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과
제 3과: 지휘체계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10-11약 17분 분량
지휘 체계
(1:10-11)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10-11절상)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 출발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편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 저편에 펼쳐진 그 약 속의 땅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40년 내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토록 그 땅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던 그들의 부모 세대도 자신들의 소원대로 결국은 그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다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기대와 두려움 가운데서, 지나간 세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일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강을 건널 것인가 아니면 되돌아 갈 것인가? 건너가자니 기골이 장대한 그 땅 주민들이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신실하신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대하시지 않을까? 이 땅을 우리에게 약속은 하셨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주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아무리 그 땅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은 강요는 될지언정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우리를 이 선택의 기로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인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죽고 없는 이 시점에...”
지금 이스라엘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립니다. 담대하고도 확신에 찬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서 새 역사를 이루어 가야할 운명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가 가장 시급한 우선적인 과제로 수행한 작업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여호수아서> 제 1장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앞 과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진군명령(1-9절)
2. 명령체계의 확립(10-11절)
3. 여호수아의 진군명령(12-18절)
세 개의 단락이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는 명령 체계에 대한 일종의 계통도(系統圖)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통해서 진군 명령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를 거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로,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일사불란하게 전달되고 있는 양상을 한 눈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 한 언어의 유희는 “건너다”(rb'[, 아바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처음 두 단락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 강을 “건너라”고 하셨고(2절),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진중(陣中)을 두루 “다니면서”(문자적으로는 “건너다니면서”)(11절), 백성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강을 “건너라”고 촉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11절).
두 번째 단락을 이루고 있는 두 절(10-11절)은 그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 이곳에 두기에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1장 전체의 주제나 모티브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리더십”과 “순종”이라는 두 주제가 그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1-9절)은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 배경과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곳인데,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진군 명령 속에 잘 드러나고 있음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을 뛰어 넘어, 세 번째 단락(12-18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바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를 향한 ‘여호수아’의 연설로서, 내용인 즉은 첫 번째 단락에서 선언한 신학적 주제를 완성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두 번째 단락(10-11절)이 기능하고 있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이 단락 역시 ‘여호수아’의 연설을 담고 있는데, 그 대상과 연설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백성의 관리(유사)”들, 즉 “이스라엘의 중간 지도자들”이며, 연설의 내용은 그 땅의 정복에 관한 소개입니다. 이 세 단락을 이런 식으로 일별해 보면 리더십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 다시 각 지파의 두령들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두 절은 특별한 신학적인 기능을 하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이 두 절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는 될 수는 없고, 전체 이야기의 한 단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진군 명령의 배경이나 그것을 수행하는 것에 관한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의 배경은 1-2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구체적인 수행에 관한 이야기는 3:2-17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볼 때 두 번째 단락은 오히려 3:2-17의 내용에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10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1:10-11상)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3:2상)
자료와 편집. 이 두 절은 특히 <여호수아> 1장에 대한 자료비평 연구에서 논란의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1장을 <신명기 전승>으로 간주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11절 후반은 그 내용이나 어휘에 있어서 <신명기> 11:31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수 1:11하)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신 11:31)
10절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 “관리”(rfev, 쇼테르)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만(출 5; 민 11:16), <신명기> 특유의 단어입니다. 또한 11절의 “양식”(hd:yx,체다)은 <오경> 전체적으로 등장하는 회수는 세 번에 불과하지만(창 42:25; 45:21; 출 12:39),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 본문은 모두 <야훼 자료>이거나 또는 <엘로힘 자료>로 인정받는 본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여러 책에서도 독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수 9:11; 삿 7:8; 20:10; 삼상 22:10). 이 두 단어 자체는 아주 오래된 단어임에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 자체도 반드시 오래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Wenham). 추측컨대 <신명기> 화자가 이 시점에서 전승에 의존하여 나름대로 수정 작업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3장 참고). 물론 이러한 추측은 현재의 본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서 내려진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권위: 위임과 분담
리더십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첫 번째 단락이 보여주고 있는 바가, 리더십의 “위임”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단락의 핵심은 리더십의 “분담” 내지는 “확산”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리더십을 위임받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진군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1:10-11)
여기서 중간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 “관리”(rfev, 쇼테르)는 <오경>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출 18:25-25; 민 11:16; 신 1:15), 그 배경은 ‘모세’가 자신에게만 몰려있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각 지파의 수령들에게 일부 위임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전승은 또한 이후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법적이고도 군사적인 체계를 재편하는 일에 있어서도 직∙간접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대하 19:5-11). <역대기> 기자에게 있어 리더십의 분산은 레위 지파의 법적 의무 사항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대상 23:4; 26:29; 27:1; 대하 19:11; 26:11; 34:13). 그러니까 <신명기> 화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민사상의 책임과 관련된 부분은 ‘모세’가 확립해 놓은 것이며, 그 책임은 단순히 법적 영역뿐만 아니라(16:18), 군사적인 영역까지 포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20:5-9). 이와 관련해서 <잠언서>는 지도자가 정치적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잠 6:7). 따라서 리더십에 대한 <신명기> 화자의 관점은 이스라엘에 왕국이 출현하기 전에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 1:15; 29:9; 31:21: 수 8:33; 23:2; 24:1). 훗날 왕정이 들어섰을 때에도 제반 행정적 체계나 용어들이 <신명기>의 이러한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신학”의 또 다른 요소가 11절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차지하다”(기본 어근: vr'y:,야라쉬)는 동사가 그것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소 광범위하고 애매하기는 합니다만, 비군사적인 의미로는 “상속받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창 15;3-4; 21:10; 삼하 14:7; 렘 49:1-2).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군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땅을 무력으로 차지하는 행동을 나타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신 2:12, 21, 22, 24, 31; 4:47; 6:18). <민수기>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이 단어의 의미를 확정지어주고 있습니다(민 13:30; 21:24, 32, 35; 33:53).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라는 권면은 사실 <신명기> 설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예. 신 4; 5:31; 6:1; 18; 28:21, 63; 30:5, 16, 18; 31:13; 32:47). 이들 예외에도 무려 50여회에 걸쳐 유사한 의미의 구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단어는 “땅의 정복”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을 <족장 이야기>와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창 15:7; 22:17; 28:4; 민 33:53; 신 1:8, 21, 39; 3:12, 18, 20; 31:3; 수 1:11). 따라서, 이 예에서 보듯이, 본문 11절은 마지막으로 땅과 관련한 “족장 언약”과 그 성취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싸워 정복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그러한 약속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요단’강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강입니다. 이 강은 ‘안티레바논’(Anti-Lebanon) 기슭의 수많은 급류와 작은 시내들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사모코니티스’ 호수(Lake Samochonitis, 소위 Merom; 현대는 el-Huleh)로 흘러 들어간 후 거기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깊은 협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강이며, ‘디베랴’ 호수(‘갈릴리’ 바다)로 유입됩니다. 이 호수를 떠난 후 흐르는 도중 보다 작은 다수의 물줄기에 의해 유량이 증대되며 마침내 이 강은 사해로 흘러들게 됩니다. 이 강은 평소에는 수심이 얕고, 폭이 좁아 개울 같지만 봄철 해빙기가 되면 북쪽 ‘헬몬’ 산으로부터 홍수에 가까운 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이 주변은 경작이나 거주지로 쓰기에는 여전히 어려우며, 지리적으로 가나안과 요단 동편 땅을 가르는 경계로서, 군사적 요충지의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요단 강 지류>

<요단강 물줄기>
교훈과 적용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았거나 또는 독재 지배를 겪은 국가나 민족일수록 권위에 대한 혐오감 내지는 거부감이 강한 법입니다. 정치권력이 올바르게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남용되어,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만 주로 이용되는 것을 보아왔기에 어쩌면 이런 감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국가일수록 대의민주주의 보다는 직접민주주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심합니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으로 촉발된 대규모 촛불시위를 두고 전직 대통령이란 자들이 아테네 식 직접 민주주의를 보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지만, 직접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열린사회의 공적(公敵)으로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선동(煽動)이나 인기영합주의(populism)가 판을 치게 되고, 다양한 여론이 수렴되기는커녕 인민재판식의 여론 몰이가 사회를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K. Popper)도 <열린 사회의 적들>에서 이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싫어하는 언론에 광고를 게재했다 하여 광고주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격과 음해를 자행하고, 불매운동을 하는 행위, 광고 담당자의 신상 명세를 인터넷에 공개하여 난도질을 하는 행위, 당연한 법과 권위의 상징인 경찰을 향하여 욕설과 조롱과 심지어 구타도 마다 않는 행위,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대통령에 대하여 물러나라고 명령을 내리는 행위,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과 다른 견해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기모순과 위선 등... 실로 열린사회의 적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통계나 자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절차나 과정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문명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국가일수록 집회나, 시위나, 선동이나, 구호가 난무하고, 빈번한 법입니다. 이 모든 난동과 무질서의 근본적인 기저에는 올바른 리더십의 부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남을 위하여 자기를 태우는 촛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권위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진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지금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땅”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그 대답은 무엇입니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즉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권위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권위”(ejxousiva, 엑수시아)는 곧 “힘”(power, force)을 뜻합니다. 이 우주에는 세 가지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1) 강력(强力)-흔히 만유인력으로 불리는 별과 별 사이에 작용하는 힘; (2) 중력(中力)-전자기력; (3) 약력(弱力)-원자 내에서 작용하는 핵력. 이 세 종류의 힘은 자연계를 지탱시켜주는 기본 골격입니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우주는 그 순간 와해되어 버립니다. 가정이나 정부나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와 힘이 없으면 그날로 망합니다. 교회의 지도자 역시 그러함을 이 본문 역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10절상).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권위의 분담(분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는 혼자 행세할 것이 아니라 다시 분담되고 분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10절하). 무슨 말입니까?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백성의 중간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분담시키고 분산시켰다는 말입니다. 힘이 한 곳으로 모이거나 쏠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히 정치권력에서 그러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중간 지도자들에게 분담시킨 권위의 내용은 최고 지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내용 그대로입니다. 즉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요단을 “건널” 준비를 시키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다”와 “건너다”는 실은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즉 백성의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흥미롭게도 백성들 사이를 “건너다니면서” 그들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순종했습니까? 그렇습니다(3:2). 하나님의 권위는 ‘여호수아’를 거쳐 백성들의 중간 지도자들에게 전달됨으로써 전쟁을 위한 지휘∙명령체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를 ‘여호수아’에게 “위임”하고(1절상), ‘여호수아’는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서 위임받은 권위를 백성의 관리들 즉 중간 지도자들에게 “분담”시키고(10절), 이들은 이를 받아들여 백성들 사이에서 “수행”함으로써(3:2), 신정(神政) 공동체의 권위와 질서가 확산되고 확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 오늘날 교회를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이처럼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위임과 분담, 그리고 확산을 통해서 교회의 질서와 체계를 확립해 가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절대적인 헌신과 순종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정반대의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소위 거룩한 방해자들이 교회에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결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셋째, “권위에 대한 인정과 격려”입니다. 이 세 번째 항목은 최고 지도자의 몫이라기보다는 권위를 분담 받고 이를 수행해야 하는 자들의 몫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위임받은 권위에 대한 “용기와 확신에 찬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초심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를 향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첫 번째 단락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분의 권위를 위임하실 때 하신 말씀 중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1:1-5). 다름 아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의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격려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11절하).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확인입니다. 물론 40년 ‘가데스바네아’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주지시켜 준 바가 있었습니다(민 13).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위로나 격려는 일방통행식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의 모든 지도자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동체 회중으로부터도 나와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장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는지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8절). 첫 번째 단락의 친숙한 모티브가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아닌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되돌려주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소위 “셀 교회” 또는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꿈꾸는 자라면 바로 이 대목을 사역의 철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화자와 그의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디이며,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하나님 나라의 전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열방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골육상쟁의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화자는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의 단결과 통일을 염원하면서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북 열 지파를 향해서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 남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가! 우리 조상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일치단결하여 이 땅을 정복한 것처럼 이제 우리도 다시 연합하여 새로운 민족의 번영을 이루어 보세.”
아니면 지금 화자는 ‘바벨론’에서 또 한 번의 “출애굽”의 기적을 고대하며, 저 약속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회복의 기운을 보면서, 그들을 도와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데 다 함께 돕자는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 메시지가 필요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그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확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장막과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혼자 있을 때나, 교회목장이나 교회학교에서 모일 때마다, 우리가 기억하고, 확인하고, 또 행동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교훈과 적용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이곳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나 주제는 무엇입니까?
3.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