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추수 감사절을 맞아
김태정 목사살전 5:16-18약 6분 분량
시 91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추수감사절 설교 본문으로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우리가 지난 주 시은이를 통해서 목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11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도 죽기는커녕 경미한 골절과 타박상만을 입고 지금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는 시은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 시편 11-12절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11-12절)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높은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지고 있는 시은이를 보고 하나님께서 놀라 그분의 천사들을 급히 보내어 이 아이를 붙들어 돌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시는 장면을 말입니다. 시은이는 이 사건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TV 뉴스로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물론 제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 이 일을 알고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놀라들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이런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간혹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그저 “와!”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찾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적적인 한 사건을 목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체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시은이의 생명을 건져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부모의 가슴에 “부흥”의 불길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영적 부흥”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병원을 찾았을 때 시은이의 애비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만 살려놓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생명도 살리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럽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시은이 애비의 신앙고백입니다.
대개 목회자의 자녀들은 그들 부모에 비해 신앙이 열심이지 못하거나, 또는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의 열심에 기가 질려 신앙을 고의로 거부하며 방황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아이들도 그런 세월을 거쳐 왔습니다. 시은이 애비도 이런 과정을 거쳐 왔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렇지 않다 해도 이번 사건은 분명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 준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너져 내리던 성벽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시은이 애비에게 한 마디 덧붙여주었습니다. 감사해야 할 분들이 또 있다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 황 목사님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본인이 계셔서 들으시기가 다소 민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양심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들려줄 수 있었던 말이 있습니다.
즉 황 목사님께서 그 동안 하나님 앞에 살아오신 삶의 궤적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은이는 그 할아버지가 살려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은이를 나 몰라라 하고서 어떻게 황 목사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감사해야 할 사람은 또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 집 교회> 성도 모든 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시은이를 살렸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 년 삼백 육십오 일을 한 결 같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여러분들의 기도를 무시하고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 말씀이 참으로 참담하다고 느끼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향해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모세’의 계명을 상기시키면서 그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룻’이 ‘보아스’를 향하여, “나는 당신의 여종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하) 하며 요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읽어봅시다. 이 시는 다른 시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마귀가 유일하게 인용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4:6; 눅 4:10-11).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천사가 그로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라고 했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11-12절).
그러나 마귀는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살이든 의도적이든 부문별하게 뛰어내리는 사람을 결코 보호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일반 신자(1-2절). 즉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1-2절)
나도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황 목사님?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협력시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화자 자신(3-13절). 시인은 일반 신자가 자신에게 적용한 바 있는 신앙고백을 이제 우리에게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온갖 상상력과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그분의 약속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환난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비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3절);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5절);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찾아오는 재앙(6절); 사자와 독사(13절).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이들 환난에 굴복하게 될 것이고(7절), 악인들이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지만(8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결코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약속합니다(9, 10절).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보호할 것입니다(11-12절). 시은이를 보호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14-16절). 이 모든 약속들도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셨음일까요? 마침내 하나님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나에게 직접 말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4-16절)
하나님은 두 번이나 “내가 그를 건지리라”고 약속하십니다(14, 15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역시 두 번에 걸쳐 밝히고 계십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그가 내 이름을 안즉”(14절).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꼭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게으르거나 무위도식하며 지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랑해야 하며, 기도로 나의 믿음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며 요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숙제를 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것은 “장수”와 “구원”입니다(16절). 이 약속이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기도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