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4과
제 14과: 메롬 대첩과 북방 정벌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1:1-23약 36분 분량
메롬 대첩과 북방 정벌
(11:1-23)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1:15)
앞선 이야기에서 <여호수아서> 10장과 11장은 각기 “남방 정벌”과 “북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북방 정벌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두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과정을 보면 마치 “한국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전략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니면 ‘맥아더’ 장군이 본문을 통해서 암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전략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전투>(6장)와 <아이 성 전투>(7장)를 거치면서 ‘가나안’ 중부 지역에서 교두보를 일단 확보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의 남과 북은 자연스럽게 각기 고립되었으며, 상호 연락이나 연합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효과적으로 남과 북을 끊어 놓은 다음 남쪽 지역 공략에 나섭니다. 남방정벌이 끝난 후, 군사를 돌이켜 북방 진군에 나섭니다. 북방 정벌 역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전쟁은 단숨에 끝난 것으로 화자는 보고하고 있습니다(실은 정복전쟁은 7년여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만).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동일한 신학적 주제가 본문에서도 관통하고 있습니다.
. 문학과 역사
<여호수아>의 구조적 원리를 다시 요약해 본다면 그 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그 땅을 정복하라(1-12); (2) 그 땅을 나누어라(13-18); (3) 그 땅에서 살아라(19-24). 이 중에서 정복과 관련한 대 전제는 ‘헤렘’이며, 그 절정이 마지막 세 장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1) 정복전쟁의 발단과 배경(9장); (2) ‘기브온’ 대첩과 남방정벌(10장); (3) ‘메롬’ 대첩과 북방정벌(11장). 화자는 11장의 마지막 절에서 이 주제를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동시에 12장부터 전개될 두 번째 주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11:23)
따라서 11장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10장과는 아주 흡사하기 때문에 동일한 이야기 단위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두 곳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들 또한 이런 주장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두 장은 마치 시적 “유사병행”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구조적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각 장은 첫 단락에서 전쟁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물론 11장에서 ‘메롬’ 전투가 ‘기브온’ 전투 때처럼 두려움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화자의 침묵이 오히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메롬’을 포함한 북방 지역 주민들의 두려움이 ‘기브온’이나 ‘예루살렘’ 등을 비롯한 남방 지역 주민들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아이’ 성으로, 그리고 남방 지역 모든 성읍을 차례로 섬멸하면서 시시각각 자신들을 압박해오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북방 지역 주민들의 위기감과 두려움은 ‘가나안’ 남부 지역 주민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 역시 항복보다는 저항과 도전을 선택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응전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헤렘’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브온’ 전투의 우두머리는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고, ‘메롬’ 전투의 괴수는 ‘하솔’ 왕 ‘야빈’입니다. 이 두 전투는 ‘가나안’ 정복전쟁의 대표적이고도 핵심적인 사건으로서 각기 긴장과 서스펜스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왕이 주변 왕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서나(10:4; 11:3),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오는 다섯 왕들의 위용과 위엄을 통해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10:3, 5; 11:4, 5). ‘기브온’ 전투의 경우 ‘예루살렘’ 왕 ‘아도네-세덱’의 격문에 응하여 나아오는 주변 다섯 왕들의 위용과 위세를 두 번씩이나 상세하게 그려줌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가 하면, ‘메론’ 전투의 경우에는 ‘하솔’ 왕의 격문에 부응하여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가 말과 병거와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메롬’ 물가에 진치고 있다고 기술함으로써 전쟁의 위기와 긴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시> 2편은 이러한 전쟁의 긴장된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화자는 11장에서 두 가지 요소를 새롭게 추가함으로써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야빈’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말과 전차를 이끌고서 ‘메롬’ 물가로 나왔다는 언급입니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4절)
책 전체를 통해서 “말과 전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두 번째 새로운 요소는 ‘여호수아’가 ‘유다’와 이스라엘의 산지로부터 ‘아낙’ 자손을 몰아냈다는 언급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21-22절)
‘아낙’ 자손은 체격이 큰 족속으로서 다른 민족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낙’ 족속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민 13:22, 28, 33; 신 1:28; 2:10-11, 21; 9:2; 수 14:12, 15; 15:13, 14; 21:11; 삿 1:20). 이들은 ‘헤브론’ 지역에 살던 거인들로서 이스라엘이 두려워서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정도였습니다(민 13:22). ‘여호수아’ 시대에 이르러 ‘갈렙’에 의하여 쫓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두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두 가지 다른 점에서 우위를 보이는 대적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는 무기이고(1-20절), 다른 하나는 신체적 조건입니다(21-22절).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긴장되는 분위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으로 깨끗이 날아가 버리면서 전쟁은 갑자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10:10-15; 11:6)
이 신탁 이후 고조되고 긴장된 전쟁 분위기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단숨에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아모리’ 연합군이 패하여 도주하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7-9). 10:10-15; 11:
비록 이곳에서 우박이나 태양의 운행 중지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없지만,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런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전차들을 불사른 행동은 단순히 승리의 결과라기보다는 북방 정벌을 가능하게 한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요인은 기적 말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순종입니다: “여호수아가...그대로 행하여...”(10:9; 11:9). 그는 두 전쟁에서 모두 기습 공격을 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10:9; 11:7).
두 번째 단락에서도 동일한 모티브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단순히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잔당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하고 소탕하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이스라엘은 연합군의 우두머리를 끝까지 추격하여 잡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잔당을 격멸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헤렘’의 모티브와 함께 ‘순종’의 모티브가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장의 두 단락을 문학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직접 연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두 번째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 중 일부가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순종’의 모티브와는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방 정벌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11:18), 북방 지역의 그 많은 성읍 중에서 ‘하솔’ 성만을 불태웠을 뿐이라는 사실(11:13) 등이 그렇습니다. 두 단락이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헤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부치셨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0:39; 11:15).
두 이야기의 세 번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이 각 지역에서 정복한 성읍들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10:40-41; 11:16-20). 단락의 말미에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도 동일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20절)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공히 신학적 결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11장의 경우 그 결론은 두 이야기 전체(10-11장)에 대한 결론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단순히 북방 지역뿐만 아니라 남방 지역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낙’ 족속에 대한 자료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거인(巨人)들로서 ‘갈렙’이 쫓아낸 자들입니다. 덧붙여 마지막 구절의 문학적 기능은 <여호수아서>의 제 1부 전체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제 2부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23절)
신학과 신앙
1. 메롬 대첩(1-9절)
‘기브온’을 포함한 남쪽 지역을 성공적으로 정복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메롬’ 전투를 시작으로 북방 정복에 나서게 됩니다. 이번 전투 역시 선제공격이라기보다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방어전의 성격이 짙습니다. 북방 연합군의 우두머리는 ‘하솔’ 왕 ‘야빈’으로서, <사사기>는 ‘야빈’을 ‘하솔’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으며(삿 4:2, 7, 17, 23, 24), <시편> 기자도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시 83:10). 그런데 ‘야빈’에 관한 기록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라빈’은 전쟁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사사기>에서는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삿 4-5장). 이런 모순에 대해서 혹자는 ‘라빈’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아도니-세댁’처럼 선제공격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1절상)
그러나 북방 연합군의 규모나 세력은 남방 연합군에 비해서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화자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왕들과 통치 지역을 대부분 실명(實名)이 아닌 익명(匿名)으로 거명하고 있으며, 북방에 산재해 있는 모든 지역과 그곳 주민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항하러 나오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10장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하하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2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3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4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5이 왕들이 모두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 가에 함께 진 쳤더라(1절하-5절) 북방 정벌에 포함된 지역들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는 지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T. C. Butler, 126-127쪽.
북방 연합군의 수에 대한 화자의 묘사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인산인해 전술을 연상시켜주는 듯합니다만, 이런 표현을 통해서 화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상상해 봅시다.
우선 화자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듯합니다: “이 많은 적들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든 족속들은 철저하게 궤멸시켜야 하고,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모든 지역들은 이스라엘에게 돌아가야 한다”입니다. 지금 적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땅은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던 그분의 땅이며(창 15:18-21),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약속의 땅이었습니다(출 3:8, 17). 따라서 지금 다른 족속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거룩한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참고: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출 33:2).
지금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그 수에 관계없이 철저하게 궤멸시켜야 한다는 ‘헤렘’의 모티브를 화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신 7:1);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신 20:17).
화자가 강조하는 바는 또 있습니다. “말과 병거”에 관한 언급입니다(4절). 전쟁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말과 전차 등의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적군은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화력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쟁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 결과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전 1500년 경 이후부터 근동지역에서 말과 전차는 전쟁의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군사적 힘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각 부족 국가들도 나름대로 이들 현대식 무기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무기들을 갖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신 17:16). 오히려 장차 올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는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당나귀를 타고 올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슥 9:9). 실제 적들의 이러한 첨단 무기들은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과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17:16-18; 삿 1:19; 4:13).
화자가 강조하고자 바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초자연적인 개입이 그것입니다. 구원의 신탁이자 반복해서 등장하는 ‘헤렘’에 대한 선언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6절)
<시편> 기자의 이런 상황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과연 전쟁은 너무 싱겁게 끝나버리고, 이야기는 곧바로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고 소탕하는 장면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7-9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두 진영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을 길게 서술하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막상 전투 개시 이후의 상황을 아주 짧고도 간략하게 기술함으로써 이 전쟁이 과연 ‘여호와’의 전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술은 ‘기브온’ 전투에서 사용했던 바 있던 비장의 무기, 즉 “기습 공격”이었습니다. 적이 자랑하던 엄청난 화력은 이 무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11:9).
죄 없는 짐승들을 이처럼 대한 것이 한 편으로 잔인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가축의 힘줄을 끊는 것은 그 존재 및 사용 가치를 없애버리는 잔인한 행위로서, 이스라엘이 ‘세겜’에게 취한 복수의 한 형태였습니다: “그들이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혈기를 끊었음이로다”(창 49:6).
전차나 말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쪽에서 보자면 어쩔 수 없는 작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후대 다윗도 블레셋 왕 ‘하닷에셀’과 전쟁을 치를 때 마찬가지로 적군의 말들에 대해서 꼭 같은 조처를 취한 바 있습니다(삼하 8:4).
더 나아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과 전차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 위에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음을 화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9절상). 하나님께서는 적군의 첨단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고(6절하),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충실히 따라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전차를 불로 태워버립니다(9절하).
이스라엘은 단순히 ‘메롬’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 김에 ‘가나안’의 북방 한계선 ‘시돈’과 서쪽 지중해 한계선 ‘미스르봇마임’, 그리고 동쪽 한계선 ‘미스바’까지 밀어붙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궤멸시켜버림으로써 북쪽 땅도 완전히 정복하고 맙니다(8절).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과 ‘여호수아’의 순종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성취입니다. 11:8의 언급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보다는 기자 자신의 신학적 진술로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돈’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앗셀’ 부족의 북방 한계에 위치한 지역으로서(19:29), 이 부족이 한 번도 정복해 본 적이 없었고(삿 1:31), ‘여호수아’ 자신도 ‘미스르봇마임’을 포함한 ‘시돈’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수 13:1-6).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 같습니다(삼하 24:6). 따라서 화자가 11:8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의 모티브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모티브의 반복 또 반복입니다.
2. 하솔과 북방 정벌(10-15절)
‘하솔’ 왕국은 청동기 당시 ‘가나안’ 지역을 수 세기 동안 지배하던 군사적 대국이었다고 합니다. 화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11:10)
북방 정벌 이야기의 첫 번째 단락을 ‘하솔’ 왕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것처럼, 두 번째 단락에서도 다시 그를 언급함으로써 이 왕국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려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솔’을 특별히 지명하여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맹주로서 권세를 누리던 막강했던 그 왕국이 단 하루 만에 지상에서 사라지지는 것을 독자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하솔’의 편에서 보면 치욕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화자의 편에서 ‘헤렘’의 연장일 뿐입니다. ‘야훼’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땅이므로 이스라엘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솔’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오래 전에 이미 예고된 것일 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신 20:17)
그리고 그와 함께 자발적이든 억지로든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다른 왕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줄을 잘못 선 결과였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화자가 이 단락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입니다. 이 모든 과업을 이룸에 있어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다시 한 번 큰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오직 그만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이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절)
그러나 ‘여호수아’를 향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가 알고 있는 옛 전승을 다룸에 있어 보다 솔직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하다거나 전혀 실패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북방 정벌을 통해서 빼앗은 그 많은 성들 중에서 불태워 없애 버린 성읍은 ‘하솔’뿐이었으며(13절), 여전히 많은 지역이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고 말합니다(수 13:1-6).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그 모든 과업을 다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서로 모순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처럼 논리적으로 모순된 일이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났다는 점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여호수아’를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아 살아가야 했습니다만, 현실 생활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솔로몬’도 ‘다윗’도 그 어떤 왕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처럼 완벽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조차도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화자가 강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이점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의 마지막 구절은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권면이자 설교입니다.
3. 정복지 요약(16-20절)
세 번째 단락은 이야기의 잠정적인 결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방 정벌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 문제가 계속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13:1-6; 15:63; 16:10).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땅은 모두 이스라엘의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는 것일까요? 화자는 이곳에서 ‘가나안’의 동서남북 전체를 망라하는 지명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16절)
이 구절은 형식상 10:40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10:40).
그러나 그 기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단순히 북방 지역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전체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역을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지나(유다 산지), 온 남방(네게브), ‘고센 땅’, 평지(세블라), 그리고 ‘아라바’는 모두 남쪽 지역에 속한 지명들입니다.
화자는 정복 전쟁을 치른 기간에 대해서도 원래의 전승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모든 지역을 단숨에 정복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즉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수행했다고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복과 정착 이 모든 작업이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고 믿는 쪽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진술은 앞의 것들과 모순되기도 하지만 그 차이에 크게 신경 쓸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를 따라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게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기브온’에서 저질렀던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그 땅의 모든 족속들을 전멸시켰습니다(18절). 전쟁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의 나머지 족속들이 ‘기브온’처럼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맺기는커녕, ‘이집트’의 ‘바로 왕’처럼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항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20절)
이 구절은 일반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순종’이지 ‘자비’나 ‘긍휼’이 아닙니다. 그 땅의 족속들은 ‘헤렘’일 뿐입니다. <신명기>에서도 동일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신 7:1-3)
이들 명령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분은 진정 이방인들에게만 무자비한 분이십니까?
4. 결론(21-22절)
이야기의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아낙’ 족속을 멸절시켰다는 언급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21-22절)
이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38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했던 원흉들입니다(민 13:28, 33; 신 1:28).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역시 전멸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고(신 9:1-3), 이제 비로소 실현된 것입니다. ‘가나안’의 가장 악독한 무리들조차 다 사라졌으므로,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이방 문화에 오염됨이 없이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차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강조일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화자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여운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가사’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다가 이후 <사무엘서>나 <사사기>에서 다시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삼상 17:4; 삼하 21:18-22).
교훈과 적용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여론 조사에서 국가 정책 순위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있습니다. 경제가 그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늘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입니다. 상대적으로 이념이나 사상은 오히려 경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대부분 응답합니다. 그래서인지 역대 정권마다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소위 각종 ‘게이트’가 끊이지 않고 발생합니다. 특히 한 정권이 끝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어김없이 지난 정권 실세들이나 친인척들이 줄줄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일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하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지극히 한가하게 다른 주장을 펼치는 자가 있습니다. <신명기> 화자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후).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통찰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의 금식 후에 배와 등이 거의 맞붙어 있었을 시점에 이 말씀에 의지해서 그를 유혹하던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신 바 있다고 했습니다: 땅과 율법과 그리고 지도자. 이 셋은 구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땅과 율법은 각기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종류의 양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땅이 가시적(可視的)이고 물질적인 양식이라면, 율법은 비가시적이면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둘로 나누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영혼이 없는 육체 또한 한낱 유기물질에 불과합니다.
<신명기>에서 “율법과 땅”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이자, 조건과 성취의 관계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그 땅을 얻을 수도 없고, 그 안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기브온’ 전투에서 ‘아모리’ 족속들은 ‘여호수아’의 군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고 알면서도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대항하다가, 끝내 추방과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아이’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점 이스라엘이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땅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가나안’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불순종과 반역의 세월을 살다가 결국에는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나왔던 ‘갈대아’의 ‘우르’ 땅으로 다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개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한 조그만 공동체에게나 해당되었던 고리타분하고도 구시대적인 종교적 유산이 아니라, 시대를 두고두고 배우고, 지켜야 할 영원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양식(糧食)임을 압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 우리의 정신적 빈곤과 타락의 중요한 원인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역설적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가 이루어 놓았던 엄청난 물질적 풍요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동안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의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영적각성과 부흥을 성취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원하고 있기나 한가? 나는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이기만 하는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희망과 투지를 불태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들 질문이 본문의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메롬 대첩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성공의 비결은 성공사례를 그대로 따라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역할 모델의 존재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생이자 선지자의 모델은 역시 ‘모세’나 그의 부관 ‘여호수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수행했던 방식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는 우선 전체 땅의 허리에 해당하는 ‘길갈’을 취하여 총 지휘 본부로 삼고, 남과 북을 끊어놓은 다음, ‘기브온’ 전투를 필두로 남방 지역 전체를 일차적으로 정벌합니다(10:1-43). 이어서 방향을 북으로 돌려 ‘메롬’ 전투를 시작으로 북방 정복에 나섭니다(첨부 지도 참고).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대단한 군사 전략가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화자가 전하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술 방식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복전쟁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모든 전쟁의 발단은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땅의 거민들이 선제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왜 이들이 선제공격을 감행했을까?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무슨 두려움? 누구나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갖추거나 심하면 싸움을 걸어오게 마련입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격파하고 그 땅의 새로운 군사적 강자(强者)로 떠오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가나안’의 원주민들의 마음이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하든지 또는 대항하든지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시시각각 그들의 명줄을 압박해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화자는 먼저 ‘기브온’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들은 떠오르는 태양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여 머리를 숙이고 그의 보호 아래 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체면이고 의리고 할 것 없이 모두 내던져버렸습니다. 결과는 몰살의 위험을 넘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인 결과이지요.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도니-세댁’은 정 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땅에 그동안 지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새롭게 나타난 이방인에게 머리를 숙일 수야 없지요. 자존심이 상할 일입니다. 더구나 한 때 자기 밑에서 빌붙어 살던 ‘기브온’ 녀석들이 나를 버리고 새로운 강자에게 붙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멸감과 함께 배신감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일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이없게도 몰살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들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도 하지요. 자신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함께 했던 다른 친구들마저 모두 사지(死地)로 내몰아버렸습니다. 이 친구들 모두 줄을 잘 못 선 것이지요.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을 위한 경고 한 마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 1:7)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은 결국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모하고 무지하기로는 ‘하솔’ 왕 ‘야빈’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자입니다. 이 자 역시 ‘아도니-세댁’처럼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선제공격을 선택합니다. 무언가 믿었던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군대 수자와 첨단 무기였습니다. 이번에도 ‘야빈’의 격문을 듣고 모여든 군대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고, 말과 전차 역시 그 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들이 지금 ‘메롬’ 냇가에 모여 이스라엘을 마주하며 진을 치고 있습니다. 깃발은 하늘을 뒤덮고, 말발굽과 전차 끄는 소리는 땅을 뒤흔들며, 군인들의 함성은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전차는커녕 말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습니다. 수적으로도 절대적인 열세입니다. 도무지 믿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모로 보드라도 기가 죽어야 할 쪽은 이스라엘 이지 ‘야빈’이 아닙니다. 혹시 남방 정벌에서 경험한 바 있던 초자연적인 기적이 이번에도 일어날까? 그러나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입니다. 새로운 현실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 다른 두려움 가운데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처럼 연약하게 무릎 꿇고,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기적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6절). 전쟁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헤렘’ 즉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노래가 혹시 이런 상황을 회상하면서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과연 전쟁은 아주 싱겁게 끝이 나버립니다. 이스라엘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고 소탕하기 바쁩니다(11:7-9). 한 판 싸움이 붙기 전에 두 진영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던 긴장감을 길게 서술하던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야훼’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박이 내린 것도 아니고, 태양이 멈추어 선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기브온 전투’에서처럼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 전부였습니다(사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유일한 무기입니다만).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무기를 가지고 적이 그렇게도 의지하고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최신 병기들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9절).
그러나 아무 죄 없는 짐승들까지 이처럼 무참하게 죽여야만 했을까요? 전차나 말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이런 만행(蠻行)도 어쩔 수 없는 작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과 전차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자비”나 “긍휼”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 모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조차 ‘야훼’ 하나님을 향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9절상). 하나님께서는 적군의 첨단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고(6절하),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메롬’의 승리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친 김에 그 땅의 북방 한계선 ‘시돈’과, 서쪽 지중해 한계선 ‘미스르봇마임’, 그리고 동쪽 한계선 ‘미스바’까지 밀어붙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궤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과 ‘여호수아’의 순종이 없이는 불가능한 성취일 것입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모티브의 반복 또 반복입니다.
하솔과 북방 정벌
북방 정벌의 중심에는 ‘하솔’ 왕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이 오기 전 수 세기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왔습니다. 화자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 였더니”(10절).
왜 ‘하솔’입니까? 왜 화자는 이 왕국을 특별히 선택하여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일까? 짓궂기도 하고 얄밉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헤렘’의 모티브를 만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맹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하솔’이 단 하루 만에 그 땅에서 사라져버린 사실을 설명할 방도를 마련해 보라는 화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솔’의 편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야말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이루실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하솔’에게 붙어 줄을 잘 못 섰던 다른 왕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이 역시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해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 알면서도 대항하고, 거부합니다. 줄서기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다니는 넓은 길입니까 아니면 불편하고 고독한 좁은 길입니까?
이 모든 과업을 완수함에 있어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다시 한 번 큰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오직 ‘여호수아’만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이룩한 자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
그러나 ‘여호수아’를 향한 이러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조차 숨길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화자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하거나 전혀 실패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정복한 북방의 모든 성읍들 중에서 오직 ‘하솔 성’만 불태웠을 뿐이며, 여전히 많은 지역은 정복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수 13:1-6). 이처럼 서로 모순된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그 모든 과업을 다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지도자의 원형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이나 ‘다윗’과 같은 왕들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에도 따라 살지 못한 백성이 어찌 그의 사후에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에게는 ‘여호수아’를 능가하는 참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나는 그분의 삶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역할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놓인 영적인 전쟁을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정복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황무지나 산지나 평야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런 나를 향해서 지금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질책이자 권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선택과 유기
화자는 정복지를 요약하면서 ‘가나안’에서 ‘기브온’ 주민 외에는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성읍이 하나도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9절). 이들 모두가 하나 같이 마음을 악하게 먹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진술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20절).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이집트’의 ‘바로’ 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 대하셨습니다. 즉 그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역시 처음부터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가혹한 하나님의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순종” 이지 “자비나 긍휼”이 아닙니다. ‘가나안’과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은 단지 ‘헤렘’일 뿐입니다. 즉 그들은 멸망의 대상 이지 자비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명기>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과는 어떠한 언약도, 결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서도 안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망치는 것은 값싼 인본주의적 박애정신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반역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순종은 생명을, 저항은 죽음을.”
화자는 마지막 두 절에서 ‘아말렉’ 족속을 언급하면서 절정의 여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아말렉’ 족속까지 궤멸시킬 수 있었다는 진술이 그것입니다(21절). 왜 ‘아말렉’입니까? 이들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 년을 허송하게 만들었던 원흉들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던 자들이었습니다(민 13:28, 33; 신 1: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역시 전멸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고(신 9:1-3), 그 약속이 비로소 실현된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이방 문화에 오염됨이 없이 거룩하고 순수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하던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들도, 그렇게도 무섭던 ‘아낙’ 거인들도 하나 남김없이 철저하게 궤멸당하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에 따라, ‘여호수아’를 통하여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실수도 저질렀고, 때로는 어정쩡하게 싸우다 만적도 있었고, 아직도 싸워서 뺏어야 할 땅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 그 땅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숙제가 있다면 노동과 안식을 통해서 서로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여호수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할 ‘가나안’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히 4).
토의 문제
1. 우리가 어느 누구와 약속을 했을 때, 그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서원에 관해서 주신 유명한 충고도 함께 토의해 봅시다. 지난 한 주 내가 약속한 것은 무엇이며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기브온’과 ‘아모리’의 다섯 왕들이 취한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해 봅시다. 이들의 선택은 ‘라합’의 선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라합’과 그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비교해 봅시다.
3. 지난 한 주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싸워주신 영역이나 체험이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나누어 봅시다.
4.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나 조언자가 나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그의 어떤 부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까? 각오와 결단을 피력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