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6과
언약: 세겜의 예배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4:1-28약 51분 분량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24:15, 25)
결혼 생활과 관련해서 영어권에서는 물어오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How long have you been married?” 직역하자면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까?”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언제 결혼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구태여 차이를 구분해보자면 서양식 표현에는 결혼이란 시작, 출발,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네 표현에는 끝, 종착역, 내지는 “다 이루었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설명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서라도, 만일 우리가 결혼을 후자(後者)의 경우로 인식한다면 이 결혼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이루어 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자(前者)의 경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등산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가?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까?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은 ‘언약’입니다. 상대를(상대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입니다.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은 바꾸어 말하자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선 사랑할 자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그러한 선택은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야 하며, 그리고 어느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무미건조한 주례사 같습니까? 사실 우리는 늘 신혼부부처럼 감정 충만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늘 보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아마 얼마 못가 기진맥진 탈진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의지적인 선택, 즉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상대를 더 알아가고, 더 잘 이해하며, 그래서 보다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은 언약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 책을 접어면서 책의 마지막 두 장에서 우리는 이 언약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23장이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 은퇴를 앞둔 지도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행하는 ‘고별 설교’의 장면입니다. 마치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그랬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세겜의 예배’ 장면입니다. 또는 비록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결혼식을 연상시켜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도 설교자 또는 결혼 주례는 역시 여호수아입니다만, 언약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제 그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내용. <여호수아>의 마지막 두 장(23-24장)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나 또는 구문(構文)에 있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장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것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23:2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24:1)
두 장의 핵심 주제는 “언약”에 관한 것으로서, 그 형식이나 내용이 시적 유사반복처럼 두 곳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역사적 회고(23:3-5; 24:2-13)와 현재를 위한 권면(23:6-13; 24:14-15)
(2)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경고(23:13, 15-16; 24:19-20).
(3) 이방신의 배격과 야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23:7, 12, 16; 24:2, 14-24, 27)
이와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장을 별개의 문학적 단위로 볼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상당히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 배경: 23장이 시제(時制) 즉 ‘여호수아’의 노령(老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24장은 장소 즉 ‘세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2) 역사적 회고: 23장이 땅의 분배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다면, 24장은 ‘야훼’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3) ‘야훼’에 대한 충성: 23장이 율법 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면, 24장은 ‘야훼’를 섬기는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음.
(4) 불순종의 사례: 23장이 이방인과의 결혼을, 24장은 이방 신을 섬기는 행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고 있음.
(5) 본문의 문학적 형식: 두 장을 구별 짓는 가장 뚜렷한 차이로서, 23장의 양식이 죽어가는 지도자의 백성들을 향한 “연설” 내지는 “고별설교”라면, 24장은 지도자와 백성의 대표자들 간의 대화를 담은 예배 또는 제의(祭儀)로 이루어져 있음.
자료와 편집. 따라서 24장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바로 이 양식, 즉 “제의”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양식비평(樣式批評)의 대 전제에 따르면, 본문의 양식에 대한 이해는 본문의 배경과 전승(傳承)의 역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소라> 본문으로 인정되고 있는 본문의 구조는 언약 양식의 특징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회합(1절): ‘세겜’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위하여 모임
(2) 회고(2-13절): 이스라엘의 선택과 보호에 관한 하나님의 일인칭 신탁
(3) 초청(14-16절): 순종을 위한 하나님의 일인칭 신탁
(4) 서원(17-18절):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5) 경고(19-20절): 서원의 결과에 대한 경고
(6) 재확인(21절): 경고에 대한 백성들의 재확인
(7) 체결(22-24절): 공식적인 언약의 체결
(8) 증거(25-27절): 언약의 돌판을 증거로 세움
(9) 해산(28절): 무리의 해산
이처럼 본문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언약 체결에 관한 보고서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양식이 그려내고 있는 원래의 “삶의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고: T. C. Butler, 266-268쪽(참고도서 1).
가장 그럴듯한 가정은 본문을 아주 오래된 “세겜의 제의”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할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제의의 주된 목적은 주변의 이방 신들이 아닌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과 순종의 서약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헌신 서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겜의 제의” 또는 “세겜의 헌신”은 첫 예배 이후 시대를 거듭하면서, 그 양식이나 강조하는바 내용도 점차 변모해 갔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처음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이방 신을 제거하고 버리는 의식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나, 점차 새로운 내용들이 추가되면서 일정한 예배 순서 내지는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즉 본문을 통해서 보는 바처럼,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역사적 회고에 이은 재 헌신의 서약이 전체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방 신의 유혹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서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였던 만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는 비단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제의에서 중심 되는 선포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배의 전통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수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사사기 시대” 이후 “세겜의 성소”가 사라지고 없는 상황에서 기존의 전통을 보전하는 문제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베델의 성소”로 이 전통이 전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북 왕국의 멸망으로 이 전통은 <신명기 전승>의 일부로 채택되어 계승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후 <신명기 전승>은 ‘아시리아’아 ‘바벨론’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신학적 체계로 확립되면서 절정을 맞이하게 되고, <여호수아>의 핵심 신학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들이 제의적인 언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길갈’의 “할례 의식”이나(5:2-9) “유월절 축제”(5:10-12), 그리고 ‘여리고’ 성 주위를 법궤를 메고 일곱 바퀴를 도는 의식(6장)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친 물건”에 대한 ‘아간’의 범죄로(7:1) 백성들이 성결 의식을 거친 연후에 쌓은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7:25-26)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발’ 산에 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며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낭독하는 의식도 그러하며(8:30-35), 지파 별로 땅을 나누는 사역은 항상 ‘길갈’이나 ‘실로’와 같은 소위 거룩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14:6; 18:1; 19:51), 이 예배 장소를 놓고 지파 간 분열과 대립의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22:28, 34) 역시 <신명기> 화자의 편집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책의 절정이나 결론으로 적합한 것은 언약의 두 얼굴에 대한 “고별 설교”보다는(23장), 언약에 대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예배”일 것입니다(24장). 따라서 <여호수아>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계명이나 율법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그 이름에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동안이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사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적으로 쇠락해 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회합(1절)
본문은 이야기의 시작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회중을 ‘세겜’에 모으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1절상)
하지만 화자의 진술은 이야기가 처음이 아니라 중간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모으고”(#s'a, 아사프)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배경이나 목적 등에 관한 진술이 있은 다음에 이런 표현이 뒤따르는 것이 상례입니다(예: 창 29:22; 출 3:16; 4:29; 민 11:16, 24).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이야기의 배경에 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채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본문을 어떤 목적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의 모델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겜’에 대한 소개는 다소 놀랍습니다. ‘세겜’은 이전에도 이곳에서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느닷없이 한 번 등장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8:30-35). 그 때에도 지금처럼 율법에 대한 헌신 예배와 관련해서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여호수아> 1-11장 전체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으며, 13-19장에서 다루고 있는 정복지 성읍의 목록에도 빠져 있습니다. 다만 도피성 중의 한 도시로(20:7), 그리고 레위의 한 성읍으로(21:21) 등장한 바 있을 뿐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실제 ‘세겜’ 성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과 관련된 성읍 밖에 있는 한 성소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참고. 신 27; 수 8:30-35).
‘여호수아’가 마지막 설교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것과 마찬가지로(23:2), 이곳에서도 언약 체결을 위하여 ‘여호수아’가 불러 모으고 있는 무리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장면 역시 고별 설교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겠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일상생활 속에는 종교적인 책임과 일반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까지 포함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섰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며, 이스라엘의 대중 집회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심상 10:19).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표현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욥 33:5; 41:2; 잠 22:29; 출 8:16; 9:13).
2. 역사적 회고(2-13절)
‘여호수아’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온 백성을 향해서 연설을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2절상)
연설의 첫머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는 선지자적 신탁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기원은 추측컨대 족장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인데, 일단의 무리를 이스라엘로 부르던 시절을 말합니다(창 33:20). 본문은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엘’이 아닌 ‘야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연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회고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을 ‘요단’ 강 동편에 살던 족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호수아’의 역사적 회고는 <신명기>에서 ‘모세’의 그것에 비해서 적어도 한 세대 내지는 두 세대를 앞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이주와 “출애굽”을 각기 출발점으로 삼은 바 있습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신 26:5);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신 6:21).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2절하)
‘여호수아’가 근거로 삼고 있는 전승은 <창세기>의 계보입니다(창 11:24-32). 그는 특별히 이방 신을 섬기던 “조상들”의 원조(元祖)로서 ‘데라’를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아비와 단절하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아브라함’의 결정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창 12:1-6).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언급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35:1-4의 본문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장 전체의 핵심 주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실은 <십계명>의 핵심 모티브를 이루고 있으며(출 20:3; 신 5:7), “신명기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참고: 신 6:14; 7:4; 8:19; 11:16, 28; 13:3, 7, 14; 17:3; 18:20; 28:14, 36, 64; 29:25; 30:17; 31:18, 20; 수 23:16; 삿 2:12, 17, 19; 10:13; 삼상 8:8; 26:19; 왕상 9:6, 9; 11:4, 10; 14:9; 왕하 5:17; 17:7, 35, 37, 38; 22:17.
<후기 예언서> 중에서는 <호세아>나 <예레미야>만이 “다른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 렘 1:16; 7:6, 9, 18; 11:10; 13:10; 16:11, 13; 19:4, 13; 22:9; 25:6; 32:29; 35:15; 44:3, 5, 8, 15).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연히 예배의 형태나 내용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주된 관심사일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이 좁게는 본문 속에, 그리고 보다 넓게는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신명기 역사서” 전체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다른 신을 섬기는” 문제에서 소위 <신명기>적 약속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3-4절)
두 가지 핵심적인 약속은 그 땅과 후손에 관한 것인데,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여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창 12:5-9). 그리고 후손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진 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화자의 입장은 선별적이고 선택적입니다. 즉 ‘이삭’을 언급하면서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은 생략하는가 하면, ‘에서’는 ‘야곱’과 함께 나란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에서’를 ‘야곱’과 함께 언급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신학적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에서’의 후손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에서’를 ‘야곱’보다 더 축복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야곱’을 향한 더 원대한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아무리 역사적으로 암흑기나 시련기 속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거나 잊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특히 이점은 포로기 공동체의 청중들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신명기>적 교훈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라는 꿈은 다름 아닌 “고토회복”(故土回復) 즉 두 번째 “출애굽”일 것인즉, 화자는 이들에게 역사적 첫 번째 “출애굽”의 기억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5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5-7절)
‘모세’와 ‘아론’은 역사적 사건의 두 주역으로서, 시공(時空)을 불문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두 중요한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과 제사장 제도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도 이들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모세’나 ‘아론’에 근거한 그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는 부차적일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권위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세 구절이 전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 즉 “야훼께서 애굽을 치셨다”는 표현은 분명 이전의 <유월절 전승>과 연결되고 있으며(출 12:23),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표현, “인도해 내다”는 <신명기 전승>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서 추측컨대 북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홍해의 기적” 이전에 일어난 일로서, 흔히 <광야 전승>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추격”이나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관한 언급은 <출애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만(출 14:9, 23; 14:10),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은 “신명기 화자”의 청중 즉 포로기 이스라엘에게는 의미 있는 모티브였습니다. 화자는 또한 홍해 근처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흑암”을 언급하면서(7절), <출애굽>에서의 동일한 사건을 연상시켜주기보다는(출 14:10), 그 이전에 이집트 땅 전체를 뒤덮었던 삼일 동안의 “흑암”(&v,j, 호셰크)의 재난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의 활동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 기적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여호수아’ 세대가 광야 세대와는 한 세대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적의 현장에서 그 사건을 직접 목도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7절). 이 표현 역시 <신명기> 화자가 자주 애용하는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참고. 신 4:3; 11:7; 3:21; 4:9; 7:19; 10:21; 29:2).
광야 시절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불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만, 광야 시절을 바라보는 <오경>의 대체적인 시각은 하나님의 심판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다”는 짧고도 함축적인 표현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의 초점은 하나님의 인도와 승리에 있습니다.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8절)
‘요단’ 동쪽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민 21;23-25, 32, 33-35; 31:1-12). 하지만 ‘가데스’에서 ‘에돔’ 족속과의 싸움을 피하여 우회한 이야기는 고의로 빠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민 20:14-21; 신 2:2-8).
‘요단’ 동쪽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간략한 역사적 회고에 이어, 본문의 의도에 걸 맞는 구체적인 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발람 이야기>입니다(참고. 민 22-24; 수 13:22):
9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9-10절)
화자의 의도인 즉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방의 왕이나 예언자의 의도를 무산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입니다(민 25:2-3).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신탁(神託)의 저자이시지, 예언자의 신탁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으로서, 예언자의 신탁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없는 분입니다. 선지자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다는 화자의 번뜩이는 해학(諧謔)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극적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의 손 안에 있을 정도로 아주 무서운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선지자들의 손아귀로부터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는 한, 그 어떠한 하나님의 대언자도 두려워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발람’의 예언을 무위(無爲)로 돌리셨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어지는 <여리고 이야기>에서도 화자의 강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었으며(11절)
그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는 대신에 하나의 전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 전투와 관련해서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출처가 다른 전승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일한 전승이라 해도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 이야기>와 관련해서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역시 이스라엘의 전체 정복 전쟁에서 하나의 예로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나간 역사에 대한 간략한 요약의 기법은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12절상)
즉 ‘요단’ 서쪽의 “두 왕”(실은 열두 왕)에 대한 정복 전쟁을 오래 전에 통용되던 “왕벌”(공포 또는 두려움)이라는 상징어로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은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2하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12하-13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떠한 축복도, 그들의 이름마저도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활동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명기>의 언어를 느낄 수 있으며(참고. 신 6:10-11), 이방 숭배와 관련한 모종의 상황을 연상해 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청중은 지금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읍이나 들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초청의 신탁(14-16절)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분위기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의 역할마저 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선지자 ‘여호수아’에서 변호사 ‘여호수아’가 된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객을 위하여 선처를 호소하고 있는 변호사 말입니다.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14-15)
변호사로서 고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우상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마땅한 경외심과 그에 상응하는 섬김의 행위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14절).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한 쌍의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함”(!ymiT, 타밈)과 “신실함”(tm,a, 에메트). 이 단어는 섬김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온전함”은 “온 종일” 또는 “일 년 내내” 등처럼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만(수 10:13; 레 23:15; 25:30), 그보다는 “흠 없는” 희생제물과 관련하여 더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출 12:5; 29:1; 레 1:3, 10 등 16회; <민수기> 6장과 19장에서 18회; <에스겔> 43-46장에서 10회). 이 단어가 사람과 연관해서 사용한 경우는 ‘노아’의 경우뿐입니다(창 6:9).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온전하라”는 명령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창 17:1), <에스겔>에서는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을 “온전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겔 28:15). 또한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과 함께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행동 즉 “진실하고”, “의로운” 행동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삿 9:16, 19). 원래 이 단어는 제의적인 배경을 지닌 전승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신 32:4; 삼하 22:31; 시 18:31; 시 19:8). 그리고 이 단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나아오는 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요구되기도 했고(시 15:2), 예배드리는 자가 드릴 무죄함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삼하 22:24; 시 18:24). <지혜서> 기자들은 간혹 이 용어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축복받는 자를 지칭하며 사용하기도 합니다(욥 12:4; 36:4; 잠 2:21; 11:20; 28:10). 따라서 본문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규범일 것입니다(신 18:13). 물론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간혹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욥 12:4; 암 5:10).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단어는 “신실함”입니다. 이 역시 인간에 대해서 사용하기는 부적절하지만 <시편>에서 종종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 이 속성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인간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이나 행동 등에 있어서 “신뢰할 만 한” 어떤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가 지금 이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태도나 행위는 인간의 상식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보여주신 그러한 수준의 태도와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적인 충성과 헌신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 시절 때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거주할 때조차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인데, 화자는 이점을 지금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요점인 즉은 이스라엘은 여태 한 번도 ‘야훼’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할 때마다 울며 도움을 요청했을 뿐입니다(7절). 이스라엘은 지금 새 땅에 와있습니다. 새 땅에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삶의 방식은 ‘바알’과 ‘엘’과 기타 수없이 많은 여신들에 대한 숭배와 예배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나름대로의 예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족장들의 신과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숭배와 예배입니다.
‘여호수아’의 호소는 이제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초청하면서 결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15절). 이처럼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초청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첫째, 이러한 초청은 선택의 교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신 4:37; 7:6, 7; 10:15; 14;2; 왕상 3:8; 사 41:8-9; 43:10; 44:1-2; 49:7; 겔 20:5; 시 33:12; 47:5; 135:4; 느 9:7).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신다 해도, 이스라엘 편에서는 여전히 그 부르심에 응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땅에는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그럴 듯하고 매력적인 종교들이 진열장에 든 상품처럼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가나안’ 종교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탄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한 신만을 선택하라는 초청은 다신론적 토양에서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며, 이단적이기까지 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그 땅의 족속들이라면 이와 같이 위기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어떤 신을 섬길 것인가?”일 것입니다. 다신론이 지배하던 그 땅에서 이런 식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예배는 섬기는 신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이미 선택한 신에 대한 축제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여호수아’의 초청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초청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주변 족속들은 이전에 한 번도 선택하도록 강요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선택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제사의 성격이나 질적 수준에 있어 그 어떠한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그러한 초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은 어떠한 강요나 위협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행동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해 보고, 과연 ‘야훼’ 하나님의 주장이 정당하고 근거 있는 것인가를 확인해 보는 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롭고 고독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가족이 이미 앞서 선택의 모범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요청대로 동일한 선택을 했을 때, 이미 그들은 따라야 할 지도자의 역할 모델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마침내 백성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서원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16절)
4. 서원(17-18절)
이 백성들의 서원은 그 내용에 있어 지극히 상투적이며 전형적인 용어들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내용인 즉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17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17-18절)
하지만 이 백성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여호수아’가 강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족속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이사와 기적, 그리고 인도와 보호, 그리고 이 땅에서의 정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5. 경고(19-20절)
백성들의 서원에 대한 ‘여호수아’의 화답은 아마 <구약> 전체를 통해서 가장 충격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19-20절)
왜입니까? ‘여호수아’가 그토록 간절하게 요구하던 그것을 이 백성이 지키겠다고 서원하자말자, ‘여호수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결코 그 서원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절상). 마치 끈질긴 구애(求愛) 끝에 상대방의 결혼 승낙을 얻어내자 말자, 상대를 내팽개치는 형국과 같습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 백성의 헌신과 결단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아주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문맥의 흐름 상 다소 엉뚱한 삽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 구절이 후대의 편집에 의한 삽입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기도 한 바 있습니다(Rudolph, Noth, Floss, Mohlenbrink). 즉 “바벨론 포로”를 기억하고 있는 후대 편집자의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단지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같은 힘든 경험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메시지라는 것입니다(Schmitt). 또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의 배경을 조약체결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McCarthy). 즉 저주와 축복은 서로에 대한 대안(代案)이 아니라 번갈아 가면서 순환하는 역사적 필요악 정도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24장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당면 화두(話頭)는 이방신에 대한 섬김과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섬겨온 신들은 ‘야훼’ 하나님에 비해서 비교적 덜 엄격하고 요구사항이 적은 신들이었습니다. 그런 신들을 섬기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들의 형상을 세울 수도 있고, 이들에게 옷을 입히거나 화장품을 발라주는 등 치장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거나, 희생 제물을 바쳐 사육(飼育)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들고 다닐 수도 있으며, 때로 땅에 파묻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창 35:4; 31:34). 이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의 방식대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헌신의 서약에서 간파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지켜주어야 하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지키고 섬길 수 있다는 정도의 태도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백성들에게 바라는 바는 이처럼 가벼운 헌신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내면의 동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의 서약이 보답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성찰에서 우러나온 것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백성들의 헌신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두 가지 속성, 즉 왜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지를 설명해주는 그 두 가지 속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야훼’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이 거룩하고 초월적이며 신비한 존재라는 인식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호수아’가 도입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표현은 오히려 당시 ‘가나안’ 의 보편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구원의 능력과 동일 시 되고 있었습니다만, 동시에 어떤 파괴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에 대해서 전혀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는 그러한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예배자로 하여금 거룩하도록 요구하고 계시며(출 22:31; 레 19:2), 예배자 역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거룩하시므로 그분의 요구에 결코 미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결코 ‘야훼’ 같은 신을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야훼’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번째 표현 역시 다신론적 주변 문화에서도 친숙한 개념입니다. 즉 각 신들은 인간의 사랑과 헌신을 두고 저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야훼’ 역시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놓고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이스라엘 역시 오직 그분만은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그분의 질투는 분노로 바뀌는데, 분노의 대상은 다른 신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을 다른 신들과 함께 섬기는 것에 대해서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오직 처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절대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이스라엘 역시 같은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출 20:5; 34:14-16). 이렇게 볼 때,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장 익숙하고 핵심적인 개념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섬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한 눈 팔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야훼’에게만 충성과 헌신을 바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심각한 결과를 야기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참고. 출 23:21). 그분의 기대치는 너무나 높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과도하여 이스라엘이 단 한 순간이라도 한 눈을 팔거나 다른 신들과 노닥거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방신들이라면 바람난 이스라엘을 벌하기 보다는 그냥 그들의 사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만, ‘야훼’는 다릅니다. 그분은 바람 난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까지 징계와 훈련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어서 배신의 결과가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20절). 이스라엘이 받게 되는 유혹은 단순히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전혀 낯설고, 이상한 신들입니다. 즉 이스라엘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신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런 신들과 짝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출생의 신분과 정체성을 망각하고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유혹은 어쩔 수 없이 선택 가능한 하나의 현실로서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를 선택한다면, ‘야훼’의 선택 역시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규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경고하고 예언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먼저 설정하셨고, 그 관계를 무엇보다 우선하여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줄 것입니다.
6. 재확인(21절)
‘야훼’ 하나님의 속성과 요구 사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여전합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21절)
오히려 더 엄숙하고, 심각하며, 적극적인 모습니다. 이 장면 어디에도 억지나 강요나 맹목에 의한 헌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경고로 ‘야훼’가 어떤 신인지에 관해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헌신은 정확한 지식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자발적인 헌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언약 체결(22-24절)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22-24절)
그런데 이 장면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데가 많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결혼식을 보는 듯합니다. 결혼의 주례자는 ‘여호수아’이며, 결혼 당사자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의 증인은 하객이나 또는 다른 신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입니다(22절). 다른 의식 같았으면 고대 근동 지역의 전통에서 볼 때 증인은 신들이 맡는 것이 상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약에 참여하고 있는 당사자가 ‘야훼’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이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대상이 다른 신들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서약을 맺고 있느니만치 스스로 자신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증인의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섬겨왔던 이방 신들을 거부하고 야훼 하나님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맺고 있는 자리에서 이들 신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증거나 증언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헌신을 받아낸 ‘여호수아’는 이제 다시 한 번 ‘야훼’의 요구 사항을 들려줍니다(23절; 참고. 14절). 요구 사항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땅의 신들은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의 신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신들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세대라고 해서 이전 조상들이 저질렀던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방신들을 치워버리는 의식(23절)은 그 자체로서 결코 충분치는 않습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헌신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단순히 예배에서 손을 뻗거나 들어 올려 회개나 헌신의 표현을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기 자신의 헌신의 각오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훼’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야훼’를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24절; 참고. 17절). 그리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참고. 18절하).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듣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의 약속은 이전에 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본문의 핵심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단순히 신앙 고백이나 종교적 헌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대화, 즉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8. 증거의 돌판(25-27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서약을 바탕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야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체결을 마무리합니다.
25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26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25-27절)
이 단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언약”(tyriB, 베리트)의 기원이나 의미, 그리고 본문에 들어오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제정했다는 “율례와 법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시내’ 산에서 제정한 “모세의 법”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단락의 핵심은 그 내용에 있다기보다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섬김에 있다 하겠습니다.
언약의 장소는 다시 ‘세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문을 ‘세겜’과 관련된 오래된 전승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본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도입한 바 있는 ‘세겜’의 모티브를 이곳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26절과 25절은 일종의 시적 유사 반복과 같으며, 26절에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신명기>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전 전승에 대한 추가 내지는 재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에서 다루고 있는 규례나 심판에 관한 용어는 <하나님의 율법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참고. 1:7-8; 8:31-34; 22:5; 23:6).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운 “증거의 돌판”(26절하)은 고대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한 때 “돌판”에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참고. 창 28:18-22; 31:13, 44-52; 35:14, 20; 출 24:4; 수 4; 삼하 18:18). 이스라엘의 법적 유산은 “돌판”을 세우는 등의 행위를 정죄하고 있습니다만(출 23:24; 34:13; 레 26:1; 신 7:5; 12:3; 16:22), 이스라엘의 그러한 행위를 막지는 못했습니다(호 3:4; 10:1-2; 믹 5:13; 겔 26:11; 왕상 14:23; 왕하 3:2; 10:26;27; 17:10; 18:4; 23:14).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돌판”은 다소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혹자들에게 이 “돌판”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행위와 그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기념하는 오래된 전통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훼’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가나안’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기자들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와 같이 “돌판”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돌판”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용어는 “상수리나무”입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이 나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창 12:6; 35:4; 신 11:30; 삿 9:6, 37; 삿 6:11, 19; 창 13;8; 14:13; 18:1; 삿 4:11; 삼상 10:3). 다소 다른 형태의 거룩한 나무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창 21:33; 삼상 22:6; 31:13). 성소 내에서 이 나무를 사용하는 것 또한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신 12:2; 왕하 16:4; 사 1:29; 57:5; 호 4:13; 렘 2:27; 3:6; 합 2:19; 겔 6:13; 20:38). 여기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시기는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로서, 그 때만 하더라도 “돌판”과 “상수리나무”는 종교적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나 가지 부여를 하지 않은 채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후대 <성경> 화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하겠습니다.
성소를 “야훼의 성소”로 지칭함으로써(26절하), 그 성소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세겜’ 근처에 있는 이스라엘의 성소를 ‘세겜’ 도시 내에 있던 ‘바알-베릿트’ 성소(삿 9)로 불리는 ‘세겜’ 족속의 성소와 구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한 장소는 이스라엘의 성소였습니다. 의식의 구체적인 장면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희생 제물이나 식사 등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참고. 출 24).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에서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이 의식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의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의식이 요구하고 있는 기본 전제들인 것입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치른 행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27절). 언약 체결에 있어 두 증인이 동원되고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당사자 자신이며(22절),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제 삼자인 “돌판”이 될 것입니다(참고. 창 31:51-52). 이와 관련해서 ‘여호수아’는 그 “돌판”을 의인화하면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돌판” 위에 써놓은 일련의 규례들일 것입니다(참고. 신 27; 수 8:30-35).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은 2-13절 사이에서 읽을 수 있는 역사적 회고가 전부입니다. 따라서 이 “돌판” 위에 어떤 규례들을 써놓았는가 하는 문제는 다분히 형식적인 문제로서 ‘여호수아’의 주된 관심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이 다른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닌가 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9. 해산(28절)
모든 합의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기업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28절)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야훼’만을 섬기며 살기로 서원한 백성을 말합니다.
교훈과 적용
결혼 생활과 관련해서 영어권에서 묻는 질문은,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까?”(How long have you been married)인데 반해, 우리네 표현은 “언제 결혼했습니까?”입니다. 결혼에 관한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구태여 그 차이를 강조해보자면, 서양식 사고 속에는 결혼이란 시작, 출발,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고, 우리네 인식은 결혼을 하나의 종착역 내지는 완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는 인식입니다. 과연 동서양에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만일 결혼을 하나의 완성 또는 다 이룬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 결혼은 처음부터 문제점을 안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루어 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나의 출발로 본다면 기본자세가 달라집니다. 더 나은 결혼생활, 더 풍성한 결혼생활을 위해 마치 산 정상을 향해 등산을 하듯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관심을 쏟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가?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까?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은 “언약”입니다. 상대를(상대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입니다.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은 바꾸어 말하자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선 사랑할 자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그러한 선택은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야 하며, 그리고 어느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너무 무미건조한 주례사처럼 들립니다. 사실 우리는 늘 신혼부부처럼 감정 충만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늘 보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아마 얼마 못가 기진맥진 탈진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의지적인 선택, 즉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상대를 더 알아가고, 더 잘 이해하며, 그래서 보다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밝히자면 사랑은 언약의 행위입니다. <여호수아>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두 장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두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퇴를 앞둔 지도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행하는 “고별 설교”입니다(23장). 이는 마치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겜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장면은 비록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결혼식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결혼식의 주례자 역시 ‘여호수아’입니다. 두 장면 모두 공통되는 주제 언약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이제 “세겜의 언약”이 그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본문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먼저 떠올려야 할 질문이 하나 있는 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순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하는 일을 놓고 단순한 무료 봉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인즉, 이럴 경우 그가 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자칫 오만과 교만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구속의 역사”(救贖史)입니다(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바라보는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순전히 그분의 “자유 의지”(自由 意志)로 인류 가운데서 한 백성을 선택하여 이스라엘로 삼았습니다. 선택의 기준이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비한 자유 의지에 속한 것이지, 다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선택의 조건이 이스라엘이 가진 그 어떤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강해서도 아니고, 더 지혜롭거나 거룩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자유입니다. 자유야말로 구원이나 구속의 핵심 주제입니다. 자유는 절대적인 해방이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구속을 위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은 좌절을 맞이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자유를 구속이 아니라 방종을 위해서 사용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역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자유의 감격의 주인주체가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매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지도자를 보내 그분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탁월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있을 때에만 나름대로의 정체성에 충실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세겜’ 교회에 모였고 ‘여호수아’는 강단에 올라가 이제 막 설교를 하려 합니다. 이 장면을 다른 모습으로 비유하자면 결혼식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주례자는 여호수아, 신부는 이스라엘, 그리고 놀랍게도 신랑은 하나님입니다. 이 결혼이 여느 결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신랑과 신부가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신혼부부가 아니라, 오래 전에 결혼을 하여 이제는 권태기에 들어선 부부라는 점입니다. 권태감을 떨쳐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치르는 일종의 金婚式이나 銀婚式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 방송국에서 매주 토요일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내용인 즉은 수십 년간 결혼 생활을 한 노부부를 한 쌍씩 선택해서 결혼식을 재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부부가 다시 결혼식을 치르면서 행복해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이 장면도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라는 노부부의 금혼식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주례사를 준다면 어떤 내용이 적절할까? 결혼의 의미? 신부란 누구인가? 신랑은 누구인가? 아니면 이 모두? 만일 이 부부가 그동안 금실 좋게 살아왔다면 이런 주제들은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이들 주제들에 대해서 다시 들어야 할 정도로 그동안의 관계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니 불화의 연속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는 신랑이 아니라 신부입니다. 당연히 주례사는 신부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주례사의 핵심은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네 신랑이 누구인지 알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랑을 잘 알 수 있을까? 너무나 단순, 명료합니다. 신랑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특성과 체질 그리고 그의 운명마저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랑의 이름은 ‘야훼’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이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음인지 두 이름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두 이름은 “거룩”과 “질투”입니다(19절). 이 두 이름은 ‘야훼’의 속성이자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별명으로서, <레위기>를 비롯하여 <구약>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 “거룩”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입니다. “구별됨”입니다. “초월”입니다. 그리고 “질투”는 순간적인 감정의 발작이나 흥분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본능적인 혐오감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의 위(謂)가 불순물을 받아들였을 때 보이는 반응, 즉 구토와 같은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불순물을 다 쏟아낼 때까지 위가 보이는 그런 반응입니다.
‘야훼’는 그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보이십니다. 주례자가 나열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들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과 구별”; “(땅과 후손의) 약속”; “(비천한 처녀의) 구속”; “(광야의) 인도와 보호”; “(전쟁에서의) 승리”; “(저주를) 축복으로”; “(그 땅의) 선물.” 주례자는 지금 단순히 신부의 과거사를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훼’라는 신랑이자 한 인격체가 그 이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행동의 목록을 제시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이름에 충실하기를 원하시는 그의 질투심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데! 내 신부가 누군데! ‘야훼’는 이스라엘을 자기 이름 때문에 사랑하고, 보호하며, 잘못에서 회복해주었다고 주례자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야훼’는 순전히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선택을 고집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신부가 기억해 내야 할 이름이 바로 이 이름인 것입니다.
주례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부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객(賀客)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도 함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야훼’가 그 이름 때문에 행한 이 모든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에는(적어도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라면)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대가없는 사랑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대가는 과연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때 바라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부모가 쓴 모든 양육비를 되돌려 받는 것일까? 노후에 자식의 보살핌을 받는 것일까? 이런 수준의 대가를 바라는 부모라면 부모로서는 아직 수준 미달입니다. 필자는 내 두 아들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큰 인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로부터 독립해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필자는 그들이 성인이 되고난 뒤에도 내 품 속에서, 내 영향력 아래 메여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혹이나 효자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창의적인 인간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야훼’의 기대치도 이런 수준이 아닐까? 그분이 우리에게 준 자유를 가지고 ‘야훼’처럼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룩함과 질투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명예와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 옛 시인은 이런 삶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파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바울’ 사도 역시 같은 수준의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 4: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어린아이나 종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늘 부모나 주인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사건건 물어보고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하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실하고 경건하다고 인정하는 신앙생활도 이런 유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대답을 듣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자세 말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니 존경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종이나 어린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신비주의 정도라고나 할까요. 성숙한 결혼 생활에서도 이런 일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자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판단을 통해서 가정을 잘 꾸려가는 것이지, 상대에게 일일이 보고하거나 물어보지 않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이 신부가 보고 따라야 할 모델은 없습니까? 주례자 ‘여호수아’입니다. 주례는 결혼을 해본 사람만이 실감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자라면 더욱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여호수아’는 주례자로 아주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 자신도 그런 자격을 갖추었노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은 교만도 아니고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도 아닙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주례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오직 야훼 한 분만을 사랑하는 데 쓰겠습니다. 비록 온 세상이 그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스라엘이 가장 이스라엘답게 살았던 때는 언제였을까? ‘여호수아’ 당대였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는 추락과 쇠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결론에서 ‘여호수아’를 더 이상 ‘모세’의 부관으로서가 아니라(1:1), “야훼의 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24:29). 즉 그는 이제 ‘모세’와 대등한 반열에 올라서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하며,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순간의 선택과 지속적인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여호수아> 23장과 24장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시적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유사성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발견해 봅시다.
2. 본문은 <여호수아> 전체의 핵심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곳으로서 책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주제는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책 전체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