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3과
제 13과: 남방 정벌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0:1-43약 50분 분량
남방 정벌(征伐)
(10:1-43)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10:41-42)
<여호수아서> 10장과 11장은 각기 “남방 정벌”과 “북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투>(6장)나 <아이 성 전투>(7장)를 통해서 ‘가나안’ 중부 지역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이후에 수행한 것입니다. 이 두 번에 걸친 정벌전은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방어전의 성격이 더 짙습니다. 즉 먼저 공격을 감행한 쪽은 이스라엘의 승승장구에 두려움을 느낀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이 구축한 반 이스라엘 연합 세력입니다.
첩그러나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이들 연합 세력을 격파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처럼 승승장구, 연전연승 했던 시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시체 말로 “개 발에 땀났습니다.” 한 개인이나 국가가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이 승승장구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두 번의 정벌 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승리는 “기브온 언약”(9장)의 실패에 바탕을 두고 있음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가나안 정벌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화자는 10-11장에서 다시 <정복 이야기>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10-11장은 ‘가나안’ 정복 이야기로서, 9장의 첫 두절에서 끊어졌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9:1-2)
이어지는 10장에서 “남방 정벌”, 그리고 11장에서는 “북방 정벌”을 다루고 있는데, “남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네 개의 단락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1) ‘기브온’ 대첩(10:1-15)
(2) ‘막게다’의 심판(10:16-27)
(3) 남방 대장정(10:28-39)
(4) 결론(10:40-43)
양식과 배경.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역사 편찬도 그렇습니다. 역사학자의 의무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의 주제를 위해서 그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전승이나 자료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취사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한 자료들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또한 이들을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일련의 문학적인 작업을 거치기도 합니다.
“남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도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전승들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본문이 여러 개의 자료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전체 내용이 한 개 이상의 양식(genre)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1) 이야기(說話); (2) 시(詩)(예: 야살의 시). 그리고 각 이야기는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쟁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주제를 반복하고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화자 자신의 신학적인 결론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각 단락의 이야기는 원래의 배경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화 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브온 대첩(1-15절). 첫 번째 단락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성전(聖戰)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배경이 먼저 등장하면서(1-2절), 이야기는 곧바로 긴장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의 일차적인 당사자인 ‘기브온’과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이 각기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우군(友軍)을 향해 지원과 동맹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4절상)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6절하)
이어서 아주 친숙한 하나님의 약속, 즉 구원의 신탁에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고(8절), 전쟁은 예상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9-11절). 이스라엘의 승리를 알리는 전형적인 결구(結句)가 이야기의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하)
그러나 화자는 당시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을 고대 시가 <야살의 노래>에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절정의 여운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찌어다(12절하-13절상)
현대의 독자들은 화자가 본문에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을 통해서만 그러한 책이 존재했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이 책에서 힘주어 노래하고 있었던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비록 ‘기브온’의 요청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쟁이었기에 그분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전쟁은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이처럼 화자는 두 번에 걸친 절정의 끝에 다음과 같은 마침표로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15절은 43절과 함께 마소라 사본에는 있으나 <칠십 인 역>에는 없는 구절로서, 아마도 후대의 삽입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갈’을 강조하고 있는 편집자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소는 ‘여호수아서’에서 상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로 돌아왔더라(15절)
막게다의 심판(16-28절). 형식 상 두 번째 단락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앞의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부록 내지는 후기(後記)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섯 왕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16절)
다만 이곳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편집적인 재구성을 통해서 정복 전쟁(10-11장)에 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은 새로운 이야기로써 갖추어야 할 도입부 또는 배경 설명이 전혀 없고 오히려 무대 장면만을 달리해서 첫 번째 이야기와 차별을 시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 무대가 ‘기브온’과 ‘벧호론’ 이라면(10-11절), 이곳에서는 ‘막게다’가 주 무대입니다(16절).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을 “막게다의 심판”으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첫 번째 단락의 끝에(10절) ‘막게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곧바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아직 살아있는 다섯 왕들의 소재를 알려 오자말자(17절), ‘여호수아’가 즉각적으로 대응책을 하달합니다(18절).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19-20절)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단락의 주제에 혼란을 가져옵니다. 즉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적의 후군을 소탕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19절)
끊어졌던 이야기는 다시 그 무대를 ‘막게다’ 동굴로 돌려놓고 있습니다(21절). ‘여호수아’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새롭게 명령을 하달하고(22절), 백성들이 명령을 수행하며(23절), ‘여호수아’가 다시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면서(24절), 예의 그 유명한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25절).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 죽여 다섯 나무에 매어 달고 석양까지 나무에 달린대로 두었다”는 마무리 언급으로(26절), 두 번째 이야기가 끝을 맺는듯하다가 아주 어색하게 기원론적인 언급을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하).
전체적으로 두 번째 단락은 구성이 산만하여, 처음 가졌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적의 후군 잔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19-20절), 또는 다섯 왕들을 매달아 죽인 이야기를(21-27절) 하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 질문이야말로 두 번째 단락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신학적인 의도는 보다 분명해 보입니다. 즉 21-27절을 이야기의 주된 내용으로 볼 때, 곳곳에서 반복되는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10:19하, 25. 한 편 19-20절의 내용은 본궤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20절 끝의 언급-“...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읍으로 들어간 고로...”-은 문학적으로 세 번째 단락을 암시하고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성읍이야말로 다섯 왕들의 본거지로서 남방대첩 이야기(29-39절)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남방 대장정(29-39). 세 번째 단락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작과 결론이 비교적 뚜렷하기 때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게다’의 전투에 이어 남방 다섯 왕들과 그들의 성읍을 차례로 파괴하였다는 종합적인 진술은 정복 이야기 전체를 요약하고 회고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하나의 이야기를 끝맺는 전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39절)
결론(40-43). 세 번째 단락이 정복 전쟁에 관한 요약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화자 자신의 전쟁에 대한 신학적 요약이자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대의 편집적인 손길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부분으로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모티브를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여호수아의 순종; (2) 헤렘; (3) 하나님의 전쟁. 특히 마지막 구절은 상당히 의도적인 결론으로서, 이미 첫 번째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15절)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43절)
본문에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양식들을 살펴보면, <성전 이야기>(the holy war narrative)에서부터, 산문적인 서론과 결론을 포함한 시 <야살의 노래>, 기원론적인 삽입, 정복 여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대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자료와 편집. 이처럼 본문의 구조와 양식이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사실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전승들 또한 아주 다양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전승들이 모여 본문을 구성하고 있을까? Butler, 112-113쪽(참고도서, 1).
첫 번째 이야기 <기브온 전투>의 출처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많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덱’으로 불리는 고대 ‘예루살렘’ 왕에 관한 전승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 전승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反) 기브온 연합군”을 패배시켰는가를 다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브온 언약”에 관한 이야기도(9장) 실은 동일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사울’과 ‘솔로몬’ 왕 시대에 ‘기브온’ 족들은 이 언약을 바탕으로 자신들에게 대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줄 것을 왕에게 요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편 화자는 이 전승을 “기브온 전투”의 신학적 근거로 삼아, <성전(聖戰) 이야기>의 한 예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전승, <벧호른과 아세가의 전투>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삽입하고 있습니다(11절). 이 두 전승을 결합하여 <여호수아서> 특유의 신학적 모티브들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지요:
(아도니세덱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으니(2절)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8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하).
<야살의 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켜주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업을 기리고 노래하는 이러한 시를 구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출 15:21);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5);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15; 21:27-30).
이 시를 인용하는 목적도 승리의 기쁨이나 감동을 더 이어가자는데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의 정확한 출처나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기브온 전투” 당시에 탄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아주 특이한 기도의 내용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12절하)
즉 이스라엘은 야간 기습 작전을 통해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만큼, 달이 기울고 태양이 떠오르는 상황, 즉 밤이 지나고 낮이 밝아오는 상황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배경이 어떠했든 화자는 오히려 정반대되는 상황에서 같은 노래를 도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반대되는 상황이라 함은 전투에서 도망하는 잔당들을 추적하고 도륙하는 상황을 말합니다(10절하). 이 경우라면 태양은 오히려 중천에 더욱 오래 머물면서 도망하는 적군들이 잘 보이도록 해야 할 것인즉,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개입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13절하) 12절을 단순히 시적인 과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실제 그날 우주적인 기적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미해결의 난제(難題)로 남아있습니다. 보수진영에서는 당연히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인가 하면(화자 자신도 13절에서 그렇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보나 자유주의적 진영에서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여호와의 전쟁” 모티브를 계속 이어가면서 ‘여호수아’의 특별한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막게다’ 동굴에 갇힌 다섯 왕들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23절) <막게다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왕들이 처음 연합 세력을 형성하여 모였던 곳은 ‘벧호른’이 아니라 ‘막게다’ 근처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화자는 그 내용을 <기브온 전투>와 <막게다의 추적 이야기>에 똑같이 도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동일한 전승이 두 이야기에서 공히 나름대로 다른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사실 <막게다의 심판>에서는 잔당들에 대한 추적과 소탕이 주된 관심사이므로, 이 다섯 왕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둔 것도 이 지역의 잔당들을 완전히 다 소탕할 때까지 일시적인 조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입하고 있는 기원론적 언급,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는 물론 ‘헤렘’ 모티브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남방 정벌”의 남은 여정도(29-39절) 실은 두 번째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서, “추적과 소탕”이라는 주제를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립나’에서 ‘라기스’와 ‘에글론’을 거쳐 ‘헤브론’과 ‘드빌’에 이르는 ‘가나안’ 남쪽의 다섯 성읍을 차례로 정복해 가는 이야기 역시 원래의 전승에서 일부 취하여 동일한 주제를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40-43절) 이 점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단락은 이야기 전체의 종합적인 결론에 해당됩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그동안 계속 강조해왔던 일련의 모티브와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데, 강조가 지나쳐 이야기의 다른 부분과 상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40절의 선언은 동일한 책의 다른 부분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책과도 상호 모순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수15:13-19; 16:10; (2) 삿 1:10-15.
신학과 신앙
1. 기브온 전투(1-1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참여했던 다른 전투들과는 달리 공격보다는 방어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11장에서 다루고 있는 북방 정벌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헤렘’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다섯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기브온’을 돕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이 연합군은 이스라엘보다는 ‘기브온’을 치기 위해서 결성된 군대입니다. 화자는 첫 두 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이스라엘이 참여했던 모든 정복 이야기들을(7-9장) 하나로 묶어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1절)
이들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모리’와 ‘가나안’의 다섯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브온’은 배신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신자를 응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아도니세덱’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창세기 14:18; 22:14 등에서도 이 이름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도니-세덱은’ ‘아돈’과 ‘세덱’의 합성어로 볼 수 있는데, ‘아돈’은 ‘주’(主)를 의미하고 ‘세덱’은 ‘의롭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종합하면 “나의 주는 의로우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2절)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가나안 주민들의 “두려운 반응”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온 모티브로서,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들려준 ‘여리고’ 주민들의 반응이 처음이자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2:9).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듣게 되면 정 반대되는 두 가지 반응이 생겨납니다. 그 하나는 두려움, 승인, 굴복 등의 반응이고, 2:9-10; 5:1; 9:3-4, 9-10.
다른 하나는 적대감과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9:1-2; 10:1-3; 11:1-5.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모리’ 다섯 도시 국가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기로 선택합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3-4절).
‘아도니 세덱’은 자신의 공격목표가 이스라엘이 아닌 ‘기브온’이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참여하도록 유도했으니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기로 작정한 셈입니다.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즉각적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하는 쪽이나 공격을 당하는 쪽이나 후원자의 도움을 요청하는 표현이 너무 흡사하여 흥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6절)
‘기브온’의 요청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신속하고도 관대한 자세로 응답합니다. 단순히 다섯 왕들이 아닌 ‘아모리’의 모든 왕들을 물리치기 위해(6절), ‘여호수아’는 밤중에 ‘길갈’로부터 ‘기브온’으로 모든 용사들을 보냅니다(7, 9절):
7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9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7, 9절)
이곳에서 화자가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비록 속아서 맺은 것이라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히 개인이나 국가 간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차원에서 결정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 성전(聖戰) 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돕기 위해 달려간 것도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때문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위해서 싸웠다는 표현도 그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8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10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전쟁에서 ‘기브온’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분명이 이들 중에도 용사가 많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보다 하나님의 행위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보고가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
파괴적인 우박을 “던지신” 하나님의 행위는 후에 ‘여호수아’가 다섯 왕들의 시체를 ‘막게다’ 동굴에 “던진” 행위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우박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을 피해 적군에게만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출애굽”의 기적을 연상시켜줍니다. 당시 “악질”과(출 9:4, 6) “우박”과(출 9:26) “흑암”(출 10:23) 등의 재앙도 이스라엘을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야살의 노래>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를 소개하지 않고는 이야기를 마치기가 어딘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요? 화자는 <야살의 책>에서 “기브온 전투”에 관한 전설적인 옛 노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살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을 12-14절 전체로 볼 것인지, 또는 12절하-13절상까지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후자의 견해를 취할 때 12절상과 13절하-14절은 화자가 해설을 위해서 추가로 삽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 정확한 상황이나 배경은 베일 속에 가려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에서도 「야살의 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삼하 1:18).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 할지어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12절하-13절상)
화자는 마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믿지 못하겠다는 독자들 앞에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과연 우주의 역사에서 이런 엄청난 대 격변이 실제 있었는가에 관해서 과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화자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의 진위 여부를 증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다만 성경 해석의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과연 이 구절이 기적을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과 <성경>의 특정 구절이 기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해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어떤 시(詩)의 몇 행(行)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에서는 보통 문자적인 의미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대치됩니다. 또한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번역이 정확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동사 “머무르다”(ם 다맘)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remain motionless) 또는 “잠잠하다”(be quite), “침묵을 지키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태양을 향해서 “머무르라”고 했는지 또는 “열을 발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화자는 전자(前者)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13절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야살의 책>의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무어라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향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은 태양이나 달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의 세계관을 통해서 볼 때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겠으나,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태양이나 달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것조차 꺼려하면서 이들을 각각 ‘큰 광명’과 ‘작은 광명’으로 부를 정도였으니 말입니다(창 1:14-19). 자칫 ‘여호수아’가 이들 천체를 향해서 기도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분명 우상 숭배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천체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었으며, 천체들에 대해서는 다만 명령을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12절)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호수아’입니다. 실제 화자는 태양과 달이 ‘여호수아’가 요구한대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고 전합니다. 태양계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4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14-15절)
그리고 화자는 “온 이스라엘이 길갈로 돌아왔다”고 진술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렘’ 모티브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길갈’은 ‘세겜’과 함께 신학적으로 중요한 장소임을 앞의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본문이 “바벨론 포로기” 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라면,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과거의 영웅적인 사건을 회상하고 회고하기보다, “고토(故土) 회복”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도전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을 계획하고 군대를 모으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임을 권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막게다의 추격(16-28)
두 번째 에피소드는 ‘기브온’에서 ‘막게다’에 이르는 대 추격과 소탕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만, 화자는 계속해서 “추격”의 모티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19절)
이 전쟁은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승리를 이루려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기브온’의 승리에 만족하며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자 소명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암시해 놓은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10절)
즉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제가 다름 아닌 “막게다의 추격”이 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길갈’로 철수해 버렸고(15절),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 버렸습니다. 잔당들은 아직 남아있고, 특히 적장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막게다’의 동굴에 피신해 숨어있는데도 말입니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처음과 두 번째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처음 이야기의 끝에 이스라엘이 ‘길갈’로 돌아갔다는 언급은 전쟁을 마치고 철수했다는 의미일 것인데, 두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거나, 아니면 철수한 이스라엘이 다시 ‘막게다’로 되돌아 와 전쟁을 재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어느 경우든 이야기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료비평학자들은 이를 두고 두 이야기가 다른 전승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식 이야기 특유의 “중첩과 반복”의 기법을 상정한다면, 반드시 자료비평적인 논리에 동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즉 화자는 두 번째 단락에서 동일한 <기브온 전쟁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즉 이곳에서 새로운 모티브를 도입하면서 ‘기브온’ 전쟁의 신학적 주제인 ‘헤렘’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티브란 ‘여리고’ 전투에서 본 바 있는 “하나도 남김없이”와 관련된 것으로서,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두 번째 단락의 제목을 “막게다의 섬멸” 또는 “막게다의 심판”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16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16-17절)
혹시 ‘여호수아’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막게다’ 동굴에서 생명을 부지하기에 급급하게 되어버린 ‘아모리’의 다섯 왕들을 동정해서 살려주어야 할 것인가, ‘기브온’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의 이런 속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달려와 다섯 왕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요지인 즉은, “계속해, 계속해, 고삐를 늦추지 말고 계속 추격해.” 두 번째 단락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정보를 들은 ‘여호수아’가 즉각적으로 행동에 돌입했다고 함으로써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19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재촉하여 잔당 소탕 작전을 펼칩니다. ‘막게다’ 동굴로 피신해 들어간 다선 왕들을 지키게 하고(18절), 나머지 잔당들을 크게 도륙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18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크게 도륙하여 거의 진멸시켰고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간 고로,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20-21절)
이 대목과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렘’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순종과 지도자 ‘여호수아’의 권위에 대한 모티브와 함께 어우러져,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신학적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22때에 여호수아가 가로되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매, 23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 내니라. 24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25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26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 죽여 다섯 나무에 매어 달고 석양까지 나무에 달린 대로 두었다가(22-26절)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기원론적 언급입니다:
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매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어 그들의 숨었던 굴에 들여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
왕들이 숨었던 동굴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무덤이 되어버렸다는 화자의 해학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후대의 독자들에게 확인해 주는 이상의 신학적 교훈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막게다’의 승리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3. 남방 대장정(28-39절)
‘기브온’ 구출을 위하여 시작한 전쟁은 이곳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서는 “남방 대 장정(長征)”과 그 결과로 정복한 지역들을 차례로 언급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단순히 ‘기브온’과 ‘막게다’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가나안 남방에 대한 “대 정벌”에 나서, 그 땅에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일체의 세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시켜버렸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남방 다섯 성읍에 대한 정복 이야기가 동일한 형식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그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0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2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3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35그 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을 쳐서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당일에 진멸하였으니 라기스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7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9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요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40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28, 30, 32, 33, 35, 37, 39, 40절)
이스라엘은 두 번 다시 ‘아이’ 성의 패배와 ‘기브온’과의 언약 체결 등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또한 이들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그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4. 결론(40-43)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9장 서두에서 시작한 이야기의 결론이자 신학적 결론입니다: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9:1-2).
신학적 결론이라 함은 단순히 ‘기브온’과 남방 정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주제들을 요약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렘’의 모티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42절상)
이 전쟁은 단순히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 그 이상입니다. 비록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앞에서 기술한 바처럼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9:1-2; 10:1-2),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분이 직접 개입한 전쟁이므로 지루하고도 힘들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끝이 납니다:
단번에 취하니라(43절하)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언급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이야기나 <사사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정복 전쟁은 적어도 7년 이상이나 끈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격려를 위해서 그런 역사적 진실은 무시하거나 왜곡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화자는 그 땅과 관련된 나머지 주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40절)
이 선언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시 화자 본인의 신학적이고도 교훈적인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머지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교훈과 적용
기브온 돕기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할까? ‘도날드 케이건’ 교수는 두려움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도널드 케이건. 「전쟁과 인간」. 김지원 역. 서울: 세종연구원, 1998.
탐욕이나 명예 때문에 전쟁을 한다면 이해가 되나 두려움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전쟁이 두려움 때문에 비롯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기브온’에 모여 있는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분명 그렇게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야말로 <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 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참고: 1:9, 18; 2:10-11; 5:1; 9:1-2, 24). “기브온 전투”는 이렇게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은 ‘여리고’에서 ‘아이’ 성까지 승승장구해 오던 이스라엘이 두려웠고, 더 나아가 ‘기브온’이 이들과 군사적 조약을 체결한 것 때문에 더욱 두려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가장 큰 도시 ‘기브온’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스라엘과 한 편이 되어버렸으니 이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위기감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이웃 왕들과 함께 반(反) 이스라엘 연합 전선을 구축합니다. 명분은 배반자 ‘기브온’을 응징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브온’이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승인과 굴복의 길을 선택했다면, 이들은 저항하고 싸우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가히 위협적입니다. 화자는 다섯 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성읍을 일일이 거명함으로써 긴장과 두려움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3-5절). 반(反) ‘기브온’ 연합에 참여하고 있는 도시는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그리고 ‘에글론’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 1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아도니-세덱’의 격문(檄文)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4절). 이 격문은 ‘기브온’이 다급한 가운데 구조를 요청하는 파발마를 이스라엘에게 보내면서 울부짖는 호소와 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소하소서”(6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전쟁은 단순히 ‘아모리’ 족속 간에 벌어지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참여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요청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닥친 두 번째 중대한 시험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까?” 그들이 당면했던 첫 번째 시험은 ‘기브온’에 속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라 할지라도 속아서 맺은 것에 대해서 지킬 의무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대체적인 생각은 조약을 폐기하고 ‘기브온’을 다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여호수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은 ‘기브온’의 몫이기는 하나,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내 차가 중앙 분리선을 넘어 반대편에서 오는 도난 차량과 충돌했다고 할 때, 그 차가 도난 차량이라고 해서 내 과실이 없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요. 도난 차량 운전자는 도적질 한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나 또한 교통 위반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결코 그 언약을 폐기할 수 없었으며, 한편 ‘기브온’ 역시 이후부터 언약의 대등한 당사자가 아니라 노예가 되어 이스라엘을 섬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당면한 두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노예로 부릴 권리가 있었지만 동시에 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도 동시에 떠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새로운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이 지금 위기를 맞아 구조를 요청해옵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여리고’나 ‘아이’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가나안’ 주민 모두가 참여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3, 5절). 이스라엘은 이 경우에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것인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도우러 나서야 할 것인가? 약속을 지키기에는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 맺은 언약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 주실 것인가? 이 긴박한 상황에서 구원의 신탁이 들려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8절)
다시 한 번 친숙한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들릴 때마다 항상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신탁은 전쟁이 ‘아모리’와 ‘기브온’과의 전쟁도 아니고, ‘아모리’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한 ‘헤렘’이라는 선언입니다. ‘기브온’에도 분명 장수나 영웅들이 많이 있었을 것인데도 이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에 일조했다는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에 힘을 얻었음인지, ‘여호수아’는 관대하게, 지체함이 없이 ‘기브온’을 도우러 달려감으로써 그가 맺은 언약에 충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 약 35 킬로미터를 밤을 달려 행군한 끝에 아침 무렵에 도착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9절).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부분은 무엇입니까? 예의 그 “두려움”입니다. 적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처럼 공포에 질렸을까요? 하늘에서 떨어진 돌덩이와 우박 덩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인 수보다 돌과 우박으로 죽은 수가 더 많았다는 언급이 이를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11절). 즉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을 들어야 할 대상은 비단 ‘여호수아’ 공동체에 국한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누가 이 우렁찬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까요? ‘바벨론’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지금 정복자가 아니라 피정복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기브온 전투”는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나 기적은 언필칭 지금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지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포로 시절 이스라엘의 처지는 ‘여호수아’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 무기력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삼류 시민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들처럼 말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나 계시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잊은 채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살아왔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나 기적은 희망이나 격려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절망과 냉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패자들에게 성공 사례는 반드시 용기와 격려가 되지만은 않습니다. “기브온 전투”에 이은 “막게다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바벨론공동체”의 심정도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의심과 절망에 빠져있는 청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의심과 절망 가운데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도마’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손과 허리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자국이었습니다. 마치 “네가 이래도 나의 부활을 믿지 않겠느냐?”하며 다그치듯 말입니다. 화자가 지금 그 유명한 <야셀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약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믿고 있듯이, “바벨론 공동체” 또한 전설적인 “기브온 전투”를 노래하고 있는 이 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회중 가운데 어느 누가 이 엄청난 우주적 대 격변이 과학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놓고 따지며 논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진위 여부를 놓고 따지고 논쟁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회중 개개인의 영적 부흥에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자도 없을 바에야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증명하는 것 또한 검증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며, 불필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야살의 책>이 주는 신학적 메시지는 또 있습니다. 영웅적인 지도자 ‘예수’ 즉 ‘여호수아’와, 그의 기도와,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 노래는 자칫 ‘여호수아’가 태양이나 달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분명 우상 숭배이며, 당시 가나안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는 몰라도, 이스라엘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향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태양이나 천체들을 향해서는 명령을 내렸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찌어다(12절)
요점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사실 화자는 두 번에 걸쳐 태양과 달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여호수아’가 요구한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2절하-13절상). 태양계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오로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기도하는 지도자”와 “응답하는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교회”의 목사는 주일 예배에서 불을 뿜어 내듯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나라가 어떻게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주변 강대국과의 안보동맹입니까? 외교적 수단입니까? 경제적 풍요함입니까?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과연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처럼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우리의 옛 영토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연약한 ‘기브온’은 왜 살아남았습니까? 그처럼 위세 등등하던 반 ‘기브온’ 연맹은 왜 사라졌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다면, 당연히 우리의 온 정력과 힘을 그의 뜻을 아는데 쏟고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의 하나까지
기독교 소책자 <오늘의 양식>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 미국 항공사의 회장이자 창립자의 사업 철학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분은 두려움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두렵게 하는 일들을 하기 좋아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용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항공사의 번영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사업 확장을 할 새로운 노선을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때 일어날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도 아랑곳 않고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입니다.”
“성격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격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유사한 경구에 혼돈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예정되어 있고 천성(天性)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의 성격이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창조되고 변화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구원은 재창조로서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것이고, 바뀐 운명은 그 자리에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날로 새롭게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임에 틀림없지만, 그 자체로서 완벽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을 가꾸고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신생아는 젖을 먹어야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갈수록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과거의 구원만을 자랑하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자는 마치 갈비뼈 우려먹듯 가문과 조상 자랑으로 일관하는 못난 후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을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것일까? 어떻게 승승장구, 연전연승하며 살 수 있을까? “기브온 전투”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처럼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시체 말로 “개 발에 땀났습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무엇이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인가?”를 묻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 ‘포스터’(R. Poster)는 우리 시대의 고질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로 “피상성”(superficiality)을 꼽고 있습니다. “피상성”이란 매사에 대충 대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영적 훈련에 있어서나, 성경 지식에 있어서나 “피상성” 즉 적당주의는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루어 놓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적당히 시험공부해서 합격할 수 없습니다. 결핵 약을 적당히 복용하고 그만두면 나중에 더 강도가 높은 약을 사용해도 고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왜 끊임없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야만 할까?” “이쯤해서 살육을 멈추면 안 될까?” “살겠다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저들 왕들을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여호수아’도 이스라엘도 “여리고 전투”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런 질문들로 시달려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적어도 양식(良識)과 인정(人情)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 굳이 박애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태도와 기분을 꾸짖고 있습니다. 절대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추격해서 원수의 하나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라”고 말하십니다(19절). 잔당(殘黨)들이 아직 남아있고, 이들을 완전히 격멸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자 소명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쯤해서 그만두면 안 되는 것일까? 한 예를 들어봅시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한 겨울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를 당하여 선원들은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헤엄을 쳐서 인근 조그만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위한 구조선이 10 시간 뒤에 이 섬에 도착했을 때에 한 사람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매서운 추위에 오직 이 사람만 섬 주위를 계속 달리면서 동사(凍死)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추워서 앉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만 있다가 죽고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려고 하는 곳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우호적인 곳은 아닙니다. 유혹과 거짓의 삭풍이 불어대는 그런 곳입니다.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제 갓난아이와 같아서 맨 몸으로 얼음 속에 들어가 그 얼음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얼음에 갇혀 얼어 죽기가 십상입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 얼음을 깨어 부수는 일밖에 없습니다.
‘헤렘’은 이 원리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단락의 제목을 “막게다의 섬멸” 내지는 “막게다의 심판”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부터 등장한 바 있는 “하나도 남김없이”의 구호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목전에 두고 다시 한 번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며, 전쟁을 하다 말고 ‘길갈’로 철수해 버렸고(15절), 하나님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버립니다. 잔당들은 아직 남아있고, 특히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막게다’ 동굴에 피신해 숨어있습니다(16절).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군가가 ‘여호수아’에게 와서 알려주고 있습니다(17절). 무엇을 말하려 함일까요? 적어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모리’의 다섯 왕들의 처지를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배신자 ‘기브온’을 응징하겠다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위세도 당당하게 나서던 이들 왕들의 꼬락서니를 보라! 지금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승리는커녕 자기 목숨 하나 지키려고 동굴에 숨어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라! 두려움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큰 두려움으로 동굴 속에서 떨고 있는 이들을 보라! 차라리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랴!
두 번째이자 더 큰 교훈은 이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 ‘기브온’ 족속들에게 했던 것처럼, 불쌍한 이들 왕들도 동정하며 살려주어야 할까? 박애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까? 박애정신은 그 자체로서 참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항상 군사적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각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생각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기브온 언약”을 통해서 체험한 바 있습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과연 ‘여호수아’는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위하여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동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아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18절), 잔당들을 소탕합니다(20절). 이후 곧바로 군사를 돌려 동굴에 가두어두었던 ‘아모리’ 다섯 왕들을 끌어내어(22-23절), 그들의 목을 발로 짓밟게 하고(24-25절), 다시 이들을 쳐 죽여, 그 목을 나무에 매달아 저녁까지 두었다가(26절), 해질 무렵에 시체들을 내려 동굴에 내던져 돌로 막아버립니다(27절). 이 모든 장면에서 화자는 ‘여호수아’를 거의 매 구절마다 주어로 등장시키면서(10회) 철저하고도 완벽한 순종의 모티브를 끝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 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28절)
‘막게다’의 동굴에 대한 기원론적 언급(27절)도 단순히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능 그 이상을 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에서 승패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영적 승리, 즉 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은 것이겠지요:
기억합시다. 또 기억합시다. ‘막게다’의 승리는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인생의 장애를 만났습니까? 목을 죄어오는 두려움과 어려움의 벽이 있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 모든 장벽들을 내 발 아래에 꿇게 하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계명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 사도 역시 오늘 우리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친 김에
“막게다의 심판”조차도 완벽한 승리가 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것일까요? 아직도 ‘가나안’ 도처에 저항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하나님과 그 기름 부은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참고. 시 2편). “쇠뿔도 단김에 빼어라.” 지금 이 순간 이스라엘을 위한 시의적절한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내친 김에 “남방 대정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머뭇거릴 이유도 시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또한 그 땅에 남아있는 이방인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수행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수행한 남방 다섯 성읍에 대한 정복 이야기가 매번 동일한 표현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봄으로써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ooo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ooo 왕에게 행한 것과 ooo 왕에게 행한 것이 일반이었더라(28, 30, 32, 33, 35, 37, 39, 40절).
그리고 이번에도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이 핵심 모티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패배나 ‘기브온’과의 언약 체결 등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또한 이들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할 때 성령 충만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크레센도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은 것입니까? 아니면 절정의 여운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까? 이 두 번째 ‘크레센도’(crescendo)는 사족(蛇足)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화자 자신의 역사적 결론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결론으로 삼는다면 노인네의 실없는 잔소리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적 결론이라 함은 단순히 “남방 정벌”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주제들에 대한 요약과 정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렘’입니다(42절). “기브온 전투”와 “남방 대장정”은 단순히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 그 이상입니다. 비록 전쟁이 발발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아모리’ 왕의 두려움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지만(1-2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신비한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개입한 전쟁이었으므로 지루하고도 힘들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끝이 납니다: “단번에 취하니라”(43절하).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이야기나 <사사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정복 전쟁은 적어도 7년 이상이나 끈,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격려를 위해서 역사적 진실은 무시하거나 왜곡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화자는 그 땅과 관련된 나머지 주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40절)
이 선언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시 화자 본인의 신학적이고도 교훈적인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지금 역사적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신학적 요구 사항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아직 할 말이 남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은 또한 완벽한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한 인물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모든 왕들이 지도자의 전형으로 삼고 따라야 할 인물, 그가 곧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기브온’과 맺은 터무니없는 언약 때문에 맞이한 국가적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고,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한 순간의 승리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않고 끝까지 일관된 태도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이루어갔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공동체를 향해서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하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이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위해서 나의 적들과 싸우게 할 수 있을까?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기브온’ 전투, ‘막게다’의 심판, 남방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적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밀어붙여 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탕하고 섬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순종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그리고 노예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세상이 주는 거짓 약속에 연연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나, 아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세상과 언약을 맺어 국가 안보를 보장 받으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할 때만이 참된 자유와 안식이 있다고 말입니다(요 8:32).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을 때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43절).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길갈’에서 쉬고 있는 중입니까?
토의 문제
1. 우리가 어느 누구와 약속을 했을 때, 그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서원에 관한 유명한 충고도 함께 토의해 봅시다. 지난 한 주 내가 약속한 것은 무엇이며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기브온’과 ‘아모리’의 다섯 왕들이 취한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해 봅시다. 이들의 선택은 ‘라합’의 선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라합’과 그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비교해 봅시다.
3. 지난 한 주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싸워주신 영역이나 체험이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나누어 봅시다.
4.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가 나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그의 어떤 부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까? 다음 한 주를 위한 각오와 결단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