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4과
야훼의 제단: 권위와 목적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2:1-34약 39분 분량
르우벤 지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22:10)
다양성과 다원화는 현대 문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통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모든 조직이나 기관이 다 그러하듯이, 그 정통성에 도전하는 어떠한 형태의 유사한 조직이나 기관들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조직의 기강이나 단합이 해이해지고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조직일수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나 유지를 원할 것이며, 그에 반하는 어떠한 형태의 다원화도 반대하게 됩니다.
다양성이나 다원화가 종교의 영역에서 나타나게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종교가 지닌 특성상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옳고 그름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양보나 타협은 배교나 이단을 인정하고 공생하는 길과 동일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점 유일신 사상을 신봉하는 유수 종교, 예컨대 유대교나 이슬람교 및 기독교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놀랍게도 이들 종교 모두 한 분 하나님 ‘야훼’를 신봉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해석과 인식을 달리할 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금 심각한 이단 논쟁에 빠져 있습니다. ‘요단’ 동편 즉 약속의 땅 밖에서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 지파가 자신들 만의 새로운 제단을 세워 예배를 드린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와 유사한 문제가 오늘날에는 없는가?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22장을 하나의 통일된 문학적 단위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1-8절의 독특한 성격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요단’ 동편의 지파를 향한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로서,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신학적 메시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43-45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는 이 책의 주제를 마무리 짓는 기능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의 신학적 관계를 유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22:1-8가 21:43-45의 신학적 결론 내지는 완결에 해당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 과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기능과 관련해서 볼 때, 1-8절은 이어지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이야기”(9-34절)를 위한 전환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 1절의 “그 때에”는 분명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며, 9절은 앞의 내용(1-8절)을 마감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이야기(9-34절)를 위한 서론의 기능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1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9절)
이렇게 볼 때 22장은 문학적 양식에 따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1-8절: 설교와 권면과 축도
(2) 9-34절: 설화(이야기)
첫 번째 단락은 “독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정복 전쟁에 참여했던 ‘요단’ 동편 지파에 대한 화자 자신의 편집적인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의 독백은 7절의 역사적 회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첫 번째 단락을 문학적 양식에 따라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 동편 지파를 돌려보냄(1-6절)
1) 서론(1절)
2) 격려와 칭찬(2절)
3) 격려의 이유(3절)
4) 순종의 결과(4절)
5) 미래를 위한 권면(5절)
6) 축도와 해산과 귀환(6절)
2. 므낫세 반 지파를 돌려보냄(7-8절)
1) 역사적 회고(7절)
2) 축복의 명령(8절)
이야기 형식을 담고 있는 두 번째 단락 역시 아래와 같이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론(9-12절)
1) 이스라엘을 떠나 길르앗으로(9절)
2) 요단 강가에 제단을 세움(10절)
3) 이스라엘이 분노함: 전쟁을 준비함(11-12절)
2. 법적/군사적 조치를 피하기 위한 조사와 협의(13-34절)
1) 이스라엘이 조사단을 파견함(13-15절)
2) 조사단의 연설(16-20절)
(1) 두 지파 반의 범죄를 비난함(16절상)
(2) 범죄의 구체적인 성격을 제시함(16절하)
(3) 범죄의 결과와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함(17-18절)
(4) 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안을 제시함(19절상)
(5) 범죄에 대해서 경고함(19절하)
(6) 경고를 지지해 주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함(20절)
3) 두 지파 반의 변론(21-29절)
(1) 서론(21절)
(2) 스스로 저주의 서원을 함(22절)
(3) 비난에 대한 반박과 서원(23절)
(4) 서원과 함께 화의를 제안함(24-28절)
4) 문제의 해결(30-34절)
(1) 이스라엘이 변론을 받아들임(30절)
(2) 판결을 선언함(31절)
(3) 조사단의 귀환과 보고(32절)
(4) 원고(이스라엘)의 반응(33절)
(5) 피고(두 지파 반)의 반응(34절)
이처럼 각 단락을 문학적인 양식에 따라 구분해 볼 때, 전체적으로 법적이고 제의적인 용어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제단과 희생제사를 두고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나머지 지파들 간의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마치 법정에서 심문과 변론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쟁의 빌미를 제공한 측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입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결국 제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따라서 본문은 성격상 <사제 전승>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여호수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 또한 한 곳이 아니라 두 곳으로서, 하나는 ‘실로’이고 또 하나는 ‘요단’ 동편 지파를 위한 곳으로서 <칠십인 역>은 이곳을 ‘길갈’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의 출처와 배경은 무엇일까? 일견 지파 간 갈등의 중심에 성소의 위치에 대한 문제, 즉 ‘실로’와 ‘길갈’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자는 ‘실로’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길갈’이 아닌 ‘실로’가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갈’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정기간 동안 합법적인 예배 장소로서 중요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 내에서도 ‘길갈’을 공공연히 “거룩한 곳”으로 부르면서(수 4:19-5:15), 그에 합당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후 이곳에 역사적인 열두 개의 돌무더기를 세웠으며, 할례 의식을 행하였고, 유월절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브온’과 언약을 체결할 때도 이스라엘은 이곳을 택하였습니다(수 9:6-15). 이러한 전통은 ‘사무엘’과 그 이후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길갈’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이고도 합법적인 성소(예배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곳)로 부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0:8; 11:15; 13:8-14; 15:12-15, 21; 암 4:4-5). 그리고 <사무엘>에 의하면 ‘길갈’은 ‘사울’ 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서 ‘길갈’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자신은 ‘에브라임’ 족속으로서 ‘길갈’이 아닌 ‘실로’ 출신임이 분명합니다(삼상 1-4). 그의 어머니 ‘한나’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을 보드라도 당시 성소는 ‘길갈’이 아닌 ‘실로’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실로’가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바,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서 ‘실로’에서 가져온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겨 버린 이후가 될 것입니다(삼상 4). 이 사건을 통해서 제사장 ‘엘리’의 집안은 몰락하게 되고 따라서 ‘실로’를 중심으로 한 제사의 전통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의 이름도 ‘실로’의 제사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하겠습니다(삼상 1:3; 2:34; 4:4, 11, 17, 19; 14:3).
이렇게 볼 때 ‘실로’가 성소로서 중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시기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가나안’ 정복이후부터 ‘사무엘’에 이르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향력이나 세력이 ‘베냐민’이나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능가하며, 압도하고 있었을 시기였을 것입니다(삿 12:1; 19-20). 그리고 ‘실로’의 성소가 백성들의 종교 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시기이기도 했습니다(삿 21:12, 19). 그렇다면 성소의 위치를 놓고서 ‘실로’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길갈’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베냐민’과 같은 ‘요단’ 동편의 지파 사이에 일종의 합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그러한 합의로 손해를 보는 쪽은 분명 ‘길갈’ 성소를 고집하는 지파 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가 갖는 구속력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 ‘실로’는 ‘블레셋’과의 전투로 그 지위와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전투 이후 언약궤는 ‘기럇여바림’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솔로몬’ 이후 성전에 영구 보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실로’의 성전은 일찍부터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긴 했어도 그 영향력이나 전승은 계속 살아남아 이곳 <여호수아> 전체를 통해서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여러 곳에서 소위 <길갈 전승>이 압도하고 있지만, 책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실로 전승>이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봅니다(18:1-22, 34). 이처럼 <실로 전승>은 마치 등고선처럼 책 전체를 휘감고 있는 형국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유수 이후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많은 학자들은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가 바로 이 시기라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제의의 정통성을 놓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포로 당시 예배의 중심지는 더 이상 ‘실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비록 옛 성전은 파괴되고 그 자리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예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재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를 집전하고 주도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그곳에 있지 않고 ‘바벨론’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 즉 ‘요단’강 밖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본문이 들려주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대답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던 정상적인 희생제사와 같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피치 못할 상황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심리적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에스라>나 <느헤미야>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과 ‘사마리아’에서 남아 살고 있던 자들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과 분열의 양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해결할 방안은 없을까?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타협안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방안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들인 적도 없고 실현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늘 만날 수 있는 문제이고, 그 때마다 이 옛 이야기는 문제 해결의 좋은 방안으로서 백성들을 자극하고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요단 동편 지파를 돌려보냄(1-8절)
이 단락은 내용상 앞부분(21:43-45)과 긴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도 나머지 지파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책임을 다 완수한 셈입니다.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들 지파들의 참여를 촉구하였고(1:12-18), 이제 그 모든 사역이 다 끝났으므로, 이야기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출발 지점에 와있는 듯합니다. 이제 한 형제로서, 한 가족으로서 그 모든 책임을 완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들 지파에게 ‘여호수아’가 당부할 말은 무엇일까요? 설교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책의 전체적인 주제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1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7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1-8절)
‘요단’ 동편 지파들에 대한 ‘여호수아’의 관심과 배려는 각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약속의 땅 밖에서 살아갈 지파들이기 때문입니다. 늘 적들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거나 타협하여 배교와 이단의 길로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은 본문의 역사적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지도자가 해 줄 수 있는 권면은, 그들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이요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을 주시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안식을 말합니다(4절. 참고, 1:15; 21:43-44).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안식은 특별히 ‘요단’ 서편 지파들의 것으로서, ‘요단’ 동편 지파들은 이미 그 안식을 획득한 상태에 있었습니다(1:13).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 안식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식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누리고 있는 안식이 ‘요단’ 동편 지파들의 순종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요단’ 동편 지파들의 안식 역시 그들이 그 땅에 돌아가서 어떻게 순종하며 사는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계명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당연한 결과이자 열매입니다. 평화 시에나 전쟁 시에나, 번성의 때에나 위기의 때에나 초지일관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설교의 요지는 바로 그것입니다(22:5와 1:7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축도로써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복의 한 형태로서, 아비가 자식에게 주는 그러한 것입니다. 이어서 ‘여호수아’는 ‘므낫세’ 두 지파에 대해서 역사적 회고를 덧붙이고 있는데, 왜 특별히 이 지파를 언급하고 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스라엘의 결속과 연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므낫세’ 지파가 ‘요단’의 동과 서로 갈라져서 살아가게 될 것이지만 원래는 한 지파이듯이,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선언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한 형제로서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축복의 결과들(금, 은, 동, 가축, 의복 등등) 역시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8절).
2. 이스라엘과 제단(9-34절)
두 번째 단락의 핵심 내용은 ‘요단’ 동편 지파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후에 그들을 위하여 ‘요단’ 강가에 별도의 제단(祭壇)을 세운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견 불법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화자는 당대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이야기는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전•후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반부 이야기(9-12절)는 일종의 서론으로서 배경 및 문제 제기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후반부(13-34절)는 문제 해결 및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결론에 이르는 전 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서론: 불법적인 제단(9-12절)
화자는 첫 번째 단락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내용(6절하), 즉 ‘요단’ 동편 지파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시 반복 진술함으로써 두 번째 이야기의 서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전 진술과의 비교를 위해서 두 구절을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9절)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6절하)
두 진술의 차이는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화자는 ‘요단’ 동편 지파를 이스라엘과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지파가 거주할 땅도 ‘길르앗’으로 부르면서 ‘가나안’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에서 열두 지파가 지파연합과 같은 단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요단’ 동편 지파 역시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화자는 이들 지파가 그들의 땅에서 무엇을 했는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10절)
자신들을 위한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제단의 위치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요단’ 서쪽 땅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위치에 대한 언급이 시사해 주는 바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요단’ 서편은 ‘야훼’ 하나님이 계시며 제단을 세우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것입니다(19절).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요단’ 동편 지파와 ‘길갈’에 성소를 두고 있던 ‘베냐민’ 지파 간에 일종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제단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11절)
그런데 이곳에서 제단의 위치에 대한 표현이 애매하며, 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문제가 되는 표현은 “(가나안 땅의) 맨 앞쪽”(l~WmAla,, 엘물)과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rb,[eAla, 엘 에베르)때문입니다. 전자(前者)의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출 26:9; 28:25, 27, 37; 수 8:33), 가장 근접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여호수아> 9:1의 “(레바논) 앞(이쪽)”으로서, ‘요단’ 서쪽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화자가 가나안 땅에서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표현은 더욱 애매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0:13에 의하면 “(요단의) 다른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신 30:13)
그러나 이 표현은 가장자리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출 28:26; 겔 1:9, 12). 아마 본문에서도 화자가 의도하는 바도 이 두 번째 의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요단’ 동편의 지파가 세운 제단은 가나안 땅에 있기는 하나, 그 땅의 동쪽 언저리에 있으면서, 약속의 땅이 아닌 ‘길르앗’에 살고 있는 지파들의 성소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의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분리와 해체에 대한 염려입니다. 화자는 12절에서 이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12절)
이들이 모인 이유는 응징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사사기>는 ‘다윗’과 ‘사울’로 대표되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간의 갈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삿 19-21장).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지파간의 갈등과 분열은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서부터 흔히 있었던 듯합니다.
2) 이스라엘의 대응(13-34절)
조사단 파견(13-20절).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은 태도를 돌변하여, 전쟁 대신 사태 파악을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예는 거의 전무하지만, 매사를 법적이고 군사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기보다는 조정이나 중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선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단장은 제사장 ‘비느하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13절)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14:1; 19:51; 21:1), 특히 이곳에서는 ‘여호수아’를 제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단을 놓고 일어나고 있는 지파 간 분쟁을 해결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비느하스’의 역할은 오히려 ‘여호수아’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비느하스’가 등장하는 곳은 그의 출생과 관련한 부분(출 6:25) 외에, “바알브올 사건”과(민 25) “미디안과의 전쟁”(민 31:6), 그리고 “이스라엘과 베냐민과의 전투” 등입니다(삿 20:28).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본문에서는 그를 ‘실로’에 있는 제단과 연계시키고 있는 반면, <사사기>에서는 ‘베델’임이 분명하고(삿 20), <여호수아> 24:33에서는 ‘기브아’와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느하스’와 함께 조사단에 포함된 자는 ‘요단’ 서쪽의 아홉 반 지파들 중에서 한 명씩 선정한 대표자들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14절)
그런데 이 구절 중에서 “지파”의 의미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흔히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호칭할 때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에 따라 큰 무리에서 작은 무리로 갈수록 “지파”(טבש 또는 הטמ; tribe) > “가계”/“가족”(תוחפשמ 또는 םיפלא; clan) > באתב (the house of the father) 등의 단어를 사용합니다만,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 번째 단어라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단어 역시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지파”를 드러내는 용어로 확대 사용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사단의 공식 발언은 그 양식에 있어 이스라엘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소위 “예언적 메시지” 내지는 “신탁의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15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16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15-16절)
메시지의 내용인 즉은 <아이 성 이야기>를 통해서 공식화 한 비난성 발언,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바벨론 유배” 시에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오래 동안 잘 보존되어 온 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자는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며, 패역한 이스라엘의 역할은 ‘요단’ 동쪽의 두 지파 반이 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의 비난은 나름대로 역설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 입장에서 보면 제단을 쌓은 일이 다른 이방신을 섬기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과 헌신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신앙적 배교로 오인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마치 하나님의 성소는 단 한곳에만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합니다(신 12). 성소의 숫자에 대한 초기 전승들의 입장도 다소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신전들과 구별되는 합법적인 성소들만 허락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요단’ 동편 지파들이 세운 제단은 불법적이며, 사사로운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서편의 지파들은 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조사단은 자신들의 심문과 비난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브올의 반역>(민 25) 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명기> 화자 자신도 일찍이 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 대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바 있습니다(신 4). 조사단의 우려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즉 새로운 제단은 결국에는 이방신을 쫓는 제단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7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17-18절)
그러나 조사단의 목적은 심판과 정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심문 속에서도 동지애적인 배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세운 제단을 버리는 대가로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제공할 용의도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19절)
‘요단’ 동편과 그곳에 세운 제단에 대한 서편 지파들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하지만,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놓는 이러한 제안은 분명 자기희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간 이야기>를 역사적 선례로 들어 한 개인의 범죄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를 설명하면서, 조사단은 이 문제가 단순히 두 지파 반의 범죄에 국한된 것이 아님도 역설하고 있습니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20절)
변론과 방어(21-29절). 그러나 조사를 받는 지파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 지파가 단순히 제사장 ‘비느하스’를 향해서가 아니라 이례적으로 “이스라엘 천만 인의 두령”(14절)을 향해서 변론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21-22절)
하나님의 이름 하나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세 개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고 그것도 두 번에 걸쳐 노래하듯 반복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전능하신 자 하나님”(hw:hy] !yhila> la; 엘, 엘로힘, 야훼). 첫 번째 하나님의 이름 ‘엘’은 원래 ‘가나안’의 최고 신(神)의 이름으로서, <족장 이야기>에서 족장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여러 수식어와 함께 채택한 이름입니다: ‘엘 샤다이’(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 출 6:2-3); ‘엘 올람’(창 21:33); ‘엘 엘리온’(창 14:18-22); ‘엘 로이’(창 16:13); ‘엘 베리트’(삿 9:46); ‘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창 33:19-20). 두 번째 이름 ‘엘로힘’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이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대개 단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이름입니다(창 1).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름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출애굽>에서 모세에게 현현하셨던 하나님입니다(출 3, 6). 아무튼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결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맹세 위에 새로운 서원 한 가지를 더하고 있는데, 만일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두 번째 서원은 직접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종 판단은 ‘요단’ 서편의 아홉 반 지파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아닌, 하나님에게 달렸음을 전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신들을 변론하는 이 두 번째 서원에서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23절)
그것은 다름 아닌 세 가지 제사에 관한 것으로서 조사단도 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만, 자신들이 받고 있는 혐의가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은 <사제 전승>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이 성전 제사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장소임을 천명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서원 역시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대하면서 처벌을 받겠다는 서원까지 밝힌 후에,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4절)
즉 그들의 그렇게 한 것은 “두려움과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미래에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단의 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25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25-26절)
즉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닐진대, 훗날 자신들의 후손들이 ‘요단’ 동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염려는 충분히 신학적인 근거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의 범위가 분명 ‘요단’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면, 강의 동쪽과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당연히 이방인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이미 ‘요단’ 서편에서 온 조사단이 공공연히 선포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 지파들의 염려는 타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대한 반격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두려움을 피력한 후에, 간절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7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27-28절)
그들의 간절한 열망인 즉은 자신들이 세운 제단이 ‘야훼’ 하나님께 세워진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훗날 같은 문제를 놓고 불필요한 충돌을 없애 줄 증거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요단’이 지리적으로 분리의 상징임에 분명하지만, 제단은 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연합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자신들의 순수한 동기와 열정, 그리고 무죄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써, 이들 지파는 변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29절)
문제 해결(30-34절). 조사단은 동편 지파들의 변론에 만족했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30절)
<구약>에서 “좋게 여기다”는 표현은 상대의 제안이나 증거를 받아들일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창 41:37; 레 10:20; 신 1:23; 삼상 18:5; 삼하 3:36; 18:4; 왕상 3:10; 에 1:21; 2:4).
이에 제사장 ‘비느하스’가 동편 지파들의 혐의를 벗겨주는 최종 판결을 내려줍니다. 그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31절)
제사장의 이 선언은 실은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1:5, 9, 17).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고 평화와 안식이 가능하게 된 것이 결국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화자는 여기서 재확인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신들의 순수함과 무죄를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전쟁과 분열의 위기로부터 구원해 낸 것입니다.
조사단의 임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돌아가서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자신들이 듣고 본 바를 보고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모두는 만족했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32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와 그들에게 보고하매, 33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32-33절)
전쟁과 공멸(共滅)의 위기는 사라지고 예배와 신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요단’ 동편 지파들이 세운 제단은 이 모든 일의 역사적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이스라엘의 연합과 결속에 대한 증거를 넘어, ‘야훼’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증거로 남게 될 것입니다. 즉 그 제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화자의 결론도 바로 그것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34절)
교훈과 적용
수 년 전 어느 부활 주일 성찬 예배를 준비하면서 한 교우에게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곁에 있던 한 집사가 포도주는 술이니 성찬의식에 쓸 수 없고 포도 주스로 대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바람에 결국 그 분의 뜻대로 해 준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버님이 목회자였던 가정에서 자란 신앙의 연륜이 아주 오래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먹거나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고 설득시킬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 일부 교단에서는 이단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척도로 “사도신경”에 대한 고백 여부를 묻는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은 그 자체로서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는 아주 훌륭한 신앙 고백이긴 하지만, 그 역시 하나의 신조(信條)로서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했을 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기독교 역사가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이나 또는 찬송가 집에 수록된 교독문을 낭독하거나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의례적인 중언부언으로 흐리기 쉽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전통적인 신앙에 익숙한 성도라면 이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내심 못마땅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라면 예배 시간에 소위 “축도”를 행할 수 없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침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 아닌 다른 사람이 “침례식”(또는 세례식)을 집전한다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담임 목사를 제쳐두고 다른 지도자가 이를 대신할 필요는 없겠지만(그것도 신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교회 내의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 혼자서 그 모든 의식을 집전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제단
그렇다면 한 교회 내에서 일단의 회중이 별도의 장소와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별도의 장소에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문제로 해서 이스라엘은 상호 불신과 이단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당면한 위기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때문이 아닙니다(수 1-12장). 또는 차지할 땅을 놓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지파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탐욕이나 지파 간 싸움도 아닙니다(17:14-18).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설화세계의 배경 내에서만 보자면,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것에 있는 듯합니다. 논쟁의 핵심이 이스라엘이 과연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지정된 성소(聖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드릴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 보면, 보다 더 깊은 의도 즉 정치•사회적인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 의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표면적인 문제 즉 종교적인 문제부터 짚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예배를 위한 단 하나의 성소만 두어야만 할까요? ‘모세’의 율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신명기>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나아가서(신 12:5)
이 구절에 따르면 일견 하나님의 성소가 그 땅에 단 한곳에만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른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 땅에 몇 개의 성소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신 ‘바알’에 대한 제사를 공공연하게 드리고 있는 그 땅에서 오직 ‘야훼’ 하나님께만 예배드릴 수 있는 제단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 의도인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도 ‘요시아’ 시대 이전까지는 성소의 숫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편하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람들이 임의로 예배 장소를 선정하는 것을 금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임의로 성소를 여기저기 세워 나름대로 제사를 드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강력한 중앙 성소 체제가 없는 곳에 이단과 배교가 싹틀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의 분열과 와해(瓦解)에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당면하게 될 위기는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한 분 이시므로 이스라엘 역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을 해칠 수 있는 그 어떠한 조짐도 사전에 예방하고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 일치를 강조하는 화자의 의도는 그가 구사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 즉 역설을 통해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가 구사하고 있는 단어들은 그 반대의 상황, 즉 이스라엘이 한 때 분열되어 있었던 시대를 연상시켜주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예컨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나머지 지파들을 각기 “요단 동편 지파”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구별하여 부르면서 마치 이들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다루고 있는가 하면, 이들 두 진영이 살고 있는 장소도 각기 “가나안 땅 실로” 및 “길르앗 땅”으로 다르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일치와 단결이 강조되는 곳에 부작용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일치와 단결을 요구하는 요란한 구호는 공동체의 경직과 획일성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쉽사리 독선과 이단 정죄로까지 나아가기 일쑤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수 없이 보여준 바 있습니다. 지금 ‘요단’ 동편 지파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12절). 상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전후사정 알아보지도 않고 정죄의 칼을 먼저 꺼내들고 있습니다. 대개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예배 그 자체가 아니라 예배의 장소와 형식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질이 아니라 비 본질,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조사와 타협
그러나 무슨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요? 누가 중재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까? 그들은 싸우고 정죄하기 앞서 사전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정은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들의 의도나 행동이 단죄를 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 역시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계명을 어김없이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제단은 다름 아닌 한 분이신 ‘야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단이 있는 장소 또한 “약속의 땅” 밖이 아니라 “가나안 땅” 경내였습니다: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10절상). 다만 그 장소가 ‘가나안’과 ‘길르앗’의 경계 지역, 즉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약속의 땅” 최 동편의 가장자리라는 점이 미심쩍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아무래도 이방인들과의 접촉이 가장 빈번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방 문화와 이방 종교에 가장 쉽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으며, 가장 먼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염려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길르앗’의 형제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염려입니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응징을 위하여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들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단’ 동편 지파들 역시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후손이 “약속의 땅” 밖, 즉 ‘요단’ 동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제외되고 배척당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입니다. 이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사는 곳에도 제단을 세워 동일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임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면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심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이들의 고백은 정말 눈물겹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동기요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진심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전쟁을 벌이겠다고 으르렁댔으니 조사단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조사단을 파견한 일은 정말 잘 한 일이었습니다.
두 진영은 타협과 양보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각 지파는 자신의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책과 타협안을 제시하여 합의에 이르게 되고,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백성으로 결속하게 됩니다. 이러한 합의는 ‘요단’ 동편 지파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분열과 파멸로부터 보호해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온 이스라엘은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제단이 기능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제단은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증거로써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분열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고 새로운 단결과 신뢰 속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증거하는 상징으로도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 교훈
그러나 이것이 화자가 의도하는바 신학적 주제의 전부일까? 보다 영속적인 교훈은 없을까?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렵사리 갈등을 봉하자 말자, 정작 이해 당사자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맙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겼던 ‘실로’의 제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본문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며 이해 당사자로 등장했던 자신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이들 모두는 역사의 무대에서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도 점점 그 세력을 잃어가다가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마저 상실해 버렸고, <사사기> 이후부터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제단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그 중요한 역사적 언약을 이끌어 내었던 그 백성들과, 언약의 핵심이 되었던 그 제단마저 망각의 세월 속으로 사라져가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에 대해서 왜 그토록 사생결단 전쟁까지 불사하며 전의를 불태웠을까? 본문의 역설은 모든 보이는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데 있습니다. 가변적이면 지엽적인 것들이란 무엇일까요?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예배는 어디서 드릴 것인가?”, “어떻게 드려야 할까?”, “각 지파의 경계는 어디로 할 것인가?”, “하나님은 어디에 모실 것인가?”, “이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러면 보이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대의 주인공들이 그날 그 무대 위에서 맺었던 “언약”이 아닐까요? 또는 언약의 정신은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전통과 역사가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살아 숨 쉬며 계속 이어져 갔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흐르는 강물이 지역에 따라 물길을 달리하며 유유히 그러나 도도히 흘러가는 것처럼, 언약의 숨결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그 표현이나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즉 본문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든 시공을 뛰어넘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즉 하나님의 백성이 종교적, 이념적, 그리고 정치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분열의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요단’의 동과 서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 되게 하는 처방은 없을까?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어 하나 되는 감격적 체험을 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월드컵 축구 대회 때 였습니다. 당시 모두를 하나로 묶는 구호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입니다. 월드컵이라는 축제가 외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내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대로 태극기를 들고 흔드는 것에서부터, 태극기 모양의 스티커를 얼굴이나 손에 붙인다든지, 아예 얼굴 전체를 태극기로 페인팅을 하기도 하며, 태극기로 옷을 만들어 입는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고 어느 누구도 태극기를 모독하는 불경스런 짓이라고 비난한 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유행으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축제가 있다면, 예배와 제사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축제를 통해서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구호가 있다면, “야훼 하나님”입니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든, 어떤 톤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야훼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구호가 들리는 이상 분열이 아니라, 하나 된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를 한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변적인 것들에 집착하다 불변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 될 수록 하나님의 공동체는 연합과 단결이 아니라 분열과 와해의 길로 치닫게 됨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입니다. 이단 논쟁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논쟁이 극심할수록 세상을 향한 선교는 쇠퇴하고 맙니다. 우리 목장 운용의 방식을 놓고서도 지나친 획일화를 추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낸 합의를 토대로 논의해 봅시다.
2. 나의 신앙에 있어 비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