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의 떡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30-35약 10분 분량
생명의 양식. 식품 영양학자들이 자주 쓰는 유명한 금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We are what we eat).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올해 초, 내 아내는 의사로부터 “고지혈증(高脂血症)” 진단을 받은 바 있습니다. 나는 이 때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적어도 아침 한 끼는 순수한 야채식으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로부터 약 6 개월 정도가 지난 후 다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았는데, 수치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정말 놀랍고도 즐거운 체험을 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 아침 야채식(野菜食)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먹으며, 또 자라기 위해서 먹는다고들 합니다만, 제 아내에게 있어 먹는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서 무엇을 먹느냐?”가 항상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이는 당뇨를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뇨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인의 식단이 아니라, “당뇨식단”일 것이며, 그것만이 그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세상에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를 찾아온 무리를 향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있었던 그날 오후 이후 밤이 새도록 줄곧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날 낮에는 비록 진수성찬(珍羞盛饌)은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 덕분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공허한 수사(修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제도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은유(隱喩)를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유의 대가(大家)이신 예수님, 그분은 지금 “육체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유는 이것입니다. ‘모세’의 말입니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예수님께서 무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것도 역시 같은 목적에서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이들 무리는,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그들의 선조들처럼, 여전히 배고픈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씀입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 말씀을 먹어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생명의 양식” 즉 그리스도를 먹으라는 말씀이 아니던가요? 그리스도를 먹다니요?
제가 중학교 재학 시절 일입니다. 당시 우리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초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영어 과목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난생 처음 배우는 과목이라 많은 학생들이 힘들어했습니다. 우리말과는 전혀 다른 문법 체계도 그렇거니와 전혀 생소한 단어들을 기억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 중의 하나가 매일 한영사전(韓英辭典) 한 쪽씩을 찢어 그 안에 든 단어들을 다 외운 다음 입안으로 집어삼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성경>을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찢어 먹는 것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우리는 이 강력한 은유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려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전해지던 당시의 상황도 모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온갖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교회가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한 비법(recipe)을 마련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책을 먹어라”는 명령을 받은 이는 사도 ‘요한’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보다 육백여 년 전에 ‘에스겔’도 책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겔 2:8-3:3). 그리고 ‘에스겔’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렘 15:16). <구약>의 이 두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도 <계시록>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온갖 억압과 배척과 환난이 몰려오던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먹고 삽니다. 음식이 인간의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듯이 교회에 영양분을 제공해 줍니다. 교회는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흡수합니다(E Peterson). <요한복음>은 그 위대한 서문(序文)에서 그리스도가 곧 “말씀”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1-5).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4절).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합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말은 살아서 움직이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책을 단순히 읽는 것과 책을 먹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책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어서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독자는 자신이 읽는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E Peterson). 그러므로 책을 먹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더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가에 있습니다. 그 무엇이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쉬운 일인가? 책을 먹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무시해 온 한 가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성경>을 먹고 나서 배앓이를 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그 책을 입에 넣었을 때는 맛이 좋았지만,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배가 아팠습니다(계 10:10). 도대체 왜 배가 아픈 것입니까?
제가 늘 다니는 스포츠센터 근처에 ‘아멘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전도에 열심인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은 매주 번갈아 가며 스포츠센터에 나타나 전도지와 함께 선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해주는 전도지 말씀 중에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적인 문구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전도자의 열성이나 의도를 비난보다는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그래도 그 문구를 혼자 되씹어 보면서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도 문구는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달콤한 맛을 느끼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초신자(初信者)들이 <성경>을 처음 배우면서 갖게 되는 기분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축복과 약속, 위로와 격려, 등은 분명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고 <성경>을 사랑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이 다 자신의 기호(嗜好)에 맞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은 단데 나중에 보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썩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배속에 들어와서 쓰게 된 것입니다. 점차 깨닫게 되는 사실은 그 책이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쓰여 진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만, 순종하기는 더욱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화하기에는 힘든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심각한 소화불량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소화불량에 걸렸을 때, 밥을 삶아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입맛이나 취향에 맞게 조리하거나 취사선택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식으로 그 책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요약하거나 체계화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책을 먹되 가까운 곳에 소화제도 늘 준비해 놓아야만 할 것입니다(E Peterson).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은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큰 곤란에 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어떤 사람의 손에 쥐어주면서 “그것을 먹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동차 열쇠 한 묶음과 자동차 한 대를 어린 아이에게 주면서 “운전을 해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E Peterson). 따라서 <성경>을 먹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그것을 어떻게 먹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야채식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빠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채식이 좋다 해서 모든 야채를 다 날것으로 먹을 수는 없으며, 그럴 경우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간이나 신장(腎臟)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볍게 데치거나 삶아 먹어야 할 야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배추의 경우 정상인이라면 어떻게 먹든 상관없겠습니다만, 이 식품은 ‘칼륨’(K)이 아주 풍부하여 신장이 좋지 못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내의 경우에는 양배추는 반드시 삶아 먹어야 합니다. 도마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 날 것으로 먹는 것보다 살짝 익혀서 오일(oil)에 발라 먹는 것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한 율법학자에게 질문을 던지셨고 그것 때문에 그 학자는 곤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네가 읽는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읽느냐?”였습니다. 즉 “어떻게 먹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화의 끝에 그 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십니다: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즉 “네가 먹은 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만, 먹은 것은 반드시 살아내어야 합니다. 즉 소화를 시켜서 태워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뇨환자에게 있어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운동입니다. “육체의 양식”이나 “영혼의 양식”이 이렇게 닮은 점이 많다는 데에 대해서 새삼스럽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먹을까?”, 그리고 “먹은 것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연기자는 대본을 단순히 읽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연기해 내는 자입니다. 즉 대본을 살아내는 자라는 것입니다. 연기자가 읽는 대본을 연기해 내지 못한다면 그 대본은 그야말로 죽은 텍스트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말이 되어야 할 것이 글로 남아 죽은 상태로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말과 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살리지만 글은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참고. 고후 3:6). 기록된 모든 말, 책이라는 관에 담겨 도서관에 묻혀있는 말들은 모두 죽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책은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덮어버리거나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말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전화로 직접 대화하는 것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적당히 회피하고 싶을 때, 말로 하지 않고 문자를 보내거나 이메일로 대신합니다. 그 점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자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말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세계도 원래 살아있는 음성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도 원래 글이 아니라 말로 자신의 의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었을 때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목소리, 음색, 음조, 주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 분노와 세세한 기분들, 느낌, 등. 즉 생생하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박물관에 진열된 박제품이나 화석처럼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독서라는 것도, 심지어 그것이 <성경>의 경우라 해도 마치 공동묘지 비석에 기록된 글씨의 탁본을 뜨는 정도의 경건한 산책에 불과합니다. 기록된 모든 말, 책이라는 관(棺)에 담겨 도서관에 묻혀있는 말들은 모두 죽은 말입니다.
하지만 ‘피터슨’ 목사님은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죽은 말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서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靈)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독서”(lectio divina)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영적독서에 관해서는 많은 책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피터슨’ 목사님의 <이 책을 먹어라>을 읽어보시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행한 설교의 많은 부분도 실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발췌했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자라갑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