를 지닌 일, 즉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라고 명시(明示)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공생애”(public ministry)일 텐데, 요약하자면 “치유”(治癒)와 “축사”(逐邪) 그리고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책임감, 결의, 열정, 그리고 헌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 것이지요. 사실 모든 일에 있어 이와 같은 덕목(德目)이 없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요리를 할 때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나머지 한 손만으로 대충대충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요리에 흥미가 없거나, 또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거나 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손끝에서 맛있는 요리가 탄생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음식 맛이 손끝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훌륭한 선생은 대개 배우기를 즐겨하는 훌륭한 학생입니다. 나이 열둘에 성전에 머물며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묻고 하는 예수님을 보고 그 부모가 왜 집으로 따라오지 않고 성전에 그냥 머물러 있었느냐고 책망하자, 아들은 오히려 그 부모를 책망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성전에서 배우는 일을 그가 “해야 일”로 여겼다는 반증입니다.
깨달음은 배움에서 오는 법, 어린 시절부터 그분은 자신의 소명을 주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훗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
그 대상이 어디 사는 누구든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여리고’의 외로운 ‘삭개오’라 해서 예외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분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앉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사마리아’의 한 고독한 여인은 어떻습니까? ‘요한’ 화자는 이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고하듯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서 자신이 직접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된 양들로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 10:16).
하지만 헌신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도 들고, 돈도 써야 하며, 재능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헌신에는 이보다 훨씬 큰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의 목숨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이마저도 거쳐야 할 일로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기왕에 하는 일이라면 억지로 하기보다는, 이처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훨씬 유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뜻을 당연히 존중하고 받들어야겠지요. 그래야 보는 아버지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독생자”란 아버지의 흉금, 진심, 또는 가슴이란 뜻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중 또한 꿰뚫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책임과 사명만으로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히 4:15). 예수께서 “해야겠다”고 하신 이유는 그 일이 자기 아버지의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만이 필요의 전부가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 즉 ‘헤세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동업으로의 초청.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해야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 이 얼마나 놀라운 제안입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함께 일할 동업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대개 동업은 어딘가 부족하고 아쉬운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기 마련입니다. 자금이나 기술 모두를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은 남과 동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은 나누고 싶어 해도 부귀영화는 혼자 가지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습니까!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빚보증을 서지 말 것. 둘째 돈을 꾸어주지 말 것. 셋째, 동업을 하지 말 것.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그분의 친구들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연약하고, 무지하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제자들에게 동업을 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너무 순진하신 것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자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일까(참고. 2:24-25)? 아니면 혼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기가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했음일까? 다 틀렸습니다. 도대체 소경이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만일 이와 같은 동업 제의를 받는다면 심정이 어떠할까? 대박이구나 하며 눈이 번쩍 뜨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거 내가 잘못 걸렸구나.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에게”하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동업을 요청받았을 때, 다른 사람은 어쩌고 나한테만 그런 제안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참고. 21:21). 이럴 줄을 아셨던지 예수님은 동업 제안을 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묻고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 16, 17). 그리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21:15, 16, 17).
사랑은 행동하는 것만큼 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말이나, 느낌이나, 각오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필요로 할 때, 필요로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 “내가 여기 있소”라고 말해야 합니다. 제 아내의 불만은 내가 필요해서 찾을 때마다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곁에 있어도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보자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어도 아예 포기하고 잘 찾지를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집에 자전거가 한 대 있는데, 탈 때마다 덜커덩거려 그냥 거실에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내 소유이긴 하나 별로 가치 없는 재산 목록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든지 버려도 하등 아깝지 않은 그런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행여 주님에게 내가 이런 소유가 아닌지 자문(自問)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찾을 때마다 내가 없다면, 그분이 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내가 듣지 못하고 딴 짓하고 있다면, 그러다가 마침 다른 집 문이 열려있어 그곳으로 들어가 버리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혹시 이런 나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합니다. 친구가 찾을 때, 친구가 아쉬울 때, 내가 모른 체 한다면 나는 과연 그의 친구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