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1과
도피성: 자유와 구속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9:51약 19분 분량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20:2-3)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본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단락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하는 제 1절은 분명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9절은 결론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21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레위 인들의 성읍에 관한 것으로서 분명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구조는 그 내용에 따라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1-6절)
(2) 이스라엘의 순종(7-8절)
(3) 결론(9절)
이 중 첫 번째 단락은 다시 여러 개의 소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용(1-2절)
② 명령의 목적(3절)
③ 명령을 수행하는 절차에 대한 설명(4절)
④ 새로운 관점에서의 결의론적인 설명(5절)
⑤ 절차에 대한 추가 설명(6절)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순종도 두 개의 병행 구절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개 씩의 도피성을 선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앞 선 내용에 대한 반복과 함께 새로운 내용도 아울러 소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내용이란 이방인 도피자들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설명이며, 반복되는 내용 중에서 앞의 설명(6절)과 다소 다른 내용은 살인자가 본래의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도피성에서 머물 수 있는 기한에 대한 규정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는 두 가지 경우 중 한 가지, 즉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역사나 전승에 관해서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약의 다른 책이나(출 21:12-14; 민 35; 신 4; 19), 고대 근동의 유사한 제도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출애굽>(20:22-23:33)에서 보면 타인을 다치게 한 경우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규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출 21:12).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일종의 수정 법안이 등장하고 있는데 고의적이 아닌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 도피성을 마려해 주라는 규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자의 경우에는 그가 하나님의 제단으로 피신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고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도피와 관련한 <출애굽>의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도피성은 하나님의 성전 한 곳이거나 아니면 불특정 다수의 지역일 수 있습니다.
한편 <민수기> 35장에 의하면, 도피성은 ‘레위’ 인의 40 성읍 중에서 여섯을 선택하도록 규정하면서(민 35:6),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추가로 더하고 있습니다(35:9-28). 그러나 이 본문 중에서 성의 숫자와 관련하여 여섯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곳은 13절 한 곳뿐이며, 9-11절을 통해서 보면 오히려 그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도 도망자의 자격 여부를 가리는 경우에 대해서 <출애굽>이나 <여호수아>의 본문보다는 훨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버틀러(T. C. Butler).
<신명기> 4:41-4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들을 위한 도피성을 할당하고 있는데 세 곳의 이름은 ‘르우벤’ 지파의 속하는 광야 땅에 있는 ‘베셀’과, ‘갓’ 족속의 땅인 ‘길르앗의 라못’,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땅인 ‘바산의 골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9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단’ 서쪽에서 세 성읍을 도피성을 위하여 할당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기서도 살인자를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 그 이웃을 죽인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19:4). 그리고 이어서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죽게 한 자”가 이에 속합니다(19:5). 이러한 도피성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신명기> 19:10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대로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며 동시에 그의 창조의 명령, 즉 그 땅에서 그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번창하라는 그의 명령이 방해받음이 없이 성취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의적인 살인으로 그 땅을 더럽힌 자에 대해서는 살인으로 응징하라는 명령을 덧붙이고 있습니다(19:11-13).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각기 다른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도피성에 대한 유사성과 공통성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이 제도의 기원과 전승 과정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는 시도가 학자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만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범위를 벗어나고 있어 이에 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버틀러(T. C. Butler)는 도피성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성경의 네 본문(출 21; 민 35; 신 4, 19; 수 20)으로부터 이 제도에 대한 각 본문의 유사성과 공통성을 상세하게 도표로 잘 정리해 놓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학자들의 견해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1, 211-215쪽).
신학과 신앙
1. 신탁(1-6절)
<오경>과 <여호수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있다면 ‘모세’와 ‘여호수아’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 여섯 책을 통 털어 <육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섯 책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신학적 메시지가 일관되고 통일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 성취되어 나타나고 있는 곳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땅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는 본문의 서두에서도 이 점은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서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19:2하)
‘여호수아’가 그동안 ‘모세’의 규례에 얼마나 충실하게 순종해 왔는지는 익히 드러나 있습니다(예: 11:15, 20, 23). 이 구절에서 화자는 다시 한 번 이점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관한 참고 구절은 신 19: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피성은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을 범한 자들을 위한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3절)
그러나 살인은 어떠한 연유에서든 심각한 범죄 행위임에는 틀림없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일련의 속죄 의식을 거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레 4; 민 15:27-29). 따라서 도피성은 범죄자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피난처가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곳에서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피살자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소위 “피의 보수자”로서의 법적인 책임을 지닌 자라면 이 문제를 그냥 모른 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피의 보수자”는 “기업 무를 자”(לאג, 고엘)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룻 3-4; 렘 32:6-7. 특히 “피의 보수자”에 관해서는 삼하 14:1-1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공적인 재판 제도가 성립되기 전의 고대 사회에서 행해지던 오래된 관습이었으나,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해 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 전통은 화자에 의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4절)
즉 복수나 처벌의 문제를 피해 당사자의 친척의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으로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집행할 기구는 도피성의 “장로회”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로회”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 내지는 법 기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성경>에서도 이 기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룻 4:1-2; 삼상 11:3; 16:4). 이로 미루어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정착 이후까지 나름대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출 17:5-6; 민 11:14-17; 16:25; 신 5:23; 19:12; 21:1-9;, 18-21; 22:13-21; 25:5-10; 27:1; 29:9; 31:9, 28). 한편 <여호수아>에서 이들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7:6; 8:10, 33; 23:2; 24:1, 31). 이 단락에서 장로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5절)
살인의 고의성 여부일 것인데, 이 때 중요한 기준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이전 관계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두 사람이 혹시 이전부터 알고 지냈는지, 서로 상대를 미워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등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참석한 재판에서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살인자는 도피성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살인자가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도피성을 의미하고 있지만, <민수기>에 의하면 살인자 자신의 성읍을 의미하는 듯합니다(민 35:24-25).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6절)
그런데 이 구절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모든 재판마다 이스라엘 “회중”이 다 간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했을 것 같은데, 본문에서는 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 “회중”(הדע, 에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재판에 참석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결정에 영향을 끼쳤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도피가 허락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이 무한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경우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서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입니다만, 이 역시 상세한 설명이 없어 어떤 방식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두 경우를 나란히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만,<민수기>에 의하면(민 35:12, 25, 28), 이 두 경우를 각기 별도로 다루고 있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즉 살인자의 도피 기한을 결정함에 있어 어느 쪽이 먼저든 한 쪽만을 택하면 되는 것인지, 또는 두 경우를 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전체 재판 과정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따릅니다만 확실한 답변의 근거가 오늘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대제사장의 소위 “대속적 죽음”과 관련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인이 속죄함을 입게 되는 경우는 오직 희생제사를 통해서이지 제사장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다소 이상합니다. 사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대속적” 효능을 갖는다는 언급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은 초기 랍비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살인자는 자신의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보호와 감독 아래 성전에서 섬기는 임무를 담당했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처지는 한편으로는 망명자의 신분으로 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 보면 제사장에게 구속된 일종의 노예의 신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므로 그 제사장이 죽은 연후에야 그는 비로소 자유인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사장의 죽음은 분명 그에게는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대속적 죽음의 효과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죽음과 대속적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참고도서 2의 해당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순종(7-8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지시한 사항은 여섯 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구별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때 구별과 관련하여 쓰이고 단어는 분명 제의적 용어로서 “성별”(sanctify)의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들 도시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나 그들의 소유가 되었을 뿐인 곳들로서,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혹자는 본문이 오래된 전승의 역사를 지녔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의 게데스’는 주전 734년에 아시리아의 왕 ‘티글랏’ 3세가 점령한 도시이며, ‘세겜’은 ‘에브라임’의 중앙 산지에 있던 도시로서 여러 곳에서 등장한 바 있습니다(8:30; 21:21; 24:1). ‘기럇아르바’는 그 땅의 남쪽 ‘유다’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이 ‘요단’ 서편의 세 성읍이고, 나머지 셋은 ‘요단’ 동편에서 취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스라엘의 결속성과 연합을 강조하는 모티브를 강조하기 위한 화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 두 도시는 이곳과 ‘레위’의 소유 성읍 목록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하나는 ‘베셀’로서 ‘르우벤’ 지파 중에서 취한 것이도, 또 하나는 ‘므낫세’의 영토 중에서 취한 ‘바산의 수도 골란’을 말합니다. 세 번째 도시는 ‘갓’ 지파에서 취한 ‘길르앗’ 땅의 ‘라못’입니다.
7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7-8절)
3. 결론(9절)
본문의 결론은 이 책의 제 2부(13-19장)의 결론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화자의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9절)
한 가지 새로운 요소가 있다면 이방인에 관한 언급입니다. 즉 도피성은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이방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느낄 수는 대목입니다.
교훈과 적용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의 광야 유목 생활을 버리고, 그 땅에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해답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야훼’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될 것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백성이 따라야 할 사표이자 모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시적인 모델입니다. 화자는 본문 전체를 통해서 이점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즉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모든 명령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따랐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모세’의 법을 가시화시키고 구체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여호수아>를 <오경> 속에 포함시켜 <모세 육경>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신학적 연결성과 통일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제 3부에 이르러 ‘여호수아’의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 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황은 바뀌었지만 옛 전통이나 관습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피의 복수”에 관한 규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법을 엄격하게 원칙적으로 그대로 적용했다가는 공동체 전체의 삶에 막대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이 상당히 도전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살인 행위 자체를 방조하거나 간과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 혐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이 쓸데없는 복수의 피로 더럽혀지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도피성 제도에는 두 가지 법적 절차가 따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피성에 살고 있는 장로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일단의 회중으로 구성된 공청회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에게 고의적인 살인 동기도 없었고, 살인이 우발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해도 그냥 자유의 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죄로 입증된 후에도 그는 도피성에서 사실상의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당시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그곳에서 성전 등에서 봉사의 일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도피성이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중요한 원리로 존속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 공동체는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도 이스라엘의 사회 환경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랜 본문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통찰력을 얻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통찰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교훈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범죄 행위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해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범죄 행위를 묵과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피의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신중한 배려를 해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무고한 사람이 공연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또한 범죄자의 경우에도 죄에 마땅한 처벌 규정을 마련하되 형을 마친 후에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와 희망을 갖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도피성 제도에 대한 교훈을 사형제도와 관련시켜보면 어떻습니까? 작금의 대한민국은 사형제도의 존치 여부를 놓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뜨겁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김영삼 정권 이후 사형집행을 한 사례가 없어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대충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또 다른 형태의 살인으로서 피의자(즉 살인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사형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으로서 이 제도를 존속시킨다고 해서 범죄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우선 첫 번째 주장과 관련해서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도피성 제도는 의도적인 살인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연쇄살인과 같은 의도적이고도 습관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위 진보적 사고의 문제점은 항상 주의주장이 편향적이며, 자가당착에 쉽게 빠져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피의자의 인권을 주장하면서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동정심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드라도 우리나라 국민의 70% 정도가 여전히 사형제도의 존치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서도 강호순과 같은 습관적 살인마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 폐지론자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피해자 가족이나 친척의 복수심을 만족시켜줄 뿐이지 살인과 같은 범죄 행위를 실효적으로 방지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 역시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편향적인 것입니다. 사형제도는 단순히 범죄를 예방하자는 목적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적으로 피해자를 대신해서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국가가 개인을 대신해서 북수를 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만 하드라도, 범죄의 예방이라는 차원보다는 되갚아준다는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한 편 도피성 제도를 오늘날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탈북자들의 대탈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더욱 최근에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합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내의 처참한 인권 유린 참상을 폭로하는 국내외 언론 보도도 갈수록 구체적이고 생생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만든 한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 수용소 내 인권 유린 참상은 말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합니다. 수용소 내의 임산부들은 강제로 낙태 주사를 맞고, 그래도 살아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곧바로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탈출하다 붙잡혀 온 여성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2000년 3월에서 5월까지 두 달 동안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탈북자가 8000명에 이르며 이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언필칭 인권과 자유를 내세우며 출범한 김대중과 노무현의 두 정권 하에서 이러한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해서 보여준 바 있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입니다. 이 두 정권은 유엔에서 개최하는 북한의 인권 사태를 규탄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국제적 결의에 늘 기권하거나 반대편에 서왔습니다. 이유인 즉은 남북대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남북 갈등과 충돌만 야기 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권 문제 해결에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소위 기능적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를 하드라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실효적 이유 때문에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논리의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지요. 위선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대화의 궁극적인 목적도, 그렇게 염원하는 남북통일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일진대, 이런 인권 참상을 애써 외면 한다면 그동안 모든 구호도 노력도 위선이요 거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선적이기는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툭하면 자유와 인권을 외쳐대던 이 정부도 정작 한 탈북자 가족이 중국 의 영사관으로 도피하여 미국으로 망명을 요청하자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대도 미국의 의회는 중국이 탈북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서는 안 되며 유엔이 규정하는 난민 처리 규정에 따라 인도주의적 원칙에 입각해서 처리해야 된다는 성명서를 내놓는 등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미국도 부시 정권에 들어서는 탈북자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 특별 기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얼마 전 탈북자의 미국 망명을 허용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권에 관한 한 구미 제국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관심과 염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탈북자들의 출애굽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우리나라의 재외 영사관이나 주변 외국은 탈북자들로 바빠질 것입니다. 이들이 살인자들이 아니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이들 탈북자들을 어떻게 처리함이 마땅할까요? 도피성을 마련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를 마련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면 나 또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피성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라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더 큰 문제는 영적 고아나 과부들입니다.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를 피상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피상성이라 함은 대충 대충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제대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하는 법이 없고, 지식을 대함에 있어서나 무슨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도 수박 겉핥기식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대형 교회일수록 더 심한 법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아야 들어줄 사람도 없고, 괜한 짓만 해서 자신의 수치만 드러내게 될 뿐임을 알고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들여보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모두들 스스로의 도피성이 되어 영적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도피성으로 삼고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또는 나에게 도피성이 되어줄 만 한 단 한 사람의 친구라도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