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과
제 4과: 리더십의 교훈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12-18약 25분 분량
리더십의 교훈
(1:12-18)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7-18절)
중국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마, 중국인의 자녀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태어났건, 그리고 어디서 살고 있건 상관없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점 우리 역시 뒤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정하고 있습니다. 북한 영토도 대한민국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대한민국 백성입니다. 그 흔한 말로 “우리는 결코 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쉐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니”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곧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곧 열두 지파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들이 약속의 땅밖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백성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세 번째 단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이야기가 본래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야기의 주제가 갑자기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관한 이야기로 초점을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화자의 의도는 무엇이며, 그 의도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신학적 주제와 일련의 모티브들이 무엇인지 발견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서>에서 “성령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교회도 하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소위 <셀 교회 목장>의 이상과 정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좋은 사례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은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락의 내용입니다. 앞에서 본 바처럼 제 1장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진군명령(1-9절)
2. 명령체계의 확립(10-11절)
3. 여호수아의 진군명령(12-18절)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두 곳 모두에서 진군명령을 내리고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은 그 자체적으로 별개의 독립된 단락으로 별도 취급할 수 있으며, 내용상 세 번째 단락이 아닌 제 3장으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독려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고, 그 후속 조치가 다음 단락이 아닌 3장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하여 살게 될 두 지파 반을 항하여 정복 전쟁에 동참하여 나머지 형제들을 도우라는 명령과, 이들의 순종과 각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명령(12-15절)
(2) 반응(16-18절)
이어지는 제 2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고 있는데, 내용인 즉은 <스파이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여호수아서>의 자료나 편집은 <신명기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제 1장은 “신명기 역사관”의 축소판 내지는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단락의 신학적 결론 역시 <신명기>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문학적 양식에 있어서도 “신학화 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기자”들에게는 엄격한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역사는 없고, 다만 “신학화 된 역사”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 중에는 <신명기> 특유의 양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자료들 역시 반복해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여러 인용문들의 집합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편집자들은 단순한 필경사들이 아니라 창조적 신학자들로서, 인용문들을 있는 그대로 느슨하게 연결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식을 갖춘 채 본문 속에 삽입하고 있습니다.
양식과 배경. ‘바르트’(C. Barth)는 이런 양식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대답” 또는 “준비 완료 선언”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Barth는 본문과 <구약>의 다른 본문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대답”이라는 양식으로 규정할 만 한 일련의 요소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참고 구절: 출 19:7-8; 출 24:1-7; 스10:10-12; 느 8:2-6; 신 27:11-26; 왕상 18:17-40; 수 24:14-28; 왕하 23:1-3; 민 32:28-32; 신 31:9-13).
이들 양식이 반영하고 있는 배경은 일단의 회중(會衆)이 하나님 앞에서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는 제의(祭儀)나 축제 등일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절기 제사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 이 제의를 통해서 백성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겠다는 각오나 결의를 다지며, 맹세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지도자는 하나님과 회중 사이의 중재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결의하고 있는 바는 예컨대 “전쟁 준비 완료”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양식은 주전 7 세기경에 일단의 “신명기 학파”의 설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C. Barth). 물론 이러한 견해는 나름대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신명기 학파”의 활동 시기를 그토록 늦게 잡을 수 없다는 엇갈린 주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문제와 관련해서
제의란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며, 맹세의 서약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신명기>의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 즉 ‘모세’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양식은 이곳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관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충성 맹세를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충성서약이 절대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에게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야 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위대한 확신과 용기를 겸비한 자라야 할 것입니다. 이 두 조건 모두 실은 ‘모세’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여호수아’가 상대하고 있는 무리는 전체 이스라엘이 아니라, 정복 전쟁 이후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 반입니다. 이들 두 지파 반에 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는 <민수기>와(32장) <신명기>(3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에 관해서 소상히 밝혀줄 역사적 배경이나 전승은 결코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르우벤’과 ‘갓’의 두 지파는 정복 초창기부터 일치감지 이곳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화자가 이들 지파에 관한 전승을 정복 이야기 속으로 끌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서>의 화자는 “신명기 학파”이거나 또는 “사제”들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결속성”에서 그 해답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로서, 당연히 그 모든 책임과 권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참고. 민 32:20-23).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을 향해서 설교하고 있는 내용(12-15절)은 ‘모세’가 이전에 이들 지파들에게 설교한 내용(신 3:18-20)을 거의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다만 두 본문에서 차이가 있는 부분은 달라진 역사적 상황과, <여호수아서> 자체의 각별한 신학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단락은 내용상 이야기의 흐름에서 갑자기 일탈(逸脫)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어지는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확정짓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2절이 이 단락의 배경과 상황을 결정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13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2-13)
그런데 13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은 이중적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이전의 역사적 상황 즉 <신명기>(3장)의 상황과, 또 한편으로 달라진 역사적 상황 즉 <여호수아>의 그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본문 중에 “기억하라”는 요구는 지금 이들 두 지파 반을 향해서 ‘모세’가 이전 세대에 들려주었던 그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모세’의 설교에는 없었던 새로운 표현들을 새롭게 첨가함으로써, 달라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너희 모두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새로운 표현, 즉 “정복과 안식”은 이 단락의 핵심어이기도 한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소개하기 위함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종 모세”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리더십의 권위와 승계”와 관련한 모티브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1:1-9). 달라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주는 표현은 14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1:14)
중요한 변화는 다름 아닌 “땅”입니다. 이 책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이 “땅”을 모두 “성읍”으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15절과 연계해서 고려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신명기>와 흥미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1:15)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신 3:20)
일견 같은 진술로 보입니다만, <신명기>에서의 땅의 소유에 대한 강조점이 개개인에게 있었다면, 이곳 <여호수아서>에서는 그것이 지파의 소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역시 이 책의 모티브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여호수아서>에서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이며, 그 땅도 개개인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새롭게 추가하고 있는 “그들을 도와”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달라진 역사적 상황은 이 단락에서 군사적인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14, 18절).
이어지는 16-17절은 <신명기>보다는 오히려 <민수기>(32장)와 더 가깝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그 내용에 있는 것이지, 기원론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오히려 제의적인 것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8절은 최종 편집자의 손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장은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단락은 그 어조에 있어 신명기적이며,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도 신 3:18-20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달라진 역사적 상황이나 화자 자신의 신학적 관심사에 따라 어휘나 표현에 있어 일련의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이미 언급한 바처럼 본문은 내용상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은 1:1-9 사이에서 요약해 놓은 핵심 주제나 모티브들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1) ‘모세’(13, 14, 15, 17절); (2) “주다”(@t'n, 나탄)(13, 14, 15절상); (3) “땅”($r,a, 에레츠)(13, 14, 15절). 이를 통해서 두 개의 소 단락이 각기 독특하게 강조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경우, 13절은 새로운 주제 “안식”을 소개하고 있고, 14절은 반복해서 군사적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는가 하면, 15절에서는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 16-17절은 백성들의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마지막 18절은 불순종의 대가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 용어 모두 <신명기> 특유의 모티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도자 모세; 그에 대한 순종; 땅. <여호수아>의 역사적 상황은 <신명기>의 그것과 분명히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두고 흐르는 메시지는 동일함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제사가 아니라 전투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며, 최고 지도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순종의 대상도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를 향한 것이라야 합니다.
1. 명령 하달(12-15절)
화자의 관심사는 연합과 일치입니다. 첫 두 절은 그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2-13)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 반(半)에 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는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민 32; 신 3:18-20). 지금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모세’가 이전에 이들에게 한 설교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두 지도자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새로운 용어는 “안식하다”(j'Wn,누아흐)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이 단어가 약속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제전승>에서는 이 단어를 개인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구원”을 뜻하거나(시 116:7; 23:2; 렘 45;3; 욥 3:13, 26; 참고 출 33:14), 또는 하나님이 계시는 “평안한 장소”를 뜻하기도 합니다(시 132:8, 14, 대상 28:2). 그리고 안식일과 관련한 초기의 계명에서는 인간의 안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출 23:12; 신 5:14), <사제전승>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안식(שׁבת, 쉐바트)”으로 재해석하기도 합니다(출 20:11; 창 2:2-4).
<이사야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이 거부했던 “생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28:12). 따라서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를 종말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으며(사 14:3, 7; 11:20; 32:18), 보다 넓게는 “신의 영”을 뜻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민 11:25-26; 왕하 2:15).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일부 <예언서>에서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사 11:2; 63:14; 슥 6:8).
그렇다면 <신명기 전승>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곳에서는 그 의미가 보다 광범위하고 폭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생의 제반 문제로부터 “평강이나 안식”을 뜻하게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쟁이나 적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의 안식을 말합니다(신 3:20; 12:9-10; 25:19). 본문에서 채택하고 있는 의미도 바로 이러한 <신명기 전승>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신 3:20),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식의 궁극적인 성취나 실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안식이 이루어졌다 해서 그것이 영영 불변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가변적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안식을 잃어버리거나 또 회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삼하 7:1, 11; 왕상 5:18; 8:56). 주전 597-586 사이에 있었던 “바벨론 유배”야말로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결과로 안식을 잃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신 28:65). 이처럼 안식을 구원과 연계시키려는 시도는 비단 <신명기 전승>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의 다른 전승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 95:11; 사 63:14; 대상 22:9, 18; 23:25; 대하 14:5; 15:15; 20:30; 느 9:28). 안식은 이스라엘에게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잃어버린 이상이자 또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있든 안식은 구체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적의 압박이나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은 ‘요단’ 동편에 서서 강 건너 편에 펼쳐져 있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힘들었던 지난 세월과, 가나안에 살고 있던 거인들에 대한 기억들에 사로잡힌 채, 이스라엘은 지금 운명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 그들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다시 광야로 되돌아갈 것인가. 대답은 당연히 강을 건너 그 땅을 싸워 빼앗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안식은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여호수아’는 ‘모세’의 이전 설교를 반복함으로써, 동기 부여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4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15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1:14-15)
‘모세’의 설교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이 아니라 안식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식은 그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쟁을 통해서 이길 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충성 맹세(16-18절)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향한 ‘여호수아’의 설교는 ‘모세’의 설교를 회상시키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 대한 충성 맹세입니다:
16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
“모든 이스라엘”의 모티브는 뜨겁고 또한 완벽한 충성 맹세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든...”; “당신이 우리를 어디로 보내든...”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결시킴으로써, 리더십에 관한 모티브롤 보여주고 있습니다. 훗날 <사사기>에서 보듯이 일부 지파는 어려움에 빠진 다른 지파들을 도우러 나서는 일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만(삿 5:16-17), 이 장면에서만큼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따르겠다는 이들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1:18)
즉 불순종의 대가로 죽음의 저주까지 감수하겠다는 결의가 그것입니다. 이곳에서 “불순종하다”(hr;m, 마라)가 의미하는 바는, “반역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신 1:26, 43; 9:23; 삼상 12:14). 이로 미루어 이들 결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장 전체의 또 다른 모티브 “강하고 담대하라”를 수미상관 식으로 처리함으로써, 1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명령: 모세의 약속을 기억하라(12-15절)
이야기는 난데없이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향해서 명령을 내리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하필 이들입니까?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서 <민수기> 32장을 회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원래 ‘요단’ 동편이 아니라 서편에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야셀’과 ‘길르앗’에 도달했을 때 이들 두 지파 반은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민 32:1, 4)
이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에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거하기보다는 많은 양떼와 가축들과 함께 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약 속의 땅 밖에서 살기를 택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이들은 예배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녀들도 또한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기 위해서 특별한 제단을 따로 세워야만 했습니다(수 22:10).
‘위어즈비’(W. Wiersbe) 목사님은 이들을 가리켜 “경계선 신자”라고 합니다. 그는 오늘날 교회에도 이들 “경계선 신자”들은 수없이 많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필경 그리스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유업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이들은 교회 내 지체들과의 교제나, 교회의 힘든 사역에 동참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취미나 생계를 우선적으로 택합니다. 공동체의 관심사나 비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동체나 공동체의 지체를 위한 기도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올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약한 교회의 누룩이 되어 교회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화자의 관심은 바로 이들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위함일까요?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모세’와 맺었던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형제들을 도와 약속의 땅을 정복한 후에야 이 땅에 돌아오겠다는 이전의 약속입니다. 이들의 숫자가 지극히 미미했지만 말입니다. 실제 전쟁에 나간 사람의 수는 40,000명으로서(수 4:13), 기록에 의하면 136,930명이었습니다(민 26:7, 18, 34). 나머지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냥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는 유기체로서, 너와 내가 아니라 단지 우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구원받고 혼자 살아가는 교인을 위한 책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로 일치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구원받고 확신 가운데 혼자서 신나게 살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예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사탄’의 책에는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너희”라는 단어는 실은 “너희 모두”로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무려 열한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일치와 연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원리는 교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안식”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안식은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그 땅을 정복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도 얼마나 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이야말로 교회를 약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리더십과 관련해서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설교는 직전의 지도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이스라엘이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고 있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여호수아’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주제로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과 계획을 담은 새로운 내용의 설교를 새로운 세대에게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것이며,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나 ‘여호수아’를 따르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리더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혼자 사막으로 들어가 오랜 수련을 통해서 갈고 닦은 결과도 아니고, 신학교를 졸업할 때 받는 졸업장도 아닙니다. 적어도 <여호수아서>는 <신명기 전승>을 따라, 지도자의 권위와 자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다.”
2. 반응: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16-18절)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 보였던 반응 그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여호수아’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첫째, 순종하겠다는 헌신과 결단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어디든지 보내십시오. 우리 모두가 가겠습니다.” 지파는 지파의 목적을 따라, 개인은 개인의 비전을 쫓아 흩어져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지파를 향한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일말의 저항감이나 불안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 지도자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 당연히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을 통해서 물어봐야지 어찌 내 선생이나 리더나 목사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누구나 함부로 선생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완벽하고도 진정한 스승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불완전한 리더에게 순종하며,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6:7, 1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사실 현대인들에게 “순종”이라는 단어만큼 혐오감을 일으키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자유와 독립, 자율과 그에 따른 책임 등이 미덕이 되어버린 오늘날 순종은 그야말로 케케묵은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대, 교회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나, 직업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나, 심지어 결혼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의 말에 따르고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교회가 있다면, 필경 이단으로 지목받을 것이 뻔합니다. 특히 순종의 결과로 오히려 이전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빠지게 되었다면 그러한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대개 <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필자가 오래 몸담아 왔고, 관계를 유지해 왔던 교회도 이런 범주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학생은 그를 가르치는 선생이 옳다고 믿을 때 비로소 발전이 있는 법입니다. 특히 도제 관계를 중시하는 직업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여러 유형의 제자들을 가르쳐 보았습니다만, 필자의 권유나 가르침에 순종해 그대로 따라했던 학생들은 지금 나름대로 만족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나보다는 타인이 나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법니다. <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라면, 진정한 목자는 양의 기질을 양 자신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에는 용서와 이해와 인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만, 권면과 질책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는 순종이 최대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지도자를 위한 기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중보의 기도를 해 줄 필요가 없는 지도자란 없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백전노장도 이 백성의 기도를 누구보다 필요로 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세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헌신과 기도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헌신과 결단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간주하겠다고 말합니다(18절상). 약속을 어겼을 때 저주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자기 저주는 “신명기 언약”의 당연한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 장면은 참으로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원의 결의”(桃園의 決意)를 방불케 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나 하나님 앞에서 행한 헌신의 결단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서원을 하지 말라고까지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언약을 파기한 결과의 심각성이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시사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목장 모임에서 경험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모임에서 항상 무엇인가 헌신하고 결단도 해보지만 끝나기가 무섭게 까맣게 잊고 한 주를 지내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이 공동체가 어떤 헌신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각오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경각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나의 결단과 기도 제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매일처럼 기도해 왔습니까?
네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지도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18절하). 이 동일한 위로와 격려는 제 1장 전체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의 경우가 위로부터 온 것이라면(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여호수아’가 백성의 관리들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백성들로부터 ‘여호수아’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그들의 목자를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힘을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눈물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런 것이겠지요: “이리하여, 공동체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약속의 땅을 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책의 제 1장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문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세 번째 단락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단락을 구분하고 이곳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모티브들을 발견하고 주제와 연결시켜 봅시다.
3. 본문을 통해서 <교회 목장>을 위한 이상과 정신을 이끌어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