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5과
마지막 설교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3:1-16약 27분 분량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23:2)
은퇴나 죽음을 앞둔 영웅이나 지도자의 고별설교는 후대를 위한 교훈으로서 인류가 역사를 두고 즐겨 사용해 왔던 문학의 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 <신명기>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 이 책 전체가 실은 ‘모세’의 “고별 설교 모음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여호수아> 역시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은퇴를 앞둔 영웅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를 싣고 있습니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은 <신명기>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바, 화자는 이곳에서 열여섯 절에 걸쳐 소위 <신명기>의 핵심 신학적 주제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전체 사상을 아주 압축해서 요약하고 있는지라, 그 깊이나 강도에 있어 마치 “빅뱅”을 기다리고 있는 태초의 미립자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의 ‘다이나마이트’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이 설교를 들어야 할 공동체의 배경이나 상황은 어떠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본문의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은지라”로 시작하는 제 1절의 부사절은 본문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 상 15-16절은 일종의 위협과 경고로서, 본문의 결론으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볼 때 23장과 24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과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양식과 내용. 본문은 문학적 장르에 있어 “설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 하나하나마다 소위 “신명기 신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현재의 본문으로 정착되기까지 편집 작업의 과정이나 기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양식과 관련해서는 “설교”와 “언약”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본문 제 1절은 <구약>의 다른 본문을 통해서 이미 친숙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는데, 영락없는 “임종 설교(축복)” 내지는 “고별설교” 그것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임종설교(창 48-49), ‘요셉’의 임종설교(창 50:22-26), ‘모세’의 고별설교(신 33), 그리고 ‘다윗’의 임종설교(상하 23:1-7; 왕상 2:1-9)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 양식에 있어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즉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양식에 있어서도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위 “언약 양식”과 관련한 일련의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체결하거나 갱신할 때 대개 다음과 같은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역사적 회고(3-5절)
(2) 기본 원칙의 진술(6-8절)
(3) 언약의 축복(9-10절)
(4) 기본 원칙의 반복 진술(11절)
(5) 언약의 저주(12-13, 15-16절)
따라서 본문은 그 내용으로 볼 때, 언약의 갱신 의식과 연관해서 그 배경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특한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본문은 그 내용이나 분위기에 있어 언약 갱신을 위한 예배나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설교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학자는 본문의 배경을 고대 ‘히윗’ 족속의 “봉신계약”(封臣契約)과 연결시키면서, 나이든 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면서 그 후계자에게 백성의 충성을 담보해주는 의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Baltzer).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 본문에서는 후계자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회중을 향한 직접적인 설교만 있을 뿐입니다. 다만 축복과 저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순환되고 반복되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언약 갱신과 관련한 내용이 족장의 임종 시에 “유훈 설교”(遺訓 說敎)의 일부로 채택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본문의 설교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축복보다는 저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설교의 분위기는 현재 공동체가 당면한 삶의 자리를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벨론의 이스라엘 공동체일 것입니다. 이들은 한 때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으나 지금은 그분의 저주 하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셨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긴장으로 가득 찬 본문의 저주의 경고는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왕하 17).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연이은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왕하 21:1-16; 23:26-27).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를 체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역의 결과가 무엇인지 곧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삿 2:6-23; 3:1-6).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 23장은 <성경>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예고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출발에서부터 어두운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만이 아닙니다. 전망과 아울러 역사적 회고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출애굽을 회고했던 것처럼(출 19:4-6), 이곳에서도 이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회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3-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출 23:23-33), 이곳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시고 계십니다(5-13절). 또한 ‘시내’ 산에서 자신의 진노를 보여주신 것처럼(출 33:1-3), 이곳에서도 저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13, 15-16절). <출애굽> 34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 갱신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언약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적들을 물리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충성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 동일한 언약이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전제 하에 불순종의 심각한 결과가 어떨지를 사전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을 관통하는 핵심 신학적 주제가 될 것이며, 이는 <신명기> 전체 특히 27-29장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벽두에서부터 이러한 “신명기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1:1-9). 마지막으로 이곳 23장에서는, 13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당면 과제, 즉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고 정복할 땅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수아> 23장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시대와 남북조 시대와 “바벨론 유수기”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의 요약이자 핵(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1-2절)
본문은 이 책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배경이 될 만 한 시점이나 장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1절)
다만 본문의 배경과 관련해서 화자는 두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이 두 가지 사실은 화자 자신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참고. 13:1; 21:44).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배경으로 상정할 수 있는 바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화자 당대까지 늘 꿈꾸어왔던 하나의 이상(理想)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출 33:14).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위기 상황 즉 리더십의 전환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본문의 메시지가 반영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는 이스라엘의 번영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상황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 1절은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서로 상충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리더십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절박한 상황은 2절에서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2절)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로 거명하고 있는 네 가지 이름들은 이 책의 전반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습니다: “장로들”(6:21; 7:6; 8:10, 33); “재판장들”(8:33); “관리들”(1:10; 3:2; 8:33); “수령들”(14:1; 19:51; 21:1; 22:14, 21, 30).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사장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소위 일반 세속적 지도자들입니다.
2. 회고(3-5절)
‘여호수아’는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역사적 회고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3절)
이스라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대적자들을 물리치시며(출 14:14, 25; 신 1:30; 3:22; 20:4; 수 10:14, 25, 29, 42), 이를 통해서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대조를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 33:1-3; 수 1:5, 9, 17.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며, 전투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제 1부는 이점을 확인시켜주고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여전히 적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단 상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그 땅입니다(이것은 22장에서 다룬 바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4절)
화자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지파별로 나누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14-19장), 대적(對敵)들도 지파 별로 나누어 각 지파의 땅에서 살도록 허용하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바 약속에 대한 진술과는 상반된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3-45). 두 상반되는 진술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였으며, 따라서 더 이상 정복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땅의 여러 곳에 골치 아픈 대적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 두 번째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삿 1: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5절)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적들을 몰아내시겠다는 약속은 <신명기>에서 이미 선언하신 바 있는데(신 6:19; 9:3-4), 이곳에서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쫒아낼 것”이라는 약속은 멀리는 “출애굽” 당시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출 34:24; 민 32:21; 신 4:38; 9:4-5; 11:23; 18:12; 수 3:10; 13:6).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창 15:7; 22:17; 24:60; 28:4). 이들 약속은 <민수기>에서 성취되기 시작합니다만(민 21:24, 35), 이후에도 동일한 약속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이스라엘의 과업에 대해서도 <신명기> 전체에 걸쳐 무려 60여 회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예: 1:8, 21, 39).
3. 대 원칙(6-8절)
그런데 이스라엘의 남은 과업은 다시 정복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 속하는 과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문제와 직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6절)
이와 동일한 모티브는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1:7-8; 출 24:7; 신 28:58, 61; 29:20-21, 27; 30:10; 31:24, 26; 수 8:31, 34).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말할 것도 없이 <신명기>의 율법에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거룩” 즉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 차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7절은 이 질문에 대한 요약적인 답변이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7절)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구별은 다름 아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이 예배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일은 이들 민족들과의 왕래나 접촉을 끊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불러서도 안 됩니다(출 23:13; 사 26:13). 그것은 그 신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들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신 6:13; 10:20). 그 또한 이들 신들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참고. 렘 5:7; 12:16; 습 1:5). 이스라엘은 또한 다른 신들을 섬겨서도 안 되고 오직 한 분 하나님 ‘야훼’만을 섬겨야 합니다(출 3:12; 20:5; 23:24-25, 33; 신 4:19, 28; 6:13; 7:4, 16; 8:19; 10:12, 20; 11:13, 16; 12:2, 30; 13:5, 7, 14; 17:3; 28:14, 36, 47, 64; 29:17, 25; 30:17; 31:20; 수 22:5, 27).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출 20:5; 23:24; 32:8; 34:14; 레 26:1; 민 25:2; 신 4:19; 5:9; 8:19; 11:16; 17:3; 29:25; 30:17).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복수(複數)의 신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회에서 오직 이스라엘만은 한 분 하나님 ‘야훼’만을 섬겨야 하는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그 땅의 “풍요의 신”이나 “전쟁의 신”들을 의지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절대적인 충성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의 충성과 헌신을 요청하면서 일종의 공식적인 서원의 형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0:20; 11:22; 13:5; 30:20; 수 22: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8절)
이 부분에서 화자의 태도는 격려와 위안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에 있어 성공적으로 잘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는 화자의 당대가 아니라 정복 전쟁에 참여했던 이전 세대에만 국한됩니다. 광야 세대나 정복전쟁 이후의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4. 언약의 축복(9-10절)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3절에서 했던 바 역사적 회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충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9절)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수 1:5). <신명기> 28:7과 32:30에서 천명하신 그분의 축복도 성취되었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10절)
5. 원칙의 재천명(11절)
당연히 지금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헌신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대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왕에 대한 충성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자리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절)
6. 언약의 저주(12-16절)
이 모든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그 땅의 여러 신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새로운 민족의 탄생입니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족속도 아닌 일종의 영적 혼혈아가 탄생될 것입니다. 당연히 이 혼혈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결혼의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11절에서 사용한 바 있는 “사랑”의 모티브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12절)
화자는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일로 이방인과의 결혼을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통혼(通婚)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혼혈아를 낳게 되며,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지름길이 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솔로몬’ 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고통과 좌절 가운데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왕상 11).
사랑과 결혼을 예로 들며 충성과 헌신을 요구했던 화자는 갑자기 톤을 바꾸어 위협과 저주로 불순종에 대하여 경고하며 나서고 있습니다.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13절)
그런데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자는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그 땅의 이방 족속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물리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4-5절).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어떠한 유혹도 무시하라고 요청하신 바도 있습니다(7, 11-12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 역시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자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러한 요청을 무시한다면 심판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상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인과의 통혼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점차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될 것이며, 그 결과 혼혈과 혼합은 더욱 가속화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갈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점점 더 깊이 쌓여가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 땅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이전에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지만 여호수아가 지금 이스라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경고를 발하셨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실패를 거듭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상실했습니다.
위협의 설교를 전하는 중에 ‘여호수아’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애절한 간청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24절)
늙어 죽어가고 있는 노인의 말은 듣지 않을까요? 그의 개인적인 간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현재 처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가 말한 것 중에 그분이 이루지 못한 일이 과연 있었던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서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약의 축복뿐만 아니라 언약의 저주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15절)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약속을 이루시기도 하지만, 저주의 말씀 또한 이루실 능력과 의지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신명기> 특히 28:15-68에 소개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저주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 땅입니다. 바로 그 선물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은 7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16절)
교훈과 적용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를 놓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잘못 때문인지 말입니다(요 9:2).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만족할 만 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즉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원인 규명을 해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일견 유치하고 단세포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인생의 제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범답안 즉 정답이 있으며, 또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을진대,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해결책 또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기에 모든 현상이나 사건을 인과의 원리로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단순•유치한 해석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어 보이기는 하다는 생각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 역시 이점에 있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역경과 고통에는 필경 이유와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단하는 원인이란 다름 아닌 ‘욥’의 범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무엇인가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욥’은 이들의 진단에 대해서 분노하며 다툼까지 벌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진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부인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그 지경으로 몰아간 당사자가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연 ‘욥’을 비롯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현실인식은 온당한 것입니까? 지나치게 단세포적이고, 유치하며, 이분법적이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판결 내리고 계십니다. 드러난 현상이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화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예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사는 자가 더 장수하고, 부유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아도 그의 진단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의 말처럼 인생에는 인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더욱 헛되며 무상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헛된 인생에서 지혜는 무슨 소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또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다짐이나 결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현자(賢者)나 우자(愚者)나 결국에는 죽기는 매 일반인데 말이지요.
그러나 만일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라고 한다면, 그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내리고 있는 이런 식의 진단이 과연 온당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임종을 맞은 아비가 자식들에게 이런 유의 유훈(遺訓)을 남겨도 괜찮은 것입니까?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그의 고별 설교 본문으로 ‘솔로몬’의 <전도서>를 택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모세’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는 고별설교에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가 ‘바벨론’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살아가게 되었을까? 우연히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무슨 원인이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공동체의 지도자라면 어떤 진단을 내려주어야 할까?
이스라엘이 자녀교육을 위하여 한 권의 책을 선택한다면 <신명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솔로몬’의 일생에 관해서나, 또는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현실을 진단함에 있어서, 설교의 본문으로 <전도서>보다는 <신명기>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신명기>의 인과응보를 가르치고 싶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신비하여 그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언약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있으며 또한 그 언약에 철저하게 충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한 국가나 개인의 흥망성쇠가 우연이나 운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언약의 공식 즉 필연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전도서>가 바라보는 <신명기>는 지나치게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합니다. 보다 지적이거나, 오랜 신앙의 연륜을 가진 성도라면 십중팔구 이런 식의 설교에 대해서 ‘욥’처럼 분노하거나 냉소하거나 또는 혐오감을 드러낼 것이 분명합니다. “좀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해석은 없을까? 이런 해석은 정말 지긋지긋해.” 그러나 듣기 싫다고 해서 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주를 탐구할 때 망원경이 필요하다면, 인체를 연구할 때 현미경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신명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기막힌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사후(死後) 마치 ‘이집트’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살면서 수시로 조폭처럼 떼를 지어 나타나 재산을 약탈해 가는 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사기>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사사기>의 현실 인식은 철저하게 <신명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고별설교에서 경고한 바대로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믿지 않았고, 그분의 명령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열왕기>가 ‘솔로몬’의 일생을 진단하는 방식도 철저하게 <신명기>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왕국이 하나님의 언약을 업고 희망에 찬 출발을 하였으나, 결국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게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열왕기> 화자는 그 원인을 ‘솔로몬’의 “혼합주의”에서 찾고 있습니다(왕상 11). 즉 그는 온갖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영적 혼혈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지금 화자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그 땅의 주인도 아니며, 그 땅의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동방의 땅 ‘바벨론’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기약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한심한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화자는 <신명기>를 그의 설교 본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청중들에게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은 <신명기>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바, 화자는 이곳에서 열여섯 절에 걸쳐 소위 <신명기>의 핵심 신학적 주제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시대와 장소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천편일률적인 설교를 들어야만 할까? 역사를 두고 변하지 않는 두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본성과 그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철부지 어린 아이로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설교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언감생심 <전도서>의 인생무상의 노래를 듣고 있을 겨를도 자격도 없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신학은 보수적으로 신앙은 급진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신학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하자면 신앙은 그 열매나 잎에 해당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강의나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 볼 수는 있을까요?
흔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탈현대기”(post modernism)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신앙의 열정이나 흥미나 에너지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선교나 전도에 대한 열정의 엔진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보상심리인지는 몰라도 기독교회는 전통적인 복음 전도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선교를 대체하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사회봉사나, 복지나, 구제 등을 놓고 교회는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 또는 각종 재단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실적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열심입니다. 물론 기독교 선교가 전도와 봉사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있어 교회가 봉사나 구제에 힘을 쏟는다 해서 나무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칭찬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의 질문은 왜 교회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그 일에 매달려 경쟁을 벌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레아’와 ‘라헬’이 각기 자신은 갖지 못했으나 상대가 가진 것을 가지려고 질투하며 싸우는 바람에 정작 자신이 가진 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교회가 가르치지 않으면 누가 가르쳐야 합니까?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합니까? 교회가 다른 일 하느라고 이들 소중한 자산들을 다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70-80년대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목회자와 성도들의 열정적인 기도와 전도활동이 때문이었다는 연구 보고서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나 선교 방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지금도 안동의 <우리집 교회>에는 지도자의 밥 먹듯 하는 금식 기도, 하루에 세 번이나 드리는 열정에 찬 기도회, 중단 없는 <성경> 읽기 등이 <우리 집>을 지키는 버팀목이라고 장 전도사님은 말합니다. 필자가 잘 아는 한 권사님은 지난 십 사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가 예수님을 믿을 당시 자신의 부모님을 비롯해서 오남매 중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분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신명기>적 아전인수라고 비난하실 건가요?
과연 우리 교회는 성장할까요? 아니 수적인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과연 수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요? 사실 기도와 전도가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노인들 발 씻겨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 성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 된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은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보다는 어리거나 젊은 영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필자가 마치 본문의 주제가 전도인 것 같은 착각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필자는 지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행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흥미와 열정과 에너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본문이 주는 교훈은 <신명기> 신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고리타분한 그 가르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비범함이란 지극히 평범한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 고별설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 내용이나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고대의 조약 체결문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가지 양식이 혼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 본문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2. 본문은 <신명기> 사상의 압축 내지는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3. 오늘 나를 향한 교훈이나 경고는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